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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휘(諱)는 종저(宗著)이고 자(字)는 경숙(褧叔)이며 자호(自號)는 간재(艮齋)이다. 만년에 종남산(終南山) 아래의 청학동(靑鶴洞)에 살면서 다시 호를 남악(南岳)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한양 조씨(漢陽趙氏)는 승국(勝國, 고려를 말함) 때부터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며 전해왔는데, 원조(遠祖)인 조지수(趙之壽)는 첨의중서(僉議中書)를 지내고 쌍성 총관(雙城摠管) 조휘(趙暉)를 낳았다. 조휘가 낳은 조양기(趙良琪)가 습작(襲爵)하여 용성군(龍城君) 조돈(趙暾)을 낳았으며 이어 대대로 훈벌(勳閥)이 있었다. 조돈은 용원 부원군(龍源府院君) 조인벽(趙仁璧)을 낳았는데, 그는 태조(太祖)의 자부(姊夫)로서 흥왕(興王)의 운수를 만나 세상을 피하여 은거함으로써 절의(節義)를 온전히 하였으며 시호(諡號)는 양렬(襄烈)이다. 그가 조연(趙涓)은 낳았는데, 조연은 국초(國初)의 좌명 공신(佐命功臣)에 책훈(策勳)되어 한평 부원군(漢平府院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양경(良敬)이다. 그로부터 6세(世)를 전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조응문(趙應文)에 이르는데, 이가 선생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조영남(趙榮男)으로 일찍 요절하여 벼슬하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조간(趙幹)인데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를 지냈다. 아버지는 조중려(趙重呂)인데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문장(文章)에 능하고 지극한 행실과 뛰어난 식견이 있었고 호(號)는 휴천(休川)이다.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신경진(申景珍)의 딸이자, 판서(判書)를 지낸 문절공(文節公) 신상(申鏛)의 현손녀(玄孫女)이다. 숭정(崇禎) 4년인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7세 때에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다. 나의 선조(先祖)인 지천공(遲川公, 최명길(崔鳴吉)을 말함)이 선생을 가르쳐 주었는데 매우 장려하고 추허(推許)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660년 현종 원년)에 국상(國庠, 성균관을 말함)에 올랐는데, 유림(儒林)의 중대한 글은 반드시 선생이 짓도록 돌아갔다. 예컨대, 성혼(成渾)과 이이(李珥) 두 선현(先賢)을 문묘에 종사(從祀)하자는 상소문과 송(宋)나라의 세 선현을 계성묘(啓聖廟)에 종사하자는 상소문과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부묘(祔廟)하자는 상소문 등이 대부분 선생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정미년(丁未年, 1667년 현종 8년)에 한인(漢人) 90여 명이 배를 타고 탐라(耽羅, 제주도를 말함)에 표류하여 왔는데, 조정의 논의가 장차 이들을 잡아서 연경(燕京)으로 보내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은 붓을 휘둘러 수천 마디나 되는 상소문을 기초(起草)하여 그 불가함을 극력 진언하였고, 이어 별지(別紙)를 갖추어 은밀히 계책(計策)을 논하였는데, 곧이어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자 그 아들인 조의징(趙儀徵)으로 하여금 후사(喉司, 승정원의 별칭)에 투진(投進)하게 하였으나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점을 쳐보니 간지고(艮之蠱)가 나오므로 마침내 그 재명(齋名)을 간재(艮齋)라고 편액(扁額)하였다.
