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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계 22: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계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계 22: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요한 계시록 22장, 마지막장은 요한 계시록 전체를 정리해 주는 장이다.
(계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계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계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계 22:9)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하나님이 요한에게 보내주신 천사가 처음부터 요한을 데리고 다니면서 환상을 보여 주고 이해시켜주었다. 그게 그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완수했다.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보좌 앞에 둘러선 천사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다.
(계 5: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만만과 천천을 숫자로 계산하면 100조(100,000,000,000,000)이다. 그러나 숫자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이 천사들 중에서 특별한 일을 맡아서 하는 천사의 수는 약 36명이다. 미가엘 외에 나머지 천사들은 이름이 소개되지 않는다.
요한은 그 천사가 보여준 환상으로 통해서 큰 위로를 받았고,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줄 수 있는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천사가 얼마나 고마웠던지 요한은 그 천사에게 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천사는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자신은 종이기 때문에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는 것이었다.
목사들은 사람들이 떠받들어주면 신격화 되어 하나님께서 받아야 할 영광을 대신 받는 경우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는 천사든 목사든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가로채면 안된다.
목사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재능을 받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을 자신이 가져서는 안 된다.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젊어서는 돈을 위하여 음악을 했고, 그 다음은 명예를 위하여 음악을 했다. 그러나 내가 눈이 열린 후 부터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음악을 했고, 내 음악을 듣는 사람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이 음악을 하는 목적이 되었다.”
그런데 일부 목사들은 영광을 받고자 자신이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을 내세우고, 박사 학위를 받으려고 애쓴다.
어떤 목사님이 아들에게 철없는 충고를 들었다고 한다.
“아빠! 아빠도 박사 하나 따! 옆 교회 목사님은 이번에 '목사'보다 높은 '박사'가 됐대요. 그 목사님 아들이 얼마나 자랑하고 다니는지 아세요? 아빠도 어서 '박사 하나' 따세요!"
무인가 신학교에서 남발하는 박사 학위는 돈만 있으면 받을 수 있는 경로가 많다. 교회에 돈이 들어오고 목사의 주머니에 여유가 생기면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박사 학위를 받는다.
나도 예전에 개척 초반에 시간이 남고 하여 우리 교단 신학교에서 주는 신학 박사를 따려고 전화로 알아 본 적이 있다. 한 해 천 만 원 정도 내야 하고, 이년 반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만 학교에 나가서 강의를 들으면 되고 졸업할 때 논문만 써내면 된다고 들었다. 그렇게 대충 절차를 거쳐서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그 때부터는 주보에도 명함에도 목사라는 타이틀보다 더 진하게 신학 박사라는 타이틀을 붙인다. 그렇게 박사가 된 목사님들의 논문책을 몇 번 선물로 받았는데 쓰레기도 그런 쓰레기가 없다. 검은 색 표지의 그 논문책은 꾀나 권위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라면 끓여 먹을 때 받침대로 쓰기에도 참 사이즈가 안맞는 것이었다.
아예 공부를 하지 않고 공짜로 받는 박사 학위도 있다. 명예 박사학위이다.
언젠가 어느 교회 신문에 서울의 꽤 알려진 목사님이 '나는 미국의 이름 있는 신학교에서 명예박사를 받아 가지고 왔다'고 광고를 했다. 그것을 추적한 결과 그 학위는 미국 Los Angeles의 작은 신학교에서 공부한 것이 없어도 그냥 주는 학위였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서 '명예박사학위 축하 기념예배'라는 현수막을 설교단 뒤에 걸어 놓고 자기 교인들 앞에서 '축하감사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서울의 큰 교회인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조용기 목사님이 미국의 모 대학에서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주었다는 광고와 함께 대단한 영광을 받는 것을 보았다. 큰 교회 목사든 작은 교회 목사든 우리 나라 교회 목사들에게는 학위의 열풍이 오래동안 불었다.
