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눈부신 햇빛이 스며들기에 창밖을 보니 멀리 보이는 관악산 자락에 진달래의 분홍빛이 선연하다. 아파트 앞뜰에도 목련이 활짝 피었고, 이웃집 담장에는 산수유, 개나리, 앵두꽃이 가득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꽃들의 봄잔치가 시작된 게지.
4월이 오면 나는 늘 이 노래가 생각난다.
꽃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내 마음은 푸른 산 저 너머
그 어느 산 모퉁 길에
어여쁜 님 날 기다리는 듯....
(박화목 詩 ‘망향’)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힘들게 지내던 시절, 라디오에서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처럼 나는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가슴을 휘젓고 지나는 전율을 느낀다. 언제부터였을까. 해마다 꽃피는 봄 사월은 돌아왔지만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고향은 자꾸만 멀어져만 갔느니.
지금도 그 고향마을에는
온 산에 진달래 분홍 꽃들이 지천으로 피었을까
흐드러지게 핀 그 꽃 속에서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러자 나는 갑자기 목이 메인다.
가슴을 휘감는 서러움에 눈시울이 뜨겁다.
아들아, 너는 지치고 추운 날이 힘겹거든, 모든 것 내려놓고 상냥한 마음 지닌 채 내게 오라. 꿈에런 듯 슬픈 그 분이 손짓하며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이런 노래는 또 어떤가.
먼 산에 진달래
울긋불긋 피었고
보리밭 종달새
우지 우지 노래하는
아득한 저 산 너머
고향집 그리워라
버들피리 소리 나는
고향집 그리워라.
(윤복진 시 ‘망향’)
그리운 것이 어디 고향집뿐인가, 아지랑이 피어나는 들에 냉이는? 달래는? 씀바귀는 아직도 많이 자라고 있다더냐?
연분홍 진달래와, 푸른 보리밭은 고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영원한 테마인가 보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온 세상 햇살 가득한 날에 봄은, 어느새 우리에게 다가와 아픈 어깨를 다독이며 이제 그만 쉬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왜... 왜 진달래꽃은 그렇게 아련하게 분홍이고, 보리밭의 출렁이는 그 빛깔은 그리도 소박하게 푸른가, 왜 아직도 학교길에 핀 그 개나리 노란 꽃 그림자는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것인가.
삼동내 얼었다 나온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리...
왜 저리 놀려대누.
어머니없이 자란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리...
왜 저리 놀래대누.
해바른 봄날 한종일 두고
모래톱에서 나 홀로 놀자.
(정지용의 동시(童詩) ‘종달새’)
어머니없이 자란 것도 서러운데 홀로 노는 아이를 놀리다니... 종달새라는 놈, 참으로 나쁜 놈이다. 하지만 어쩌면 어린 시인의 외로운 마음에는 종달새의 우짖는 소리마저도 마치 저를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아, 그리움이 차고 넘쳐 꽃처럼 휘날리는 어느 봄날, 나는 그 시절 보리밭 언덕에 앉아 보고 싶다. 종달새가 놀릴지언정 푸른 빛 출렁이는 보리밭 그 언덕에서 봄볕 한 자락 깔고 누운 채 혼자이고 싶다.
가고 오는 봄이 언제든 정답지 않으랴만은 오늘따라 봄볕 가득한 산기슭에 봄 아지랑이는 제대로 피고 있다. 봄바람에 설레는 마음 보듬고 상념에 젖다 다시 먼 산자락의 분홍빛을 보고 있노라니 황홀한 봄기운에 한바탕 호사를 누려본 기분이었다.
어머니,
지금 어디메쯤에서
찬란한 이 봄을 맞이하고 계시 온지요...
(2009. 3. 20.)
벌써 7월이 되었다. 7월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고 한 이육사의 시가 생각난다.
지난봄은 어떻게 하다 보니 아카시아 꽃도 향기도 모른 채 지나가 버렸고, 어느 날 문득 아버지 제사일이라서 사무실을 나와 형님 집으로 가면서 보니 이미 아카시아 꽃들은 힘없이 지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늘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서글펐다. 그 옛날 철산리 뒷산에 피던 아카시아 꽃과 성일이네 집 야산에 피던 아카시아 꽃을 다시 볼 수는 없겠지만 그때가 너무 그리웠다.
어떤 시인은 그리움이 세월을 만든다고 했지만 나는 세월이 그리움을 만드는 것 같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그 시절 그 모습 그 향기는 세월이 가도 그리움을 더해 줄 뿐이다.
늙어가는 아내의 모습에서 그녀의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아내의 얼굴에서 전설처럼 떠나버린 내 어머니의 얼굴을 본다. 세월은 때로 우리를 무섭게 한다. 처절한 슬픔이 사뭇 가슴을 휘적실 때 꿈결처럼 그 날 그 모습들이 그립다.
그러나 다가오는 세월 또한 우리 것이기에 겸허히 끌어안고 살아야 하리라.
고개를 끄덕이며 순응하면서 그래 이런 삶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가 늘 되새기면서 나보다 더 어렵고 힘겨운 이들을 위해 가슴 한편을 비워두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7월 그 뜨거운 태양빛을 보면서 일상의 삶이 주는 그 소중한 가치를 되새겨본다.
(2010. 7. 1.)
