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계에서 '아이돌'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1971년 최이철이 결성한 틴에이저 락밴드 아이들(IDOL)의 첫 앨범이다.
밴드 아이들의 음반은 오랫동안 일반대중에게는 존재자체가 무색했지만 락 마니아라면 누구나 수집 아이템으로 꼽는 희귀음반이기도 했다.
1970년 미 8군 무대를 떠나 최이철이 클럽무대에서 활동할 때, 재즈 드러머 김대환의 주선으로 6인조 락밴드 아이들을 정식으로 결성해 독특한 첫 음반을 발표했다.
이 음반은 음악적 완성도보다는 그 사료적 가치로 무게중심을 이동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중요하듯 락의 대중화를 꽃피웠던 사랑과 평화는 이 앨범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맷돌공연] 음반은 국내 초창기 포크 신의 소중한 흔적을 기록한 명품 음반이다.
'맷돌' 음반은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1970년대 명동 노래운동의 실체를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맷돌공연은 1972년 6월 14일 명동 코리아나 백화점 3층 문화 살롱에서 시작되었다.
공연의 단골관객이었던 평론가 이백천의 사회로 1972년 9월 26일 명동 시공관(현 명동예술회관)에서 특별공연이 열렸는데, 그 실황을 담은 음반이 [맷돌 밝은 노래모음]이다.
장현종, 임진수, 이탄 등 6명의 시인들에게 가사를 의뢰해서 백순진, 김광희 등 대학생 작곡가들이 멜로디를 만들어 발표하는 실험적인 무대를 구현했다.
이 공연 가운데 흥미로운 점은 송창식과 백순진이 '딩동댕' 같은 가사에 다른 곡을 붙여서 동시에 발표했다는 점이다.
송창식이 발표한 버전은 대중이 기억하는 익히 알려진 버전이 맞고 백순진의 다른 버전은 가야금 두 대와 통기타 두 대가 어우러진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국악 포크 형태의 크로스오버곡이었다.
'돌멩이'를 노래한 심창균은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의 아들이었는데, 그런 그의 신분으로 인해 맷돌 공연은 어느 기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다.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한국포크의 대모'로 성장하게 되는 양희은과 참여가수들 모두가 부른 ‘아침이슬’의 합창버전이다.
이 앨범 역시 한때 음반의 존재여부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는데, 2004년 CD로 복각되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정선에게는 공식 1집 이전에 0집과 [마이너스집]으로 불리는 진귀한 음반이 한 장 더 있다.
이정선의 [마이너스집]은 2005년 한 인터넷 음반경매에서 당시로는 대중가요음반 경매사상 최고가인 176만원에 낙찰이 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음반은 브라스 사운드를 시도하며 제법 탄탄한 밴드 시스템으로 녹음을 시도했지만, 가사가 '불신감을 조성하고 냉소적'이라는 이유로 총 11곡 중 무려 9곡이 사후심의에 걸렸다.
제작사는 자진해서 배포된 음반들을 수거하면서 음반은 자연스럽게 사장되어버렸다. 이정선의 공식 1집은 1976년 발표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그 이전인 1975년에 제작된 소위 0집으로 언급되는 이정선의 실질적인 데뷔 음반이 존재한다.
0집이라는 표현이 다소 의아하지만, 여기에는 다소 황당한 비화가 존재한다.
두 음반의 재킷을 보면 초반에는 장발의 자유스런 이정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자리하고 있다.
이와 달리 1집 앨범의 재킷에는 초반과 달리 단정하게 머리를 다듬고 착실한 이미지를 지닌 이정선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레코딩 내용은 같은 이 두 음반의 녹음 당시에 이정선은 충무로4가의 달동네에서 기거했다.
특별히 이 당시를 아직도 그리워하는 이정선은 집 아래층이 두부공장이라서 밤 새워 기타를 쳐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서 좋았다고 한다.
두 음반의 재킷은 그 당시 주거지와 연관성을 지닌다. 0집 재킷은 그가 살던 동네 뒷골목의 공중화장실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다소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나름 신선하기도 하다.
