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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믿음과 구기종목의 공통점>의 줄거리:
복음적 믿음과 구기종목 간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바로 '탈출시키기' 입니다. 두 번째는 이를 위한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고요.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구기종목은 공을, 믿음은 마음을 탈출시키는 것과 구기 종목은 정해진 시간을 알고있지만 믿음은 시간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모른다는 것이 다른 점이지요. 여기서 문제는 믿음도 구기종목도 모두 각각 마음과 공의 탈출시키기를 방해하려는 엄청난 힘에 맞서야 한다는 점입니다.
믿음과 구기종목의 공통점
(예레미야 47:1~7)
1.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블레셋 사람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물이 북쪽에서 일어나 물결치는 시내를 이루어 그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그 성읍과 거기에 사는 자들을 휩쓸리니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그 땅 모든 주민이 울부짖으리라
3. 군마의 발굽 소리와 달리는 병거 바퀴가 진동하는 소리 때문에 아버지의 손맥이 풀려서 자기의 자녀를 돌보지 못하리니
4. 이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며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는바 도와 줄 자를 다 끊어 버리시는 날이 올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갑돌 섬에 남아 있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믿음과 구기종목의 공통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믿음과 구기종목의 공통점’
제가 이래봬도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때까지 축구시합이 있을 때마다 항상 반대표로 뽑혔습니다. 야구대회를 한다고 하면 또 반대표로 뽑혔습니다. 축구나 야구는 몸에 달고 살았다고 할 정도로 즐겨했고 반대표로 뽑힐 수 있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화가 있습니다. 경성중학교를 다닐 때였는데 방과후에 다른 반과 야구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비를 할 때에는 2루와 3루 사이에서 수비를 보는 유격수를 했고 타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을 치면 집에 가던 학생들이 가방을 내려놓고 박수를 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에는 또 농구를 좋아하게 됐는데 미군 부대에서 카투사로 복무할 때까지 이어집니다. 남한에 있는 미군부대들이 농구대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한 팀은 미군 3명과 카투사 2명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제가 부대를 대표하는 선수로 나가 뛰기도 했습니다. 드리블의 왕자라는 별명이 붙을 지경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구기종목과 믿음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축구가 시작되면 공을 가진 선수가 바로 하프라인을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편 선수들에게 공을 돌립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열한 명이 하나가 되어서 방어하는 상대의 수비를 뚫고 공을 탈출시켜야만 합니다. 방어가 강력해서 공을 탈출시키지 못하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농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섯 명이 힘을 합쳐서 공을 탈출시켜야만 합니다. 그래서 기어코 상대방의 골대 안에 공이 들어가야만 득점으로 인정이 됩니다. 야구도 다르지 않습니다. 투수의 손에서 출발한 공은 포수를 향해 날라 옵니다. 이때 타자는 방망이로 쳐서 모든 수비수의 손아귀에서 공을 탈출시켜야만 합니다.
모든 구기종목이 상대방의 방어벽을 뚫고 공을 탈출시켜서 골인이 되어야 이긴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구기종목과 믿음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복음이 말하는 믿음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기종목이 수비로부터 공을 탈출시키는 것과 똑같이 마음을 세상으로부터 탈출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수비를 뚫고 골로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복음이 주는 승리는 우리의 마음을 이 지구의 인간세상으로부터 탈출시켜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품으로 골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복음은 인간사회를 피해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종교구역 내에서 폐쇄적으로 살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몸은 세상 한 복판에서 살지만 마음만은 이 세상에서 탈출시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품으로 골인시켜야 합니다. 이 마음의 탈출은 순간순간 일어나야만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기종목을 보면 골을 넣지 못하게 하는 수비수가 있는 것처럼 믿음에도 마음의 탈출을 방해하는 강력한 방해꾼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강하게 주장한다고 해서 성립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1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구에서 탈출시켜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골인시키는 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영적으로 반복되면서 내 마음을 탈출시키고 골인시키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탈출을 방해하는 방해꾼이 있습니다. 이 방해꾼의 능력에 압도되어서 마음을 탈출시킬 수 없다면 믿음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주님!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믿음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믿음의 시작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믿음이 온전한 모습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이 지구를 탈출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골인되어야만 합니다. 구기종목의 승리 규칙과 똑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 주변에 있는 이방나라 10개국에 대한 멸망 예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앞장에서 애굽에 대한 예언이 있었고 본문에서는 블레셋에 대한 예언이 나타납니다. 이방나라들에 대한 예언은 선민의 나라와 주변국들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주변에 대해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창세기 12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음절에서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선민이 가지는 주변과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된 선민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복의 근원을 만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행운이 넝쿨째 들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선민의 존재를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인격적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삼라만상에는 항상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이 닿고 있지만 인격적인 접촉이 이루어지는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선민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인격의 기운을 말과 행동으로 방출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선민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과 사랑의 기운에 접촉하게 됩니다.
