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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의 산 역사 산중 김태락 회장
- 이 분을 만나면 팔공산 60년 살아 있는 역사가 보인다
산중(山中) 김태락(金泰洛) 회장 1938년생, 격동의 세월,
이 어른께서 팔공산에서 살아 온 60년 인생은 바로
팔공산 자락의 역사 그대로다.
1953년, 열다섯 살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경주 서면에서
팔공산 자락 동화사 아래 쪽 절골로 와서 살게 되었다.
절골 깊은 산골 마을에 있는 ‘공산여관’은
개성 출신의 한 사람이 1930년대에 문을 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마을 최초의 여관이었고
이어서 ‘태평여관’과 ‘약천여관’이 문을 열고 손님들에게
식사까지 제공하는 형태의 여관으로 영업을 했다.
소년의 집에서는 엉성하게 만든 목공예품 등 몇 가지
기념품을 파는 것이 생업이었고 뒷날
‘경주상회’라는 기념품가게를 열게 된다.
이들이 절골마을 주민의 전부였고 산 아랫마을의 대부분
주민들은 팔공산에서 땔감용 나무를 해다가 대구시내,
칠성시장까지 갖고 가서 팔았다.
1950년대 후반, 대구에서 학생산악운동이 시작되었고 이
마을에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하루 네 차례 대구시내에서 백안동까지 운행하는
버스편이 있었고 이것이 팔공산을 찾는 사람들의
교통편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백안동에서 동화사까지는 약 6km의 거리,
걸어서만 왕래 할 수가 있었다.
1962년 동화사 가까운 지점까지 버스가 들어가는 것이
계기가 되어 마을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동화사를 탐승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마을에는
‘동화식당’을 위시, 식당과 기념품 가게 몇 집이 문을 열었다.
군대를 다녀 온 청년 김태락은 이 무렵부터 동네의 일
모두를 떠 맡아서 했다.
당시 행정구역인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도학동, 절골마을에는
50여 세대, 36개 성씨(姓氏)의 외지인들이 모여 살게 되었는데
여러 성씨가 함께 모여 살면서도 주민들이 단합을 잘 하는
마을로 크게 소문이 났다.
1985년, 팔공산 중턱, 해발 820m까지 오르는 1.196m 길이의
‘팔공산’ 케이블카가 개설되고
이와 때를 맞춰서 절골과 폭포골에 있던 상가도
케이블카 출발역 아래쪽으로 이전, 영업을 시작했다.
장년이 된 김태락은 이 과정에서 확장된 상가마을 조성 추진워원장을
맡아 산골 마을을 반듯한 관광단지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를 한다.
이 과정에서 ‘접대부 없는 식당’으로 영업을 하게 했었다는 사실은 많은
세월이 흘러 간 지금까지도 매우 잘한 일로 생각하고 있다.
동장에서 상가번영회 회장까지 그에게는 ‘회장’이라는 직함이 여섯 개나
되던 해도 있었고, 이런 이력으로 그는 이 지역의 ‘영원한 회장님’이 되었다.
자신은 생계의 방편으로 식당을 경영하면서 성공을 했고 부인 김영자씨와
함께 운영했던 식당을 큰 아들에게,
또 하나의 식당을 개점해 둘째 아들에게 물려 주었다. 나이 60을 넘기고는
남을 돕는 일과 봉사 활동을 하면서 바쁘게 살고 있다.
봉사활동은 그의 몸에 배어 있는 일상이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한 고아원의 60여명 원생들을 10여년간 꾸준히
도왔던 일이나 무연고 사할린동포 후원사업을 펼쳤던 일들은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았다.
어언 70 후반의 나이, 김태락 회장은 지금 ‘팔공산 봉우리 이름
바로 부르기 운동’에 매진 중이다.
소년시절, 처음 팔공산에서 살게 되었을 때
그는 제왕봉(帝王峰) ․ 미타봉(彌陀峰) ․ 삼성봉(三聖峰) 등의
팔공산 봉우리 이름들을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이 이름들이 지금 부르고 있는 비로봉 ․ 동봉 ․ 서봉의 본래 이름이라니....
이로 인해 팔공산의 원래이름을 찾아 줘야만 하겠다는 신념이 섰다고 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팔공산 정상에 올라 주목을 심기도 했고
계속 팔공산 정상 보전에 심혈을 쏟고 있다.
그가 펼치고 있는 ‘팔공산 봉우리 이름 바로 부르기 운동’이 조속히
성취되어 팔공산 정상부위가 본래의 이름을 되찾게 되기를 기원한다.
첫댓글 위 칸의 글과 사진은 김태락 회장과의 관련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