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계를 놀라게 한 부인 강씨의 부탁
이성계는 궁궐이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집무는 수창궁에서 봤지만 궁에서 유숙하지 않았다.
군주가 궁궐을 비워두고 출퇴근하는 꼴이었다. 집무를 마치고 사저에 돌아와 잠자리에 든 이성계 품으로 부인 강씨가 파고들었다.
“전하! 장군님을 전하라 부르니까 너무 어색합니다.”
“나도 듣기가 매우 거북하오.”
“전하를 전하라 부르지 않고 예전처럼 장군님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편 할대로 하시구려.”
“장군님! 장군님께서 정말 상감마마가 된 것이 맞습니까?”
“이르다 뿐이오.”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나두 믿어지지 않지만 현실이라오. 내일이면 당신에게도 왕비마마라 부를 것이오.”
“당신이 왕인데 못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내일이면 자신의 제2부인 강씨를 현비로 봉했음을 공표하는 날이다.
강씨의 눈에서 두 줄기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성계라는 인간 하나만 믿고 함길도를 비롯한 두메산골 야전군 막사를 전전하며 키워왔던 꿈이 현실이 된 것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었다.
“아니,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처음 듣는 것처럼 깜작 놀라며 내숭을 떨었지만 어제 정도전이 사람을 보내어 귀뜸해 주었던 내용이다. 정도전과 강씨 사이에는 빈번하게 사람이 오가기 시작했다. 전처 소생 자식들로부터 배척과 따돌림을 당했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더욱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이라오. 이제 당신도 왕비라오.”
“어머머머, 당신은 너무 멋져, 이제 한 가지 소원은 성취시켜 주셨는데 나머지 한 가지도 들어 주실 거죠?”
“당신이 왕비가 되었는데 또 소원이 있단 말이오?”
“저만의 소원이 아니라 당신과 나 우리의 소원이랍니다.”
“그게 무어요? 어서 말해 보구려.”
“방석이를 세자로 세워주실꺼죠?”
“...”
부인 강씨가 야망이 있고 욕심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방석에게 세자를 돌리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이성계는 뒷통수를 얻어 맞은 듯 했다. 정신이 아찔했다. 막내에게 세자라니 이거 보통일이 아니었다.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위로 형들이 줄줄이 있는데 서자(庶子) 방석에게 세자라니 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방우를 비롯한 장성한 아들들과 방원의 날카로운 눈빛이 가슴에 꽃이는 것만 같았다.
이제 강씨의 입에서 세자 방석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이상 강씨의 욕망을 꺾느냐? 끌려가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방석이에게 세자란 말이오?”
“그렇지 않구서요. 당신이 왕이고 내가 왕비라면 방석이가 세자가 되는 것이 안 될 것도 없잖아요?”
품속에 안겨 있던 강씨가 눈을 치뜨며 이성계를 바라보았다.
“으으음.”
이성계는 괴로운 한 숨을 내쉬었다.
“아이 몰라요. 당신이 왕인데 못할 일이 없잖아요. 당신만 믿겠어요.”
강씨는 얼굴은 별로였지만 손이 예뻤다. 처녀시절부터 섬섬옥수(纖纖玉手)라 개경바닥에서 소문이 자자하던 아가씨였다. 반면 이성계의 제1부인 한씨는 여러 자식 낳아 기르고 노복들과 함께 과전을 지키며 농사짓다 보니 손이 미웠다.
개경진입을 노리던 청년장교 이성계가 권문세족 가문의 강씨가 탐이 났지만 예쁜 손에 반했는지 모른다. 그 고운 손으로 이성계의 가슴을 후비며 파고들었다. 강씨는 이성계와 21살 차이가 나는 젊은 부인이었다.
부인 강씨를 현비(顯妃)로 책봉하는 날 여러 아들들도 군(君)으로 책봉했다. 이방우는 진안군(鎭安君), 이방과는 영안군(永安君), 이방의는 익안군(益安君), 이방간은 회안군(懷安君), 이방원은 정안군(靖安君), 서자(庶子) 이방번은 무안군(撫安君), 방석은 의안군(宜安君)에 봉했다. 책봉식을 마친 이성계가 방원을 불렀다.
“네가 동북면에 다녀와야겠구나.”
“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이건 명이 아니라 네가 정안공(靖安公)이 된 것을 조상님께 배례하고 이 애비가 왕이 된 것을 선조님께 고하고 오너라.”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위로 형들이 줄줄이 있는데도 자신을 찍어서 동북면에 다녀오라는 것으로 봐서 아직 아버지가 자신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보권이 정도전에 넘어가고 서모 강씨가 왕비에 오른 것이 씁쓸했다. 특히 정보권이 정도전에게 넘어간 이후 서모 강씨의 사람들이 빈번하게 내왕한다는 것이 방원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A급 정보에 휘둘리는 B급 정보
공식적인 정보창구는 정도전으로 일원화 되었지만 방원이 안테나를 다 거둔 것은 아니었다.
방원은 비밀리에 사설 정보팀을 가동하고 있었다. 방원이 꽂아둔 안테나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었다. 정도전 주변에 벌써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고 왕비로 책봉된 서모 강씨와 정도전이 긴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특이 사항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정도전과 강비가 ‘모종’의 일을 전격적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모사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가 접수되었으나 그 ‘모종’이 무엇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고급 정보를 주무르기 시작한 정도전과 하급 정보가 모아지는 방원과의 권력의 함수 관계였다.
미확인 정보에 의하면 자신을 동북면에 보내놓고 서모의 아들 방번이나 방석을 세자로 세우려 한다는 정보가 접수되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또 하나의 첩보에 의하면 세자 책봉은 아버지가 왕으로 즉위한 1주년이 되는 내년에 있을 것이라는 첩보였다. 어쩌면 정도전 진영에서 방원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흘린 역정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동북면에 다녀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계 가문은 원래 전주가 본향이다. 전주를 떠난 4대조 할아버지 이안사가 삼척을 거쳐 함흥에 정착하면서 무골 집안으로 성장했다. 방원은 함흥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