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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누구인가 (隨筆)
影園 / 김인희
연일 장맛비가 내리고 있다. 마치 물을 함지박으로 퍼붓듯이 쏟아지고 있다. 가까운 곳에 잠시라도 다녀오면 빗줄기가 우산을 뚫고 어깨를 적시고 손등을 적신다. 장맛비가 내 발을 집안에 꽁꽁 묶어두었다. 장맛비가 아니더라도 두문불출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나는 스스로 고치 안에 갇힌 번데기가 되었다고 여기고 있다.
환경으로 인하여 한시적으로 프리랜서를 선언하였다. 당초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자 다짐하고 큰 산을 등반할 채비를 단단히 하였다. 모든 유혹과 번뇌를 꾹 누르고 책상에 앉아 책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수시로 비집고 들어오는 상념들이 얽히고설키어 거대한 실타래가 되었고 오롯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거대한 과제로 확대되었다. 스스로 뿜어내는 의문들은 씨실과 날실로 직조되어 순백의 고치가 되었고 그 속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끝없는 미로 속에 갇혀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매듭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으려고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자조의 늪에 빠진다. 고대의 알렉산더대왕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아시아를 제패하였다지? 알렉산더대왕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어야 할 것인지, 끊어야 할 것인지 고심 끝에 과감하게 칼을 들었을 것이다. 고작 내 앞에 놓은 실타래를 고르디우스 매듭을 운운하면서 알렉산더대왕을 떠올리는 것은 거대한 망상이 아닌가. 대왕은 아시아를 제패하였지만 나는 기껏해야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했던가. 할 일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는데 나 홀로 고독하다. 언젠가 TV를 통해 이어령 선생의 서재를 본 적이 있다. 이어령 선생께서 직접 당신의 서재에서 책상을 가리키면서 흥분했다. 컴퓨터가 여러 개 놓여있는 아주 긴 책상이었다. 그 책상에서 일을 할 때 선생께서는 기사였으며 책상은 말이었다고 했다. 책상에 있는 여러 개의 컴퓨터로 일을 할 때 말이 된 책상을 타고 달리는 선생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 순간에 반짝이는 눈방울로 선생을 동경했던 나였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이어령 선생처럼 말달리고 싶다고 독백했었다.
말하는 대로 되었을까. 날마다 일에 치여 지내고 있다. B문학회의 행사를 위해 계획하고 진행하고 정산하여 보고하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지역 행사에 동참하여 매년 시화전을 하고 있다. 회원들의 작품을 정리하여 제작사에 보내고 완성된 작품을 게시하고 개전식 행사를 진행하였다. C문학회의 행사는 거대하다. 기백명의 회원을 아우르고 공문을 작성하여 기관과 단체에 보고하는 절차 또한 만만치 않다. 순차적으로 일을 하나씩 매듭짓고 심호흡할 겨를도 없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다. 산 넘어 산, 첩첩산중이라는 말을 절실하게 체득하고 있다. D문학회의 소임을 소홀히 할 수 없다. 혼신을 다하여 편집에 몰두하는 중 H문학회로부터 다음호 문학지 발간을 준비하라는 하명을 받았다.
서재의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 큰 산을 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날들이다. 책 받침대 위에 책이 펼쳐져 있고 노트북 화면에는 메모하는 파일이 열려 있다. 독서하면서 어휘를 찾아 권수와 페이지를 메모하고 있다. 내가 가장 골몰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수시로 울리는 휴대전화는 B, C, D, H의 업무를 지시하고 있다. 내 책상에서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하다가 다른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긴급 상황에는 거실에 있는 컴퓨터로 달려가서 즉각 응대하여 처리한다.
참으로 웃지 못할 일이다. 산더미 같은 업무에 시달리면서 희열을 느끼고 있다. 어쩌다가 식사조차 잊고 일에 매달리기 일쑤다. 입안에 가득 쓴 침이 고이는 일이 부지기수다. 수시로 강의를 위해 자료를 찾아보고 PPT를 점검하는 일도 중요한 과제다. 그런 중에는 이름 모를 꽃이 활짝 웃더라도 외면할 때가 많다. 너무 바쁘게 움직이느라 발이 삐끗하여 넘어질 듯 휘청거릴 때도 여러 번이었다. 밤마다 하늘을 더듬어 별을 찾던 로망이 아득하기만 하다.
