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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8장 21-30절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어둠 가운데 있고, 그런 어둠은 하나님께 대하여 생명을 잃어버린 것으로 있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세상에 빛을 비춘다고 해서 어둠 가운데 있는 세상이 빛을 깨닫는가?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30절에 보시면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고 하지만 그 이후의 내용을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하게 되느냐? 요한복음 8장 마지막절인 59절에 보시면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이 믿더라고 하지만 바로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깨닫고 생명을 얻는 일은 어려운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결코 사람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달린 문제냐?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네게 너를 위하여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네 증언은 참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될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그 사명을 수행하고 계신 성자 하나님, 모든 사명을 완성하고 난 뒤 다시금 성부 하나님께로 가시는 성자 하나님. 만약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저들도 영접했겠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저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육체를 따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능력을 보면서 그 능력의 출처가 어디인지, 또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의 출처가 어디인지 전혀 살펴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은 참되지만 내 판단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는 판단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만 나의 판단은 그 출처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들의 율법 해석은 육체를 따라 판단한 결과만 내놓지만, 예수님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살피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놓으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출처로 한 그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시면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요한복음 7장 34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동일한 의미를 여기서도 말씀하시는데, 내가 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승천하시는 것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그때는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좀 더 강하게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결코 오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마지막 결과를 저들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의 말씀으로, 그리고 그의 능력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그 능력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께서 가실 곳에는 함께 갈 수 없다고 선언하고 계신 겁니다. 지금은 너희들 가운데 있지만 성경의 예언을 따라 예수님은 죽을 것이고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난 뒤 이 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승천하실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아무리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여겨 영접하지 않는 이상 결국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결코 갈 수 없게 됩니다. 소위 천국, 낙원,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불리는 곳에는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이후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이후에도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부터 예언한 그리스도이시지만, 그리고 유대인들은 구약에서부터 예언한 그리스도를 찾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인데,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고 할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기 때문에 죄 용서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죄로 인하여 결국 죽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일반계시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기 때문에(롬1:20)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나는 무신론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마지막 때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 면제의 이유가 되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특별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유대인들은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대면했던 자들입니다. 그의 말씀을 들었고 그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핑계도 그들에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간혹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다는 것으로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지만, 저들이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은 것은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입니다. 말씀까지 받았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코 은혜가 부족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강퍅함을 더욱 나타낼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죽어 영원한 멸망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희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저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결하시는가? 자기 백성의 모든 죄의 짐을 자신이 대신 지시고 하나님의 저주를 나타내는 십자가 형벌을 받으심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시기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지만 의에 대하여는 살도록 하기 위해서 부활하십니다.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자기 백성의 의를 위하여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는 말씀 안에는 사실 이런 의미가 다 내포되어 있었던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이 사실을 들었지만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로,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굉장히 어리석은 말을 합니다. 22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요한복음 7장 34절에서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말씀하실 때 저들은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요7:35)라는 말로 반응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1절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하실 때 저들은 “...그가 자결하려는가” 이렇게 반응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실제로 자결하려고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지금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조롱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할 뿐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헬라인에게로 가려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못갈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그가 자결하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네 말이 맞다.”
요한복음 8장 15절에서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한다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 24절에서는 외모로 판단하는 자들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 죽을 것이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하셨다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될 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육체를 따라 판단하고 외모로 판단할 뿐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조롱하듯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얼마나 완악하지 모릅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은 왜 자신을 믿을 수 없는지, 자신의 말에 대하여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근본 원인을 설명하는데,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물론 예수님께서는 아래에서 났지만 아래에서 난 자가 위로부터 날 수 있다는 것도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하셨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깨끗하게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는 것인데, 다시 태어난다고 할 때 헬라어 ‘다시’에 해당하는 단어는 ‘위로부터’라는 뜻도 있습니다. 즉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 혹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비록 아래에서 났지만 위로부터 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에게 그런 거듭남의 역사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아래에서 난 자로 이 세상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자로 이 세상에 마음을 두고 살며 이 세상의 원리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7장 7절에서 세상이 나를 미워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할 때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이 세상은 온통 죄악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죄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세상 자체가 죄악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죄는 온 세상을 죄악으로 물들어 버릴 정도입니다. 그런 세상에 마음을 두고 산다는 것, 그런 세상의 원리로 산다는 것은 결국 죄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죄와 결별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한 예수님께 대하여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반면 예수님은 나는 위에서 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이요, 성부로부터 나신 성자이시지만,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심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셨다고 해서 이 땅의 원리로 사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도 이 땅에 속하지 않는 자로 사십니다. 온 세상이 죄로 물들어 있다고 할 때 그런 죄와 함께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원리로 사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시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살아가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소속 자체가 다릅니다. 소속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삶의 원리도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너희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너희 죄 가운데 죽는 일과, 그 결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소속은 어디이며, 여러분의 삶의 원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입니다. 다시 태어난 자요, 위로부터 난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성적으로 위에서 났지만 우리는 은혜로 위에서 난 자들입니다. 본래는 땅에 속한 자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깨끗하게 하심을 입은 자 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소속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말하며(빌3:20),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히11:13). 그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저들처럼 세상에 속한 자로 세상 원리에 따라 산다면 그것은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의 삶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한 예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비천하게 사셨다는 것도 맞지만 세상의 것이 집착하며 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시험처럼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드실 수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성전세를 내시는 부분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17:27). 즉 원하시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자로 이 세상에 매여 사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그와 연합된 우리도 사실은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조차 다 버리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집착하며 세상에 매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모든 것인 양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그 뜻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인가 고민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 살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줄 알고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며 살라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주께서 말씀하신 23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래에서 났고 이 세상에 속한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그 말은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에 속한 방식, 이 세상에 속한 원리를 버리셔야 합니다. 