그런데 음반발표 직전에 진행된 심의에서 담당자가 이정선의 장발모습을 문제 삼으면서 판매금지처분이 내려졌다.
나름 고민이 커진 이정선은 다시 제작하게 될 두 번째 음반까지 검열에 다시 걸려서 음반을 발매하지 못하게 될 경우 자신이 음악을 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절박한 심정으로 머리를 단정하게 자르고 장소도 이전보다 밝은 곳에서 재킷 사진을 다시 찍어서 발매된 후반 음반은 그렇게 다행히도 심의를 통과해서 빛을 볼 수 있었다.
이장희는 뮤지션이자 방송인, 음반 제작자, 그리고 사업가로 다방면에 걸쳐 멀티플레이어로써의 재능을 과시한 1970년대 한국대중음악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1973년 이장희와 강근식은 4인조 락밴드 동방의 빛을 결성했지만 음반 발표도 못해보고 해체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건 너', '촛불을 켜세요', '자정이 훨씬 넘었네' 등 그들이 만든 1970년대 명곡들에 대한 음반사들의 반응이 시큰둥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가운데 성음제작소 기술부장으로 근무하던 나현구의 지원으로 발표된 이장희 3집은 1973년 '가요음반 판매 베스트5'를 기록하며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1970년대 도시 젊은이의 생활을 속삭이듯 솔직하고 정감 어리게 표현했던 수록곡들의 가사와 음악적 스타일은 파격이었다.
특히 대화체의 직설적 어법의 가사를 담은 '그건 너'는 1970년대 젊은 세대의 마음을 대변하기에 충분했다.
밴드가 아닌 솔로 독집으로 발표된 아쉬움이 있지만 이 음반은 대중적으로 가장 각광받았던 포크락의 명반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장희가 발표한 음악들은 뒤늦게 모든 음반사들이 땅을 치며 후회했을 만큼 엄청난 호응과 판매로 이어졌다.
외국원판에 버금가는 뛰어난 음질과 국내 최초로 무그 신디사이저 음악을 선보인 이장희의 3집은 2011년 CD로 재발매되었다.
김정미 4집 [NOW]는 세계적인 지명도를 자랑함과 동시에 국내 싸이키델릭 락 음반의 결정판으로 평가받는다.
김정미는 싸이키델릭이라는 장르에 최적화된 가수였다.
데뷔 초기에 신중현에 의해서 김추자의 대역으로 활용되었고, 음악적으로 보다 방대한 획을 그어 나온 김정미는 대중의 기억 속에서 그만하게 정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정미는 2000년대 들어 젊은 락 애호가들로부터 ‘한국 싸이키델릭 여제’로 재평가를 받아 나오며 최고의 주가를 올렸었다.
이 음반의 초반은 한때 부르는 것이 곧 가격일 정도로 엄청난 이슈를 모았던 작품으로 실물을 보는 자체가 기적일 정도로 희귀했던 것이 사실이다.
음악적으로 신중현 사운드의 정수와 김정미 음악의 매력이 전 세계 싸이키델릭의 흐름보다 앞선 것이 특징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재킷에서 빨간 코스모스는 싸이키델릭과 신중현, 그리고 김정미의 몽유한 음악을 상징하는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이 음반은 국내외적으로 LP로 4번, CD로 2번 등 총 6번에 걸쳐서 재발매되었다. 2013년에는 픽쳐 LP까지 나올 정도로 마니아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었다.
2009년 리듬온과 2011년 미국의 싸이키델릭 전문 재발매 레이블인 Lion프로덕션의 재발매 LP는 180G 중량반이었다. CD는 2002년과 2012년에 각각 재발매되었다.
신중현의 걸작 '미인'이 수록된 신중현과 엽전들의 1집은 말이 필요 없는 한국대중음악사 최대의 명반이다.
1973년 5인조로 출발했던 라인업은 1974년 신중현(기타), 이남이(베이스), 김호식(드럼)의 3인조로 재편되었다.
6개월 간에 걸쳐서 합숙을 하며 작업된 레코딩 과정 속에서 이 음반은 전체적으로 싸이키델릭에 주한 사운드를 바탕으로 녹음되었다.