책상을 쳇바퀴 삼아 뱅글뱅글 돌리고 있는 작은 다람쥐가 흡사 내가 아닌가. 오죽하면 B업무를 하다가 멈추고 C업무를 하는 것이 휴식이라고 여길까. D업무를 하다가 H업무로 옮겨가는 찰나가 달콤한 쉼이라고 자위하고 있다. 가사를 돌보는 시간은 유희와 다름없다. 식사 준비하고 설거지하는 일. 빨래를 세탁하고 옥상에 있는 건조대에 세탁물을 너는 일은 유유자적이 따로 없다.
그리운 그 시절이 다시 오려나. 시제를 찾아 길섶에 앉아있는 작은 들꽃을 어루만지던 때. 저녁 하늘에 흩뿌리는 태양의 편린이 어둠 속에 스러지고 영롱한 별빛을 하나둘 시야에 묶어두던 그날. 인터넷 서점을 열어서 베스트셀러를 검색하고 중고서점을 기웃거리면서 한량처럼 지내던 지난날. 서울에 당도한 프랑스의 화가를 만나러 가던 여름과 겨울이 그립다.
어쩌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 바쁘게 지낼지도 모르겠다. 25년을 한 작품에 전념했던 여류작가를 동경하고 있다. 나는 문학의 능선을 따라 수십 년을 걸어왔으나 작가처럼 작품에 매달리지 못하고 문학의 언저리를 맴돌면서 오랜 시간을 지냈다. 가까스로 문학의 하늘을 향하여 공을 하나 쏘아 올렸다.
날마다 독자의 소감을 전달받으면서 전율하고 있다. 처음 공을 쏘아 올렸을 때는 쥐구멍을 찾아 움츠리고 있으려니 각오했었다. 그러나 무엇이 그토록 배짱을 두둑하게 하였을까. 때로는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혀 파르르 전율하고 더러는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으니 말이다.
고치 안에 갇혀 꼬물꼬물 꿈을 꾸는 번데기. 오늘이 가고 내일이 가고 때가 되면 어떤 모습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 할까
시월의 어느 멋진 날 (隨筆)
影園 / 김인희
국립부여박물관 전시유물해설 자원봉사를 다시 시작했다. 타의 반 자의 반으로 프리랜서를 선언한 후 느슨한 자신을 견딜 수 없어 괴로워했다. 그때 박물관 자원봉사 담당 학예사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큰 산을 등반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 중이었건만 기세등등하게 수락했다.
전에 공부방 교사를 할 때 오전 시간 여백이 있어서 자원봉사를 할 수 있었다. 방과 후에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학습지도를 하면서 고학년 사회과목에 역사에 대한 단원을 지도할 때 생생하게 지도할 수 있었다. 박물관에서는 해설을 신청하는 학생 자녀를 동반한 가족을 만났을 때 학교 교과서와 연계하여 해설하겠다고 귀띔하면 학부모가 무척 기뻐했었다.
공부방 문을 닫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박물관자원봉사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하여 박물관이 전시실을 개방하지 않았을 때 텅 빈 넓은 주차장을 보고 한숨을 쉰 적이 있었다. 봄과 가을에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의 조잘대는 소리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았던 그때, 전대미문의 코로나를 원망했다.
시월의 가을 아침 박물관에 가는 발걸음은 고치 안에 갇혀있다가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는 기분이었다. 컴퓨터 앞에 산적한 자료들을 외면하고 거울 앞에 앉아 화장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현관을 나선다. 박물관에 들어서서 걸어갈 때 또각또각 구두 발걸음 소리가 경쾌하였다. 고요한 침묵을 깨는 소리를 들으면서 계단을 오르고 전시실 로비에 들어서면 두근두근 신선한 내면의 소리가 들렸다.