그런데 선민이 선민 됨을 잃을 때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선민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행운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기쁨과 만족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접하게 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세상 사람의 기준에서 선민은 기뻐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도 돈으로 기뻐하고 다들 돈으로 기뻐하는데 저 사람만은 이해가 가지 않는 방식으로 기쁨을 누립니다. 이러한 선민과 접하면서 하늘로 가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유다가 멸망당하게 되는 이유는 선민 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나라들에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기회가 되기는커녕, 선민의식을 잃고 오히려 그들의 문화와 종교와 관습과 가치관에 휩쓸려버렸습니다. 본래는 선민 각자가 성전의 상번제를 생활화함으로써 이 지구로부터 마음을 탈출시켜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삶이 계속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과 일치되는 삶입니다.
마음이 지구로부터 탈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표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마음이 지구를 떠남으로서만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마음이 지구를 탈출해서 하나님 품에 안긴 사람들의 자리에는 당신의 마음을 보내십니다. 유다 백성들은 선민으로써 이렇게 하나님의 인격적 기운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럴 때에 주변 국가들도 하나님의 기운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이 마음을 지구에서 탈출시키기를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적 기운을 주변으로 퍼뜨리기는커녕 주변의 문화와 종교와 관습과 가치관이 선민의 나라로 밀려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세상에 휩쓸린 끝에 선민 됨을 잃게 된 유다는 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경기로 비유하자면 결국 수비수들에 막혀서 골을 넣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선민들의 마음 탈출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수비수가 애굽이었고, 또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나라가 블레셋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애굽은 전통적인 패권 국가로써 발달 된 문화와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군사적 경제적으로도 강대국이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침 흘리며 좋아하는 가치들의 집결지였던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 또한 애굽을 동경했고 그러는 동안 지구에서 마음을 탈출시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애굽이 선민들의 골을 막는 강력한 수비수의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건강이나 출세 혹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취미 같은 것들조차 이러한 수비수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선민의 마음을 붙들고 지구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또 다른 강력한 수비수는 바로 본문의 블레셋으로 대표되는 인접한 사람들입니다. 블레셋은 선민 유다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이방족속이었습니다. 유다의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른 것도 블레셋이었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골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에는 75억 명이라는 사람이 있지만 나와 가장 많이 말다툼을 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배우자일 것입니다. 가장 많이 속을 긁는 사람은 자녀일 것입니다. 부모가 남긴 유산이 많다면 형제자매가 세상에서 가장 경계해야 될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꿈에서라도 짓밟고 앞서고 싶은 사람이 입사 동기입니다. 그렇게 사랑했지만 헤어지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떨쳐버리고 싶은 사람은 애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가까이 인접한 사람들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동안 마음이 지구에 묶이고 땅에 휩쓸립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한 지구 탈출에 실패하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마음이 이 땅을 탈출하지 못하면 믿음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시작은 했으나 온전하게 성립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성립되어야만 합니다. ‘성립 된 믿음’이란 지구를 탈출하여 하나님께 전념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믿는 사람들이 지구 탈출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이 땅에서 주어지고 만나게 되는 상황만을 현실로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삶에서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선민은 지금 여기서 하늘을 현실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 마음이 지구를 탈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 천국은 미래에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 성령님을 통해서 살아야 될 나의 현실입니다. 하늘을 지금 현실로 살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적인 믿음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믿음은 결코 십자가 복음에 근거 된 믿음은 아닙니다.
선민이 이 땅에서 사는 것은 미국의 NBA의 농구 경기를 방불케 합니다. 엄청나게 큰 덩치의 선수들이 골을 차단하기 위해서 압박을 가해옵니다. 미식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잡아 죽일 기세로 방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민에 대한 블레셋의 역할이었고 나와 인접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내 마음을 묶어 두려고 합니다.