기유년(己酉年, 1669년 현종 10년) 가을에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가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그만두었고, 임자년(壬子年, 1672년 현종 13년)에 복기(服朞)를 마치고 다시 제수되었으며, 그해 겨울에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뽑혀 괴원(槐院)에 분속(分屬)되었고 전적(典籍)에 승진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기었다. 얼마 뒤에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로 옮겼는데, 그 당시에 금상(今上, 숙종을 말함)이 춘궁(春宮, 동궁(東宮)의 별칭)에 있으면서 두창(痘瘡)을 앓았으므로 강연(講筵)을 폐한 것이 서너 달이나 되었는바, 선생이 소를 올려 그 불가함을 진언하고 궁료(宮僚)들이 재실(齋室)에 숙직(宿直)하며 진강(進講)하도록 청하니, 현묘(顯廟)께서 비답을 내려 가상히 장려하고 그대로 따르게 하였다. 선생이 서연(書筵)에 올라 강설(講說)할 때 경서(經書)의 뜻을 명확히 분석하고 간간히 사승(史乘)을 섞어 말하였는데, 세자를 개발(開發)하고 증향(證嚮)하려고 하여 번번이 해가 기울 때까지 계속하였는데, 세자가 자못 마음을 기울여 들었다. 선부(選部, 이조(吏曹)를 말함)가 선생을 간헌관(諫憲官)에 의망(擬望)한 것이 전후로 십수번이나 되었는데 끝내 옮겨가지 않았으니, 이는 현묘께서 선생을 강관(講官)에 오래 있게 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이듬해에 문학 겸 지제교(文學兼知製敎)에 승진하였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이배(移拜)되었는데, 공이 지은 응제문(應製文)이 임금의 뜻에 거슬리어 경상 도사(慶尙都事)에 제수되었으나 수재(守宰, 수령(守令)을 말함)에 친혐(親嫌)이 있어서 부임하지 않으니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현묘께서 승하하자 행장 찬집청(行狀撰集廳)의 낭청(郎廳)에 차임(差任)되어 기성(騎省, 병조의 별칭)으로 옮겼다. 금상(今上, 숙종을 말함)이 새로 즉위하여 초상(初喪) 때문에 경연(經筵)을 폐지하자 선생이 상소하여 충년(沖年)의 강학(講學)이 시급하니 거상(居喪) 때문에 독서를 폐지함은 예의(禮意)가 아니다고 진언하였으며, 이어 ≪충년귀감(沖年龜鑑)≫을 찬집(撰集)하여 올리니, 임금께서 우악한 답을 내리고 말의 가슴걸이[馬纓]를 포상하였고 또 정언(正言)에 임명하였다. 기전(畿甸, 경기(京畿)를 말함)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복토(復土)하느라고 시달리는데 북사(北使, 청나라의 사신을 말함)의 수레가 잇따르자, 선생이 계청(啓請)하여 환곡의 독촉을 완화하고 이듬해 조세(租稅)의 절반을 감해주도록 하니, 임금이 조정에 의논하지도 않고서 모두 그대로 따라주었는데, 두 해의 조세를 감해준 수량이 거의 수만 곡(斛)이나 되었으므로 기전 백성들이 그 혜택에 힘입었다.
을묘년(乙卯年, 1675년 숙종 원년) 봄에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임명되어 호서(湖西)의 시험을 관장하였다. 가을에는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가서 묵은 폐단을 씻은 듯이 제거하여 온 경내가 공의 선정을 칭송하였고, 어사(御史)가 그 치적이 가장 뛰어나다고 보고하였으며,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워 추사(追思)하였다. 그 이듬해 겨울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소명(召命)을 받았는데, 서울에 이르기 전에 병이 들어 사직하자 체직되었다.
