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ttp://www.everyday01.com 제로원(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살아서 도착하라 arrive alive>의 줄거리:
자동차 이용이 일상화 되면서 도로위의 분노로 인한 다툼과 사고와 사망 소식을 끊임없이 접하게 됩니다. 일단 자동차를 몰고 나갔으면 본래 의도했던 목적지에 살아서 도착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매일의 삶에서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시동이 걸리고 달리기 시작했으면 제일 중요한 것은 살아서 도착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로위 분노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삭이 어떻게 이 문제를 대처해 나가는 가를 살펴봅니다.
살아서 도착하라 arrive alive
(창26:12~25)
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23.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5. 이삭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살아서 도착하라, arrive alive>라는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살아서 도착하라, arrive alive’
‘arrive’는 ‘도착한다’는 뜻이고 ‘alive’는 ‘살아서’라는 뜻입니다.
‘arrive alive’라는 말은 도로 위 안전을 위한 미국시민단체의 이름이고 모토인 모양입니다. 이름인지 모토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하여간 도로 위 안전을 위한 미국시민단체의 모토인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이 시민단체가 제시하는 Road rage(도로 위 분노), 도로 위에서 운전을 하다가 분노가 치밀게 되면 심각한 사고나 사망까지도 가능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는 십계명을 만들어서 시민들에게 배포를 한 모양입니다. 우리도 다 운전을 하면서 공감이 되는 게 많습니다.
첫째, “절대로 보복 운전을 하지 마라”
보복 운전을 해서는 안 되죠.
둘째, “화가 난 운전자와 눈을 마주치지 마라”
미국에서는 화가 난 운전자와 눈을 마주쳤다가 총 맞아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도 운전자를 쳐다봤는데 경주하듯이 쫓아와서 제 차를 세우고 따지는 사람을 만난 경험도 있습니다. 왜 쳐다봤냐는 거예요.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집사람에게 30대 초반이나 돼 보이는 사람이 와서 ‘뭐라고 씨불였냐고?’ 하는 거예요. 그때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셋째, “화가 난 운전자와 말과 행동에 상대하려 하지 마라”
상대하려고 하다가 일이 더 커집니다. 다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넷째, “상대 운전자들에게 공손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라”
화를 돋우지 말라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 해서 십계명이 진행 되다가 맨 마지막에 “영원히 도착 못하는 것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라”
arrive alive, 도착하라 살아서.(하하하)
자동차를 타고 생활하는 것이 참 일상적이고 당연한 이야기이고 그러려니 하는 것인데, 너무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아니에요. 과도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여보 다녀올게’하고 운전하고 나갔다가 죽는 경우가 많아요.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요. 고속도로 상에 차를 세워놓고 싸웠어요. 그러니까 뒤 따라오던 트럭이 그 차를 들이받으면서 트럭 운전사가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무서운 거예요.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나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그 사람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여러 가지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사람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복된 계획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태어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계획은 자동차와 같습니다. 시동이 걸려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의 계획들이 시동조차 걸리지 않은 채로 생이 마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또 시동이 걸렸다가도 도중에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태어날 때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내 소원을 가지고 살다가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험하고 아주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믿는 사람들도 오늘 하루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살았다면 내일도 그렇게 저절로 살아질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오늘은 살았지만 내일 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계획을 내가 받아들여서 나의 계획이 되고 나의 소원이 되어버리고 말아요. 그것에 묶여버리고 맙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보다 계획을 더 좋아하게 되고 이 땅에서 일어날 일들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하나님의 계획은 나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가 없지요.
그런 이유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면서 동시에 무엇의 조상이냐 하면?
하나님의 계획에 시동이 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되어서 성취되는 일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원조라는 거예요.
어제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억되고 있어요. 그러므로 믿음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고 계신데, 하나님 마음속에는 아브라함이 기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아브라함이 기억되고 있으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획에 시동이 걸리고, 시동 걸린 계획이 진행되어서 성취되어 가는 사람의 원조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열쇠구멍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계획에 시동이 걸리려면, 내 마음이 마치 열쇠를 복사하듯이 아브라함과 똑같은 상태로 포개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 바로 이삭이에요.
이삭의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굉장히 짧게 나오지만 그 의미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실 야곱의 생애가 길게 소개되고 있지만, 이삭이 2~3장 정도에 소개되면서 이루었던 일들을 야곱은 그 많은 장 속에서 이야기되는 역사를 통해 도달하는 거예요.
우리는 야곱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지만, 아브라함을 기억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삭은 그의 인생의 계획들이 어떻게 시동이 걸리고 진행될 수 있는가를 아주 농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본인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해요.
아브라함이 여기서 뭘 예표 합니까?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거예요.
실제를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먼저 있지요. 영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 마음속에서 아브라함이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에 앞서서 포개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무슨 말이냐?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만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하늘에 들려 올라갔고, 노아가 의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에녹과 노아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십자가 사건의 예수님을 앞당겨서 받아들인 자들이고, 그 예수님께 포개진 자들이었습니다.
의가 뭐예요? 하나님 마음에 드는 거예요.
