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규정한 말들
민금순
사람들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 살아간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거의 필사적으로. 교사가 꿈이었던 내 삶의 물줄기가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21세기를 시작하는 2000년도에 내 직업은 노환의 시어머님을 모시고 두 아이를 키우며 정신없이 살아가는 특별한 것 없는 실수투성이 가정주부였다.
큰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려는데 가정환경 조사서에 부모의 학력을 적는 칸이 있었다. “고졸”이라고 적는데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내 아이들이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그렇게 써야 한다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2000년은 무언가를 시작해도 좋을 해였다. 방송대 국문과에 입학해 4년 만에 졸업했으며, 20년 후에는 사이버대학교 문창과도 졸업했다.
병환의 시어머님과 예기치 않게 장애 진단을 받은 둘째를 제대로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력이 없어 집에서 살림이나 하는 여자’라는 취급을 받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온라인으로 공부하고, 국가고시에 합격해 1급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보육교사, 특수교육지도사 등 돌봄 관련 자격증도 오랜 세월 동안 독학으로 취득했다. 배워서 실천하는 ‘돌봄 전문가’가 되었다.
직장에 다니지 않는 동안, 언젠가는 어엿한 내 일을 갖고 싶었다. 꾸준한 취업 준비로 전산 관련 필수 자격증들을 취득했다. 어느 때일지는 몰라도 시어머님은 우리 곁을 떠나실 것이고, 아이들은 성장할 것이다. 나만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부모도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동반성장을 위해 ‘공부하는 엄마’였다.
신혼 초부터 16년 동안 모시고 살았던 시어머님의 소천은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늘 내 곁에 계셨던 시어머님이 계시지 않는 것은 큰 상실감을 주었다. 집안에서 무언가 큰 소임을 다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살았던 16년이었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내가 우울증을 겪게 된 것을 지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고생하며 살았는데 이제 좀 편해질 수 없느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힘든 세월을 함께한 분을 그리워하는 무르고 ‘정 많은 사람’이었다.
지인이 센터 규모를 키우면서 함께 일하자고 했을 때, 둘째가 걱정되어 망설였다. 둘째가 자립심을 기르려면, 엄마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피력하는 센터장의 말에 설득되었다. 실제로 둘째는 내가 취업한 이후에 몰라보게 성장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고교 졸업 후, 복지관을 다니게 되면서는 눈물을 머금고 주말마다 훈련한 버스 타기 훈련에 성공해 혼자서 버스를 타고 복지관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또 눈물을 꾹꾹 눌러 삼키면서도 ‘단단한 훈련가’였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쓴 육아일기를 열 권의 책으로 묶었고, 둘째의 그림과 비즈 삽화에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담아 동시집 다섯 권을 문화재단 지원금으로 출간했다. 내가 혼신을 다해 키워 온 둘째가 나를 ‘동시 작가’로 키워 준 것이었다.
아동센터에서 팔딱이는 아이들의 숨결과 반짝이는 눈동자와 깜짝 놀랄 말들도 동시의 글감이 되었다. 아이들이 주인공인 동시,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동시로 썼다.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나의 큰 복이었다. 센터 아이들은 나를 “민쌤!”이라고 불렀다. 아이들에게 학습과 생활지도, 인성 지도를 하며 근무했다. 10년 넘게 지역아동센터에서 ‘엄마 같은 사회복지사’였다.
열 권의 책에도, 다섯 권의 동시집에도 나를 온전히 담을 수는 없었다. 삶에 놓인 문제에 억눌리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점을 찾으려 애쓰며 실수를 거듭하면서도 긍정적이고 당차게 살았던 나는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부인이 아닌, 나로 살고 싶었던 나는 분명, 나를 살리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평생을 누군가를 돌보며 살았던 나인데, 그들과 더불어 내 삶이 채웠졌다. 그들이 나를 살게 해 준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생의 아이러니다.
가정주부였다가, 돌봄 전문가, 공부하는 엄마, 정 많은 사람, 단단한 훈련가, 동시 작가, 엄마 같은 사회복지사의 길들을 지나 오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계속 쓰기』의 작가 대니 샤피로는 아이를 돌보고, 가정의 살림살이를 꾸려가면서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글쓰기를 향한 열망은 꺼지지 않고 타올라 결국은 자신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단순히 가정주부로만 규정지어진 나를 내가 만족할 수 없었다. 긴 세월을 돌고 돌아서 농부가 된 지금도 그저 흙 속에 파묻혀 세상과 담쌓고 살아가는 삶은 아니고 싶어서 끊임없이 책을 읽고 나를 살리기 위해 글을 쓴다. 이제 나를 이렇게 소개한다. “읽고 쓰는 농부 작가입니다.”
첫댓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멋진 분이십니다.
김규진 선생님! 저를 놀리시는 거지요? ㅎㅎ
늦깎이로 엉금엉금 눈물로 넘어온 고개입니다. 적어 놓고 보니 더 부끄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많은 수식어 중에 "읽고 쓰는 농부 작가" 타이틀이 가장 멋지십니다!, 가정주부, 돌봄 전문가 등.... 나를 대변하는 타이틀이 점차 변화되는 전개가 너무 좋습니다.
와 다채로운 이력서입니다. 게다가 이대로 끝이 아닐 것 같은 기분.
삶과 인생에 대하여 성실함과 진정성으로 가득한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글로 이렇게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