자원봉사 명찰을 달고 심호흡한 후 관람객을 기다렸다. 오전 10시에 경기도 용인 대한노인회 단체 40명을 안내하면서 부여의 선사시대 역사와 유물에 대해 해설했다. 사비 백제시대 전시실로 이동하여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할 때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인하여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피난하여 정한 도읍이었다는 것,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할 때는 도성을 기획하고 축조한 후 천도를 선포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행차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위덕왕이 관산성에서 전투 중 성왕께서 사기를 높이기 위해 행차하다 신라군에게 무참히 죽임당했다. 위덕왕은 전쟁에서 참패하여 많은 병사를 잃고 아버지 성왕의 비명횡사에 괴로워하면서 출가를 선언했다. 대신들이 만류하면서 왕을 대신하여 100명을 출가하게 했다. ‘창왕명석조사리감’에 새겨진 글씨를 통하여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께 못다 한 효심으로 능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체 어르신들을 안내하면서 구구절절 해설을 멈추지 않았다.
관람을 마치고 밖에서 단체사진을 찍을 때 합류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하나 둘 셋 찰칵, 다시 한번 찰칵, 손가락 하트하고 찰칵, 파이팅 하면서 찰칵.” 계단을 내려갈 때 조심하라고 하고 부여 여행이 좋은 추억이 되기를 바란다며 작별했다. 어르신들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감칠맛 나게 설명해 주어서 이해가 잘 되었다면서 물개박수를 보내주셨다.
오후 박물관자원봉사를 마치고 궁남지 행사장으로 이동했다. 행사장에 도착하여 음향팀에 시낭송 배경음악을 전달하고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었다. 트럭 뒤에 숨어서 낭송할 시를 차곡차곡 되뇌면서 점검했다. 무대에 올라 여유를 가지고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의 선율에 목소리를 실었다. 트롯의 달콤함에 젖어있는 관중들에게 실낱같은 감동을 주고 싶었던 절규! 詩가 윤간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시낭송을 마쳤다. 무대를 내려올 때 들리는 함성,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나는 의상을 갈아입고 잠시 망설였다. 집에 가서 컴퓨터 앞에 쌓여있는 일을 해야 하나. 썰렁한 객석에 앉아서 응원할까. 객석에 앉아 응원하는 편이 여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무대에 올라 공연하는 가수를 위해 손바닥이 아프게 박수하고 연주자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가을 오후 석양은 미련 없이 능선을 넘었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바리톤의 음성이 땅거미를 부른다.
공연을 마치고 식사하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행사의 이모저모 대화가 오갔다. 단원들이 이구동성으로 객석에서 응원하는 내 모습이 감동이었다고 했다. 늦은 밤 컴퓨터에 매달려 일하다가 단장님 문자를 받았다. “응원단장으로 촉탁합니다.”
나는 헤실 웃고 팔을 걷어 올린다. 이제는 별을 따러 가리라!
2.가을을 좋아하는 소녀 (隨筆)
影園 / 김인희
가을을 좋아하는 소녀가 있다. 갸름한 얼굴에 찰랑거리는 긴 머리가 어깨를 덮는 소녀는 뒷모습도 아름답다. 소녀는 이른 봄 벚꽃이 만개했을 때 탄성을 지른다. 한여름 매미의 노랫소리가 따갑게 들려오면 매미마다 노랫소리가 다르다고 귀 기울인다. 흰 눈이 푹푹 내리는 날도 두 팔을 벌려 나비춤을 추면서 좋아한다. 그 소녀가 유독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녀의 옷장 안에 있는 옷 중 가을옷이 가장 예뻐서라고 했을 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소녀가 대학교를 졸업한 후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창백한 얼굴로 찡그린 날이 더러 있었다. 소녀의 엄마는 덩달아 의기소침해지고 소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애달파했다. 소녀가 최후의 수단으로 대전에 가서 공부할 때였다. 소녀가 학원과 독서실을 오가느라 긴 머리 질끈 묶고 모자를 눌러쓰고 운동복 차림으로 주말에 집을 다녀갔을 때였다. 엄마는 소녀의 방을 청소하다가 소녀의 옷장을 열어보고는 훌쩍훌쩍 울었다. 소녀의 알록달록 예쁜 옷들이 옷장에서 우두커니 소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소녀는 책상에 붙박이가 되어 책과 씨름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였다.