이 앨범이 레코딩을 마칠 당시는 온 나라가 석유파동으로 휘청거리던 때였다.
제작사였던 지구레코드는 신중현과 엽전들의 1집 앨범이 ‘경제사회적인 흐름상 팔릴 음반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음반 제작에 난색을 표했다.
그럼에도 수록곡의 가치를 인정한 제작사는 정식 발매 이전에 앞서서 비매품으로 1천 장을 먼저 제작해서 배포했다.
그리고 역시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신중현과 엽전들의 공식 1집의 타이틀곡은 '미인'이지만 비매품 초판에선 2면 세 번째 곡이었고 타이틀곡도 ‘저 여인’이었다.
총 10곡이 아닌 8곡이 수록된 음반이 오리지널 초반이었다.
이 음반이 발매되기까지의 과정은 다소 여러 단계를 거치며 시간이 걸렸지만, 이 음반은 발매와 동시에 빅히트를 기록하며 흥행과 작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내며 1970년대 중반 한국대중음악계를 강타하고 말았다.
빅히트가 터진 ‘미인’은 동명의 영화로 1975년 8월 30일 개봉되기까지 했다. 이 영화에서 신중현은 주연배우로 직접 출연했고 음악감독까지 담당했다.
그러나 이 음반은 대마초 파동에 연루된 신중현으로 인해 판매금지와 더불어 무려 7곡이 방송금지 처분을 당했다.
시대의 명반, 시대에 묻혀졌던 이 음반은 1994년 CD로 재발매되며 여전한 이슈를 이어 나오고 있다.
1974년에 발표된 맑고 순수한 포크의 원형질을 담은 여대생 포크듀엣 현경과 영애의 유일한 독집은 70년대의 답답한 사회분위기를 정화시켰던 세레나데였다.
명품 포크음반으로 평가받는 이 음반은 현경과 영애의 대학 시절의 음악 활동을 기념하는 음반이다.
제작자인 오리엔트레코드의 나현구 대표의 제안으로 화음 창법이 아닌 번갈아 노래하고, 때로는 같이 호흡하는 방식으로 노래했다.
연주도 포크 질감을 살리는 클래식 기타 세션을 원했던 두 사람과는 달리 락밴드 동방의 빛이 세션을 맡았다.
이 지점에서 이 음반에 대한 음악적 평가는 엇갈린다.
음반이 처음 나왔던 당시, 포크 애호가들은 "현경과 영애의 노래를 망쳤다"는 비판을 제기했지만 이는 2000년대 들어 "자칫 평이하게 들릴 지도 모를 곡들은 다채로운 편곡과 구성으로 아기자기하게 변모했다."는 찬사로 둔갑했다.
김정호는 1973년 남성듀오 사월과 오월의 3기 멤버로 잠시간 활동한 이후, 솔로로 독립해서 1974년 데뷔앨범을 발표했다.
김정호를 단숨에 대형가수로 아로새긴 이 앨범에는 김정호가 창작한 9곡과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를 리메이크한 트랙까지 총 10곡이 수록되어 있다.
초반과 재반이 존재하는 이 음반은 수록곡이 동일하지만 재킷 앞뒷면의 사진이 다른 특징을 지닌다.
모두 거대한 고목나무를 배경으로 하는 재킷이지만 나무 사이로 김정호의 모습이 나온 앨범이 초반이고, 나무 앞에 앉아있는 사진은 재반으로 분류된다.
상대적으로 희귀한 초반 뒷면에는 편곡자 안건마의 사진과 고목나무 위에 올라가 미소 짓는 김정호의 진귀한 사진까지 실려 있다.
김정호의 노래는 학생층에 한정되었던 포크송을 온 국민이 사랑하는 장르이자 음악으로 영역을 넓힌 의미를 지닌다.
대표곡 ‘이름 모를 소녀’는 총각시절에 아내를 애타게 짝사랑하면서 품었던 사랑앓이의 감정을 스케치한 곡으로 음울하지만 서정적인 가사와 멜로디로 특히 사랑을 받았던 명곡이다.
