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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읽는 고전의 글귀 하나가 가슴을 울린다!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이자 철학박사인 저자는 인생을 차분히 돌아보는 데 고전만 한 것이 없으며, 이 5분간의 짧고 명료한 고전 읽기가 인생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준다고 강조한다. 일부러 시간 내지 않아도 되는 짧은 아침 시간에 고전 한 구절을 읽어보자.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것, 그것이 바로 21세기에 고전을 읽는 이유다. 현대사회가 1분 1초 촌각을 다투고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5분 정도의 시간은 누구나 낼 수 있다. 이 5분은 짧다고 하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시간이다. 하루 24시간 중 5분의 시간을 자신을 되돌아보는 고전읽기에 투자해보면 어떨까? 고전은 오랜 옛날부터 앞이 보이지 않는 삶에 희망과 활력과 꿈을 주는 글이었다. 평온한 세상이든 어지러운 세상이든 고전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었고, 시대와 공간을 넘어 사람들에게 힘이 되었다. 이 책은 배움에서 시작해 리더의 자리에 이르기 까지의 보석 같은 고전의 진수를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다. 때마다 숙연해지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오랜 연륜을 지닌 그 뻔한 이야기 속에 녹록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간 조상의 지혜와 삶의 자세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전은 단순히 옛사람들이 남긴 좋은 말이 아니라 수천 년을 현실 속에서 부대끼며 검증을 거친 지혜의 정수다. 고전은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길을 제시해 자신에 대해, 자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어떤 것이 올바른지에 대해 고민하지만 답을 구하지 못해 표류하는 현대인들에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렇게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첨단을 달리는 오늘날에도 고전의 가치는 빛난다. 일부러 시간 내지 않아도 되는 짧은 아침 시간 5분! 아침을 시작하는 5분간의 고전 메시지가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인생을 바꿀 것이다.
하루 5분, 고전과 만나는 시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앞으로 내달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남을 이기기 위한 경쟁이 우선이다. 이기기 위해 빠른 길을 알려주는 속성 지침과 필요한 것만 콕콕 집어주는 족집게를 우선시하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이제 좋고 나쁨이 아닌 옳고 그름을 생각하고, 원칙과 정도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올바른 걸음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 올바른 걸음을 위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과 만나는 5분간의 고전 강독 시간을 가질 것을 권유한다. 고전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을 지키게 해 자존감과 자긍심을 갖게 한다. 고전의 힘은 소유에 흔들리지 않는 존재의 힘이다.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한 번에 넘기에는 너무나 높은 장애물을 만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 빛이 보이지 않는 삶은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든데 그럴 때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의 한마디가, 어디선가 읽은 듯한 글 한 줄이 힘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고전의 힘도 그러하다. 이 책은 단숨에 읽어나가기보다는 5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한 편의 글을 읽고 생각할 수 있도록 구성했는데, 총 8장으로 이루어져있다. 배운 지식을 어떻게 현실에 적용하고 살아갈 것인지 성찰한다. 2장에서는 나를 성찰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인격을 키우고, 다가올 기회를 위해 준비하고, 자신을 닦는 수신을 강조하고 있다. 3장에서는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고전명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눔, 선한 행동의 실천, 효, 노인공경 등의 내용을 제시한다. 4장에서는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기본을 알려준다.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마음가짐과 자세를 알아봤다. 5장에서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일에는 노력만 한 것이 없음을 알려준다. 6장에서는 욕심, 경쟁, 소유욕, 넘침 등 자신의 길을 걸을 때 경계해야 할 것들을 살펴본다. 자신의 위치와 족함을 알고, 욕심과 경쟁과 소유욕에서 자유로워야 함을 강조한다. 7장에서는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 특히 타인과의 교감과 주변의 행복을 위해 갖춰야 할 마음가짐을 알아봤다. 마지막 8장에서는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과 실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
? 책 속으로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안다.’라는 뜻의 온고지신溫故知新! 가훈으로 많이 쓰는 말이라 익숙한
한자성어죠.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온고지신은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문장의 한 부분으로 따뜻할 온溫, 예 고故, 알 지知, 새 신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온溫은 물 수水 변에 죄인 수囚와 그릇 명皿으로 이루어진 글자인데, ‘죄인에게 한
그릇의 물을 주는 따뜻한 마음’ 또는 ‘고기를 넣고 모닥불에 끓여 수프를 만든다.’는 풀이가 있어
익히다·복습하다·원만하다·순수하다 등으로 해석합니다. 옛날 혹은 옛일을 뜻하는 고故는 ‘과거의
사상과 역사’를 의미하며, 지知는 알다·깨닫다·느끼다·분별하다란 뜻이고, 신新은 새로운 것이란
뜻입니다.