지난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소녀와 산책하다가 작은 나무의 가지에 앉아 허리가 잘록하도록 혼신으로 노래하는 매미를 보았다. 소녀는 매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왜 그랬을까. 엄마는 소녀의 손을 잡고 말없이 연지를 걸었다. 소녀의 가녀린 손이 힘없이 떨고 있었다. 엄마는 말을 삼키고 온 마음을 손끝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소녀는 스스로 고치를 만들고 고치 안에 자신을 가두었다. 오롯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나서 하늘을 우러르고 오후에도 밤에도 주변을 모두 멀찍이 밀어내고 하늘만 주시했다. 소녀는 일주일 내내 한결같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소녀를 바라보는 엄마도 숨죽이며 스스로 고치를 만들고 들어앉은 소녀를 기다렸다. 일주일 후 소녀는 세상에서 가장 밝은 모습으로 웃으면서 날개를 활짝 펼쳤다.
지금 소녀는 좋아하는 도시에서 교사가 되어 날마다 천사 같은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소녀가 말했다. “엄마,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학교 졸업하고 더 공부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신 것을 잊지 않을 겁니다. 가장 고마운 일은 늘 저를 위해 기도 해주신 사랑입니다. 제가 이렇게 건강한 것도 당당하게 제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엄마가 저를 믿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에서 아이들을 대할 때도 공부방을 할 때 학생들을 사랑으로 가르치던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고 엄마처럼 하려고 노력합니다. 엄마는 학생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성적보다 인성을 우선으로 중요시한 것을 기억합니다. 엄마가 저의 좋은 롤모델입니다. 엄마가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엄마, 오래오래 곁에 있어 주세요.”라고.
소녀와 엄마는 밤마다 긴 통화를 하고 미처 하지 못한 말은 카톡으로 주고받으면서 자지러지고 있다. 소녀가 좌충우돌 일터에서 겪는 사연들은 배꼽을 쥐게 한다. 수업시간에 말썽 부리는 아이를 꾸중하고 풀이 죽은 아이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서 복도에서 울었다는 초보 선생님. 복사하다가 복사기 고장 났다는 사건과 숲 체험 수업 갔다가 다리에 붙은 잔 나뭇가지가 벌레인 줄 알고 비명을 지른 선생님. 고사리손으로 선생님 다리에서 나뭇가지를 떼어주던 아이들. 소녀는 말마다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다른 반 아이들보다 얼마나 똑똑한지 모른다고 일장연설이 따로 없다. 엄마가 소녀에게 고슴도치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가장 먼저 피었다고 / 너 만이 꽃이라고 /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너무 늦게 피었다고 / 너는 꽃이 아니라고/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 꽃피는 날이 다를 뿐
너도 꽃이다. 나도 꽃이다. /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나 너를 기다리고 너 나를 기다리는 / 우리는 꽃이다
성완희 시인의 시, <꽃> 전문이다. 엄마가 소녀에게 읊조려주고 싶은 시다.
가을이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속삭인다. 동산에 올라 하늘을 보면 바람이 구름 휘장을 걷어내고 별을 하나씩 등장시키고 있는 가을밤이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의 입김이 곡식을 알알이 영글게 하고 있으리라. 머잖아 산등성이마다 오색 옷으로 갈아입는 나무들이 깊은 가을을 예찬하리라.
가을을 좋아하는 소녀를 생각하면서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는다. 소녀가 오가는 길섶에 들꽃이 피어서 미소 짓기를 빈다.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소녀의 시간이 달콤하기를 기도한다. 아침에 소녀의 창을 노크하는 태양의 알람에 활짝 웃고 하루를 당차게 시작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한 떨기 꽃과 같은 소녀! 어여쁜 옷을 입고 걸어갈 때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소녀의 옷자락을 어루만져 주기를 기도한다. ♣
3.세한도(歲寒圖)를 생각하며 (칼럼)
칼럼니스트 / 김인희
추사 김정희가 그린 유명한 그림 세한도가 있다. 추사는 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멀리 제주도로 유배가게 되었다. 김정희의 제자였던 역관 이상적은 유배지에 있는 스승을 잊지 않고 북경에 오가면서 두 번씩이나 귀한 책을 구해다 주었다. 추사는 제자 이상적에게 답례로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주었는데 그때가 1844년이었다. 추사는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지고 가장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세한도(歲寒圖)의 탄생 배경이 가히 감동이다.
