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장 : 북 이스라엘 역사(왕상 12: -왕하 17장) 2 - 1
1.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이 분열되자 북 왕국은 이스라엘로 남 왕국은 유다로 불리게 되었다. 두 왕국은 서로가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 참으로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주장하였다.
1] 이스라엘
토지가 비옥하여 살찐 가축과 풍성한 곡식, 좋은 과일을 거둘 수 있었으며, 이웃 나라들과 손쉽게 무역을 할 수 있는 지형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한편으로 외부로부터 많은 영향도 받게 되었다.
2] 유다
적은 강우량으로 인해 토질이 좋지 못하여 먹고 쓸 양식이 부족하였으며,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다른 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
2. 국제적인 상황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은 역사적으로 변화무쌍한 틈바구니에서 살았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열될 즈음 인근에 있는 두 나라(애굽과 앗수르)는 그들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서서히 그 마수를 뻗치기 시작하였다.
1] 애굽
사울·다윗·솔로몬 시대에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리비아의 방백인 시송크(성경에는 시삭)가 애굽을 정복하고 22대 왕조를 세우면서부터 사태는 달라졌다. 그는 솔로몬이 죽은 후 르호보암 제 5년에 이스라엘과 유다를 총공세로 쳐들어왔다. 이후 애굽은 세계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에티오피아와 앗수르를 막는데 주력했다.)
2] 앗수르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혔던 나라로 세계적인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매우 잔인하여 적을 사로잡으면 산채로 장대에 꽂아 불에 태워 죽였으며, 사람의 해골로 피라미드를 쌓아 올리거나 사람의 가죽으로 장신구나 벽을 장식하였다. 특히 디글랏 빌레셀(B. C 1114-1076)은 앗수르의 영토를 서쪽 지중해 연안까지 확장시켰으며, 이후의 통치자들도 계속 남쪽으로 밀고 나갈 준비를 갖추었다. 앗수르의 발전은 느리고 점진적이었지만 이스라엘이 두 나라로 분열될 즈음에는 이미 상당한 세력을 가진 나라로 등장하였다.
3] 블레셋
블레셋도 계속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해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4] 페니키아와 아람
이 나라들도 이스라엘을 침략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5] 에돔과 암몬
이때에 이들은 이미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3. 주요 주제들
1]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역사를 신명기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순종 - 축복, 불순종 - 저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한다.
2] 예루살렘이 참된 예배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다른 곳의 제사는 죄, "산당"이라 불림.
3] 이스라엘의 멸망하게 된 원인을 밝힘.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 - 계속 죄를 자행함.
4] 선지자들의 활동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엘리야, 엘리사, 아히야, 무명의 선지자, 미가야, 선지자의 생도 등.
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
시내산 언약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셨다.
6] 전쟁은 왕들의 역사에서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하였다.
4. 왕들에 대한 이야기의 체제와 형식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는 거의 동일한 문체와 형식으로 언급되고 있다.
1] 유다
(1) 이스라엘 왕 --- 년에 유다 왕 --- 가 통치를 시작하였다.
(2) 그의 나이, 통치 기간, 이름, 어머니 이름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
(3) 왕의 통치가 "그 조상 다윗"의 그것에 비교하여 평가되고 있다.
(4)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 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5) 그가 열조와 함께 잤고, 그 대신 --- 가 왕이 되었다는 진술.
2] 이스라엘
(1) 유다 왕 --- 년에 이스라엘 왕 --- 가 통치를 시작하였다.
(2) 통치 기간과 수도의 위치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
(3)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한 여로보암의 죄를 쫓고"
(4)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 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5) 그가 열조와 함께 잤고, 그 대신 --- 가 왕이 되었다는 진술
3] 북쪽의 왕들은 모두 악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 금송아지. 비합법적인 제사장. 자의적인 절기 행사
4] 남왕국 유다
몇 사람만이 인정을 받음(특히 히스기야와 요시야) 10명의 왕들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졌다(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열왕기는 왕들의 업적보다 예루살렘에서 행한 예배와 율법 준수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5. 여러 왕조들
북 이스라엘은 9개의 왕조가 왕이 되었다. 2대 이상 유지된 왕조는 둘 밖에 안 되고, 일곱 왕조는 모두 칼로 왕위를 찬탈하였다. 유다는 다윗 가문이 줄곧 왕이 되었다. 가끔 왕이 몰려나고 살해된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모두 악한 왕을 몰아내고 선한 왕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의 마지막 시기는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여로보암 2세가 죽고 나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을 받았으며, 주민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이 기간의 25년 동안에 6명의 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 중 네 명은 이전 왕을 살해하고 왕이 되었다.
6. B. C. 721년까지의 북 이스라엘 역사와 선지자들.
1] 여로보암 왕가(B. C. 922-901) - 2대(12:25-14:20, 15:25-31)
(1) 여로보암(주전 931-910) - 22년간(12:25-14:20)
솔로몬의 강제 부역과 지나친 과세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선지자 아히야가 이스라엘 10지파의 왕이 될 것을 예고하자 반역을 함(유다와 에브라임 지파의 알력). 이 일로 솔로몬의 노여움을 사서 애굽으로 도망. 르호보암 때에 세겜에서 반란을 주도하여 북 이스라엘을 세우고 초대 왕이 됨.(수도를 세겜 - 브누엘 - 디르사로 옮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쪽 예루살렘으로 내려갈 것을 두려워하여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곳에서 제사하게 하였다. 평민으로 제사장을 삼고, 절기를 7월이 아닌 8월 15일로 임의로 바꾸어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함.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도 섬기고 바알도 섬기는 종교 혼합주의를 가져오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을 보내어 그 제단을 파괴하고 장차 다윗의 자손 중 요시야라는 사람이 그의 뼈를 이 제단에 불사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저지하려던 그의 팔이 마비되었으며, 죄를 회개했던 그의 아들을 제외한 모든 남자들이 죽게 됨. 남 왕국의 2대 왕인 아비얌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하나님의 재앙을 입어 사망함.
