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다 보니 점점 흐름이 바뀌다가 나중에는 수습하기가 어려워지네요.ㅎㅎ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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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태와 찬우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성격은 정반대여서 밀태가 견고하게 다져진 바위산이라면, 찬우는 어떤 그릇이든 자유롭게 닮길 수 있는 바다 같은 성격이다. 어울리기 힘든 조합이지만 학창 시절 공통 관심사인 태권도를 함께 배우면서 친해졌고 성인의 된 다음에는 이라크 파병 동반 입대까지 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사는 곳은 달라졌지만 매년 여름휴가만큼은 함께 보내는 것이 둘만의 암묵적인 룰이다.
역대 최고 더위가 예상된다는 2024년, 올해는 남해군 망상도라는 섬으로 여름휴가를 왔다.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도시문명의 혜택이 꼭 필요한 밀태는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매일 치수에 잰듯한 머리 넘김 비율과 칼날 라인을 유지한 정장 바지 대신 카키색 구겨진 반바지에 신축성이 큰 군용 가방을 메고 있다. 자신의 팀원들이 본다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리라. 그럼에도 아이의 눈망울로 이곳저곳 사진을 찍고 있는 찬우를 보고 있으면 괜스레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숙소는 다도해가 훤히 보이는 언덕 위 2층 나무집 펜션이다. 탁 트인 바다를 보자 자연스레 시선이 앞에 고정된다. 안개처럼 퍼진 구름 사이로 군데군데 삼각자처럼 내려앉는 햇빛이 바다와 만나 잔잔하게 부서져 흩어지고 있었다. 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조용히 이 평온한 자연을 가슴에 잔뜩 담아두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우리를 태워주고 숙소까지 제공한 태희 선장의 부름이 있기 전까지 둘은 이 침묵을 누리고 1층으로 내려갔다.
10인승 작은 배인 ‘다솜호’의 선장님 이름은 진태희이다. 숙박비 계좌에 적힌 이름을 보았을 때, 내심 여자일 거라 생각한 것과 다르게 그는 60대 후반의 다부진 남자이다. 160cm 후반의 키지만 어깨는 넓고 단단해 보였고, 눈빛은 사바나 맹수같이 강렬했다. 마치 동학농민운동의 녹두장군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바다 같은 편안함이 녹아있는 것 느낌이 들었다.
생선구이가 메인 요리로 준비된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우리는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우리의 이라크 파병과 선장님 아버지의 월남전 파병이라는 공통분모가 쉽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물꼬가 되었다. 서로의 말도 안 되는 영웅담에 허세라는 조미료를 넣은 자기자랑은 끝날 줄을 몰랐다. 클라이맥스로 선장님이 직접 만든 방풍나물 담근주를 기분 좋게 마시곤 피곤했는지 파도 소리를 이불 삼아 곤이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그 어떤 꿈도 꾸지 않는 편안한 숙면이었다.
...
아침 갈매기 소리에 다시 잠을 깼을 무렵… 밀태는 안개 자욱한 바다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로 뒤덮인 섬. 하루 만에 달라진 섬의 풍경을 보며 손을 뻗어보았다. 촉촉하면서도 서늘한 안개가 바람에 날려 내 손을 간지럽힌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침대를 보니 찬우가 보이지 않는다 혼자 아침 산책을 하러 간 것이라 생각하곤 30분간 홈트레이닝 하루루틴을 시작했다. 가볍게 운동을 마치고 집 주변을 둘러보니 새하얀 해가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보였다. 1층에서 마당을 쓸고 있는 태희 선장님이 눈에 들어온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아래로 내려가 반갑게 인사하며 찬우를 보았는지 물어보았다.
[태희] “글쎄, 모르겠는데, 어제 많이 취했는지 이제야 일어나 바로 마당을 쓸고 있었어.”
“... 언제부터 찬우 씨가 보이지 않았나?”
[밀태] “잠에서 깬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태희] “그럼 일단 아침을 먹고 천천히 섬을 둘러보게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서 선장님의 권유를 따라 식당으로 갔다. 청량고추가 들어간 시원한 조개탕으로 해장을 하고 찬우를 찾으러 섬을 둘러보았다. 7~8 가구가 모여 있는 마을과 송신탑이 설치된 작은 봉우리 한 개, ‘ㄷ’을 좌우 돌려놓은 모양의 방파제를 둘러보는 데 채 2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찬우는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찬우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방파제에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수영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했던 찬우지만 바다수영은 서투를 것 같다. 불안이 더욱 강하게 올라오기 시작할 즈음 혹시라도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며 다시 언덕으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찬우뿐만이 아니라 선장님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직 걷히지 않는 뿌연 안개처럼 마음이 어지럽다. 잠시 마루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게 분명하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실종 신고를 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얼핏 들은 것 같다. 서둘러 휴대폰에 저장된 찬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을 시도하고 나서야 간신히 연결이 되었다.