1974년 김수영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에 출연했던 여주인공 정애정은 노래 제목에서 착안해 예명을 ‘정소녀’로 정했을 정도로 영화 역시 히트를 기록했다.
송대관의 ‘해뜰날’은 지금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열심히 살아가는 서민들의 희망을 대변하는 국민가요다.
1967년 21살의 나이에 ‘인정 많은 아저씨’로 공식 데뷔한 이후 송대관의 무명가수의 배고픈 시절은 10여 년간 지루하게 이어졌다.
1975년 희망에 대한 자기 최면을 걸었던 노래 '해뜰날'은 발표 1년 만에 그를 '가수왕'으로 등극시켰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마초 파동으로 중요 가수들이 모두 사라진 무주공산 시대의 최대 수혜자인 이 노래도 힘겨운 삶을 표현한 가사 일부를 수정해서 심의를 통과했던 아픔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제이 가일스 밴드(J. Geils Band)는 1982년 2월 6일부터 6주간이나 빌보드차트 1위를 점령시켰던 ‘Centerfold’의 후렴구에서 ‘해뜰날’을 표절한 의혹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적이 있다.
당시 밴드의 리더가 주한미군으로 근무했다는 전력이 확인되면서 의혹설은 더 큰 설득력으로 이어졌다.
가수 최백호의 노래에는 인생과 낭만의 향내가 진동한다. 싱어송라이터인 그는 곡절 많은 자신의 인생을 일기 쓰듯 페이소스 짙은 노래들로 채워왔다.
투박하지만 왠지 정감어린 그의 허스키 보컬엔 추억의 되씹게 하는 짙은 고독과 따뜻함이 공존한다.
무명시절 부산 다운타운 밤무대에서 만난 故 하수영은 음악 은인이다.
서울에 먼저 올라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히트시킨 그가 1976년 여름 최백호의 음반취입을 주선했다.
정식 데뷔의 꿈을 안고 상경한 최백호는 하수영의 친구동생인 중앙대생 윤정하와 함께 서라벌레코드에서 취입준비를 했다.
최백호의 데뷔앨범은 윤정하와 함께 한 스필릿 음반이다.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와 '뛰어'가 빅히트를 쳤다.
사실 이 노래는 21살의 최백호가 인생의 전부였던 어머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픈 심정을 담은 애절한 사모곡이다.
멜로디는 작곡가 최종혁이 붙였다. 자신의 첫 창작곡인 '빈자리' 등 세 곡을 윤정하에게 취입시켜 가을에 발표된 데뷔음반은 품절 사태를 빚었다.
예상치 못한 뜨거운 반응에 윤정하와 함께 촬영한 초반 재킷은 곧바로 최백호의 단독재킷으로 변경된 재반이 제작되었다.
일회성으로 그칠 것 같았던 대학가요제는 대안적 오락의 의미를 넘어 새로운 시대의 음악 패러다임을 형성했다.
가수 등용문이었던 대학가요제가 배출한 가수 또한 무수하다.
1977년 제 1회 MBC 대학가요제 본선무대가 전국에서 333개 팀이 열띤 예선전을 통과한 19개 팀이 서울 정동의 문화체육관에서 경연을 벌였다.
진행자는 대학생 가수 이수만이였다. 공중파 TV를 통해 전국에 방영된 대학가요제의 파장은 엄청났다.
고상인 대상은 참가번호 11번 서울대 농대 락밴드 '샌드 페블스' 6기의 '나 어떡해'가 차지했다.
이 곡은 락밴드 산울림의 둘째 김창훈의 창작곡이다. 그 역시 샌드 페블스 5기다.
재미난 사연이 있다. ‘산울림’의 전신인 밴드 ‘무이(無異)’는 제1회 대학가요제 서울예선에서 ‘문 좀 열어줘’로 1위를 차지했었다.
하지만 이미 대학을 졸업을 한 김창완 때문에 본선에는 예선 2위인 샌드 페블스만 나갔다.
77, 78 제 1, 2회 대학가요제 기타 기능Various Artists
컴필레이션
한영애는 영혼이 빨려들 듯 카리스마 넘치는 울림을 가진 ‘소리의 마녀'다.