박사 학위의 영광을 받으려는 것은 그런대로 봐 줄만 하지만, 교인들에게 인기가 많아지면 자신이 아예 메시아라고 말하거나 성령이라고 말하는 정신 나간 목사들도 있다.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었다. 그 목사님이 자신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2년쯤 되는 송집사라는 여집사를 한얼산 기도원에 올려 보냈다. 우리 식대로 말하면 은혜 받고 참된 기독교인이 되라는 뜻으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송집사를 한얼산으로 보낸 주간의 목요일에 기도원에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송집사가 한얼산 기도원에서 완전히 뒤집어져서 난동을 부리며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식대로 이야기하면 성령의 불을 받은 것이었다. 과연 그 때부터 송집사는 완전히 뜨거운 신자가 되었다. 교회 봉사 잘하고, 예배 잘 나오고, 성경 공부 열심히 하고, 가정에서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가족들을 다 교회로 나오게 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자신을 변화되게 인도해준 목사님을 끔찍이 사랑하고 존경해서 목사님의 말에 철저히 순종했고, 선물도 자주 주었다. 목사님은 송집사에게 특별한 정을 느끼며 아껴 주었다.
그런데 그 송집사가 목사님을 서운하게 했다는 것이다. 예배당이 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곳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는데, 송집사가 남편이 멀리 있는 교회에 가지 말고 가까운 교회에 가라고 해서 교회를 옮겼다는 것이다. 목사님은 다른 성도들은 몰라도 송집사는 안그럴 줄 알았다는 것이다. 송집사만은 남편의 말보다는 자신의 말을 더 따라 줄 것으로 믿었다. 결국 송집사는 교회를 떠났고 목사님은 오래 동안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었다.
그런데 깊은 생각 속에서 목사님은 송집사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송집사가 나에게 은혜를 받은 것도 아닌데, 나는 그녀에게 은혜를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목사님은 그녀에게 해 준 것이 없는데 해 준 것이 있다고 생각했고, 송집사에게 자신이 은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착각이 송집사가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했던 것이다.
(시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많이 있다. 목사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은인 의식이다.
‘내가 그 사람을 장로로 세웠는데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나
내가 그 사람을 주례해서 결혼시켰는데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나
내가 그 아버지 죽었을 때 어떻게 했는데 정말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나
내게 세례를 받은 사람인데...
내가 기도해서 그 사람의 병이 고쳐졌는데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나
그렇게 사랑을 해 주었는데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나
평생 그렇게 기도를 해 주었는데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나’
나는 집을 짓는데서 삽질하고 벽돌 쌓는 등의 일을 하면 평생 살아온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디에 가면 수십억짜리 집이 있는데, 자신이 그 집을 지었다고 말한다. 어디에 가면 어마어마한 다리가 있는데 자신이 그것을 지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분이 실제로 한 일은 삽질하고 벽돌 쌓으면서 월급을 받는 노동자였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지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실없는 말인가?
(계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요한보다 오백년 전에 살았던 선지자 다니엘에게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는 다니엘이 본 환상을 봉함하고 공개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 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요한에게 보내주신 천사는 요한이 본 것을 인봉하지 말라고 한다. 그 예언이 곧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인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금방 쓸 돈이면 은행에 넣을 필요가 없는 이치와 같다.
(계 22: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부모는 자식에게 아이큐도 물려주고 성격도 물려준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하지만, 죽음이 사람을 없어지게 하지는 못한다. 사람은 자기와 똑 같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을 만들어 놓고 죽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너는 왜 그렇게 머리가 나쁘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머리가 나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큐라고 말하는 지능은 부모가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 주는 것이다. 자식이 머리가 나쁘면 부모는 미안해 해야 한다. 성격도 부모가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 준다. "너는 왜 성질이 그모양이냐?" 누가 그렇게 했을까? 부모가 물려 준 것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며 사는 것이고, 더럽게 사는 자는 그대로 더럽게 사는 것이다.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롭게 사는 것이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알파”는 헬라어의 첫 글자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이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의 뜻은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의미보다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라는 말이다.
한글의 첫 글자는 기역이다. 마지막 글자는 히읃이다. 하나님은 기역와 히읃이시다. 기역부터시작해서 히읃까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역부터 히읃까지 보호하신다. 이와 같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완벽함, 완전함을 의미한다.
(계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과 개 같은 자들은 서로 상반되는 존재들이다.
