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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강해-8 금식하며 기도할 일
(스 8:21-23)
여러분! 요즘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떠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주 기도하십니까? 여러분은 주로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십니까? 그리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십니까? 날을 정해 놓거나, 또는 금식을 하면서 기도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있으시다면 어떤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기도하셨습니까? 우리가 특별히 며칠 작정기도하면서 날을 정하거나, 또는 금식을 하면서 기도할 때에는 뭔가 중요하거나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일겁니다. 그리고 그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은 자녀의 문제라든가, 혹은 질병의 문제, 또는 사업상의 문제, 또는 개인적으로 아주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이렇게 특별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전에 바벨론 땅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이 기도한 문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 가운데 그들 자신과 그들의 어린 자녀들과 또 모든 소유들이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에스라를 비롯한 일행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은 4개월이나 걸리는 장기간의 여행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헤치고자 하는 대적들이 곳곳에 매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자신들이 안전을 위해서 특별한 기도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저들이 지금 왜 그런 위험하고도 험한 여행길에 오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에스라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전을 아름답게 하시기 위함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에스라와 함께 동행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저들이 그 돌아가는 길의 안전과 평탄함을 위해서 기도한 것은 단순히 자신들의 안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르지 그 목적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또 그 일의 형통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많은 기도들이 내 문제에 국한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삶이 오르지 나에게 속한 것들을 위한 것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목적도 나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할 때에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하게 됩니다. ‘공부 좀 해라! 공부! 공부해서 남주냐?’ 너 자신을 위해서 공부 좀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성세대가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역시 나 자신과 내 가정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삶이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해서 또는 내 가정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뭐하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또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또는 바른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도들의 생각조차도 거기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 내가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것, 내가 열심히 기도하는 것, 심지어 내가 열심히 예배드리는 것, 내가 열심히 찬양하는 것까지도 모두 다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세상은 온통 나를 위해 돌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그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까?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을 갑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믿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처음 예수를 알고,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예수를 나의 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매번 하나님 앞으로 나올 때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일생에 단 한번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마치 모든 사람이 엄마 뱃속에서 단 한번만 태어나듯이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은 우리의 일생에 단 한번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듭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남으로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절대로 번복되지 않습니다. 혹 우리가 연약하여진다 할지라도 이 자녀의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부터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1-5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살리심을 받았을 때에 우리는 이미 죽어 있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던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오직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격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습에 따라 그것이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먼저 확신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요, 그리고 이것은 결코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여기에서 잘못 생각합니다. 이제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까, 하늘의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이제 남은 것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3박자 구원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예수 믿어 우리의 영혼이 잘 된 것 같이 범사가 잘 되고 육체가 강건하여 지는 것이 예수 믿는 목적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가 잘 안되거나 육체가 강건치 못하면 마치 신앙생활을 잘못해서 그렇게 되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지 않아서, 내가 기도하지 않아서, 주님께 충성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거져 받는 것이고, 이 땅에서 잘 되고 잘못 되는 것은 다 나 하기 나름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러한 방편으로 우리의 잘못된 신앙을 깨닫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 속에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나 중심적인 사고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도 나를 위한 분이십니다. 내가 예수를 열심히 믿는 것도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나를 위해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온 우주의 중심이고 주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그렇습니까?)
성도는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우리는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닌 자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주인이 바뀌는 사건인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에서, 나의 주인이 창조주 하나님으로, 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분명히 바뀌었습니까? 소유권이 완전히 이전되었습니까? 아직도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 43 : 21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사 48 : 11 /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호 2 : 23 /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성도는 그 분의 나라를 위해서 그 분이 기뻐하시는 것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내가 구원받음도 그 분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도 다 그 분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하는 것도 결국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받아서 천국 백성이 된 성도가 이 땅에서 무엇 때문에 살아갑니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살아갑니까? 그렇다면 구원받지 못하고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뭡니까? 또 예수 믿어도 잘 살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어가거나, 사고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뭡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예수 믿어 구원받은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이 땅의 것들을 더 많이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 편안하게 잘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뭐 때문에 예수 믿고 그 고생을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까? 예수님의 12제자들은 뭐 때문에 죽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되었다면 그것은 무엇은 위한 것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평안하게 잘 살아간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또 우리가 이 땅에서 망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을 무엇 때문인 것입니까?
바울은 롬 14 :7-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바울이 ‘나’라고 하지 않고 ‘우리’라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고백이 바울과 같은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의 고백이 바로 이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그것은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복과도 비교할 수 없이 복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마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우리에게 주신 그 기업의 영광스러움과 그 풍성함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영광을 위해서 그 하늘의 복을 위해서 또는 이 땅의 부귀 영화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분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건강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돈을 잘 벌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평안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예수를 믿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더 이상 이 땅의 것들을 위해서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1-6 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또한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삽니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까? 우리는 주의 영광 위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것 역시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 나라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순간, 그 영광과 그 귀함으로인해서 우리는 이 땅에 있는 것들이 배설물처럼 되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배설물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제목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평생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로또 복권 한번 당첨되는 것입니까? 한번만 당첨되면 인생이 바뀐다고 하니까, 그 복권 한번 당첨되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꿈에 부풀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런 꿈이라도 없으면 세상 살아갈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소망으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그런 허황된 꿈은 집어 치우고 평범하게 그저 가정이 평안하고 아이들이 건강하고 반듯하게 잘 자라고, 공부도 좀 잘하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남편 직장이 안정되고 제 때 제 때 월급 나오고, 때가 되면 승진하고, 또는 남편 사업이 잘 되고, 돈 걱정 없이 살아가고,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한 가지 더 보태서 온 가족이 예수 잘 믿고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여러분의 평생 소망입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그 피흘려 사신 내 생명이 너무 가치가 없지 않습니까? 주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내 인생과 영원한 멸망을 향해서 가는 세상 사람들의 인생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가치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루에 수천만원씩 버는 박찬호의 하루와 하루에 일당 3만원을 받는 사람의 하루의 가치는 다릅니다.
여러분의 생의 가치는 그렇게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도 되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주님은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 값으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 주님을 위해서 기도해 보셨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탄식해 보셨습니까? 그 나라 때문에 금식하며 기도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생명을 걸고 기도해야 할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나라가 이 땅에 견고히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들이 부흥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지경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지경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반 된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 귀한 여러분의 삶들이 참으로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사용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여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