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구호 이공 묘갈명〔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龜湖李公墓碣銘〕
영종조(英宗朝)에 호서 육군자(湖西六君子)라 일컬어지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분이 구호(龜湖) 이공(李公)이다. 나는 공에게 내종제(內從弟)가 되므로, 공을 나만큼 상세히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공은 천성이 담박하고 평화로운 데다 진실함을 더하여 평소 성내는 기색을 보지 못했고, 사람과 교유할 때는 나이와 관계없이 성의껏 대접하였으니, 마치청렴하게 하되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 것같았다. 그러나 식견이 고명하고 판단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과거 시험장에서 처신을 바꾸고 권문(權門)의묘지에서 구걸하여일자반급(一資半級)이라도 얻는 동년배를 보면밖으로 뛰쳐나가 먹은 것을 토해 버리고 싶어 했고,언행에 잘못이 있는 친지를 보면 번번이 온화한 말과 안색으로 거듭 타일러 스스로 뉘우치고 스스로 고치게 하였다.
공은 40년 동안 산림에서 지내며 입 밖으로 사환(仕宦벼슬살이)이라는 두 글자를 내지 않았다. 때로 관직에 제수하는 교지가 있으면 분수에 따라 나가서 명에 응하여 남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다. 문장에 해박해서 당시 세상에 짝할 이가 적었으나 마치 무능한 것같이 겸손하였으니, 아는 자는 드물고 모르는 자는 많았다. 무릇 이러한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행동은 집안에서의 품행이 그 근본이 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것을 일에 응하고 사물을 접하는 데까지 확장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나는 일찍이 탄식하기를“군자로다, 이 사람이여.”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한 도(道)의 사론(士論)이 그 마음을 같이하고 출처(出處)를 같이한 6인을 모아 한마디 말로 칭송하여 군자라고 하였으니, 이에 공이 군자인 것을 알았다. 나같이 혈연관계가 가까워 종형제(從兄弟)가 되는 자가 그것을 알 뿐만 아니라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한 도의 선비들이 보고 감화되어 사모하고 우러르며 도모하지 않아도 한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군자라고 일컫는 것은 모두떳떳한 본성을 가지고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아, 성대하도다.
공의 휘는 수일(秀逸)이고, 자는 자준(子俊)이며, 구호는 호이다. 이씨(李氏)의 조상은 한산(韓山)에서 나왔고, 고려 말기에 가정(稼亭) 문효공(文孝公) 휘곡(穀)과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휘색(穡)이 있었다. 목은이 계자(季子)인 양경공(良景公) 휘종선(種善)을 두었다. 그의 아들 휘계전(季甸)이 문열공(文烈公)이다. 그의 아들 휘 우(堣)는 대사성에 올랐다. 그의 아들 휘 장윤(長潤)은 현감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그의 아들 휘 치(穉)는 판관(判官)을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그의 아들 휘지번(之蕃)은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되고 한천부원군(韓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성암(省菴)인데, 퇴도(退陶) 이자(李子이황(李滉))와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었다. 그의 아들 휘 산해(山海)는 영의정을 지내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아계(鵝溪)로서, 실로 선조조(宣祖朝)의 명신(名臣)인데 곧 공의 7대조이다. 그의 아들 휘 경전(慶全)은 좌참찬을 지내고 한평군(韓平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석루(石樓)이다. 휘구(久)는 한림을 지냈고 호는 후곡(後谷)인데, 그 백씨(伯氏) 이랑공(吏郞公)후(厚)와 함께 문장과 명성이 한 시대에 진동했으나 불행히 단명하였다. 이분들이 공에게 6대조와 5대조가 된다.
고조 휘 상빈(尙賓)은 진사이고 시에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말이 있었으나 역시 젊은 나이에 죽었다. 증조 휘 운근(雲根)은 현감을 지냈다. 조부 휘 덕운(德運)은 주서(注書)로서 한림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이 정랑에 그쳤다. 아버지 휘 성(宬)은 지극한 품행이 있었으나 드러나지 않았다. 어머니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된 채성윤(蔡成胤)의 따님으로서 현명하고 대단히 총명하였다. 숙종 을유년(1705, 숙종31)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적에 총명하고 빼어났으며 얼굴이 수려하고 신채(神采)가 혁혁하게 빛나서 사람 눈에 잘 띄었다. 공이 성장하자정랑공(正郞公)이 글공부와 책 읽기를 엄격히 시켰는데, 여름에는 해가 질 때까지 겨울에는 밤이 새벽에 이를 때까지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아경사자전(經史子傳)을 통달하여 환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정랑공이 세상을 떠나자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죽은 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한다.’했는데, 내가 조부께서 돌아가셨다고 해서 조부께서 정해 준 과업을 폐한다면 이는 조부를 잊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휘장을 드리우고 글을 읽었는데, 아침마다 궤연(几筵)을 살피고 글 외우기를 평소처럼 하다가 대상(大祥)이 지나서야 그만두었다.
