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전북대병원 부지 ‘백석제’,
고려말 ‘료화제(蓼花堤)’란 이름 확실 , 문헌으로 재확인
- 고려말 “료화제” , “백석제”가 아니라면 문헌적 근거 제시해야 할 것 -
군산전북대병원 부지로 군산시가 백석제만을 고집하고 있는 와중 군산시와 전북대병원은 백석제가 일제 강점기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고려말 존재하였다는 이우형(현강역사문화연구소) 소장에 대한 자료를 근거로 한 보도자료(2015.4.6)에 대하여 군산문화원 전현직 원장이 문헌적 근거가 없다는 등 백석제(白石提)가 보존가치가 없음을 언론을 통해 발언했었다. 하지만 고려시대 이름인 ‘료화제(蓼花堤)’가 백석제였음의 기존자료 및 추가적인 문헌의 내용적 근거가 더욱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백석제가 염의서원의 고려충신 고용현 선생의 역사적 무대로 , 군산 역사의 재발견 및 백석제의 문화재적 가치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
전현직 군산문화원장 발언 이후 꾸준히 백석제 생태·역사 현장답사 프로그램에 참가한 시민들은 이러한 군산문화원장들의 발언에 대하여 역사문화의 중요성을 찾아 문화재를 발굴 및 재조명을 해도 모자란 자리에 있는 분들의 본연의 모습인지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고, 더 이상의 개발 논리에 생태계뿐만 아니라 역사까지 버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말하며 군산시민들의 적극적인 역사 찾기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료화제’가 백석제가 아니라면 문헌적 근거 제시 필요.
‘료화제’가 백석제의 전신이 아니라면, 문헌에 나타난 료화제의 위치를 정확히 밝혀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문헌적 증거나 논리의 전개없이 백석제에 대한 문화적 보존가치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역사를 온전히 가르치고, 보존해야하는 ‘문화원’으로써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문화재적 가치를 가진 곳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데 이를 제대로 보려하지 않고, 비판보다는 편들기식으로 나서면서 이미 존재하는 문헌도 눈감은 현실이 군산의 현주소 같아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침묵과 비논리에 의한 파괴적 개발옹호는 냉엄한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할 사안임에 분명하다.
백석제가 ‘료화제’였다는 사실 재차확인 , 또한 “홍료제”로도 불리웠다.
이우형 소장은 자료를 찾아 이에 대한 재검증을 해본 결과 과거 백석제가 료화제였다는 문헌적 검증에 전혀 문제가 없음을 재차 확인했다며 개발에 편승한 논리로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은 것들에 대하여 폄훼하고 상세한 조사 없이 사라질지 모르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또한 이 소장은 백석제가 료화제(蓼花堤)(료화: 역귀의 꽃)였다는 것 외에 붉은 역귀를 뜻하는 “홍료제(紅蓼堤)”로도 불린적이 있다는 문헌이 있음을 추가 언급했다.
현 군산문화원장 백석제 개축 가능성에 대해 발언하였으나, 그런 기준이라면 벽골제는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백석제가 료화제였다는 것에 대하여 현 군산문화원장은 1872년 편찬된 지방도와 1906년 제작된 지형도에는 백석제가 표기돼 있지 않아 개축이나 준설을 통해 다시 본래의 기능을 회복했을 가능성을 제시 했었으나, 개축 및 준설에 대한 주장 외에 어떠한 문헌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이미 1300년대 자료외에도 여러문헌에 백석제가 제시됐음을 이미 보도된바 있고, 더욱이 한림마을 주변 60대이상 주민들의 증언으로 자신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백석제에 대한 다양한 관련 이야기를 들어왔다는 등 전현직 군산문화원장들의 원장들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문헌뿐만 아니라 주변 원주민들의 증언만으로도 100년에 가까운 존재가 입증되고 있다.
또한 현 군산문화원장은 백석제는 규모 및 축조 방식 등 중요한 자료가 없다며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인 김제 벽골제 등을 예로 들었는데, 벽골제 또한 790년(원성왕 6)에 증축과, 고려 현종 때와 인종 21년(1143)에 수축한 바 있고, 그 뒤 조선시대 1415년(태종 15)에 다시 축조하는 등 증축과 수축등을 반복하여 왔다. 현 군산문화원장의 말대로라면 벽골제의 끊임없는 증개축에 의한 문화적 가치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의문이다. 지금의 국보 1호인 숭례문이 더욱이 2008년 전소된 슬픈 사건 이후 다시 복원하였는데 군산문화원측 말대로라면 복원된 건물로 보존가치가 없는 것이라 말 할 것인지 궁금하다.
역사적 이야기 없이 무엇을 볼 것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대부분의 문화재 및 지명이 시대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여러 향토사학자가 이것들을 찾아 역사를 이어주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향토문화재를 찾아 발굴해야할 군산문화원의 수장들이 군산시의 입장을 대변하듯 도리어 문화적 가치가 없다고 문헌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적절치 못한 처사라는 견해가 적지 않다. 역사는 사라지지 않으며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것이다. 콘크리트 병원건축물이 백석제보다 문화적 가치가 얼마나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백석제 지금까지 나타난 문헌자료만으로도 문화재가치 충분
마지막으로 이우형 소장은 백석제의 정확한 축조연대는 고려시대의 문헌기록이 가지는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적 상한선을 기초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과학적 분석과 축조방식의 실증적 규명, 저수지 내부에 대한 퇴적 유기물의 연대측정등의 공식적 분석을 거치면 문헌자료보다 더 명확한 축조연대가 밝혀지므로, 백석제에 대한 발굴조사는 선급한 병원건립의 논란에 앞서 반드시 거쳐야하는 필연의 절차라고 말하고 있다. 이 소장은 이어 지금까지 나타난 문헌자료만으로도 백석제는 전라북도도 문화재 이상의 가치를 가지며, 향후 발굴조사를 거쳐 규명된 자료와 현재 중요 동식물상을 종합해 볼 때 국가지정문화재급의 가치로서 손색이 없다 말하고 있다.
끝으로 전현직 군산문화원장은 백석제가 ‘료화제’가 아닌 다른 저수지라면 문헌적 근거를 제시해 찾아주기를 바란다.
[도움 자료]
백석제는 고려말 대학자이며 절의 충신인 ‘야은 길재’의 문집에 길재선생이 추모하고 존경한 군산 출신의 고용현(高用賢, 1302~1392)에 대한 일대기를 쓴「高文英公實行錄」에 백석제의 전신 ‘료화제(蓼花堤)’가 명확히 나타나있으며, 료화제가 현재의 백석제임을 증명하는 문헌으로는 1933년 제작한 『염의서원지』에 료화제가 곧 백석제의 과거 명칭임을 명확히 말해 주고 있다.
위 서원지에는 문창후 고운 최치원, 문충공 휴옹 고경, 문영공 야수 고용현선생의 약전과 관련기록이 모두 실려 있으며, 특히 「염의서원유허비문」과 「유허비명」에는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던 료화제가 백석제의 전신이었음을 더 자세하게 강조하고 있다
첨부자료 : 1933년 제작된 염의서원지

2015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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