< 歲寒圖 / 위키백과 | Public Domain>
최근 대한민국 교육 1번지 강남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 임용된 지 2년 된 여교사가 극단적인 선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언론사마다 해당 교사가 학교폭력업무를 담당하면서 학부모 민원에 시달려 왔다고 보도했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초등학생으로부터 머리채를 잡히고 폭행을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 또 다른 초등학교 교사는 제자로부터 얼굴과 몸에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하고 바닥에 내리꽂히는 등 폭행을 당하고 욕설을 당한 사건이 터졌다. 작금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참담한 지경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다. 임금과 스승과 어버이의 은혜는 같아서 스승을 존경하고 섬겼다. 또한 제자는 스승과 떨어져 걸어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만고불변의 진리가 될 수 없는가.
필자는 학창 시절 대학진학을 향한 꿈이 무너졌을 때 ‘수불석권(手不釋卷)’하라는 스승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스승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지냈다. 필자는 책을 읽으면서 역사를 배웠고 독서를 하면서 문학의 세계에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책에서 수많은 스승을 만나서 지혜를 얻었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따라 걷게 되었다. 지금 필자의 위치는 스승님의 가르침과 은혜로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역설한다.
지금도 여전히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교육(敎育)에서 가르치는(敎) 것은 효(孝)를 매(攵)로 쳐서 가르치는 것이다. 인성이란 선(善) 지향적 회귀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선(善)을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교육이 필요하다. 문화(文化)는 자연에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더한 것이다. 하여 폭력문화나 아편문화라는 말은 절대 있을 수 없다. 반면 효문화, 예술 문화, 학문문화, 언어문화 등 보편적 가치를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한 문화다.
언어는 인격(人格)이다. 스승님께서 역설하는 문장이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문자를 버리고 한족의 문자에 동화되어 한족의 문자를 쓰다가 자신들의 언어도 사라지고 만주족의 정체성도 사라졌다. 현재 남아있는 극소수의 만주족이 사라지면 지구상에서 만주족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반면에 이스라엘 민족은 나라 없이 2천 년을 지냈어도 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간직한 까닭으로 나라를 다시 만들 수 있었다. 언어는 인격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언어를 통하여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세한도(歲寒圖)가 간직한 사제 간의 사랑을 되새긴다.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할 때 더 푸른 소나무 같은 신의(信義)를 간직한 제자가 그립다. -끝-
4『토지』를 연구하면서
김인희
박경리 문학관에서 작가를 알현하다
1. 토지의 소개
박경리의 『토지』 는 우리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우리 민족의 삶을 총체적으로 그려내는 가운데 진정한 삶에 대한 탐색을 탁월하게 보여준 역작이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6년간의 창작기간을 걸쳐 완성된 『토지』 는 그 길이만 따져서 원고지로 대략 31,200장의 분량이며, 전체 5부 25편 362장(序 포함)으로 각 편과 장에는 제목이 붙어 있다.
『토지』 가 연재되기 1년쯤 전에 발표된 단편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1968.11)에는 『토지』 의 1부 1권의 내용이 응축되어 있어, 작가가 이미 훨씬 전부터 이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을 구상하고 집필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창작, 연재된 만큼 『토지』는 문학지와 일반 잡지, 신문 등 다양한 게재지를 거쳤다. 제1부는 1969년 9월부터 1972년 9월 말까지 만 3년 동안 『현대문학』에 이어 제2부는 『문학사상』 으로 옮겨 1972년 10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역시 만 3년 동안 연재되었다. 제3부는 1977년 1월부터 5월까지는 『독서생활』에 1977년 6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는 『한국문학』에 다시 1979년 12월까지는 『주부생활』에 실렸다.
1980년에 작가는 집필지를 원주시 단구동 지금의 '박경리문학공원'으로 옮긴 후, 자연과 인간의 공생적인 삶에 대해 고민하여 4부 구상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제4부의 앞부분은 1983년 7월 12월까지 『정경문화』에 실렸고, 다시 3년 8개월간 연재가 중단되었다가 1987년 8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월간경향』에 4부의 나머지가 발표되었다. 제5부는 그 후 4년여의 공백 끝에 1992년 9월 1일 부터 1994년 8월30일까지 약2년간 607회에 걸쳐 《문화일보》에 연재됨으로써 그 긴 장정의 막을 내렸다.
