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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27장 41절-28장 9절
에서의 분노와 야곱의 피신
창세기 27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축복에 대한 내용은 창세기 25장에 나오는 장자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한 창세기 25장에 나오는 장자권은 같은 장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의 출생 속에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과 무관하지도 않습니다. 육신의 출생 순서로 보자면 먼저 태어난 에서가 장자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복락과 관련해서는 큰 자가 아니라 어린 자가 장자로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알려주신 내용입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느냐? 분명 육신적으로 하자면 에서가 장자입니다. 실제로 그가 장자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고, 창세기 27장에서도 살펴 본 것처럼 이삭 역시 그를 장자로 여겨서 아브라함과 자신에게 주어진 복을 에서에게 주고자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냥하러 나갔다고 돌아왔을 때 배고프다는 이유로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한 그릇 음식 때문에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락을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창세기 25장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것이라고 말씀입니다(창25:34).
이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문제였는지 히브리서 12장은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고까지 말씀합니다(히12:16). 심지어 이런 말씀까지 덧붙입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7) 즉 장자의 명분과 관련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도록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7장은 바로 그런 역사인 겁니다. 그만큼 장자의 명분을 판 사건은 에서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사건이었던 겁니다.
우리는 이미 창세기 25장에서 하나님의 뜻이 정해져 있다는 것 때문에 에서의 잘못에 대해서도 하나님 탓을 하려는 악습이 있습니다. 작정하셨다면 작정하신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인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이들은 작정 자체를 부인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정하셨다고 해서 실행의 역사 속에서 죄에 대한 문제를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원인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결코 성경을 따라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정하신 바가 있고, 작정하신 바대로 실행되지만, 하나님은 결코 죄의 저자, 죄의 원인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죄의 저자, 죄의 원인자가 아니시지만 영원 전 모든 일에 대하여 작정하실 때 죄에 대해서까지 작정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죄가 인간으로부터 나올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회개하라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즉 회개하라는 말씀은 그 말씀에 걸리는 자들이 죄의 원인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에 대하여 망령된 자라고 말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회개할 기회까지 박탈된 것으로 말씀하기도 하는 겁니다.
물론 야곱은 에서보다 나은 자로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27장 3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두 번이나 속여서 빼앗는 자로 있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를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자로 있기보다는 거짓을 통해 빼앗는 자로 있었습니다. 축복과 관련해서도 어머니 말에 동조하여 속이는 자로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에서보다 낫다고 할 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이 돌아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영원한 작정을 통해 그를 선택하시고 선택에 합당한 복을 주기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는 선택에 합당한 축복은 사람에게서 원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서 주실 뿐입니다.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복을 주십니다. 다만 그 복을 허락하실 때 목적을 가지신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택자가 그 길을 걸어가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해서 징계하기도 하십니다. 이것이 택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그러나 유기자들에게는 그런 간섭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 자기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죄를 짓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짓도록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죄를 짓는 겁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 형벌을 받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죄의 결과로 인한 형벌이지, 하나님께서 유기하셨기 때문에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개혁자들은 그런 구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지만 형벌의 원인은 그들 자신의 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것에 대한 에서의 분노가 나타나는데, 41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이미 그 마음에는 본래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빼앗겼다는 것 때문에 억울함이 있습니다. 그런 억울함이 이제는 분노로까지 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분노의 마지막이 살인을 결심하게 되는 것으로 있습니다.
물론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의 뜻 안에는 분노하는 것까지도 살인과 같다고 여기기 때문에 성경은 노하기를 더디 하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잠언에 보면 그런 말씀이 종종 등장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잠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잠15:18),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잠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잠19:11) 그리고 이런 명령은 실제로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34:6)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 안에서 쉽게 분노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할 것이 없이 그 마음에 분노함이 있지만, 그리고 그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본성과 맞물러 있지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주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처럼 너희도 그런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살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41절을 보시면 에서가 언제 동생 야곱을 죽이고자 하느냐 하면 아버지 이삭이 죽고 난 뒤입니다. 아버지 죽을 날이 가까웠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참고 있다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 일을 실행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분노에 휩싸여 있지만 충동적으로 그 일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때문에 자제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제네바 바이블 여백 해석에 따르면 위선자들은 오직 사람이 두려워서 악을 행하는 것을 자제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서의 경우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였는데, 아버지로부터 비난 받는 것이 두려워서 악을 행하는 데 있어 자제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거나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자기 본성대로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 인간의 모습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이 그러했습니다. 가인의 후손 중 라멕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충동적으로 가인을 아벨을 죽였습니다. 라멕은 충동보다 살인한 것을 자랑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럼 실제 살인이라는 행위를 한 자들만 그러한가? 이미 사람들 마음 가운데는 살인과 방불한 미움, 살인과 방불한 분노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누구도 사람들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비난 받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 마음속에서는 끊임없는 살인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미워하고 속으로 욕하는 등.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사람 앞에서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앞에서의 삶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은 우리의 마음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지 우리의 실제 행위만이 아닙니다. 마음까지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고 하실 때 단지 실제적인 살인, 실제적인 간음의 행위만으로 해석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의 어떠함까지도 살인과 같다, 간음과 같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때문에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계명에 위배되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 마음까지도 살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에서는 야곱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큽니다. 