2023년 11월 하순, 자전거를 타고 한강공원으로 나가 벤치에 앉아 강물을 보았다. 늦가을의 끝자락, 차가운 바람이 옷깃에 스며들어 제법 추웠다.
주변을 돌아보면 나처럼 혼자 강변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로 나이든 남자들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들은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이도 있고, 책을 읽거나,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산책을 하거나, 낙엽이 지고 있는 공원길을 걷고 있는 이도 있었다. 나 역시 이어폰으로 클래식 음악들을 듣고 있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상념을 안고 집에 돌아와 나는 이렇게 시를 썼다.
그리움
누가 물으면
어느 봄날 남모르게 피어나는
진달래꽃 향기 같은 것이라고 말하리라.
왜 그러냐고 다시 물으면
이렇게 답할 수밖에
그리움, 그 향기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더라
오히려 내 가슴 속을 파고들며
자꾸 파고들며 숨더라
심장 깊이 숨어서 떠나지 않더라.
밀어내도 그냥 있더라.
그리고는 향기를 내더라.
가뭇없이 아른대며 숨 막힐 듯
사라지지 않는 그 향기 땜에
어느 때는 정신줄마저 혼미해지더라.
그리하여 또 내 이렇게 말하고 싶노니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그냥 두어라.
숨 쉴 때마다 살고 있는 그 팔딱임을
혼자 숨어서 느끼다 보면
언젠가 그것이
내 생(生)의 숨은 동력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2022. 9. 22.)
그리움은 사실 실체가 없는 인간의 감정이겠으나 내게 있어서는 다소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온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시(詩)로 쓰여지면서 그리움이 어떤 향기이거나 아련한 꿈처럼 다가온 것은 나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만일 그리움이 향기라면,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감정에 모습과 생명이 있다면 그러한 대상 때문에 때로 내가 숨이 막힐 듯 가슴이 뛰고 슬프던 날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리움의 감정은 때로 내 숨결과도 같아서 내 호흡 속에 숨어 언제나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숲길을 거닐다가 “누군가 물으면/ 이렇게 답하리라”는 주 멜로디를 떠올렸다. 그래서 나는 즉시 집으로 돌아와 이렇게 가사를 다듬었다.
그리움, 그 향기는
누군가 물으면 이렇게 답하리라
어느 봄날 남모르게 피어나는 진달래꽃 향기 같더라
그리움, 그 향기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더라
오히려 가슴을 파고들며 떠나지 않더라
저리가라 밀어내도 꿈적 않고 나를 보더라
숨 막힐 듯 아른대며 다가오는 그 향기 때문에
때로는 달을 보며 홀로 지새운 밤이 길더라
때로는 온몸을 휘감는 아득한 슬픔 때문에
숨죽이며 눈물짓는 날도 있더라
(간주)
그리움, 그 향기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더라
숨결마다 숨어서 오래도록 머물더라
어느새 한 몸이 되어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제 그만 같이 있자, 같이 있자고 하더라
이제 그만 같이 있자고 하더라
나는 이 시를 가곡으로 만들면서 ‘그리움’이라는 제목은 이미 너무 많았으므로, 제목을 「그리움, 그 향기는」으로 바꾸었다.
나는 가곡을 창작하기 시작하면서 새벽에 일찍 잠이 깨는 날이 많아졌다. 어떤 때는 아주 이른 새벽에 잠이 깨서는 갑자기 가곡의 가사가 떠오를 때도 있고, 그때 가사를 계속 되뇌이다보면 가곡의 선율이 떠오를 때도 있었다. 그러면 부엌으로 나가 식탁등을 켜고 노트에 가사를 바로 적곤 하였다. 그렇게 적어나가던 가사와 선율은 수차례 바뀌었고, 마침내 최종 완성된 가사와 곡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그리움, 그 향기는
누군가 물으면 이렇게 답하리라
어느 봄날 남모르게 피어나는 진달래꽃 향기 같더라
그리움, 그 향기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더라
오히려 가슴을 파고들며 떠나지 않더라
저리가라 밀어내도 꿈적 않고 그냥 있더라
숨 막힐 듯 아른대며 다가오는 그 향기 때문에
때로는 달을 보며 홀로 지새운 밤이 길더라
때로는 온몸을 휘감는 아득한 슬픔 때문에
남몰래 별을 보며 눈물짓던 날도 있더라
(간주)
그리움, 그 향기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더라
숨결마다 숨어서 바라보는 그 눈길 때문에
때로는 달을 보며 홀로 지새운 밤이 길더라
때로는 온몸을 휘감는 아득한 슬픔 때문에
남몰래 별을 보며 눈물짓던 날도 있더라
남몰래 별을 보며 눈물짓던 날도 있더라
그리하여 이 가곡은 2023. 11. 25. 멜로디가 완성되었고, 2024. 1. 12. 구광일작곡가와 함께 채보를 하였으며, 2024. 7. 16. 장충신세계레코딩스튜디오에서 테너 김승직의 가창으로 녹음되었다.
https://youtu.be/kAenazW8kHM?si=S8aHXwqd5IgHhXFr
첫댓글
김성만작곡가님의 오늘도
음악의 인생 한 페이지를 함께합니다
늘 건안하시고요
먼 산에 진달래 울긋불긋 피었고 ...
지금도 선연히 떠오르는 동요,
오랜만에 불러봅니다. ^^
<그리움, 그 향기는>
들으며 선생님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여 드리고 싶은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