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평전을 읽다가 매우 의문이 드는 장면이 있었다. 고타마는 궁을 나서 세상과 접하며 큰 충격을 받는데 ...
《사람들이 늙고 병들고 죽는 추한 세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난 이 장면에 외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고타마가 살았던 궁은 어떻게 이런 속세의 삶이 전혀 나타나지 않게 연출할 수 있었냐는 것. 물론 어느정도 이해는 가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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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상을 한 걸음만 비켜 바라보면 모든 삶은 '고(苦)'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살기 위해선 '땀'을 흘려야만 한다. 아무리 우아하게 치장하고 행동해도 우리 삶 자체가 '땀' 없인 아무것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땀' 즉 노동없인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오로지 어슴프레한 희망의 유토피아를 그리다 종점에 다다를 뿐이다.
이를 일러 《유위(有爲)의 삶》이라고 한다.
첫 조상의 '선악과 사태' 후에 하느님으로부터 언도(재판에서 재판장의 판결을 알리는 것) 받은 선언은, 인간이 '무위(無爲)'의 삶에서 '유위(有爲)'의 삶으로 추락하는 극한 과정을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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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이는 무위(無爲)의 삶이 유위(有爲)의 삶으로 돌아감을 명시한 것이다. 무위와 유위의 차이점은 '땀' 즉 '노동'을 통한 삶의 유지 여부다.
인류는 유위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좀 더 쉬운 길을 선택했다. 《전쟁》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유위'의 땀을 흘려 쌓은 부를 빼앗는 것이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도 이 구도에서 비켜가지 못한다. 자신들의 '유위적(有爲的)' 영역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다.
#신의_물레방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