정사년(丁巳年, 1677년 숙종 3년) 여름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제수되어 헌납(獻納)으로 옮겼는데, 그 당시에 상국(相國) 김수흥(金壽興)이 예제(禮制)를 논한 일로 찬적(竄謫)되었다가 한 해를 넘기자 서용(敍用)하라는 명이 있었는바, 대신(臺臣)이 바야흐로 그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선생은 인피(引避)하고서 동참하지 않았다. 곧이어 또 호남(湖南)에 가서 시험을 관장하였고 도중에 헌납에 임명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체직되었으며, 이로부터 문을 닫아걸고 병을 핑계 대고서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다. 무릇 수찬(修撰)에 임명된 것이 다섯 번이고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된 것이 세 번이고 지평(持平)과 종정(宗正)에 임명된 것이 각각 한 번이고 사성(司成)에 임명된 것이 두 번이었는데,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 여름에 비로소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임명되어 사성(司成)과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옮겼고, 또 구반(舊班)에 들어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는데, 대관(臺官)이 공을 무고하고 비방하는 말을 주워 모아 갑자기 논핵하여 체직되었다. 연이어 사성(司成)과 군자감(軍資監)ㆍ봉상시(奉常寺)ㆍ사도시(司
寺)와 헌납(獻納)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광릉(廣陵)에 물러나 지낸 기간이 7년이나 되었는데, 소연(蕭然)히 서사(書史)로써 자오(自娛)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686년 숙종 12년)에 사간(司諫)에 임명되자 상소하여 공신(功臣)의 후예로서 모속(冒屬)한 자들에게 속전(贖錢)을 징구(徵求)하는 일이 올바르지 못함을 논하니, 임금이 그 논의를 묘당(廟堂)에 내리어 마침내 베를 징수하라는 명이 중지되었다.
그 당시 선생의 지인(知人)과 친구들이 선생의 위차(位次)가 승진이 늦은 까닭에 선생에게 서울에 있으면서 진취(進取)하도록 권유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노소(老少)가 서로 미워하고 유림(儒林)이 서로 시끄러우니 화가 곧 일어날 것이다.” 하고서 마침내 병을 핑계대고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이로부터 사간(司諫)ㆍ집의(執義)ㆍ사성(司成)에 누차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전조(銓曹)가 선생의 결심이 확연(確然)하여 다시 나올 뜻이 없음을 알고서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제수하니 선생이 탄식하기를, “이것은 오히려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 하고서 부임하여 백성들을 도와 학교를 흥기시키는 등 양양(襄陽)에 재임할 때와 똑같이 다스렸다. 그 당시 영서(嶺西)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선생이 상소하여 봄철 대동미(大同米)를 감해달라고 청하였고 또 서울의 곡물을 실어다가 구제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니, 임금께서 모두 그대로 따라주었으며, 방백(方伯)이 공의 치적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 봄에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품(陞品)하여 포상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당시 시사(時事)가 갑자기 변하였으므로 선생은 이미 벼슬을 그만둘 생각이 있었다. 급기야 성혼(成渾)과 이이(李珥) 두 선현을 문묘(文廟)에서 출사(黜祀)하게 되자 선생은 병을 핑계대고 즉시 봉행(奉行)하지 않았고 그 일로 죄를 얻어 파직되니, 회양(淮陽)의 백성들이 금석(金石)에 새기어 공의 은혜를 기념하였다. 선생은 평소부터 풍증(風症)을 앓았는데 마침내 경오년(庚午年, 1690년 숙종 16년) 정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은 60세였다. 양주(楊州)의 치소 북쪽에 있는 이계리(伊溪里)에 장사지냈는데, 곧 선대부(先大夫) 묘소의 북쪽 산기슭이라고 한다.