마치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듯 무아지경에 빠져 열창하는 모습은 범접하기 힘든 영적인 이미지까지 내뿜는다.
한영애는 베일에 가려진 음반이 많은 가수다. 혼성 포크그룹 해바라기 활동 이전인 1976년 데뷔앨범인 스플릿 음반 [백호빈·오종국·한영애]이 세상에 나왔다.
그해 그룹 해바라기에 합류한 한영애는 1977년 해바라기의 1집에 참여했다. 그때 해바라기 멤버들의 노래들을 모아 비공식 1집도 나왔다.
한영애 얼굴을 스케치한 이정선의 수채화 재킷음반은 정식발매가 되었지만 상업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묻혀버렸다.
1979년 한 대중매체의 대중가수 인기조사에서 심수봉은 신인가수로는 이례적으로 4위에 등극했다.
지구레코드는 MBC 10대 가수상, TBC와 KBS신인가수상을 휩쓸며 정상의 가수로 떠오른 심수봉에게 제미니 승용차를 보너스로 선물했을 정도였다.
1978년 제2회 MBC대학가요제의 주인공은 당시 명지대 경영학과 3학년생 심민경(심수봉의 본명)의 창작 트로트 곡 '그때 그 사람'이었다.
이 노래는 문병을 갔다 친구의 남자 친구가 기타를 쳐주는 모습을 스케치한 심수봉의 창작곡이다.
'그때 그 사람'이 최초로 수록된 제2회 MBC대학가요제 실황음반은 유니버어샬레코드에서 게이트 폴드로 발매되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반응이 나오자 2장으로 구성된 재반이 대도레코드를 통해 연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입상에는 실패했지만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은 1979년 스필릿 독집이 나오자마자 전국을 강타했다.
단숨에 MBC TV 금주의 인기가요와 TBC TV 가요 베스트7의 정상에 등극했다.
그 바람에 제2회 대학가요제 음반은 심수봉과 '그때 그 사람' 부각시킨 여섯 개의 재발매 음반을 양산했다.
가수로서 최정상을 인기를 누렸지만 10.26사건에 연루된 '그 때 그 여인'으로 비련의 주인공이 되었다.
2010년 KBS TV ‘가요무대’는 '국민가요 100곡'에 대한 인기도를 설문조사했다.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은 ‘최고의 국민가요’로 선정되었다.
제 1회 해변가요제 실황앨범이 낳은 7080 명곡은 무수하다.
우수상을 받은 홍익대 블랙 테트라의 '구름과 나', 동상을 수상한 항공대 런웨이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장려상 장남들의 '바람과 구름', 중앙대 밴드 블루 드래곤의 '내 단 하나의 소원', 인기상 휘버스의 '그대로 그렇게' 등이 대표적이다.
기성곡 '여름'으로 대상을 받은 한양대 징검다리에는 왕영은이 있었고 '속삭여 주세요'를 부른 개그맨 주병진도 해변가요제가 배출해낸 이색적인 인물이었다.
1집의 대박에 흥분한 음반사는 2집부터 펜더, 깁슨 기타에 베이스 앰프 등 최고의 장비를 구입해 주며 다음 앨범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제작된 산울림의 2집 앨범은 사운드적으로 헤비메탈과 프로그레시브적인 시도 등 여러 실험적인 요소가 녹아내린 앨범이다.
그럼에도 발매 이후 1주일 만에 1만장, 한 달 만에 3만장이 판매되는 히트를 기록했다.
이 앨범에는 대학 졸업으로 1977년 대학가요제에 참가하지 못했지마, 샌드페블즈에게 선사해서 대상을 수상한 '나 어떡해'의 산울림 버전이 수록되면서 더 큰 판매를 올릴 수 있었다.
타이틀 곡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2분 여의 긴 전중도 불구하고 빅히트를 기록했고, 서정적인 발라드 넘버 '둘이서'도 학생층에 각광 받았다.
그리고 전통 가락을 현대화시킨 트랙 '떠나는 우리님'의 음악적 정서는 뮤지션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외에도 '안개 속에 핀 꽃'과 '이 기쁨'과 같은 노래들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감성적인 연주가 더해지며 산울림의 음악성 역시 높게 평가되었다.