외조인 찬성공(贊成公)이 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시를 주어 말하기를,
관면은강좌의 벌열처럼 추앙받고 / 冠冕已推江左閥
문장은 일찌감치건안의 울타리에 올랐네 / 文章早躡建安藩
하였으니, 공이 일찌감치 성취한 것이 이와 같았다.
병진년(1736, 영조12)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공은 이미 3세 때 어머니를 여의어 매양“효도하려 한들 누구에게 효도하겠는가.”라는 말을 읊게 된 처지를 종신(終身)의 한으로 여겨 계모를 섬기는 데에 더욱 정성을 들이고 신중을 다하였다.
경신년(1740)에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뽑혀 승문원에 부직(付職)되었는데, 승문원의 하리(下吏)가면신(免新)을 해야 한다고 고하자, 공이 말하기를 “어찌 면신을 한단 말이냐.” 하고, 드디어 호연(浩然)히 남쪽으로 돌아갔다.
갑자년(1744) 이후로 잇따라 능관(陵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정묘년(1747)에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에 제수되었을 때는 시를 읊으면서 세월을 보내며 오직 역(驛)의 폐단을 살폈다.
기사년(1749)에 과거에 급제한 뒤에 기한이 차서 6품으로 올라 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가 예조 좌랑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제수되었으나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서를 올려 체직되었다.
신미년(1751)에 병조 좌랑으로 옮겨졌다.
병자년(1756)에 지평,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장령으로 승진하였다.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에 제수되었는데, 또한 모친이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무인년(1758)에 장령에 제수되었다. 이때에소조(小朝)에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했는데,서연(書筵)에서 공이 건의한 말에 대해 대조(大朝)에서 골자(骨子)가 없다고 하며 공을 파직하였다가곧 서용(敍用)하여 사성(司成)에 제수하였다.
기묘년(1759)에 옥구 현감(沃溝縣監)에 제수되었다. 이때 임피 현령(臨陂縣令) 김치량(金致良)이 숙부인 역적김재로(金在魯)의 세력에 의지하여 이웃 고을을 짓밟으며 까닭 없이 읍비(邑婢)를요구했는데,공이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김치량이 드디어 크게 유감을 품고 몰래 도백(道伯)에게 압력을 가하여 공을하고(下考)에 두게 하고, 역적 김재로가 다른 죄를 얽어서 형벌을 남발하고 끝내 공을 공주(公州)에도배(徒配)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상신(相臣)민백상(閔百祥)이 공의 억울함을 아뢰어 공이 돌아올 수 있었다. 이어서 장령에 제수되자 공이〈팔조소(八條疏)〉를 올려 권면하니,영조가 비답을 내려 가상히 여기고 또한 교서(敎書)를 내려 이르기를 “그 사람의 외모가 순수하고 근실한 것을 보니, 참으로 글을 읽은 사람이다.” 하였다.
갑신년(1764)에 보령 현감(保寧縣監)에 제수되었다. 보령은 공에게는 선영이 있는 고장이므로, 봉록은 박하지만 종족들과 함께 나누었으니, 공이 나누어 주는 것을 기다려서야 밥 지을 불을 지핀 자가 몇 집인지 셀 수 없었다. 이때 영조가, 시종신으로 있다가 수령이 된 자들에게 각각 그 고을의풍요(風謠)를 올릴 것을 명했는데, 공이 지은 것이 여러 도(道)에서 으뜸이므로 병풍에 그림으로 그리라고 명하고 완상하였다.
병술년(1766)에 내직으로 옮겨 대각(臺閣)에 들어갔다.
기축년(1769)에 계모의 상을 당하였다. 공은 이미 늙은 나이였으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상례를 다하였다.
신묘년(1771)에 상복을 벗었다. 잇따라 대각의 직책 및 상례(相禮), 통례(通禮)에 제수되었다. 공은 관직에서 파면될 때면 서울에 머물러 있은 적이 없고 번번이 향촌으로 내려갔다.