선생은 안동 김씨(安東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은 고려의 명신(名臣)인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김태기(金泰基)의 딸이다. 3남을 낳았는데, 장남 조의징(趙儀徵)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 승지(前承旨)이고, 그 다음은 조의봉(趙儀鳳)과 조의상(趙儀祥)이다. 승지(承旨)는 군수(郡守) 유명재(柳命才)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조진희(趙鎭禧)와 조진조(趙鎭祚)이고, 딸은 홍석보(洪錫輔)에게 시집갔다. 조의봉의 전취(前娶)는 승지(承旨) 윤빈(尹彬)의 딸인데 자식이 없고, 후취(後娶)는 사인(士人) 박성익(朴成翼)의 딸인데 1녀를 낳았으며, 조의상은 사인(士人) 여필승(呂必升)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화이(和易)하여 남들과 얘기할 때에는 부드럽고 온화하였으나 그 조수(操守)는 매우 확고하였다. 생김새는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속마음은 매우 폭이 넓고 치밀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인 신 부인(申夫人)을 봉양하면서 물심 양면으로 효성을 다하였고, 고모(姑母)를 어머니와 똑같게 섬기고 백씨(伯氏, 맏형을 말함)를 매우 조심스럽게 섬기었으며, 여러 조카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보살폈다. 마음가짐은 용서(容恕)함을 위주로 하였고 사물을 접함에 있어서는 진실하게 임하였으며, 치우치고 각박한 논의와 거짓으로 꾸미어 과격한 행동은 자신이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이 이에 가까운 언행을 하는 것을 보더라도 또한 못마땅하게 여기어 즐거워하지 않았다.
나이가 약관(弱冠)이 되기도 전에 개연히 학문에 뜻을 두어 사자(四子, 사서(四書)를 말함)와 여러 서적들을 가져다가 숙독(熟讀)하고 깊이 연구하였다. 포저(浦渚) 조 상국(趙相國, 조익(趙翼)을 말함)을 따라 강마(講磨)하였는데, 포옹(浦翁)이 선생의 견해가 뛰어나다고 허여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고질병 때문에 중도에 그만두었다. 그러나 항상 글과 책을 좋아하여 서책에 대해서는 열람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젊어서는 창려(昌黎, 당대(唐代)의 한유(韓愈)를 말함)와 좌씨(左氏, 좌전(左傳)을 말함)를 좋아하였고 이윽고 백가(百家)를 관통하여 스스로 독특한 경지를 열었으며, 항상 불후(不朽)의 사업으로써 스스로 기약하였다.
글재주에는 하늘로부터 타고났는데, 문사(文辭)는 한유(韓愈)에게서 취재(取裁)하였고 이치는 주자(朱子)를 근본으로 삼았으며, 장소(章疏)를 지으면 능히 명확하고 개절(剴切)하여 반드시 사정(事情)을 분명히 가리켜 말하고 임금을 깨우치게 함을 주지(主旨)로 삼았으니, 이야말로 이른바 세상을 경륜하는 글이었다. 약천(藥泉) 남 상공(南相公, 남구만(南九萬)을 말함)이 일찍이 선생의 응거문(應擧文, 과거에 응시하여 지은 글)의 문자(文字)가 까다로운 것을 병통으로 여겼는데, 선생이 산작(散作)한 고문(古文)과 장소(章疏) 등이 공령(功令)과 크게 다른 것을 보고서는 마침내 마음으로 허여하였다. 시를 지음에는 한 가지 격식에만 매달리지 않았는데, 젊었을 때 지은 것은 (당(唐)나라) 온정균(溫庭筠)과 이상은(李商隱)의 정수(精髓)에 핍진(逼眞)하였고 만년에는 오언 고시(五言古詩)를 공부하여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의 요체를 깊이 음미하였으며, 근체시(近體詩)로 말하자면 백거이(白居易)처럼 평이(平易)하고 소식(蘇軾)처럼 준일(俊逸)하였으므로, 당대(當代) 문단(文壇)의 거장(鉅匠)들도 대부분 선생에게 일두지(一頭地)를 양보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계곡(溪谷, 장유(張維)의 호)은 글에 있어서 법품(法品)을 얻었고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호)은 묘품(妙品)을 얻었고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의 호)은 신품(神品)을 얻었는데, 공의 글도 또한 신품에 들어갈 만하다.” 하였다고 하니, 독론(篤論)하는 자는 이 말을 취하여 절충할 것이다. 저술한 시문(詩文)은 ≪남악고(南岳稿)≫ 십수 편(編)과 간재신사(艮齋新笥) 1권(卷)이 있어 집안에 소장하고 있다.