또한 이 앨범에서 다양한 감성을 주입시킨 김창완의 가사는 이후 대중가요 작법에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았다.
더해서 산울림은 같은 해에 TBC라디오방송극의 주제가 ‘빨간풍선’을 부르면서 산울림 인기의 파장은 더욱 커져갔다.
1980년대 이후 한국 포크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정태춘은 1978년 6월 제대 후 평소 안면이 있었던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으로 서라벌 레코드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군 복무 당시 습작했던 여러 곡을 바탕으로 같은 해 11월에 데뷔 음반을 발표하게 된다.
앨범 발매 당시는 긴급조치 9호 이후 음반에 대해 여전히 사전검열이 진행되던 때였다.
앨범의 타이틀 곡 ‘시인의 마을’은 정권의 서슬 퍼런 검열의 칼날에 의해 가사 내용이 우울하고 방랑적이라는 이유로 가사 내용을 대폭 수정해서 수록되었다.
정태춘은 추후 베스트 앨범에서 '시인의 마을'을 원래 가사로 바꾸어 제대로 된 '시인의 마을'을 선보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정태춘은 오랜 관행으로 자리 잡았던 공연윤리심의위원회의 사전검열제도의 폐지를 위해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서 활동했다.
결국 정태춘은 1996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사전검열제도의 폐지를 이끌어내기에 이르렀다.
이 앨범은 경향신문에서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56위를 차지했던 작품으로 12인치 LP 발표되기 이전에 7인치 싱글이 먼저 제작되었다.
타이틀 곡 '시인의 마을' 외에도 낭만적인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가 매력적인 '촛불'이 크게 히트하면서 1979년 MBC 신인가수상과 TBC 가요대상 작사부문상을 수상하며 한국 포크의 새로운 기수로 급부상했다.
정태춘의 1집 앨범은 디지털 마스터링을 거쳐서 2008년 뮤직리서치를 통해서 재발매되었다.
정태춘은 1집 앨범의 반향에 의해 정태춘하면 뒤따르는 이름을 탄생시킨다. 바로 박은옥이다.
정태춘과 박은옥은 1980년 결혼해서 주옥같은 앨범을 발표해 나오며, 한국 포크 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왔다.
詩人(시인)의 마을 리마스터
미8군 출신가수인 윤시내는 국내 가요계에서 '디바의 원조'로 통한다. 그만큼 정열을 담아 가창을 해냈던 가수가 바로 윤시내였다.
윤시내는 영화 <별들의 고향> OST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로 데뷔한 후 밴드 신병하와 사계절의 리드보컬로 잠시 활동했다.
1978년 서울국제가요제 본선에서 '피라미드' 헤어스타일로 화제를 모으며 ‘공연히’를 가창했다.
윤복희의 2집 앨범의 타이틀 곡인 '열애'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최종혁이 멜로디와 리듬을, 그리고 부산 MBC의 배경모 PD가 노랫말을 썼다.
좀 더 정확히 이 노랫말은 채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표현한 실화를 담고 있다.
부산 MBC의 프로듀서이자 심야방송 DJ였던 故 배경모PD는 군 제대 후 음악다방 등에서 DJ로 활동을 했다.
배PD는 1970년대 부산 지역 청취자들을 사로잡은 ‘별이 빛나는 밤에’와 ‘별들의 속삭임’을 진행하고 연출하는 등 다재다능한 연출가였다.
어느 날 암에 걸려서 생을 잇던 배PD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세상에 남겨둬야 하는 애절함이 담긴 한 편의 시였다.
1982년 김추련과 나영희가 주연한 영화 <열애>의 주제가로도 사용된 ‘열애’는 특별한 에피소드의 감흥을 극대화시키는 한을 토해내는 윤시내의 절창이 청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또한 이 노래는 1979년 TBC가 주최한 세계국제가요제에서 양희은, 박겅애, 옥희 등과 함께 출전해서 은상을 수상했다.
전인권은 세시봉의 쇠퇴 이후에 통기타 가수들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쉘부르 출신의 싱어송 라이터였다.