(2) 나답(주전 910-909년) - 2년간(15:25-31)
* 여로보암의 아들. 모반자 바아사에게 피살당함.(28)
2] 바아사 왕가(B. C. 909-876)(15:33-16:10)
(1) 바아사(주전 909-886) - 24년간(15:33-16:7)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을 죽여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을 성취(왕상 14:4, 15:29 참고). 여로보암의 죄악을 답습함. 유다의 제 3대왕 아사와 일평생 전쟁상태에 있었음. 이스라엘이 유다와 연락하지 못하도록 벧엘과 예루살렘 중간 라마에 성을 건축. 유다 아사왕이 다메섹(아람)왕 벤하닷에게 원병을 요청. 아사왕은 라마성을 짓던 건축 자재로 게바와 미스바(베냐민 지파의 땅)를 지어서 오히려 국경을 확장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여로보암의 가문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문도 같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고됨.
(2) 엘라(주전 886-885) - 2년(16:8-10)
바아사의 아들. 군대장관 오므리를 기브돈에 파송. 술에 취했을 때, 그의 신복 군대장관 시므리에 의해 피살. 시므리는 친족과 친구들까지 죽임. 예후의 예언을 성취.
3] 시므리(주전 885) - 7일간(16:11-20)
바아사의 후손을 멸함으로 예언을 성취함. 그러나 7일 만에 동료 군대장관 오므리에 의해 궁전에서 포위당하여 자결함. 이때에 절반은 디브니를 좆고 절반은 오므리를 좆음. 결국 오므리가 디브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통일함.
4] 오므리 왕가(B. C. 885-841)(왕상 16:21-왕하 10:11)
4대 44년간. 유다와 우호관계를 맺음. 북 이스라엘의 초기 50년간은 매우 불안하였다. 그러나 오므리 왕조가 들어섬으로 이스라엘은 안정 세력을 찾게 되었고 유다와의 긴장도 해소되었다. 그러나 외부적인 안정과 반영과는 달리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는 암흑시대였다.
(1) 오므리(주전 885-874) - 12년(왕상 16:21-28)
세속적으로 강력한 국가. 북 왕국의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김. 이때까지의 왕 중 가장 막강한 왕. 모압을 속국으로 삼음으로서 요단 동편의 남부를 다시 장악하게 됨. 영적으로는 암흑의 시기였다. 아들 아합을 이세벨과 결혼시킴.
성경은 그의 정치적 성공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고 그의 영적인 타락상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헌신하였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신다.
(2) 아합(주전 874-853) - 22년(왕상 16:29-34, 17:1-22:40)
요단 동편(옥토와 왕의 대로) 점령을 위해 노력함. 이를 위해 다메섹(아람)의 남하정책을 방어. 아합은 북쪽의 베니게(두로와 시돈 지역)와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서 다메섹(아람)을 막으려 하였다. 그 표시로 당시 베니게를 통치하던 시돈 사람 엣바알 왕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남쪽 유다의 힘을 빌리기 위하여 자신의 딸(아달랴)을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인 여호람에게 주었다.
왕후 이세벨은 바알에게 헌신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바알종교를 지원하게 되자,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바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분기점에 이르게 되었다. 바알 종교는 이미 백성들 사이에서 가나안의 우수한 문화를 형성시킨 신으로 동경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세벨의 바알 선교 정책은 가속화되었다. 사마리아의 바알의 산당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듦.
(3) 아하시야(주전 853-852) - 2년(22:51-53, 왕하 1:1-18)
아합과 이세벨의 맏아들. 그의 아버지와 같이 죄를 범하고 바알을 섬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궁전에서 떨어져 병들어 치유를 위해 바알세붑에게 물어보았다가 엘리야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음(왕하 1:1-18)
(4) 요람(여호람)(주전 852-840) - 12년(왕하 3:-8: )
아합과 이세벨의 막내아들. 바알의 주상을 제거함으로 아비와 같이 하지는 않았으나, 여로보암의 길을 따르는 죄를 범하였다(왕하 3:1-3). 여호사밧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고 모압을 침. 그러나 물이 갈하게 되었을 때에 선지자 엘리사의 도움으로 물을 얻고 전쟁에서 이김.(왕하 3:4-27) 나아만이 문둥병을 낫고자 하여 왔을 때에 고쳐 보냄(5: -) 엘리사가 아람의 침입계획을 드러내자 엘리사를 죽이려고 군대를 파송했으나 모두 죽고 말았다. 아람이 침공하여 사마리아가 극한 기아에 시달렸으나 하나님께서 네 문둥병자를 통해 사마리아를 기근으로부터 구출하심.(6: -7: )
아람 왕 벤하닷이 죽고 하사엘이 왕이 되었을 때에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기 위해 하사엘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해 치료하던 중 군대장관 예후에게 피살당하게 되었다. 그 후에 에돔과 립나가 다시 그 수하에서 떠나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