단적인 예이지만 세상적으로 잘 되어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들, 버리셔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결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말씀으로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능력도 있으신데 왜 굳이 그렇게 사셨겠습니까? 그렇게 사셨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본을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방식, 이 세상에 속한 원리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방식, 이런 원리가 교회의 원리요 성도의 삶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24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가 23절입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아래에서 난 자로서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한 자로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죄와 결부시켜서 말씀합니다. 아래에서 난 자들, 그리고 아래에서 난 자로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결코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너희는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나아가 메시아의 사역은 결국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라는 것까지 밝히십니다. 즉 나는 위에서 났으며 결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내려온 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너희는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너희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있으며, 오히려 조롱하듯 하면서 배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21절에서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고 말할 때는 죄가 단수입니다. 반면 24절에서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할 때는 죄가 복수입니다. 물론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차이가 있다면 21절은 너희가 나를 찾지만 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불신에 대한 죄를 말씀하고 있다면, 24절은 그런 불신의 죄가 어떤 결과를 낳는가 할 때 여러 죄악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 죄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은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빼앗아 감으로 모든 죄에 대하여 열린 문이 됩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불신의 죄는 죄에 죄를 더하여 죄만을 쌓게 되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아니하면 죄에 죄를 더하고, 죄에 죄를 쌓아 그 죄들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우리의 죄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요, 죽음으로 인하여 빛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는 저들을 반응할 수 있도록 생명의 빛을 비추시는 분, 그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지만 죄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25절을 보시면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앞선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나는 위에서 났으며, 결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이 세상에 속한 자로 결국 너희 죄들로 말미암아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를 찾고 있고 정작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수행하시고 난 뒤 하늘로 올라갈 것이지만, 여전히 나를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음으로 인해 너희는 죄만을 쌓다가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자 유대인들은 “네가 누구냐? 누구이기에 이런 말을 하느냐?”고 따집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안에서만 보자면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저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요한복음 5장, 그리고 오병이어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요한복음 6장,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 기간 그리고 그 이후 말씀하신 모든 내용들을 보면 예수님은 분명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믿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었습니다. 육체로 판단하고 외모로 판단할 뿐이었습니다.
요한복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실은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말씀해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장은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라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약 예언과 예수 그리스도를 잘 비교해 본다면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자가 예수라고 볼 수 없다는 측면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구약 선지자들이 증거 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은 율법도 알지 못하는 자요(요7:19),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자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요7:28).
이런 점에서 창세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와 관련해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지 않고도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성경의 가르침이라 할 수 없습니다.
26절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지난 시간에 본 16절 말씀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판단하더라도 그 판단이 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요 모든 율법의 입법자요 그 율법에 따라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참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참 사람이시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하여 죽으시고 난 뒤 부활하심으로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성취하십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여주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에게 주셔서 마지막 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어떻게 유대인들을 판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저들의 믿음 없음을 말씀하실 수 있고, 또한 자신의 판단에 따라 책망하시고 고발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판단보다 나를 보내신 이의 판단을 따라, 그분이 들려주시는 대로 말한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철저히 성부 하나님만 드러나길 원하셨고, 성부 하나님의 뜻만 드러나길 원하셨습니다. 그 스스로도 참되시지만 무엇에 근거해서만 자신의 참됨을 나타내고자 하셨는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참됨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어디에 출처를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물론 다 하나님을 출처로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하나님을 출처로 하고 있는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도 말로는 하나님을 출처로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출처로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출처로 한다고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출처로 한다면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지만 저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기 참되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서 들은 것을 세상에 말한다고 할 때 오늘 본문 27절은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가 저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는 것인 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지금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전혀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위에서 났다고 말씀하시고, 결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시지만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또한 이 말씀은 깨닫지 못하는 저들의 완악함까지 지적하고 있는 말씀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은 종종 하나님을 가리켜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요한복음 5장에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자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데,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고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요5:17-18). 그러므로 깨닫지 못하더란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으나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완악함까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저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8절과 29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여기서 ‘인자를 든 후에’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표현은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 언급한 바가 있는데, 거기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광야에서 불평할 때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통해 그들을 징계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놋으로 불뱀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자는 살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민21:8). 이때 놋으로 만든 불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동일하게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다시 말해 너희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후에 그제서야 너희는 내가 그인 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 모든 것을 말하게 된 것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그리고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신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과 함께 30절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뭔가 큰 변화가 있을 것처럼, 그리고 그 변화는 유대인들에게 긍정적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주의해야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31절 이하의 모든 내용은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고, 그 말씀의 끝은 59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이렇게 결과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이후 더 심각한 박해가 있게 되는데 그런 내용이 사도행전에서 소개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동안 이미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알게 된다, 믿더라는 이 표현들은 더 이상 어떤 핑계도 소용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게 된다고 해서 참된 믿음으로 나아가느냐? 물론 참된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다수가 그러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믿더라고 말하고 있지만 참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핑계도 소용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알게 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그리고 그의 부활과 승천 이후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말씀하셨다는 것도 알게 하십니다. 그는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와 함께 계시며,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을 구하는 자이기에 그런 분을 결코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하십니다. 놀라운 것은 알게 하시지만 알게 하심으로 참된 믿음을 가지는 자만 있는 게 아니라,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자도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그들이 강퍅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죄를 버리지 못하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는 만큼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고, 또한 아는 만큼 믿음에 합당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에 합당한 자세란 우리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이시고 계신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예수님 스스로 판단해도 틀리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판단보다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자신보다 하나님을 나타내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시라면 몸 된 교회 역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에 합당한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