가끔 일부 몰지각한 지식층이 지식을 악용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할 지도층 인사들이 뻔뻔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해서 사람들을 실망시키기도 합니다. 이것은
지식만 쌓았을 뿐 그것을 삶으로 익히지 못해 예禮가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학부모들
중에는 성적만 중시할 뿐 자녀들이 무례한 행동을 해도 무관심하거나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정말 큰 문제지요. “예로써 요약한다.”는 것은 가정교육, 특히 부모의 교육철학과
실천적 행동이 중요한 것으로, 그를 통해 공부가 완성되어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널리
배우고 익히되 사회적 책임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은 현대에도 관통하는
훌륭한 행동양식이며, 고리타분한 탁상공론이 아닌 살아 있는 사회규범입니다. 이 때문에
박문약례는 학교의 교훈이나 가정의 가훈으로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물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을 닦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묵자는
물을 거울삼지 말고 사람을 거울삼아 자신을 되돌아보라고 말합니다. 물에 비치는 모습은
선명하지 않기에 자신이 은연중에 바라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면 잘하는 사람을 통해서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잘못된 사람을 통해서는 자신의
잘못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거울 삼으라고 한 것이지요. 이렇게 누구를
거울로 삼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그 거울은 참으로 무섭기까지 합니다.
거울로 삼는 사람들을 통해 삶의 길흉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시를 도용한 교수는
제자가 그 사실을 밝힌 것에 대해 인간적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는데, 이는 제자가 할 말이지
스승이라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요.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자주 몸 전체가 흔들리고 힘들어합니다. 언제나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갖고 싶지만 쉽지 않지요. 불교에서는 평상심平常心을 말하면서 우리가
겪는 오만 가지 일을 억지로 구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억지로
하면 일이 잘 풀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도 어지러워져 결국 스스로 문제를 만든다는 것이죠.
그래서 과욕·과음·과식·과로를 자제하고 무심無心이나 하심下心(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 방하착放下着(집착하는 마음을 없애고 내려놓는 것)을 강조합니다. 마음을 없애거나
비우거나 내려놓으라는 것이죠. 그런데 마음도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을 없애거나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과연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세상이 스스로 어지러운 것인가요? 아닙니다.
세상은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어지럽고 살기 힘든 곳이 되기도 하고, 양보와 배려와
사랑으로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즉 사람들의 행위와 모습에 따라 세상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 속에 내가 있지요. 따라서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세상은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한 사람이 바꿀 수 있을 만큼 세상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이 마음을 열고
세상을 향해 따뜻하게 손을 내밀고 주변에 감동을 준다면 주변이 변하고, 변한 그들이 각자의
자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작은 변화가 퍼지고 퍼져 마침내 큰 변화를 이룰 때 물속의 고기가
뛰어오르고 풀을 먹던 말들이 고개를 들어 돌아보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아이가 7~8세가 되면 『소학小學』으로 삶의 기본을 익히게 했지요. 바로
쇄소응대진퇴灑掃應對進退가 그것입니다. 쇄소응대진퇴는 물 뿌리고 청소하며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하며 어른 앞에서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의범절로, 삼절三節이라고 합니다. 즉 청소를 통해
주변을 깨끗이 정돈하는 습성을 몸에 익히고, 궂은일도 스스로 할 줄 아는 봉사하는 심성을 기른
것입니다. 또한 응대하는 방법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와 조직 속에서 자신의 자리와 위치를 알게
하고, 타인에게 귀 기울이는 사려 깊은 사람이 되도록 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익히도록 했습니다.
또한 때에 맞게 나아가고 물러남을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행동거지를 단정하게 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도록 했지요. 즉 구체적인 상황과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첫 만남, 첫사랑, 첫 출근…. 어느 순간이든 어떤 경우든 ‘처음’은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세상을
날것으로 만나는 낯섦과 순수純粹를 간직한 처음! 만약 사람들이 모두 이 첫 마음을 잃지 않고
산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래서 그런지 ‘처음처럼’이라는 단어에는 자신을 다잡는
결의가 배어 있습니다. ‘처음처럼’과 같은 뜻이 초지일관初志一貫인데, ‘첫 마음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처음 초初, 뜻 지志, 한 일一, 꿸 관貫으로 이루어져 있죠. 뜻을
의미하는 단어로 지志와 의意가 있는데, 의가 ‘어떤 일을 하고자 마음먹은 것’이라면, 지는
‘마음먹은 것을 단단히 해서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초지일관은 처음에 마음먹었던
뜻을 그대로 흔들림 없이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으른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내일 하지 뭐.”입니다.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 게을러도
되고,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 하지 못해도 괜찮으며,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 잘못해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내일이 있을까요? 내일은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악마가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이 바로 “내일이 있잖아!”라는 속삭임이죠. 우리에게
주어진 날은 오늘밖에 없고, 내일은 우리의 의식 속에만 있을 뿐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내일이 있다는 속삭임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게으름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을 시간 도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바꾼다면 그것이 쌓여 덕을 이루게 되고, 성인의 마음까지
갖출 수 있다는 것이 순자의 생각입니다. 순자는 힘써서 착한 행동을 하고, 남에게 베풀 때
자신을 닦는 수신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지요. 즉 선善이 쌓이면 수신修身의 정도가 높아져
마침내 성인聖人에까지 도달한다고 본 것입니다. 성인의 마음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갈고닦아서 도달할 수 있으며, 자연현상에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수신을 하면 성인에
도달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노력에 따라 자기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본 순자가
강조한 것은 끊임없는 노력입니다. 노력을 통해 자연 그대로인 성性을 변화시키고 위僞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화성기위化性起僞)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순자가 인간에게 거는 기대였습니다.