마음에 드는 자는 예수님 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이 의인이 되고, 노아가 의인이 되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포개질 수밖에 없지요. 그것이 역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영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기억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포개지지 않는 한, 나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은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포개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포개서, 열쇠가 복사되듯이 그렇게 복사되어서 하나님 마음 안으로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마음에 기억하고 계시고 담고 계시니까.
십자가 사건이 계획하시는 단계에서는 예언적으로 담고 계셨고, 일어난 뒤로는 기억하시면서 담고 계시는 것이죠.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에 포개질 때에만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고, 시동이 켜질 수 있고 시동이 걸리는 거예요.
그럼 이제 기도 시간이 끝나고 가정으로, 직장으로 나가서 사회생활을 합니다.
아마 제로원 복음방송을 듣고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분들에게 있어서도 대부분의 경우는 삶의 현장에 뛰어 들어가면서 곧바로 십자가의 예수님과 포개짐이 끝이 나고 잊혀져버리고 직장에서, 가정에서 배우자와 부모자식 간에 형제간에 관계가 진행되고 일이 진행될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시동이 꺼지는 거예요.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동안에는 항상 자동차의 열쇠가 열쇠구멍 안에 꽂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 안에 나를 향한 계획의 자동차가 시동이 걸린 다음에 계속 진행되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포개져서 예수님의 삶이 복사된 마음의 상태라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의 자동차가 진행되는데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오므로 열쇠를 빼버리면 하나님의 계획도 중단되고 맙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모습으로부터 이삭이 떨어져 나온다고 하면 문제가 커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이삭을 통해 이루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중단되어 버리니까.
마찬가지예요. 내 마음 속에서 십자가의 포개짐이 끝나면 하나님의 계획도 중단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중단되는 이유가 뭡니까?
도로 위 분노입니다.
도로 위에서 일어나는 다툼 때문에 차를 세우는 거예요. 차 몰고 가다가 문제가 생기면 차를 한 쪽에 세우고 비상등 켜고 막 다투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삭이 그랄 지방에 머물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사실 유목민인데 농사를 지었으니 농사도 서툴렀을 것이고, 외지사람으로 그 지방의 풍토나 기후를 잘 몰랐을 텐데도 농사하여 100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당시에 보통 농사를 지으면 25배에서 50배 정도를 수확했다고 해요. 그리고 이 100배라는 것이 뿌린 씨앗의 100배라는 이야기인지, 블레셋 사람들이 거두는 것의 100배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것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게 되면서 이삭이 쫓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13절에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라고 나옵니다.
옛날의 재산이라는 것이 소나 양인데 어마어마하게 많아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농산물도 100배를 거두었으니 그 많은 수확을 다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을지 궁금할 정도로 재물과 곡식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해서 쫓겨납니다.
21장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우물을 팠고, 그 당시의 블레셋 왕인 아비멜렉과 우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암양 7마리를 주고 아브라함 것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 나 몰라라 해버리고 정당한 아브라함과 이삭 소유의 우물인데 이것을 다 메워버립니다. 그랄 지방의 아브라함의 우물을 아브라함이 죽자 다 메워버렸는데 그걸 다시 팠습니다. 그리고 옆에 새 우물도 팠는데 그것도 메워버립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아무 소리도 안 하고 그 자리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서 또 우물을 팝니다. 그런데 또 메워버려요. 그러자 또 다시 아무 소리 안 하고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팝니다.
성경이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이삭의 온유함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혹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다 포함될 수 있겠지만 핵심 메시지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첫 번째 우물을 빼앗겼을 때에 이름을 에섹(다툼)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 우물을 빼앗겼을 때에 싯나(대적)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다툼이고 두 번째는 대적입니다.
다툼이라는 우물을 놔두고 벗어납니다. 다툼을 피했다는 이야기예요. 그 다음 우물은 싯나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대적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 대적이라는 이름의 우물을 버렸으니 대적을 피한 거예요. 마지막에 르호봇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넓은 땅을 주셨고 평강을 주셨다는 의미가 들어있어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온유해서도 아니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 위해서도 아니에요.
이삭이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이유는 다른 우물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이 우물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재산이 증식되었기 때문에 증식된 만큼 우물은 중요한 거예요. 중요하다는 말로서는 다 표현이 안 되죠. 중동지방에서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우물입니다. 물이 없으면 다 죽는 거예요.
그러므로 아버지 아브라함이 암양 7마리를 주고 산 우물이고, 지금 왕의 선왕인 아비멜렉으로 부터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에, 정당방위로 싸워서 이기면 되는데 다툼이라고 이름을 지어놓고 다툼을 피했습니다. 대적이라고 이름을 지어놓고 대적을 피합니다.
왜 그래요? 우물을 지키기 위해서.
이삭은 알았던 거예요. 자기 마음이 우물이라는 것을.
잠언 4: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많은 재산이 물이 있어야 산다는 것을 모르는 바보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재산이 늘어난 만큼 우물의 중요성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우물을 계속 버리고, 빼앗아가는 족족 포기합니다.
