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글쓰기: 일과 성격, 궁합이 맞아야 한다.
-2019년 12월 엘라-
20대의 이른나이에 결혼을 하고 모든 일에 서툰엄마로 아이를 키우던 시기였다.남편이 주는 쥐 똥구녕같은 생활비로 살림을 꾸려나가려니 이건 뭐 은근 자존심에 흔적을 남길정도로 매번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두손을 벌려야했다.
그당시 봉평동 탑마트가 대형마트로 첫 입점을 하던시기라 자주 아이를 데리고 아이쇼핑(?)을 다녔었다. 정말 부러웠던건 마트 카트기에 한가득 물건을 싣고 다니던 사람들의 모습이다. 나도 저들처럼 지갑에 든 돈이 가득해서 실컷 리얼쇼핑 좀 해봤음 하는거였다.
그러나 생활비는 늘 부족한 듯 했고 거리의 매장 윈도우에 비친 예쁜 옷에 멈춰서서 멀뚱멀뚱 구경만 하는 내 모습이 하도 처량하여 이리 살아서 되겠나 싶어 남편몰래 신용카드 한 장을 발급했다.
아무런 재산이나 소득도 없는 무직(?)의 주부에게 카드가 발급되는게 신기하다 싶었다.
카드가 집에 도착하니 비굴한 내 인생도 이젠 봄날이구나 싶어 기분이 들떠서 딸아이에게 줄 옷이랑 장난감 그리고 나를 위해 옷 몇 벌을 구매했다. 밥을 안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이런거구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따스한 봄날이라 생각했던 한 달이 나에게 혹독한 겨울의 칼바람같은 추위로 올 줄이야... 카드명세서가 우편으로 날아왔다. 아직도 잊지못할 금액 323,000원
카드결제일이 다가오는데 통장잔고는 3만원도 안되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드뎌 말로만 듣던 신용불량자가 되는구나... 결제일에 돈을 못갚자 2일후 카드사에서 문자가왔다.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고 드라마에서 보던 대행 사채업자들이 날 찾아오나 싶었다.나의 불안한 마음이 밤새 이불속에서 뒤척거리자 남편이 조용히 말못할 고민이 있냐고 걱정스러워했다. 도저히 내스스로는 감당하기 힘든 채무(?)로 한 밤중 세상 서럽게 울면서 솔직함을 털어놨다.
다음날 남편은 나의 은밀한 카드값을 대신 갚아주고 나는 가계부를 적어서 학생이 선생님앞에 매일 일기장을 검사받는 고달픈 하루가 더 보태지는 생활이 되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자존심이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큰 사건이었다.
이때 나름 경기가 호황인지라 장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결혼 전 지인들과 함께 저렴한 큐슈여행 하카타 항으로 가는 배편에서의 일이었다. 전혀 낯선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어릴 때부터 주변의 어른들이나 친구들에게 말로만 듣던 ‘보따리상’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컨테이너 화물부터 자동차 화물 그리고 소량의 개인 수화물을 물론 일반 승객들까지 모두 선적 및 탑승이 가능한 이 배는 어떤 화물이든 저렴하고 안전하게 운송할 수있었다.저혐한이용 요금이라는 장점으로 인해 일반 여행객들보다는 말 그대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보따리상들을 위한 훌륭한 교통수단이었던 것이다.
매일 배를 타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원조 보따리상부터 정식으로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들까지, 이곳은 여행을 떠나기 위한 사람들보다는 생계를 위한, 그리고 사업을 위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만난 보따리상 할머니들이 조심스레 말을 건네왔다.
“아가씨들, 친구들끼리 여행가나 보네. 용돈 벌이도 할겸 부탁하나만 들어 주면 용돈 좀 챙겨줄텐데, 어때?”
처음 보는 할머니의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을 했다. 배에서 내릴 때 가방속 물건들을 직접 가지고 내려달라는 얘기였다. 일본 세관을 통과한 후 다시 본인에게 돌려주기만 하면 된다는 말과 함께 일본인에게 좋다는 국산김 1박스와 담배4보루, 그리고 양주1병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지갑을 열어 수고비라며 일본 돈 5.000엔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당시 5,000엔이라는 돈은 일본 여행 기간 중 현지에서의 식비는 거뜬히 해결할만한 큰돈이었다.
