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8,30-31.)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온 마음과 정신과 육신과 영혼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과 재물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갈라져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대해 카이사리아의 大 바실리우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찮은 것에 사랑을 쏟는다면 하느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이 그만큼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대 바실리우스 『시편 강해』 44,2.)
모든 사람이 다 사랑의 완성에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분이 누구이신지 아는 것도 아닙니다. … 부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썩어 없어질 몸뚱이의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사람이나, 하찮은 이 세상의 영광을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은, 하찮은 것을 사랑하느라 힘을 다 써버린 나머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대 바실리우스 『시편 강해』 44,2.)
참고로, 바실리우스는 카파도키아의 부유한 지주 집안의 열 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순교하셨고, 할머니는 기적가 그레고리우스한테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할머니 마크리나는 손주들에게 신앙 교육을 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바실리우스는 카이사리아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만나 평생지기 친구가 되었습니다. 바실리우스는 당시 최고의 학문 도시인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수사학을 공부하고, 아테네로 가서 수사학를 공부했습니다. 고향 카이사리아로 돌아가서 수사학 교사로 활동하다가, 누나 마크리나의 영향을 받아 교사직을 그만두고 은수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364년경에 사제품을 받고 활동하다가 370년에 카이사리아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바실리우스는 378년에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며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말로만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겸손하게 섬김으로써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겸손하게 섬기는 것이 최고의 덕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근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참조: 마태 22,39; 마르 12,31; 루카 10,27).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모른 체하지 않고, 돈을 자기 지체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큰 자비를 실천합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창세기 강해』 55,3.)
참고로, 요한이 워낙 강론을 잘 해서 ‘크리소스토무스’(황금의 입, 금구)라는 존칭을 받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된 요한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사제들과 황실과 귀족들에게 검소한 삶을 살라고 요구했습니다.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지 말라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권유에 기분이 상한 에우독시아 황후와 황제가 요한을 유배보냈습니다. 요한은 유배지로 가다가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찬미받으소서. 아멘.”이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함께 하지 않으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결코 참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눈에 보이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