사도공계 전주최씨는 시조 사도공 최균(崔均, ?~1174) 이후 200년간 7세대에 걸쳐서 재상(宰相)을 배출한 귀족이다. 1392년 밀직사(종2품) 최을의(崔乙義, ?~1392)는 조선이 개국할 때 동참(同參)하지 않았으며, 반대하여 항거(抗拒)하지도 않았으나, 우현보(禹玄寶), 이색(李穡), 설장수(偰長壽) 등 개국 반대 세력에 휩싸여, 우현보에게 원한을 가진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역적(逆賊)으로 몰려 처형됨으로 인해 가문이 몰락했다. 최을의의 아들 최녕(崔寧), 최선(崔宣), 최굉(崔宏)은 모두 고려 문과에 급제했으나 가문이 몰락하면서 더는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후손이 양주, 고창, 합천에 전해오고 있으나 여타 계열 소파(小派)보다 적은 인구를 가진 한미(寒微)한 가문으로 되고 말았다.
견훤(甄萱)을 왕으로 옹립하여 후백제 귀족이 되었던 완산최씨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조정에 진출하는 길이 막혔다. 고려전기(高麗前期, 935~1170) 말 완산주 수령 박춘령(朴椿齡)의 발탁으로 최척경(崔陟卿), 최균(崔均), 최송년(崔松年)이 문과에 급제하여 비로소 조정에 진출하게 되었으니 이른바 완산삼최(完山三崔)다. 완산삼최 중 한 사람으로 양반(兩班)이 된 사도공은 평양에서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반란(1174~1176)을 진압하다가 순국(殉國)하였다. 최균에 관해서는 뒤에 『고려사』<열전 최균전>을 통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사도공 장남 문정공(文定公) 최보순(崔甫淳, 1162~1229)은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아(孤兒)가 되었으나 열심히 공부하여 1182년(명종 12) 문과에 아원(亞元, 2등) 급제하여 재상(宰相)이 되어 사도공계 가문을 귀족으로 만들었다. 문정공 묘지(墓誌)가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学)에 보존되어 있다. 뒤에 가서 한림대 김용선 교수가 번역한 묘지문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로 하겠다. 문정공 동생 최보연(崔甫延)은『고려사』<세가 고종 9년(1222) 12월 23일>에 “최보연을 형부 상서로 삼았다.”[1]라고 수록되어 있으나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최균 열전>에는 공부 상서라고 했으므로 벼슬이 상서(판서, 정3품)에서 머문 것 같다.
문정공 아들은 최윤칭(崔允偁)과 추밀원사공 최윤개(崔允愷, ?~1266)다. 최윤칭은 봉어(6품)에 머물렀는데 『강희보』부록 <사도공계 자손록>에는 “벼슬은 상약 봉어다. 부인 여흥민씨는 아버지가 민원준으로 우사간이다.”[2] 라고 수록되어 있다.
추밀원사공은 아버지에 이어서 높은 벼슬에 올랐으므로 『고려사』<열전 최윤개전>이 있다. <열전>에 앞서 『고려사』<세가>를 살펴보면, <고종 45년(1258)>에는 “12월 1일에 최윤개를 좌부승선(정3품)으로 삼았다.”[3] <원종 3년(1262) 12월 25일>에는 “최윤개를 지추밀원사 병부상서 태자빈객으로 삼았다.”[4] <원종 4년(1263) 12월 20일>에는 “최윤개를 지추밀원사(종2품)로 삼았다.”[5] 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원종 7년(1266) 11월 27일>에는 “을묘일에 판추밀원사 최윤개가 졸하였다.”[6]라고 졸기(卒記)가 수록되어 있다. 판추밀원사는 추밀원(樞密院) 장관으로, 정2품이다. 『고려사』<열전 최윤개전>에는
최윤개는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우승이 되었다. 그때는 최의[7]가 대대로 권력을 잡고 있었으므로 모든 조정 관리들이 최의에게 아부하였으나 최윤개만은 그 문하에 가지 않았다. 김인준[8]이 최의를 죽이고서는 최윤개를 청렴하고 공평하다 하여 우부승선으로 발탁하였으며, 이부와 병부의 관리 선발을 담당하게 하였다. 뒤에 벼슬이 추밀원사 어사대부에 이르렀다. {영인}
아버지 문정공의 벼슬이 작은아들 추밀원사공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이 세운 무신정권이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로 문신은 벼슬이 높다 해도 실질적 권한은 없었고 무신들 지휘를 받아서 나라를 다스리는 상황이었으며 또 몽골의 침략을 받아 수도 개경(開京)을 버리고 강도(江都, 강화도)로 천도하여 항전(抗戰)하던 시기다. 『강희보』 부록 <사도공계 자손록>에 의하면 최윤칭의 아들은 최소(崔佋)인데 “최우라고도 한다. 초명은 탁이다. 은청광록대부(정3품) 호부 상서 한림학사로 치사하였다고 한다.”[9]라고 적혀 있으나 역사책에서는 찾을 수 없고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지은 증손 양경공(良敬公) 최문도(崔文度, 1292~1345)의 <묘지명>에는 “호부 시랑 지제고 최우가 증조할아버지다.”[10]라고 적혀 있다. 소(佋)와 우(佑)는 글자가 비슷하여 둘 중 하나가 판독오류(判讀誤謬) 같으나, 후손이 소(佋)를 옳다고 여기고 있으므로 그를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추밀원사공 아들은 최조(崔肇), 최곡(崔嚳)이고 손자가 최수전(崔守全)이라고 『강희보』 부록 <사도공계 자손록>에 기록되어 있으나 역사책 등에서는 찾을 수 없다. 여말선초(麗末鮮初)에 계보(系譜)를 알 수 없는 많은 전주최씨 저명인사가 있다. 이들 중에 추밀원사공 후손을 비롯하여 사도공계 세계표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모두 후손이 족보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4대 계열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 각주 ------------------
[1] 崔甫延爲刑部尙書.
[2] 尙藥奉御室驪興閔氏父元俊右司諫.
[3] 十二月丙子朔以崔允愷爲左副承宣.
[4] 崔允愷知樞密院事兵部尙書太子賓客.
[5] 崔允愷知樞密院事.
[6] 乙卯判樞密院事崔允愷卒.
[7] 崔竩, ?~1258. 최씨 무신정권 4대 집정(執政). 우봉최씨 최충헌(崔忠獻)의 증손.
[8] 金仁俊. 金俊. 1258년(고종 45) 무오정변을 주동해 시중에 오른 무신 집정자.
[9] 一作佑初名鐸銀靑光祿大夫戶部尙書翰林學士致仕云.
[10] 戶部侍郞知制誥諱佑其曾王父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