이 부탁으로 할머니들은 큰 거부감이나 경계심 없이 보따리상의 세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할머니들은 큰돈을 벌겠다는 목적보다는 나이들면서 집안에만 있기에 적적하기도 하고 손자손녀들 용돈벌이나 할 생각으로 친구분들과 함께 일본을 오가며 상품들을 조금씩 가지고 다니면서 쉬엄쉬엄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가 여관업을 하시면서 자연스레 일본을 오가는 상인들의 물건을 중간수수료를 붙여 되판매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주로 전자제품이나 식품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귀부인들을 겨냥한 진주목걸이, 팔찌등 귀금속품은 부르는게 값이지 않았나싶다.
어렸을 때라 얼마간의 이익이 있었는지도 몰라도 자주 할머니의 여관방엔 물건을 주문하고 찾아가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잦은 발걸음과 물건가격 흥정에도 순수히 제값을 받아내는 외할머니의 장부는 겨울의 긴 밤동안까지도 물품구매내역으로 지루하지 않게 꽉 들어찼던 것 같다.
그날 은밀한 카드사건 이후로 많은 고민 끝에 장사를 하기로 했다.
아무런 경험도 자본도 없는 철부지 같은 때라 직접 일본에 가는 국제 보따리상은 아닐지라도 중간 도매업상으로터 물건을 받아서 판매하고자 했다.
장사 밑천으로 친언니에게 500만원을 빌려서 부산으로 향했다.
이미 나름 품목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누구나 판매하는 제품이 아니라 지금으로 말하면 한정판 같은 잡화 품목이었다.
바로 젊은 엄마들의 자녀들은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는 ‘로미앤줄리 날개가방’은 정말로 날개를 단 것처럼 판매되었다. 특히 재구매율이 높았고 입소문으로 조용히 찾아오는 손님들이 아주 많았다. 당시 유행했던 스펀지밥 우산, 아사히실내화, 토이스토리 버즈가방, 신지카토의 래빗인형 및 눈이큰 돌인형등 모두 순수 일본제품에다 가격도 비싼물품인데도 제품이 없어서 판매를 못할 정도였으니 도매상가 사장님이 오히려 나를 부러워 할 정도였다.
특히 딸아이를 둔 엄마들 사이에 장사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그 밑천을 굴려서 당시만해도 낯선 돌드레스 대여사업에 뛰어들었다.
흔하고 저렴한 기성품같은 드레스가 아니라 직접 웨딩샵에서 드레스를 만들어 판매하고 대여하는 서울 청담동 제품으로 드레스와 한복을 주문했다.
생각은 빗나가지 않았다. 대여에서 구매로 이어지는 나름의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충분한 이익을 남기고 사진관과 다른 동일업체에 이일을 넘겨주었다.
카드값 33만원이 없어서 채무불이행자가 될뻔한 사건으로
시작된 일이 그당시 시중 경기도 호황이었고 많은 구매자들과 배고픔으로 인한 간절함에서 얻은 결과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꿈은 되도록 크게 가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설령 그 꿈이 깨어지더라도 그 깨진조각은 크다는 말이 지금도 참 좋은것같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증권사직원의 말에 솔깃해 중국 및 베트남주식을 사들여 대부분의 돈을 잃긴했어도 나름 제대로 비싼 돈주고 세상을 배웠구나 위로했다.
삼천만원의 투자금이 1400만으로 통장에 입금된날 상실감은 아주 뼈저리 후회했다. 절대 증권사의 말을 믿지말 것, 3이라는 숫자는 나하고 궁합이 맞지 않구나 하고...ㅋㅋ
지금은 보험사 영업직을 시작해 손해사정사로 근무하고 있다.
손해사정인은 보험회사와 피보험자 간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공정하고 객관성 있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정직성과 책임감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난 직업을 잘못 고른듯하다. 난 언제나 사고를 당한 피보험자 편이니...거기엔 생각지 못한 뇌물도 있으니...쩝!
일과 성격, 궁합이 맞아야 한다고 난 믿는다. 사람들과 장사(?)하려면 긴 호흡으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의사결정에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아울러 항상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이익보다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그들의 깊은 고민을 두려워하거나 배척해서도 안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생계형 직업으로 하는 일이 인정하긴 힘들어도 어쩌면 궁합에 맞을 수 있겠다 싶다.
첫댓글 책갈피랑도 궁합 맞춰 보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