인간은 희로애락喜怒哀樂에 좌우되고 욕망에 흔들리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순간순간 자신을 사로잡는 욕망을 버리고 마음을 텅 비우고
환하게 통하게 한다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만일 장준혁이 열악한 환경을 이기고 의사가
되는 과정에서 인간교육과 올바른 행실을 통한 인성교육으로 자신을 닦았더라면 자신이 꿈꾸던
진정한 의사가 되지 않았을까요? 뛰어난 존재가 되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진실하고 성실하며 남과 더불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덕에 나아가 학업을 닦고 남과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합니다. 그럴 때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도 바르게 할 수 있지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천재의 모습일 것입니다.
길가에 서 있는 매우 큰 나무! 그 거대함에 사람들은 감탄했지만, 나무의 줄기는 울퉁불퉁해
먹줄을 칠 수 없고 잔가지는 꼬여 있어 자를 댈 수 없었습니다. 즉 아무 쓸모가 없기에 그렇게
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세」의 나무 역시 그러합니다. 큰 목수인 석石이 제자들을 데리고
쓸만한 나무를 찾으러 길을 떠났는데, 제나라의 곡원曲轅에서 수천 마리의 소를 덮을 만큼 크고
백 아름이 될 만큼 굵은 상수리나무를 만납니다. 구경꾼들이 장터처럼 몰려들어 감탄했지만
정작 석은 그냥 지나칩니다. 제자들이 이유를 묻자 석은 그 나무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이나 곽을 만들면 빨리 썩어버리며, 그릇을 만들면 바로 깨지고, 문짝을 만들면 진이 줄줄
흐르며, 기둥을 만들면 좀이 먹는다고 말하지요. 즉 무엇도 만들 수 없기에 거대한 나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남백자기南伯子ヘ란 사람이 만난 거목은 사마駟馬(네 필의 말)
수레 1천 대를 맬 수 있을 정도로 컸지만 그 역시 재목감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발자취는 남다릅니다. 그들의 호흡·손길·미소·걱정·작은 탄성까지도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어, 거친 호흡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줍니다. 그것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주변을 빛나게 하는 것처럼 그들의 삶은 세상에 아름다운 자취를 남깁니다.
추기경의 삶이 그랬습니다. 크게는 국가부터 작게는 서울역 쪽방촌 사람들까지 추기경의 진솔한
마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지요. 그랬기에 김수환 추기경은 비록 삶과는 결별하더라도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큰 울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열자列子』 「설부說符」편에
언미즉향미言美則響美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말이 아름다우면 그 메아리도
아름답다. 관윤關尹이 열자列子에게 말했다. ‘말이 아름다우면 그 울림도 아름답고, 말이 악하면 그
울림도 악하다. 몸이 길면 그 그림자도 길고 몸이 짧으면 그 그림자도 짧다. 이름은 울림과 같아야
하며 몸은 그림자와 같아야 하니, 그대가 말을 신중히 하면 거기에 합하는 자가 있을 것이며,
그대가 행동을 신중히 하면 거기에 따르는 자가 있을 것이다.’"입니다.
통치자가 국가의 이로움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왕이 국익만을
생각하면 대부大夫도 사士도 백성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어 그 나라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통치자가 리利가 아닌 인과 의를 추구할 경우 백성들 또한 인과 의
를 행하기 때문에, 어버이를 뒤로 하거나 임금을 뒤로 하는 자가 없는 의로운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논어』 「헌문憲問」편에는 ‘이익을 보면 의로운지를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가
있습니다.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과 대구가 되는 문장으로,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쓴 글입니다. 볼 견見, 이로울 리利, 생각할 사思, 의로울 의義로 이루어진
이 문장은 『춘추좌전春秋左傳』 「소공昭公」 30년조의 ‘행할 때는 의로운지 생각하라.’는
행즉사의行則思義와도 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