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32
그 다음은
우리는 보통 주님의 일이라고 하면 성전, 즉 교회의 일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성도의 모든 삶이 다 주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골 3:17)는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또 성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골 3:23).
그러면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는 성도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1.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느헤미야서 3장에는 하나님의 일에 등장되고 있는 이름이 자그만치 75명에 15가지 이상의 직업이 나타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이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내 일처럼 달려붙어서 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 처럼, 합창단의 단원들 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 모두의 협동과 조화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남다르게 뛰어난 한 인물에 대한 우상화를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인물의 실수와 허물을 여지없이 폭로합니다.
성경은 늘 함께 '를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여... 오늘날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내가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 라고 하심으로 공동체 안에서의 나, 즉 함께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늘 머리인 그리스도와 지체된 성도로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조국 이스라엘의 멸망과 동족의 포로생활, 예루살렘의 폐허와 동족의 고난은 민족적인 죄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적인 죄 앞에서 절규하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요 !
...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 (느 1:6-7).
공동체의 죄는 곧 나의 죄요, 모든 것은 나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동체에 대하여 책임있는 나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성도란 자기 자신이 서야 할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 만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전체적인 조화와 화합을 깨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란 하나님 아버지를 단장으로, 예수님을 지휘자로, 성령님을 반주자로 한 대 오케스트라요, 성가대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리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 4:11-12).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있습니다. 그 다음은 그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 (느 3:5).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방관자들, 비판하고 비난을 일삼으며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제자들 가운데에서조차 가롯인 유다가 있으니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도록 우리 세대에 허락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어린이교회학교 유치부로 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빠지거나 물러서지 말고 동참하십시다. 암소를 끌고 올 수 있는 성도님을 암소를, 송아지를 끌고 오실 수 있는 분은 송아지를, 양을 끌고 오실 수 있으시면 양을, 아니면 비둘기라도 형편과 처지를 따라 힘에 겹도록 한번 주님을 위해 드려 보십시다. 성전 역사에 내 외적으로 반대와 방해의 세력을 만나거든 우리 모두 내 탓으로 삼고 기도로 주님의 은총을 받아내십시다. 악한 영들의 유혹에 빠져서 예루살렘의 귀족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지 않도록 깨어있어 기도로 무장하십시다.
기억하십시요 ! 얼떤 이유로든지 우리 교회가 뻐그러지면 좋아나는 것은 사탄과 마귀 밖에는 없습니다. 뭉쳐야 삽니다. 흩어지면 죽습니다.
2. 당신이 게시므로 내가 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은 성 건축에 눈물의 수고와 땀의 댓가를 지불한 백성들의 이름들이 낱낱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으로 들어가야만 할 사람이 빠져있는 것을 봅니다. 누군가 하면 이 성을 수축하는 데 있어서 가장 많이 수고하고 역사한 느헤미야입니다. 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이 기록에서 빠뜨리고 있는 것일까요 ? 이를 느헤미야의 신앙고백적인 차원에서 접근해 보시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셨습니다 ! 혹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 하는 멧세지 인 것입니다.
바울은 얼마나 위대한 사도입니까 ? 그러나 그를 있게 한 바나바를 아십니까 ?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에 선봉에 선 열심당원 바울 !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멸절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후 그는 변하여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도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유대교인들에게나 그리스도인들에게나 적대시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아무도 바울의 회심의 사건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이 절대 고독의 절망에서 바울은 바나바의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색안경을 쓰고 바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바나바 만은 바울을 믿어줍니다. 기가 죽은 그에게 생기와 활력, 꿈과 환상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바울을 변호합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그리스도인들 앞에 세웁니다.나아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한 자리에 함께하도록 주선합니다.
씨의 희생없이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수 는 없습니다. 땅의 기초없이 집이 세워질리가 만무합니다. 자기 피알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이기에 이렇게 숨겨진 희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 느헤미야, 바나바 같은 성도들이 더 귀하게만 보여집니다. 이런 분들은 하나님의 손으로 찾아지는 값진 보석들입니다.
역사의 증인들은 입을 모을 것입니다. 당신이 계시므로 내가 있습니다 ! 라고.
3. 나는 이 일에 부름받았다.
나는 이 일을 할 수 있는가 ?' 하는 재능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이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 부름받고 있는가 ? ' 하는 사명적인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일, 즉 교회 일이란 지치도록 열심히 일하고도 실컷 비판과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럴때마다 시험들고 심지어는 교회와 믿음을 떠나는 교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명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비판과 환란의 바람으로 인해 믿음의 뿌리를 더 깊이 내립니다. 사명자는 사람의 얄팍한 입술의 칭찬이나 눈가림 식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사명자는 사람 앞에서 일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일합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는 하나님 !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신 하나님 앞에서 일합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했던 75 명의 이름들과 행적을 지루하도록 낱낱이 기록한 것 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과 땀의 수고를 다 아십니다. 그다음은 삽비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느 3:20). 75 명의 일꾼들 중에서 특별히 바룩에게만 힘써하는 부사를 붙여서 그의 수고를 기억하고 기념한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 결론
본문에서 반복되어져 나오는 단어가 그 다음은 ' 이란 말입니다. 29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일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협동의 차원에서 쓰인 단어입니다. 마치 전자제품을 만드는 공장의 콘베이어시스템처럼 그 사람은 맡은 부속만 끼워넣고 그 다음으로 보내고, 그 다음 사람은 또 자기가 맡은 일만 하고 또 다음으로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부름받고 있는 일 만 하면 됩니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비방하고 비난을 하건 간에 내 가는 길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믿음의 고집을 갖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홀로가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의 나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손길로만 발견되리라고 숨겨진 희생을 즐겨하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