『토지』 는 연재 처음부터 독자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연재가 끝나는 대로 삼성출판사에서 책으로 묶여 나왔다. 1989년에는 『박경리 전집』을 낸 지식산업사에서 4부까지 개정판이 간행되었고, 1994년 총 16권으로 솔 출판사에서 완간되었다.
또한 1983년에는 『토지』 1부가 일본 문예선서에서, 1994년에는 역시 1부가 프랑스 벨퐁 출판사에서, 다음해에 1부가 영국 키건폴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으며, 독일어로도 번역 중에 있다. 뿐만 아니라 토지는 3부까지의 내용이 KBS 1TV를 통해 두 차례, 또 5부 완간 이후에는 SBS TV를 통해 52부작 대하드라마로 방영되었다.
『토지』 는 그 독특한 성격으로 하여 연재가 되는 가운데 문학계에 다양한 논의를 유발시켰으며, 완간된 후에는 한국문학연구학회 주최로 '『토지』 와 박경리의 문학'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개최되는 등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다. 현재 『토지』 에 관한 비평서가 계속 출간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석 · 박사 논문도 활발하게 쓰여지고 있다.
2.토지의 역사
『토지』 는 1969년 9월부터 연재되었지만,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된 작품이었다. 박경리는 작품을 연재하기 3, 4년 전쯤 한 수필에서 '이제부터 나는 써야 할 작품이 있다.'고 밝히고,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습작을 해 왔었다고 고백하였다. 실제로 이전의 작품들에 나오는 모티프나 인물형상화, 구성적 특성 등은 『토지』 에 종합되어 나타난다.
이중 『토지』 의 사건이나 인물화에서 직접적인 유사성을 보이는 작품으로 평사리 풍경의 중요한 밑그림이 되는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과, 작가의 진주여고 체험이 직접적으로 재구성되어 『토지』 5부에 이어지는 「환상의 시기」, 「옛날이야기」가 있다. 특히 토지를 연재하기 10개월 전인 1968년 11월, 『월간문학』 창간호에 실린 중편소설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은 강청댁과 용이, 그리고 월선이의 삼각관계를 그린 것으로 『토지』의 1부 중의 한 부분과 거의 비슷하다. 그렇게 작가는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결국 26년이나 걸리는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박경리는 왜 그토록 간절하게 이 작품을 쓰려고 했을까
문단에 나오기 전에 외가의 먼 친척뻘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즉 어느 시골에 말을 타고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광대한 토지가 있어 풍년이 들어 곡식이 무르익었는데도 호열자가 나돌아 그것을 베어 먹을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이 '베어 먹을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나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어요. 벼가 누렇게 익었는데 마을은 텅 빈 그런 풍경이 눈에 잡힐 듯 떠오른다 할까. 그 뒤 문단에 나와 작품을 쓰다가 문득 그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그때부터 그것으로 뭔가 작품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자꾸 생각이 바뀌고 했지만요.
(박경리와의 대화- 소유의 관계로 본 한의 원류, 김치수, 『박경리와 이청준』, 민음사, 1982, 165-166쪽.)
박경리는 '풍요로운 대지와 죽어가는 사람들'의 강렬한 이미지의 대비가 『토지』를 쓰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외에도 어느 부잣집이 저주를 받아 대가 끊겼다는 이야기, 근친간의 사랑, 육촌 남매의 비극적인 연애사건 같은 것도 작품을 쓰게 한 동력이 되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또 이런 이야기에 알맞은 시대배경을 설정하기 위해 흉년이 일어나고 1902년 호열자가 창궐하기 조금 전인 1897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토지』가 구한말 우리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26년간에 걸쳐 창작된 사연은 그러하다.
