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국경이 넓어짐
시조 때 을음과 해루(解婁)는 다 명장이라. 남정북벌에 도처 성공하여 강토가 점점 넓어지고 또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近仇首)는 지용이 겸비한 장수라 여러 곳에 전쟁으로 많은 군공을 세운 공신이다. 그는 부왕의 뜻을 이어 국경을 넓히려면 북으로 고구려를 치지 않으면 불가하다. 동남에 있는 신라는 지방이 적고 또 여러 해 전쟁으로 성공이 없었다. 그리하여 남으로 가던 칼날을 북으로 돌이켜 한강을 건너 평양까지 침입하였다.
근초고왕 26년에 다시 정병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칠 새 고구려왕 사유(斯由)가 백제의 황에 맞아 죽으니 이로부터 려제간의 국교가 점점 험악하여 어느 해에 서북국경에 전쟁이 없을 때가 없었다. 이 전쟁에 려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막거늘 초고왕이 태자를 보내어 막을 새 반걸양(半乞壤)에 이르러 고구려사람 사기는 근본 백제 사람으로 죄를 짓고 고구려에 들어갔더니 이때 가만히 백제로 돌아와 태자에게 고하되 고구려군사가 비록 많으나 다 수채움뿐이오 저 적기대(赤旗隊)만 요용(饒?勇)하니 적기대만 파하면 나머지는 불공자타가 되리이다.
태자가 그 말을 좇아 적기대를 쳐서 파하여 수곡(水谷)성에 이르니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가로되 듣사오니 족한 줄 아는 자는 욕을 보지 않는다 하고 그칠 줄 아는 자는 위태치 않다 하오니 이제 소득이 많으니 더 나아가지 마사이다. 태자 옳게 여겨 더 나아가지 않고 그 곳에 돌을 세워놓고 태자 돌 위에 서서 좌우에게 일러 가로되 이 후에 누가 이곳에 와서 오늘 일을 기억하리요. 이 땅에 들이 있고 말발 자취가 있으니 세상 사람이 이르되 태자말 자취라 칭하리라.
이로 보면 백제 사람들의 강토에 대한 욕심이 감하였고 태자 근구수의 욕망은 고구려의 가장 주의하는 평양을 기어이 취하려고 계획하여 자기 조상이 부여에 난 것도 잊어버리고 북진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모두 후일에 나라를 잃은 장본이다. 신라에 대하여는 무고히 침범하다가 번번히 패하여 조금도 그 이유를 연구치 않고 자꾸 나아가기만 힘쓰기를 마지않으니 십분 위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