[찬우 어머니] “.... 여보세요?”
[밀태] “네, 어머니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밀태입니다.”
[찬우 어머니] “... 응.. 밀태구나? 잘 지냈니?”
[밀태]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갑자기 연락드려 정말 죄송한데요.”
“찬우가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지만 함께 섬으로 여행을 왔어요. 그런데 갑자기 보이지 않아요.”
“경찰에 도움을 요청드려야 하는데... 어머니 동의가 필요할 것 같아요.”
[찬우 어머니] “.....”
“밀태야... 괜찮은 거니?”
[밀태] “네,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찬우 어머니]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 전화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밀태] “네? 어머니 무슨 말이세요?”
“지금 찬우가 갑자기 사라졌어요.”
“아무 일 없겠지만 바로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찬우 어머니] “벌써 3년이 지나지 않았니? 이제 그만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네 마음은 안타깝지만 너를 지켜보는 나도 이제 힘이 드는구나.”
“찬우는... 이제 이라크에서 돌아오지 못하잖니.”
갑자기 숨이 막혀온다. 귀는 멍멍하고 ‘삐-’ 하는 소리가 머리에서 계속 울려 퍼진다. 무언가 잊고 있었던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한데 뚜렷하지가 않다.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왜 그러시냐고 말해야 하는데 정작 입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마치 지금 꿈속에서 망망대해를 헤매고 있는 것 같다. 펜션 앞마루에 털썩 앉아 다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두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다. 한참이 지난 후 태희 선장이 집에 돌아오다 그런 밀태를 발견했다. 태희 선장은 덤덤히 밀태를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조금 당황했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눈빛으로 조용히 부엌으로 가 늦은 점심 겸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밀태가 정신을 차린 것은 강렬함을 잃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가며 진한 노랑 빛을 내고 있을 때였다. 선장님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 밭에서 갓 딴 상추, 손수 만든 밑반찬을 가득 담은 다리가 세 개인 동그란 상을 마루에 가져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허기가 밀려온 밀태는 그제야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노을이 반쯤 바다에 걸려 있을 때 선장님은 아버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선장] “우리 아버지는 이 섬에서 태어났어.”
“그 당시에는 70가구 넘는 제법 큰 마을이었지.”
“큰돈을 벌고 싶었던 아버지는 20살 되자 친구와 함께 월남에 가게 되었지.”
밀태는 아무 말 없이 선장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선장] “아버지는 전쟁의 참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자주 말씀해 주셨지.”
“사람됨을 유지하는 것은 사치일 뿐, 서로가 살기 위해서는 매일 죽여야만 하는 지옥이라고 하셨지.”
“그걸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 섬에서 함께 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은 친구 덕분이었네.”
“하지만...
선장은 바다를 쓱 바라보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선장] “왼쪽 팔에 총상을 입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친구는 살아 돌아올 수 없었네."
"거듭된 후퇴로 시신도 찾을 수 없었지.”
“아버지는 상처와 죄책감이 너무 컸는지 그때부터 스스로를 속이기 시작하셨네."
"섬에 돌아와서도 가끔 있지도 그분과 함께 있는 것처럼 행동하셨지.”
“술이 거하게 취하셨을 때는 바다를 바라보며 허공에 이야기하곤 하셨어.”
“아버지를 가엽게 여긴 어머니가 아니셨다면 평생 그곳에서 헤어 나오시지 못하셨을 거야.”
선장은 밀태를 바라보았다.
[선장] “어머니는 묵묵히 아버지를 기다려 주시며 이 말을 자주 해주셨어.”
'슬픔에 빠지는 것은 우리가 사람임을 알게 해주는 과정이지만 그것을 치유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 또한 사람이기에 가능하다고...
만약 친구가 지금의 당신을 보면 어떤 말을 할까? 자신을 잊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 할까?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그 친구가 진정 행복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당신은 이미 무엇이 그 친구를 위하는 길인지 알고 있을꺼야.'
밀태의 얼굴에 다시 눈물이 흐른다. 사실 밀태도 알고 있었다. 3년 전 이라크에서 함께 마을 재건 작업을 갔을 때 우연히 남아있던 지뢰가 작동하면서 찬우가 죽었다는 것을... 겉모습과 다르게 겁이 많았던 찬우를 내 욕심으로 이라크에 데려와 놓고는 나만 살아서 돌아온 것을... 속에서 올라오는 슬픔과 아련함을 뒤로한 채 밀태는 말없이 그저 바다를 바라보았다.
다음날 밀태는 꿈을 꾸면서도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꿈에서 찬우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왠지 자신을 믿는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침대에서 테라스로 나가는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맑고 개운한 바다가 태양을 강렬하게 토해내고 있다. 시원한 바람에 짧은 앞머리가 살짝 흩날린다. 찬우가 알던 원래 밀태로 돌아가는 것을 응원하고 있는 것 같다. 찬우는 이제 없다. 하지만 찬우가 기억하는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