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7:10)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여인이 그를 맞으니
(잠 7:11) 이 여인은 떠들며 완악하며 그의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여
(잠 7:12) 어떤 때에는 거리, 어떤 때에는 광장 또 모퉁이마다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자라
(잠 7:13) 그 여인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입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그에게 말하되
(잠 7:14) 내가 화목제를 드려 서원한 것을 오늘 갚았노라
(잠 7:15)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
(잠 7:16) 내 침상에는 요와 애굽의 무늬 있는 이불을 폈고
(잠 7:17)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잠 7:18)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이 성경의 부분은 내가 어렸을 때 읽었을 때 가장 이해가 안되는 부분 중에 하나였다. 여자가 말로 사내를 꼬셔서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여자가 몸으로 꼬시는 것이지 말로 꼬실 수 있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이 들고 나서 생각해 보니 말로 꼬시는 것이 맞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왕이 있었는데 자기를 뽐내고 싶어하는 왕이었다. 어느 날 옷 만드는 두 사람이 나타나서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왕은 그들의 말을 믿고 돈을 많이 주어서 옷을 만들어 오라고 하였다. 그들은 왕에게 자신들이 만들 옷은 멍청이에게는 안보이는 옷이라고 말해 두었다. 왕은 신하들을 보내서 옷을 잘 만들고 있나 감시하게 하였는데 감시하러 간 신하들이 볼 때 재단사들은 옷을 만드는 시늉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멍청이로 낙인 찍힐 것 같아서 왕에서 아주 멋진 옷을 만들고 있다고 보고 하였다. 드디어 재단사들이 옷을 가지고 왔다. 다들 멍청이가 되지 않기 위하여 옷이 매우 아름답다고 극찬을 했다. 왕도 그 옷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멍청이로 알려질 것 같아서 옷을 입는 시늉만 하면서 옷이 아주 멋지다고 말한다. 왕은 벌거벗은 채로 길거리에 나가서 행진을 하게 되는데, 어떤 아이가 '왕이 벌거 벗었다.'라고 소리치면서 웃음을 터뜨리자, 그제서야 왕과 신하들은 재단사들의 거짓말을 눈치채게 된다. 그러나 왕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거짓말을 믿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체통을 지키기 위하여 행진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나는 재단사들이 끊임없이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하자 사람들이 그 거짓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TV를 켜면 홈쇼핑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전화를 누르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쇼 호스트는 그 물건에 대하여 좋은 점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결코 취약한 부분은 말하지 않는다. 그 말을 계속 듣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이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다. 믿음이 생긴 것이다.
나도 TV 홈쇼핑을 우연히 보다가 2주전 작은 진공 청소기를 하나 샀다. 쇼 호스트가 진공 청소기로 쭉 빨아 올리니까 볼링공 두 개가 딸려 올라 오는 것이었다. 볼링공이딸려 올라오는 것을 보고 나의 손가락은 저절로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입금을 하자 물건은 신속히 도착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볼링공 두개가 딸려올라올 만큼 강한 압력으로 빨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과자 부스러기 같은 것은 잘 딸려 올라왔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의 말은 마술과 같다. 계속 듣고 있으면 홀라당 속아 넘어간다.
우리가 읽은 말씀 속에 나온 창녀는 도저히 말이 안되는 말을 늘여 놓았지만 남자는 그 말에 넘어 갔다. 자기 남편은 여행을 멀리 떠났고 자신은 신실한 신앙인이며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하여 놓았으니 함께 사랑하자는 것이다. 그녀의 말이 잘 못 된 말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여자가 남편이 먼길을 떠났다고 다른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끌어들인 남자와 하룻밤 자는 것이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하는 말을 믿은 것이고, 그 말을 듣고 그 여자를 따라간 그 청년도 그녀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믿은 것이다.
(잠 2:16)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함께 일하는 직장에 한 동료가 있다. 어느 날 그는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믿고 나를 비난하였다. 그가 강한 목소리로 내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하여 내가 했다고비난하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동료들은 내가 진짜 그런 일을 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나는 입을 열어서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런 저런 증거를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동료들은 내 말을 듣고 나를 비난한 동료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만약 내가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진실이 언젠가는 드러날까?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내가 더 큰 목소리로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은 내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믿어 준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일을 했을 것이라고 이미 믿은 그 동료는 내가 틀림없이 그 일을 했을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이미 마음으로 믿었고 입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믿은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일 중에 가장 비논리적인 일이 있다면 재판을 벌이는 것이다. 재판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논쟁하는 것이다. 그런데 판사는 서로 다른 입장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어느 편의 손을 들어 줘야 하는지 늘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사람의 말이 다 옳은 것 같아도 뒤에 말한 사람이 반론을 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입장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번갈아 듣다보면 판사는 점점 판결을 내리기가 어려워질 뿐이다.
판사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어떻게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 사람은 사실을 알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들은 것을 믿을 뿐이다. 사람은 세상을 볼 때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세상을 들은 대로 바라볼 뿐이다. 인간은 사실적인 존재이지만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들은대로 믿을 뿐이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든 그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또한 사람은 자신이 믿음으로 말한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진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일차적으로 무엇을 듣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들은 것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사실을 알아차리고 믿어주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은 내가 말을 하면 그 말을 듣고서야 나를 믿어주는 존재이다.
거짓말을 늘여 놓는 사람의 말을 계속 듣고 있으면 그 말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말을 듣는다는 것은 믿음이 생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잘잘못이 가려지는 일이 아닌 이상,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다.
나 자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사실이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을 믿고 믿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믿은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은 것에 대하여 목숨도 버리는 존재이다.
나는 TV를 보는 사람들이 TV를 통해서 듣는 말에 계속해서 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늘 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주는 것은 TV이다. TV를 계속 보는 사람들은 자기 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TV가 가르쳐주는 정신으로 사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암으로 죽기 직전까지 TV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기 목소리를 계속해서 듣는 사람들은 자기의 영혼과 마주 대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말하면서 자신의 말을 귀로 들을 수도 있고 자신의 말을 녹음해서 들을 수도 있고 자신이 쓴 글을 눈으로 읽으며 들을 수도 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경지에 이른 사람은 자기가 자기의 스승 노릇을 할 수 있다. TV를 보느니 차라리 책을선별해서 읽는다든가 글을 쓴다든가 대화나 강연을 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자기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도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자기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으며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읽고 들으면 그것이 믿어지고 그것이 스승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된 삶을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