히브리서 12장에 의하면 에서의 경우 이미 회개할 기회조차 박탈된 자입니다. 그 이유는 그 스스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전혀 배우지 못하는 자로 있었고, 오히려 그 안에서 이제는 참된 교회를 박해하고자 하는 자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칼빈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칼로 폐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는 신(하나님)을 모독하는 완강한 불복종심마저 엿보인다.”고 주석하고 있는데, 참된 교회에 대한 박해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분노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고자 하시는 복을 빼앗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리브가로 하여금 에서의 계획을 알게 하심으로 야곱을 피난시키십니다. 42절 이하 44절을 보시면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여러분, 어떤 계획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모르는 일이란 결코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어떤 계획에 대해서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어떤 위험도 없고, 어떤 어려움도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위험이 있을 수 있고, 어려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모른 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는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보낼 생각으로 있었지만 다시금 돌아오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걸리게 됩니다. 그만큼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될 것으로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거짓에 대한 징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 야곱을 만들어 가실 목적도 가지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를 선택하셨고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분노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피해 도망하게 될 때 그 도망하는 과정 속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에 대하여 해를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험악한 세월을 사는 것 자체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자로 있다고 한다면, 그 모든 일은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과정이 우리에게 유익으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경에 대하여 원망 불평할 이유도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분노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때로는 칼을 들고 나올 수도 있습니다. 칼을 들고 나오기 때문에 아벨처럼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누구를 두려워하라고 가르칩니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분, 바로 하나님만이 두려움의 대상인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주고자 하는 복을 반드시 주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위협하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복의 내용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그 복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떠하든지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자, 자족하면 살 수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겁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기로 부르고 계시는 겁니다. 세상의 방식에 따라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그래서 많이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부러워하고 적은 현실에 대해서는 불평하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어 45절을 보시면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여기 보면 형 에서의 분노로 말미암아 동생 야곱을 해하게 될 때 그것은 한쪽만 잃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다 잃게 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노로 인하여 살해당하는 자만 아니라 살인자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희생될 것을 염두 해 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지금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에서가 동생 야곱을 살해 했을 때 에서를 가만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런 확신은 어떤 면에서 아벨을 죽인 가인의 형벌을 통해 확신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실제로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은 즉각 그를 죽이시지는 않았지만 그로 하여금 유리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농사를 짓더라도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 없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에서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리브가에게는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둘을 한꺼번에 잃을 수 없다는 마음에서 형을 피해 도망하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44절, 45절을 통해 리브가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형의 분노가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기대와는 달리 실행되게 되지만, 리브가가 볼 때 지금은 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여겼던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신의 보호하심을 다양하게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어려움이 있을 때 피하게 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보면 교회를 향한 큰 박해가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흩어졌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흩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런 방식으로 보호하셨다는 겁니다. 심지어 사도행전은 무엇까지 말씀합니까? 그렇게 흩어진 무리를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했다는 겁니다. 두려움 자체는 부끄러움일 수 있습니다. 두려움 자체는 우리의 점과 흠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믿음의 연약함이 나타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부끄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점과 흠에도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박해로 인하여 흩어졌지만 흩어진 곳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역사가 있게 하신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으로 피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피한 곳에서 열 두 아들을 낳게 되는 역사가 있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근간이 됩니다. 물론 한 명의 아내가 아니라 네 명의 아내입니다. 여기에도 점과 흠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다고 해서 인간의 죄악됨을 하나님 탓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을 넘어 일하십니다. 우리가 나타내는 것은 점과 흠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따라 행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야곱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우연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좋은 일도 있을 수 있지만, 좋지 못한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 원망하고 불평하기 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점과 흠, 죄악 가운데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주의 백성들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분이기 때문에 그분만 의지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이제 46절은 에서의 분노를 피하도록 하기 위해 하란으로 보내려고 하지만 그 사실을 이삭에게는 숨기고 마치 다른 이유에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설명하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이것은 창세기 26장 34절과 35절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데, 이미 살핀 바 있는 것처럼 에서는 가나안 땅에 있는 헷 족속의 딸들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이 일이 리브가에게는 굉장히 좋지 않은 일로 있었는데, 여기 표현에 의하면 내 삶이 싫어졌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에서를 낳고 키웠지만 키운 보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이 헛된 것처럼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해당 본문을 살피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들은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아야 하지만 에서는 함께 멍에를 메는 자로 있었던 겁니다.
물론 에서에게 참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볼 때 교회 안에 있는 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 있기는 한 것입니다. 때문에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멜 수 없다는 주의 가르침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말씀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근심이 되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겁니다.