선생은 기억력이 남보다 특출하였는데 특히 사전(史傳)에 뛰어났다. 정형(情形)을 가늠하여 헤아리고 의리에 근거하여 요컨대 실용(實用)에 귀결(歸結)하였으며, 역대(歷代)의 연혁(沿革)과 전고(典故)ㆍ법률(法律)로부터 중국(中國) 산천(山川)의 험조(險阻)에 이르기까지 두루 관통하여 환하게 이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심기(深機)와 원식(遠識)이 있어서 시사(時事)를 가리켜 말할 때에 오래 지난 일일수록 더욱 분명하게 징험하였고, 변방의 낌새나 적(敵)의 형세를 논하여 헤아리면 때때로 짐작으로 판단하더라도 기묘하게 들어맞았으니, 이는 계고(稽考)의 힘으로만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축전(竺典, 불경(佛經)을 말함)과 패설(稗說)에 대해서도 또한 모두 섭렵하여 영회(領會)하였고, 승제(乘除)ㆍ성명(星命)ㆍ감여(堪輿)ㆍ의약(醫藥)의 제가(諸家)에 대해서도 곁들여 통달한 바가 많았으나, 일찍이 스스로 지식이 많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남을 가르치는 데는 재능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어 넓게 비유하고 잘 유도(誘導)하여 배우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터득함이 있도록 해주었으며, 비록 처음 배우기 시작하여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또한 반드시 자세히 개도(開導)해주고 조금도 해태(懈怠)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동몽(童蒙)으로서 선생에게 글을 배워 과거에 합격한 자들이 매우 많았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는 청렴한 생활로 자신을 검속하고 성실한 태도로 일을 다스리고 명철한 식견으로 간사(奸邪)를 살폈으며, 백성들을 위하여 이익을 일으키고 해악을 제거함에 있어서는 매우 부지런하여 마치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픈 것처럼 하였다. 세금을 관대하게 매기고 부역을 덜어주었고, 비용을 남기려고 애쓰지 않았는데도 저축(貯蓄)이 가득 찼으며, 일을 구획(區劃)하고 처치(處置)함에 있어서 가까운 시일 안의 효과를 바라지 않고 장원(長遠)한 효과를 거두도록 사려(思慮)하였으니, 비록 고을을 잘 다스린다고 소문난 자일지라도 선생의 다스리는 방도를 들으면 문득 눈이 휘둥그래지어 추허(推許)하고 감복하였다.
젊었을 때 다리에 종기(腫氣)를 앓았는데 여러 번 목숨이 위험한 상황까지 이르러 병석에 누워 지낸 기간이 수십 년이나 되었으나 능히 보색(葆嗇)하고 절선(節宣)하여 말년에는 정신이 강무(强茂)하였으니, 대체로 그 섭양(攝養)하는 데 좋은 방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석에 있을 때에 저서(著書)를 후세에 남기려고 뜻을 세우고서 우리나라 군신(君臣)이 행한 일을 망라(網羅)하여 야사(野史)를 편찬하였으나 기초(起草)만 하고서 책으로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평소 집에 있을 때에는 점잖게 청좌(淸坐)하여 종일토록 책을 보았고 일찍이 남을 찾아가 일을 부탁한 적이 없었으며, 성품이 검약(儉約)함을 좋아하여 외물(外物)로서 몸을 봉양하는 것에 있어서는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편안하게 여기었다. 사는 집에 먼지가 자리에 가득하게 쌓이더라도 태연하게 지냈다. 일찍부터 당세(當世)에 뜻이 있어서 고금(古今)을 두루 연구하고 왕패(王霸, 왕도와 패도를 말함)를 모두 절충하였으며, 항상 임금의 위엄을 높이고 붕당을 없애어 국가의 형세를 진기(振起)하려고 하였다. 조정에 벼슬한 이래로 조정의 논의가 화합하지 못하고 놀라운 조짐이 누차 벌어지는 것을 보고서 번번이 낌새를 알아채어 멀리 떠나갔으며, 혹은 군읍(郡邑)을 다스리며 서성거림으로써 스스로 자취를 숨겼으므로, 그 내면에 쌓은 것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였으니, 아까운 노릇이다.
