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렬음악(Total Serial Music)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서구 음악계에서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발생하는데,그중 하나가 대부분의 작곡가들이12음 기법을 사용하면서 조성음악을 점차 포기하게 되는 점이었다.그리고 이러한12음 기법에 의한 음렬음악은1950년 이후‘총렬음악(Total Serial Music)’으로 발전한다.총렬음악이란 한마디로 음렬 기법의 소재적 범위를 더욱 확장한 것이다.즉,음렬음악에서는12음의 모든 음들의 높이만이 음렬의 소재가 되지만,총렬음악에서는 음의 높이 외에 음의 길이,음의 강도,음색,리듬,박자,아티큘레이션 등 음악의 온갖 요소에 음렬 기법의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이러한 소재들을 매개변수(Parameter)라 하는데,작곡가는 이 매개변수를 숫자화된 도표로 정리하여 고도의 산술적 방식으로 작곡을 하는 것이다. 총렬주의 음악의 주창자로는 미국의 밀턴 베비트(Milton Babbitt, 1916~ ),프랑스의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92)과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 1925~ ),그리고 독일의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1928~ )이었다.특히1949년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연주된 메시앙의〈음가와 강세의 모드(Mode de valeurs et d’intensités)〉는 네 개의 모드를 사용하여 음의 체계적 배열을 보여준 총렬음악의 대표작으로 꼽힌다.또한 불레즈의〈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구조I〉역시 음높이,음의 세기 및 음색을 음렬화하여 만든 작품으로 유명하다. 총렬음악은 당시의 작곡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지만,그 경향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산술적으로는 음영역의 모든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조절되는 극단적인 이성적 구성체를 이루지만,이러한 작품에서 들리는 실제적인 음향은 매우 무작위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또한 총렬음악에 대한 반발은 모든 음악적 매개변수의 음렬화가 인간인 연주자의 손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진다.그리하여 총렬음악은1950년대에 들어서서 새로운 음악어법인 전자음악과 우연성 음악에 의해 그 아성이 무너지게 된다. ■ 구체음악과 전자음악 총렬음악이 지닌 문제점의 돌파구는 전자매체를 이용한 음악,즉 전자음악에서 실행되었다.
20세기 전반기에 이룩된 물질문명과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삶은 물론이고 예술영역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전자음악은 1950년경부터 다양한 형태로 시도되고 있으며, 여전히 발전과정에 있다. 전자음악의 초기 형태는 ‘뮈지크 콩크레트(Musique concréte)’(구체음악 혹은 구상음악이라고도 함)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음악의 기원은1920년대 바레즈의 여러 전위적 작품이나 제1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미래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나온‘소음주의(Bruitism)’음악까지 소급되기도 하지만,일반적으로 구체음악의 창시자로는 프랑스 작곡가,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 1910~ )를 언급한다.그는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들을 수 있는,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각양각색의 소리,즉,악기 소리는 물론이고,여기에 동물의 소리,기관차 소리,소음까지를 포함한 모든 구체적인 소리를 테이프에 녹음하여,여러 가지 형태로 조작하고 편집하여 음악적 콜라주를 만든 것이다.이때 테이프에 담겨진 구체적 소리들은 테이프를 거꾸로 돌리거나,그 속도를 느리게 혹은 빠르게 조작하여 다양한 소리를 얻을 수 있고,임의대로 편집할 수 있으며,필터를 사용하여 그 음색을 변화시키기도 한다.셰페르는 프랑스 방송국의 스튜디오 소장으로 재직하며,훗날 그의 후계자가 되는 피에르 앙리와 함께1951년에〈한 남자만을 위한 심포니〉를 공개적으로 연주한 이후 많은 전자음악을 만들었다. 셰페르가 구체음악을 통해 새로운 미학을 성립시켜나갈 때,독일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전자음악이 선보였다.전자음악이란,전자기기를 조작하여 음색과 음길이,음의 세기,음높이 등을 아주 정밀하게 만들어내고,따라서 작곡가들은 연주자의 기술적 측면에 더이상 제한받지 않으면서 직접적으로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최초의 전자음악은 독일의 작곡가, 헤르베르트 아이메르트(H. Eimert, 1897~1972)에 의해 시도되었다.그는 1951년에 독일의 쾰른 방송국에 전자음악 스튜디오를 만들었으며,여기에 본 대학의 음성통신 연구소의 에플러(W, M, Eppler)와 쾰른 방송국의 엥켈이 가담하면서 전자음악의 연구를 촉진했다. 전자음악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는 슈톡하우젠을 손꼽는다.쾰른 음대를 졸업한 후 파리에서 메시앙의 문하에서 공부하고,셰페르,앙리 등과 작업을 같이 하기도 했던 그는1953년에 쾰른으로 돌아와 아이메르트의 주선으로 갓 설립된 쾰른 방송국 전자음악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면서 ‘순수한 주파수에 의해 모든 음을 합성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습작(Studien) 1, 2〉를 발표했다. 1954년에 발표된 〈습작2〉에서는 음악기보법을 고안해내고 정밀하게 발전시켜,전자음악사상 최초의 악보를 출간하기도 했다.이어서 슈톡하우젠은 에플러 밑에서 음향학,음성학,정보이론을 공부한 후, 1956년에는 〈소년의 노래(Gesang der Jünglinge)〉를 발표했다. 자연음(녹음된 소년의 목소리와 그것을 합창처럼 다양화한 소리)과 순수하게 전기적으로 만들어낸 소재음(素材音)이 사용된 이 작품은 전자음에 의한 그의 최초의 성공작이다. 이처럼 구체적인 소리를 소재로 작업을 한 이후 슈톡하우젠은 다시 전자음악에 몰두했다. 1960년에 발표한 슈톡하우젠의 〈콘타크네〉(4트랙의 전자음과 피아노 및 타악기)는 전자음악 분야에 있어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슈톡하우젠은1963년 이래 쾰른 방송국 전자음악실장으로 재직하면서 명실상부한 전자음악계의 대부가 되었다. 또한 다름슈타트 현대음악 하기 강습회,바젤,미국 그리고 1971년부터 1977년 사이에는 쾰른에서 수많은 강의를 통해서 제자를 양성하기도 했다. 그의 제자 중에서 현대음악의 주요 작곡가로 꼽히는 인물로는 볼프강 림(Wolfgang Rihm, 1952~)이 있다. <출처: 서양음악사100장면(2),pp.401~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