배우자는 나의 마음이 지구를 탈출하는 것을 막고 땅에 마음을 묶어 두는 가장 강력한 수비수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좋아할 일도 없고 다툴 일도 없습니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는 동안 마음은 휩쓸리고 땅을 탈출하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나 스스로가 이 지구를 탈출해야만 되는 곳으로 생각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비가 강력해도 골을 넣을 수는 있습니다. 인접한 사람들이 내게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회사에 가면 동기들은 모두 경쟁 상대이고 상사는 별 것도 아닌 일로 괴롭힙니다. 부하직원은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이 이 땅에서 탈출하도록 돕기는커녕 이 땅에 묶어두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탈출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길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렸어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탈출한다면 직장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탈출하려는 마음 자체를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믿음도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탈출시킬 수 있을까요?
저는 NBA농구를 자주 봤습니다. 키가 2미터가 넘는 선수들이 부딪히고 나가떨어지며 수비를 뚫고 들어가 골을 넣습니다. 우리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동안에 우리는 세상의 수비를 뚫을 수 있고 백발백중의 골이 가능합니다.
얼마 전에 기사를 봤는데 어떤 선수가 최초로 10회 연속으로 3점 슛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삶에서도 이렇게 연속적인 득점을 내기 위해서는 십자가 생활화가 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NBA 선수들이 수비수를 제치고 슛을 계속 하듯이,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져야 합니다.
하루에도 수비수를 제치는 일은 계속해서 이루어집니다. 집에서는 배우자가 수비를 하고 자녀가 수비를 합니다. 직장에서는 동료들과 상사가 수비를 합니다. 내 마음이 지구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지구에 묶어 두려고 합니다. 블레셋은 유다에게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 수비를 뚫고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를 못했고 결국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이 모든 수비를 제치고 골을 넣을 수 있습니다. 하루가 끝나면 몇 골이나 넣었는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한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농구로 말하자면 골게터였습니다. 전성기의 마이클 조던과 같은 삶을 신앙에서 이루었던 것입니다.
유다와 블레셋의 관계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삶에서 인접한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수비수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래도 이 수비를 뚫고 계속 골을 넣어야만 합니다. 비록 장로님이나 목사님일지라도 마음이 지구를 탈출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을 향해 넣은 골이 하나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경기에서도 골이 들어가면 기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지구를 탈출해서 하나님 품에 골인되면 기쁩니다. 이 기쁨이 삶의 점수입니다. 목사님들이 교인들 문제에 시달리고, 예배당 건축에 마음이 묶여있다면 골을 넣을 수도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양편에 강도들이 함께 달렸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2~43절을 보면 한 강도와 예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강도는 생애 마지막에 한 골을 성공시킨 것입니다.
농구에서는 경기 종료를 알리는 부저가 울리기 직전에 공을 던지면 그것을 슛으로 인정해줍니다. 공이 날아가는 동안 부저가 그쳤어도 골이 들어가면 점수로 인정이 됩니다. 이 강도의 고백이 경기 종료 직전의 슛과 같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죽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농구 선수가 경기 중에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수비를 뚫고 골대를 향해 공을 던지는 것처럼, 우리는 인접한 사람들에 의해서 마음이 묶이지 않도록 계속해서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이렇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마음을 계속해서 지구에서 탈출시키고 하나님께 골인시키는 것을 죽기 직전까지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각오로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 이 땅에서의 삶은 완전히 하나님이 장악하시고 책임지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기장에 들어간 선수가 해야 하는 일은 경기가 끝나기 전에 최대한 많은 골을 넣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지구에 몸을 입고 사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마음이 지구를 탈출해서 하나님 아버지 품에 골인시키는 횟수를 늘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지구는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보다 하나님 사랑을 실습하고 증명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족적을 남기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골게터가 되는 것입니다. 경기에 나간 선수들이 수비를 뚫고 골을 넣듯이, 우리는 마음을 잡아두려는 세상의 수비수들을 뚫고 하나님께 골을 넣어야 할 것입니다. 애굽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가치들이 수비수이고 블레셋으로 상징되는 주변의 사람들이 수비수입니다. 이 수비수들이 좋아하게 하든 싫어하게 하든 내 마음을 세상에 묶어두려고 할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오늘도 마음은 지구를 탈출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품에 골인하여 높은 점수를 기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마이클 조던이 수비수들의 방어벽을 뚫고 골을 성공시킨 것처럼 오늘 하루 종일 나와 인접해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땅에 묶어두려고 할 때에, 십자가 생활화에 목숨을 걸고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 골인시키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