들국화 당시에 너무나 쟁쟁한 멤버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의 창작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전인권이 본격적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는 강인원과 이주원, 나동민과 함께 한 따로또같이 활동 당시부터이다.
따로또같이의 멤버들 역시 모두 쟁쟁했다. 멤버 가운데 지금은 고인이 된 이주원은 샹송 전문가수인 전마리의 남편이었다.
1970년대 중후반 양희은이 노래하고 히트를 기록했던 곡은 거의 고인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었다.
또한 1976년에 발표했던 고인의 [외로움]은 한국 포크 뮤직의 숨겨진 명반이었다.
전인권은 1979년 따로또같이의 1집 녹음에 참여했지만 밴드를 탈퇴해 곧바로 힛트레코드에서 첫 독집을 발표했다.
첫 독집은 1979년 초반과 1980년 재반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젊은 전인권의 사진은 카리스마 넘치는 사자머리 스타일로 담겨져 있으며, 그와 동일인물인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앳된 모습이다.
1979년 따로또같이의 데뷔 앨범에 수록되었던 '맴도는 얼굴'은 이 앨범에 다시 한 번 담긴 이후, 전인권의 솔로 3집 앨범에서 ‘헛사랑’으로 제목이 바뀌어 뒤늦게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다.
노고지리는 쌍둥이 형제 가수인 한철수, 한철호가 결성한 듀엣이다.
'찻잔'은 산울림의 김창완이 작사·작곡을 해서 선사한 노래로 이후에 산울림 버전도 발매가 되었다.
때문에 일부 대중은 노고지리와 산울림의 '찻잔'을 같은 곡으로 헷갈려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노고지리의 2집 앨범은 김창완과 연관성이 매우 깊은 음반이다. 11곡이 실린 노고지리의 2집 앨범에서 김창완은 ‘찻잔’ 외에 전곡을 작사·작곡했다.
또한 김창완은 이 앨범에서 노고지리의 음악적 방향성을 잡아주면서 거의 조련하다시피 2집 앨범을 준비시켰다.
사실 노고지리의 2집이 제작되던 당시에 김창완은 이들의 소속사인 대성음반에서 이사로 재직 중이었다.
이런 이유로 노고지리의 2집 앨범은 작사와 작곡 외에도 전체 음반의 기획과 프로듀서를 김창완이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2인조였던 노고지리는 베이시스트 홍성삼을 새롭게 영입해서 산울림과 같은 3인조로 재편되어 '제 2의 산울림'으로 진화될 수 있었다.
이 앨범을 대표하는 노래 '찻잔'은 디스코풍의 댄스음악과 전통가요가 범람하던 1970년대 후반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노래였다.
앨범 재킷 안의 인쇄물에서 '찻잔'은 "다소곳이 고개숙인 한 여인. 그 여인에게서 느낀 것을 노래했습니다."고 표기되어 있다.
이렇듯 나른하면서도 흐느적이는 듯한 '찻잔'의 선율은 의외로 음악다방과 심야 라디오에서 꾸준한 리퀘스트를 얻으면서 50만 장 이상의 판매로 이어졌다.
김트리오는 김대환이 조용필과 이남이, 최이철 등과 함께 활동했던 '김 트리오'와 이름은 같지만 음악적인 성격과 구성 등 모든 면에서 전혀 다른 밴드이다.
3남매인 김파, 김단, 김선 삼남매로 구성된 밴드 김트리오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의 가수 이해연과 미8군 베니김 쇼를 이끌던 베니김(김영순) 사이에 태어난 이들로 구성되었다.
1973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김트리오는 각각의 학업 생활 중 악기를 전문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7년만인 1979년 귀국한 김트리오는 베니김과 미8군 활동 당시부터 친분이 있었던 안치행이 창설한 안타기획과 계약을 체결하고 윤수일과 최헌, 희자매 등과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김트리오는 들고양이와 함께 진보적인 디스코 사운드와 획기적인 연주력으로 1970년대 말을 대표하는 얼굴로 급부상했다.