선생이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선조(先祖) 지천공(遲川公, 최명길(崔鳴吉)을 말함)이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과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의 국난(國難)을 당하여 능히 화의(和議)를 주장함으로써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고 징병(徵兵)을 거절함으로써 대의(大義)를 부식(扶植)하였으니, 옛사람의 경권(經權, 원칙과 권도(權道)를 말함)에 합치된 일이다.” 하였다. 선생이 정미년(丁未年, 1667년 현종 8년)에 올린 상소를 살펴보면, 간관(諫官)이나 어사(御史)로서 언책(言責)이 있지 않았는데도 논의를 주관하는 자들의 시기(猜忌)를 돌아보지 않고서 항론(抗論)해 마지않았으니, 그 말이 비록 채용되지 않았더라도 그 민이(民彝)를 수립(樹立)하고 의성(義聲)을 확장(擴張)한 것이 컸다고 하겠다. 생각건대, 선생의 이 상소는 나의 선조가 부의(扶義)한 일과 전후로 똑같은 맥락이었다. 그 심사(心事)와 의론(議論)이 저술(著述)에 보이므로 후세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선생은 나의 선군(先君) 동강공(東岡公, 최후상(崔後尙))과 더불어 계허(契許)가 가장 깊어서 옛 (후한(後漢) 때의) 범식(范式)ㆍ장소(張劭)의 유사(遺事)와 비슷하였는데, 선군이 불행히 중년에 세상을 떠나자 선생은 절현(絶絃, 절친한 벗의 죽음을 말함)의 애통함이 있었으며, 생전에 서로 전(傳)을 지어주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선생에게 글을 청하여 선군 묘소에 명(銘)을 썼었다. 선군이 세상을 떠나신 지 10년 뒤에 선생을 곡(哭)하였고, 나도 이제 머리털이 희끗희끗 세어 시들었는데, 선생의 윤자(胤子)인 승지군(承旨君, 조의징을 말함)이 나에게 가장(家狀)을 주면서 선생의 묘지명을 지어달라고 하니, 어찌 슬프게 눈물이 흐르지 않겠는가?
기억하건대, 내 나이 13세 때에 선생에게 ≪좌씨전(左氏傳)≫을 배웠고, 또 독서하고 역사를 살피는 법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들을 수가 있었는데, 선생께서는 글을 읽을 때마다 길게 읊으면서 천천히 음미하여 여미(餘味)가 있었으므로, 듣는 자들이 그 피곤함을 잊었다. 남을 가르치는 것이 깨닫기가 쉽고 비유가 깊어서 언어(言語) 너머에서 터득할 수 있었다. 또한 이로써 선생을 기억하건대, 부친의 벗이자 사표(師表)였으므로, 지금 묘지명을 기술하는 일을 의리상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가 없기에, 삼가 위와 같이 차례로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아! 선생께서는 충화(冲和)하게 도(道)가 있는 듯하셨고, 잊어버리듯 아무 영위(營爲)가 없는 것 같았네. 돈복(敦復)하여 스스로 고구(考究)하고 세속을 따라 부앙(俯仰)하지 않았네. 초현(草玄)의 각소(却埽)를 즐기고 엄이(顩頤)의 상경(相傾)을 비웃었네. 창성함을 사절하고 늙어가니 백씨(百氏)의 정화(精華)를 주워 모았네. 강한(江漢)처럼 넓고 넓으니 사라질 수 없는 것이 이름이네. 뒤에 죽는 자가 나아오거든 후세에 옛일을 살피어 징험하리라.
[네이버 지식백과] 조종저 [趙宗著]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