지금 리브가는 바로 이 일을 이용해서 야곱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자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삭은 이런 리브가의 의견을 좋게 여겨 야곱을 보내게 됩니다. 창세기 28장 1절 이하 5절을 보시면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매 그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가나안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고,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아내를 얻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는 어떤 증거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얻는 내용 속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신앙과 전혀 상관없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때문에 가나안의 딸이든,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아내를 얻든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씀 앞에서는 인간의 점과 흠을 내놓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점과 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더란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면 오늘날에도 보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결혼을 하게 됩니다. 본래 성경의 가르침은 그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결혼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인간의 점과 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속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이 있는 겁니다. 믿지 않았지만 결혼 이후 믿게 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유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 때문에 금하신 것조차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악일 뿐입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은 자꾸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려고 하는 바가 있는데, 성경을 그런 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잘못을 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방향은 점과 흠, 죄악의 방향이 아니라,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방향으로만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얻기 위해서 고향으로 보낸 것처럼 이제는 이삭이 야곱의 아내를 얻기 위해서 다시금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의 의도 가운데는 형 에서로부터 야곱을 피신시켜서 보호하기 위한 측면에서 이런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겁니다.
이삭은 후자의 의도는 모르고 야곱의 아내를 얻을 목적으로 밧단아람이라는 곳으로 보내게 되는데, 보내면서 야곱에게 다시금 축복하게 됩니다. 그것이 3절과 4절입니다. 이것은 앞서 축복한 내용이 효력을 발휘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앞서 축복한 내용과 다른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도 아닙니다. 앞서 축복한 내용의 경우 외적이고 지상적인 의미에서 복을 비는 것 같지만 그 핵심은 어떤 면에서 여기서 더욱 드러난다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지금 야곱에게 그대로 계승이 되고 있는 겁니다.
우선 3절의 말씀을 보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육신과 혈통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9장에 있는 말씀처럼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난 자만이 여기에 속하는 자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인 것이고, 또한 에서가 아니라 야곱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바로 그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4절 말씀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현재로는 거류하는 땅으로 있을 뿐입니다. 거류한다는 것은 자기 땅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임시로 거주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장차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길 구하고 있는 겁니다. 이 약속에 대해서는 야곱 때에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가 있지만 그 약속은 한 참 뒤에야 성취될 것으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은 어떻게 말합니까?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9-10) 지상의 것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지상의 약속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자로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것을 약속하시지만 그 안에 영적인 것을 담고서 약속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지금 방금 읽은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실제로 바라면서도 그 땅에 거류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지상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지상에 메어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위의 것을 찾으며 살아야지 밑에 있는 것을 찾으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무엇입니까? 구약의 경우 지상의 복 안에 하늘에 속한 복을 담아서 내놓는 형식이었지만, 신약은 그런 방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때문에 지상의 복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지상의 복이 있건, 없건 주의 백성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상의 복이 있으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구해야 할 복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지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그것이 우리가 구해야 할 복입니다.
오늘 본문 6절 이하 9절은 이삭이 야곱의 아내를 위하여 밧단아람으로 보낸 것에 대하여 에서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그러나 여전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그러니까 에서는 이삭이 야곱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듣고 난 뒤 자신이 가나안 여인들을 취한 것이 아버지 이삭에게 근심꺼리가 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여인들 외에 다시금 아내를 취하게 되는데, 그가 누구냐? 이스마엘의 딸이라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외식과 건성으로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회개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데, 지금 에서의 경우는 성령의 열매보다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딸들, 그리고 이스마엘의 딸,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물론 야곱이 아내를 취하기 위해 간 곳도 다를 바는 없지만, 야곱은 아버지의 명을 따라 가는 자로 있습니다. 성경이 밝혀주고 있지는 않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위하여 고향으로 보낸 것이 하나님의 지시로 있었다면, 그리고 야곱을 위해서도 동일하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메지 않는 것이 주의 명령이지만, 여기서는 특별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까지 한 내용이 되는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아버지 이삭이나 어머니 리브가에게 있어서는 가나안 여인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겁니다. 가나안 여인만이 아니라 가나안 여인과 다를 바 없는 이스마엘의 딸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뜻도 묻지 않는다는데 심각함이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가 취한 가나안 여인들이 아버지께 근심이 된다고 생각해서 다시금 다른 아내를 맞이한 것도 문제요, 아버지의 근심을 들어주기 위한 것으로 있었지만 오히려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행했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로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부모 공경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도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경외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모 공경이라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결국 이런 내용은 무엇을 드러내는가 하면 야곱에게 약속하신 내용과는 먼 자임을 알려줍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와 먼 자요, 하나님의 약속과 전혀 상관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의 모든 행보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임을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떠합니까? 택자이기 때문에 남다른 것이 아니라, 그도 역시 죄인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라고 말씀하시는 그런 자일 뿐입니다(사41:1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야곱과 함께 하시고 약속 말씀을 재차 하십니다. 한 마디로 내가 너와 함께 하며 이끌어 가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인도하심 속에서 인간이 내 놓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점과 흠을 내놓고 있을 뿐입니다. 여전히 허물 많은 것들을 내놓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만들어 가시고자 함께 하시고 이끌어 가시더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약속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하신 자들을 놓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어려움이 없는가? 있습니다. 힘든 일도 있고, 지치는 일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분노를 일으키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일은 없습니다. 혹 떠난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때는 숨어계실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있을 수 있지만 거기에 휩싸여 주의 뜻과 다른 것을 내놓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힘조차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