김트리오 음악의 기조는 미국 이민 시절 현지에서 습득했던 팝음악을 바탕으로 한 펑키 사운드와 가요의 독특한 방식에 있었다.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이었던 '연안부두'는 진보적인 디스코 넘버로써 인천을 연고지로 하는 프로야구 구단 SK 와이번즈와 기타 스포츠 구단 등의 응원가로도 유명하다.
'연안부두'의 히트로 김트리오의 1집 앨범은 발매 이후 3개월 만에 5만장의 판매를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둬 들였다.
노래에 나오는 연안부두는 인천광역시 중구 연안동에 위치한 인천항 연안부두를 의미하며, 이 곳에는 현재 이 노래의 노래비가 설치되어 있다.
김트리오의 데뷔앨범에는 ‘연안부두’ 외에도 완성도가 높은 '그대모습'과 명품 연가로 평가받는 '저하늘 끝까지', 기타와 드럼 연주가 도발적인 넘버인 '낙서'등 세련된 트랙이 상당수 자리하고 있다.
김트리오는 이 앨범 이후 막내 김선이 '선이'라는 예명으로 솔로로 독립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를 위해 준비한 곡들은 이듬해인 1980년 김트리오의 두 번째 음반에 수록되었다.
조동진은 진공관 앰프를 직접 만들만큼 오디오광이었던 큰형 조동완 덕분에 음악을 쉽게 접하며 동생 조동익과 함께 성장했다.
조동진의 가족은 이처럼 문화예술과 연관이 깊은 구조를 띄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피아니스트 출신 영화감독인 조긍하였다.
조동진의 실질적인 음악 인생은 1966년 미8군 무대에서 재즈락 밴드인 쉐그린(The Shagreen)과 동방의 빛의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며 시작되었다.
1996년까지 5장의 앨범을 발표해 나온 조동진의 1집 앨범은 오랜 무명 생활 끝에 뒤늦게 제작된 음반이다.
엄밀히 그의 무명 생활은 그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릴 정도로 조용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명으로 활동하던 당시에 그의 음악 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8군 활동 이후에 이장희와 윤형주 등과 음악적 교류를 나눴으며, 시인 고은과도 문화예술을 함께 공감해 나왔다.
이 시기를 전후에서 조동진은 양희은의 [고운노래모음 3집]에 수록된 '작은배'와 김세환이 부른 '그림자 따라', 그리고 최헌과 투 코리언스의 '들리지 않네', 윤형주의 ‘작은 불 밝히고’ 등을 작곡해서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쌓고 있었다.
이처럼 그는 데뷔 이전에 오랫동안 실연자가 아닌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다져나왔다고 볼 수 있다.
전곡을 작사·작곡한 조동진의 데뷔앨범의 완성도는 오랜 무대 경험과 음악적 경륜에 걸맞게 매우 높게 담겨져 있다.
수록곡 대부분은 강근식, 조원익, 이호준, 유영수, 이영림 등과 함께 했던 동방의 빛 당시에 완성된 노래였다.
이러한 인연을 계기로 조동진의 데뷔 앨범은 동방의 빛이 연주를 담당하고 있다.
타이틀곡 '행복한 사람'은 김세환의 활동 금지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곡으로 조동진의 가창으로 제대로 된 히트를 기록하게 되었다.
꾸준하게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이 앨범은 1986년까지 재반과 재녹음반 등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며 30만 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상업적인 성공 외에도 이 앨범은 경향신문과 가슴네트워크가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명반’에 선정되는 등 뮤지션과 평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동진은 냉소적인 외모와 연결되는 저항적인 음악보다는 삶 속에 묻어나는 여러 서정적인 감성과 정교한 감성의 울림을 노래하는 가수이다.
이는 조동진의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이자, 영원한 스테디셀러인 ‘행복한 사람’에서 분명히 전달된다.
이 앨범은 이후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모든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에게 영향을 끼친 음반으로 신중현 이후 최고의 계보라 할 수 있는 '조동진 사단'의 시작을 알린 앨범이기도 하다.
[출처 : 벅스 뮤직포스트 https://music.bugs.co.kr/specialView/focus/ZR7KST9S6LAOTC4SH9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