(계 22:15) 개들과
개는 더러움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이스라엘이 속해 있는 중동지역 문화의 사람들은 개를 더러운 동물로 본다. 최근에도 애완견을 팔거나 사지 못하게 하거나, 애완견을 데리고 호텔이나 공항 같은 공공장소에 오지 못하게 하고,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는 것을 금지했다. 길거리에 길고양이가 돌아다니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하고 개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애완견이라도 마당에 내놓으면 땅에 이리저리 자기 몸을 부비면서 더러워진다. 개가 왜 흙에 자기 몸을 미친듯이 부비는 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먹이를 사냥할 때 자기의 몸의 냄새를 감추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라는 주장도 있고, 자기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주장도 있다. 분명한 것은 개는 아무리 훈련 시켜도 개라는 사실이다. 개는 자신의 본성을 단1%도 버릴 수 없다. 개에 비하면 고양이는 얼마나 살살 다니는가.
더러움의 반대는 거룩하다. ‘거룩’은 구별을 의미하고 본래의 모습을 지키는 것이다.
거룩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순종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개에게 던져지면 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힌다. 그것을 세속화라고 한다. 세속화의 첫 예는 창세기 첫 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여자는 자신을 찾아온 마귀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생각을 섞어서 전했다.
(창 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짓말로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생각을 섞은 사람은 한 판에 넘어가버린 것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기 싫은 사람들은 부모에게 드릴 것에 대하여 고르반(이것은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이라고 하면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편법을 만들어 내었다.
(막 7: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막 7: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막 7: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그런 유대인들에 대하여 지적하시고 그들을 더럽게 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다.
(막 7: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막 7: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계 22: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진실과 사실
계시록은 이 세상의 종말과 심판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경우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 분이 분명히 있고, 그분이 이 일들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진행되는 것을 사실이라고 하고, 일어나는 사실의 원인을 진실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진실을 알기를 원할 때가 있고, 사실을 알기를 원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광우병 소고기를 수입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 소고기를 수입한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왜 그 소고기를 수입해야만 하는가 하는 진실을 알기를 원했다. 그러나 대통령과 정부에서는 진실은 말하지 않고 미국의 광우병 소고기가 사람이 먹어도 탈이 없다는 사실만 자꾸 주장하다가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광화문 광장에 모여 거센 항의 집회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때의 대통령은 지금 감옥에 가 있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사실만 말해주고 진실을 알려 주지 않을 때 사람들은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 때도 대통령이 그 긴박한 시간에 어디에 가 있었는지 사람들은 그 진실을 알고자 했다. 왜 대통령이 재빠르게 아이들을 구출하려는 행동을 하지 못했는지, 그 진실을 알고자 했지만, 대통령과 청와대는 대통령이 일상의 대통령 업무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만 주장했다. 그 긴박한 하루 동안 대통령이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의 진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은 탄핵되었고 지금은 감옥에 있다.
사실을 말해야 할 때가 있고, 진실을 말해야 할 때가 있다.
반면에 사람들이 진실보다는 사실을 알고 싶을 때가 있다.
일본에 쓰나미가 왔을 때 어떤 목사님들은 일본에 쓰나미가 덮친 영적인 진실을 밝히려고 했다. 일본이 우상 숭배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디 맛좀 봐라' 하시면서 일본에 쓰나미를 주셨다고 설교했다. 코로나가 중국에 발생했을 때도 하나님이 기독교회를 핍박하는 중국에 '너희들, 어디 맛 좀 봐라' 하시면서 무서운 전염병을 주셨다고 설교했다. 그러나 그런 설교들은 조금의 가치도 없는 말들이었다. 사람들이 이런 일을 겪을 때는 진실을 알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알기를 원한다. 쓰나미가 신으로부터 왔든, 자연으로부터 왔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일본에 닥친 쓰나미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쳤고, 그 일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고,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기 원한다.
코로나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가 중국의 어떤 실험실에서 시작이 되었든, 미군이 전염 시켰든, 시장에서 식용으로 거래되는 그 야생 동물에게서 시작되었든, 그런 것은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전염병이 어떻게 전파되고 있고, 어떤 악영향을 미치며, 이것을 막을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실을 알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 사람들은 만족한다.
최근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는 방식에 대하여 국민들에게 박수를 받고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이유는, 코로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가 누구에게 어떻게 전염되었고 검사를 받은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되고 죽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정보와 사실을 매우 투명하게 국민들에게 밝혔기 때문이다.
요한 계시록은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라는 사실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진실을 더 강조하고 있다. 종말의 상황의 진실을 알려주는 부분이 있다.
(계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계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이것이 극심한 고통을 불러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