이삭은 마음의 우물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내 마음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포개져서 하나님께 들어가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우물로부터 이 막대한 재산이 나왔다는 것도 알고,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의 계획의 샘물로부터 이 땅의 복된 계획들이 일어날 것을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 땅의 우물을 지키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재산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재산에 마음이 붙어 있다면 다툼을 피하고 대적을 피할 것이 아니라, 다툼 속에서 승리해야 하고 대적을 쳐부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을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고, 다툼과 대적을 피하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 누가 옆에서 끼어들기를 해서 깜짝 놀라게 한다든지 화를 나게 만드는 그런 운전을 할 때에, 양보하고 앞으로 가라고 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데 죄송하다고 하며 가는 거예요.
미국에서는 앞지르기 했다는 이유만으로 총으로 쏴 죽이는 일이 있다니까요.
살아서 도착하라 arrive alive.
주님의 십자가에 포개져서 하나님의 계획에 시동이 걸려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일, 저 일 생기고 이 사람, 저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서 계속해서 자극하고 내 마음을 이 세상 안으로 깊이깊이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내 것을 훔쳐가고, 내 것을 상실하게 하고, 내 명예를 손상시키고, 내 자리를 위태롭게 합니다. 이때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 사람과 싸우고,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되는 유일한 길은?
내 마음이 십자가에 포개지면서 예수님과 똑같은 열쇠로 복사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예수님이라는 열쇠구멍에 들어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계획은 계속해서 시동이 걸린 채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 좀 벌어서 상대방을 이겼어도 하나님의 계획과 무관한 돈은 반드시 내게 화가 될 것이에요. 내게 재앙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돈을 잃고 우물을 계속 잃었어도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면 하나님께서 그 우물 정도는 앞으로 계속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마음이 어떻게 나타느냐?
맨 마지막에 하나님이 이삭에게 오셔서 아버지 아브라함을 언급하면서 복을 주시겠다는 그 말씀을 듣고는 제단을 쌓고 여호와를 부릅니다.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얻기 위해 계속해서 이 세상에 대해 마음이 죽는 거예요.
자기 마음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삶에 포개져서 복사된 열쇠가 되어서 있는 한 하나님 마음 안에 들어있을 수가 있죠. 그게 바로 제단을 쌓은 겁니다.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중요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것을 잃으면 난리가 나고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될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가 미리 죽어버립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제단 쌓기의 삶이었는데, 이삭이 거기에 그대로 포개져서 하나님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세상 것 얻겠다고 그것을 마음에 두고 지키면서 하나님을 잃는다면, 세상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얻은 세상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뜻이 아닌데 돈 벌고, 하나님 뜻이 아닌데 성공하면, 하나님 뜻이 아닌데 형통하면 그 형통 때문에 망하고 성공 때문에 망하고 그 돈 때문에 망합니다. 하나님 뜻이 아닌데 건강하면 그 건강 때문에 하지 말아야 될 악한 짓을 하고 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뜻이면 아픈 것이 축복이고, 하나님 뜻이면 가난이 축복이고, 하나님 뜻이면 불통이 형통입니다. 하나님 잃으면 다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로 위를 달리다가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나를 자극하고, 내 것을 빼앗아가려고 하고, 나에게 손실을 입히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잃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람과 다투고 대적하며 싸움에 말려들면 반드시 하나님을 잃게 되므로, 이삭은 그 귀중한 우물에 다툼이라는 이름을 지어놓고 다툼을 피하고 다툼을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 귀중한 우물에 대적이라는 이름을 지어놓고 대적을 피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게 생명처럼 여겨지는 소중한 것을, 피해야 될 다툼과 대적으로 보는 마음이 바로 이삭의 마음이었습니다.
대단하지 않아요?
야곱은 이삭이 도달한 이 경지를 130년의 생애 끝에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섰을 때에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이야기하며 깨닫게 됩니다.
이삭을 우습게보면 안 돼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단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대면한 당사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 아버지 아브라함의 삶에 자기를 포개서 하나님을 얻은 자였고,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너무나 당연한 자기 방어의 권리까지 포기하면서 마음에 하나님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arrive alive한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살아갈 때에 뭐가 살아서 도착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계속 이루어져야 해요.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별로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무슨 밥을 먹고 무슨 메뉴를 먹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다 있을 것이에요.
그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고 하루가 마감이 되려면, arrive alive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십자가에 포개지지 않으면 도중에 하나님을 잃어버려요. 계획의 자동차에서 열쇠를 빼는 거예요. 하나님 마음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하나님 마음에 들어있으려면 반드시 십자가에 포개져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포개짐이 끊어지면 하루 중에도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죽는 거예요. 죽어서 도착하는 겁니다.
매일 매일을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고 그것이 중단되지 않고, 도중에 멈춰서 도로 위에서 싸우고 다툼에 말려들지 않고, 끝까지 alive한 상태에서 arrive 하는 그러한 삶을 반복해서 살아가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alive한 상태, 즉 하나님을 마음에 꼭 붙잡고 소유한 채로 하루가 마감되어 arrive 되는 삶을 반복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기 위해, 십자가에 포개져서 하나님의 계획의 자동차의 구멍에 내 마음이 항상 꽂혀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