『토지』는 매우 조용히 시작되었다. 『토지』 1부 연재가 시작된 『현대문학』 1969년 9월호에는 '상당한 기간 침묵을 지켜온 박경리씨의 장편을 이 달부터 새로 연재한다'는 짧은 편집후기와 작가가'오랫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끊으며 오직 이 작품에만 심혈을 기울였었다'는 말과 함께 사진이 실려 있을 뿐 연재기간 내내 작품에 대한 어떤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침묵을 깬 것은 연재가 끝나자마자 나온 1부 단행본이었다.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대하소설', '한국현대문학사의 최대걸작', '한국문학으로서 확실한 전기가 될 문제작' 등의 수식어가 붙으면서 『토지』는 이 때 창간된 『문학사상』으로 옮겨 연재가 지속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1977년 1월부터 토지 3부가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잡지, 『주부생활』과 『독서생활』에 동시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토지』는 KBS에 의해 처음으로 드라마화 되었다. 1979년 11월부터 1980년 8월까지 『토지』 1, 2, 3부가 방영되면서 독자들의 『토지』에 대한 관심은 무척 커졌다. 이에 따라 본격적인 작품론이 1980년대 중반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고, 언론에서는 『토지』 4부 연재에 대한 독자들의 강한 기대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경리는 4부의 연재에 거듭 실패하고 만다. 작품은 이미 처음에 작가가 계획했던 규모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고,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시간적 여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외부의 요구를 냉정하게 차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래 4부는 『문학사상』에 연재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창간호부터 2부를 연재했던 『문학사상』은 지령 100호를 맞아 다시 『토지』를 연재하겠다는 광고를 내고, 이 작품에 대한 김치수의 해설을 3개월이나 연재했으며, 1981년 5월호에는 '내달부터 고대하고 있던 박경리씨의 『토지』 4부가 게재된다'는 후기가 덧붙여져 있다. 그러나 어찌된 사정인지 『토지』 4부는 그로부터 4개월이나 지난 후 『마당』 창간호에 연재되기 시작했고, 이어서 시사종합지 『정경문화』에 연재되었다.
1980년대 말 다시 드라마로 만들어진 『토지』는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4부 연재를 끝내고 작가가 낸 시집과 중국기행문 『만리장성의 나라』가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79년부터 지식산업사에서 출간되기 시작한 단행본 『토지』가 매년 판을 거듭하며 팔려나갔다. 그리고 1992년 9월 1일, 새로운 포맷의 특수지인 《문화일보》에 그 5부가 연재되기 시작했고, 2년 후인 1994년 8월 30일 그 화려한 막을 내렸다. 신문과 잡지는 앞 다투어 이 사건을 보도했고, 최초로 『토지』를 연재했던 『현대문학』은 무려 125쪽을 할애한 특집을 실었으며, 『작가세계』 역시 박경리를 특집으로 다루었고, 『토지』에 대한 평문과 단행본들이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토지』라는 거대한 '탑'을 기리는 문학적 잔치가 1994년 하반기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토지』 연재 26년간 작가는 40대 초반의 중년에서 70이 다 된 노인으로 늙어갔으며, 중견작가에서 어느덧 원로작가로, 그리고 이제는 이 시대의 몇 안 되는 영향력 있는 '문사'로 대접받기에 이르렀다. 집필지를 원주로 옮긴 1980년 무렵부터 박경리는 인터뷰를 통해 작가로서보다 주로 생활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밭을 매고 연탄을 갈며 고추를 따고 잡풀을 뽑는 등 언제나 일하는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고, 그 모든 노동이 『토지』 창작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고백했다. 환경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표면화된 것은 5부 연재시 환경운동연합공동대표직을 맡은 것이었다.
작가는 이 무렵부터는 환경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를 하며, 청계천복원운동에서 앞장서는 등 환경운동의 실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박경리가 관여하고 있는 '토지문화관'이 환경문제에 대한 학술대회를 열고 환경과 문학을 공동주제로 하는 계간지 『숨소리』를 간행한 것도 그 실천의 하나이다. 이제 『토지』의 작가는 스스로 야인(野人)이라 칭하면서 이 시대의 문제를 찾아서 지적하고, 작품 밖에서도 자신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존재이자 환경 파수꾼이 되었으며, 『토지』는 이런 작가의 모습에 의해 생명에 대한 특별한 메시지로 새로 읽혀지고 있다.
3. 토지의 제목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는 각자 고유한 이름이 있듯이, 문학예술 작품에도 그 이름에 해당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문학 작품에는 그런 경우가 많이 없습니다만, 간혹 음악이나 미술의 경우 '무제(無題)'라는 제목을 단 작품을 접할 기회가 있는데, 그 '무제'라는 것도 작가가 고심 끝에 붙인 이름, 즉 제목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제목을 부여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지요. 그리고 독자들은 그 제목을 통하여 작품의 주제, 사상, 내용, 정조 등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하게 됩니다. 결국 작품의 제목이란 단순한 팻말이 아니라 작가(창조자)와 독자(수용자) 사이에서 본원적 소통의 핵심적인 통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특히 소설의 경우 작가가 부여한 제목은 소설 텍스트의 일부를 이루면서 동시에 이야기 전체의 방향을 주도하는 비중 있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많은 작가들이 작품의 제목을 두고 마지막까지 고심하는 것이나, 제목 여하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말하는 것도 이와 관련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민족의 장대한 서사시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소설 『토지』의 제목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언뜻 보면 '토지'라는 명사는 '땅'이나 '대지'(실제로 이런 제목을 달고 있는 작품들도 있습니다만)가 환기하는 것처럼, 사람살이의 터전 혹은 역사적 사건이 펼쳐지는 특정한 무대라는 의미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목인 '토지'는 단순한 땅이나 흙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삶의 터전 전체를 의미하는 대지적 이미지(김병익)를 품고 있으며, 항속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생성의 수용력과 창조력을 가진 생의 원천과 자궁으로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역사 그 자체를 표상하고 있습니다(이재선). 이 때 '표상'이라는 어휘는 은유로 대체해야만 그 의미가 더 풍부하게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작품 안에서 '토지'는 단순한 농토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직설적인 것만이 아니라 은유적 이미지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토지』는 평사리라는 특정 장소의 '토지'에 관한 제유를 통해 우리의 국토와 역사를 은유적으로 포괄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가장 조선다운 토지의 전형을 품고 있는 평사리라는 서사 공간을 중심으로 많은 인물들이 민족의 해방을 위해 터전을 지키고, 삶을 지탱하며, 투쟁해가는 과정 전체가 『토지』의 전체 서사는 은유적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4. 토지 제목의 함축적 의미
『토지』의 제목에 함축된 의미에 대해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토지'라는 제목과 관련해서는 처음에는 막연하게만 생각했지 확실히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土地'라고 정한 것은 대지도 아니고 땅도 아닌 것, 즉 땅이라고 하면 순수하게 흙냄새를 연상하게 되고 大地라고 하면 그냥 광활하다는 느낌만 들어 그 밖의 것을 찾다가 나온 겁니다. 이것은 제 느낌입니다만 토지라고 하면 반드시 땅문서를 연상하게 되고 '소유'의 관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유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역사와 관련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원초적인 상태에서 오늘에 이른 것은 다 소유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 하는 거지요.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 이런 정도의 생각으로 출발해서 그것이 씌어지면서 자꾸 생각이 넓어지기도 하고 깊어지기기도 하여 간 것이 아니냐 하는데요.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토지'라는 제목은 땅문서를 연상케 하면서, 더 나아가 '소유'의 관념을 포함한 자본제적 소유 욕망이 투여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역사적 체제 안에서 토지라는 '자본'을 작기 확장이라는 목적을 위해 특수한 방식으로 사용(투자)하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토지'라는 말에는 농경을 곧 땅의 문명화로 여기는 농경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봉건주의적이건 자본주의적이건 간에 소유의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작품에서 동학 잔류 세력들의 '오백섬의 토지'를 관리하며 김 환에게 투쟁 자금을 공급하는 토지관리인 '길노인(송안거사)'의 의식이나, 조선의 토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평사리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숱한 인물들이 배움을 익히고 삶을 꾸려나가며 투쟁하는 전 과정에서 작가가 의도한 '토지'의 중의적 의미는 잘 드러나고 있다. 요컨대 『토지』는 땅을 매개로 삶을 영위해 가는 순환적 터전이라는 기본 의미를 포괄하면서, 그것을 넘어 전체 서사의 내용에 반영된 자본제적 소유와 욕망의 개념, 더 나아가 식민지 자본주의 형성 과정을 통해 근대사회로 변화해 가는 역사적 도정에서 한민족의 존재를 새롭게 규정하는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이해된다.
편집자 註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를 박사 논문의 주제로 선택 하여 도입 부문에 쓰여진 글이다 별도의 장르가 요구 되지만 편집자의 선택으로 수필 란에 탑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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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다운 수필....감동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