임진년(1772)에 다시 납언(納言헌납)에 제수되었다. 이때 조정에서후정시(後庭試)를 시행했는데 공의 아들 주명(柱溟)이 마침 합격하였다. 시임(時任) 대각의 아들이 응시했다 하여 상이 엄한 하교로 그를 탈락시키고 이어서 공의 관직도 삭탈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특별히 용서하여 집의로 승진시켰다.
계사년(1773)에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사간(司諫)으로 옮겨졌다. 공이 경연에서 아뢸 적에, 영조가 가문의세덕(世德)과 연기(年紀)를 물어보고 특별히 동부승지에 제수하면서 분부하기를 “고상(故相이산해)은 곧 목릉(穆陵선조(宣祖)) 때의 명신이다. 나는 매번 그를 별호(別號)로 불렀다.” 하고, 공에게 명하여《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및 《아계집(鵝溪集)》을 가져와 앞에서 읽게 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승선(承宣)은 곧 인원성모(仁元聖母)의 지친(至親)인데,내가 아직까지 몰랐단 말인가. 그리고 왕명 출납(出納)을 익숙하게 해서 마치 익히 승지를 해 본 자 같으니, 가상하다. 만일 이번 제수가 없었다면 조정에서 누가 이와 같은 사람을 천거했겠는가.” 하며, 오랫동안 탄식하고 한탄하였다.
공은 성상께 선발되면서부터 은혜를 전에 없이 많이 받았으나 서울에 오래 머무는 것은 평소의 뜻이 아니었으므로 사직서를 올리고 향리로 내려가서, 마침내 기해년(1779, 정조3) 9월 1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5세이다. 11월에 보령 칠현(漆峴)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나의 선군(先君)은 인물을 품평하고 감식하는 눈이 본래 높아서 사람을 허여하는 일이 적었는데, 유독 마음으로 공을 자랑하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수일(李秀逸)의 넓은 학문과 높은 식견은 참으로 문단의 고수이고, 그 밖에 산천(山川)의 맥락과 도리(道里)의 원근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중국에 대해서도 평소 왕래하는 사람처럼 모두 알며,성력(星曆)의 영허지수(盈虛之數)와용요(龍繇)의 가배지법(加倍之法)에 이르러서도 묻기만 하면 바로 응답하였으며 통달하여 환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기이하고 기이하다.” 하였다.
국포(菊圃) 강공(姜公)도 역시 국기(國器)로 공을 대접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이수일의 문학은 속유(俗儒)의 것이 아니니, 우리가 마땅히 한발 양보해야 한다.” 하였다. 공이 젊어서부터 선배의 추천을 받은 것이 이미 이와 같았다.
일찍이 공이대비과(大比科)가 있는 해를 만나 향촌에서경시(京試)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다가, 도중에 평소 잘 아는 친구 중에 향시(鄕試)를 관장하게 된 자를 만났다. 그 친구가 공을 만류하며 말 머리를 돌려 향시에 응시하게 하여보배를 버려두지 않으려고 했으나공은 끝내 달가워하지 않고 말에 채찍질하여 서울로 갔으니, 공이 처세한 시초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숙부인(淑夫人)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진사 한종욱(韓宗煜)의 따님으로, 부윤(府尹) 한명상(韓命相)의 손녀이다. 숙부인은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공보다 10년 뒤인 무신년(1788) 9월 13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84세이다. 숙부인은 자손에게 올바른 도리를 가르쳤고, 여사(女士)의 풍도가 있었다. 나와는 외가가 같아 이종 남매가 되기 때문에 나는 그 규범(閨範)을 더욱 자세히 안다.
부부는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우명(宇溟)은 생원이고 문학과 품행으로 영화로운 명예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둘째 경명(景溟)은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옥당을 거쳐 승지를 지냈다. 셋째 일명(日溟)은 일찍 죽었다. 넷째 주명(柱溟)은 진사로서 도사(都事)를 지냈다. 다섯째 효명(孝溟)은 일찍 죽었다. 사위는 남영로(南永老), 이종혁(李宗赫)이다.
우명은 우윤(右尹) 김조윤(金朝潤)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광교(廣敎)ㆍ광의(廣毅)이고, 사위는 진사 한영익(韓永益)이다. 경명은 참판 정언충(鄭彦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생원 광도(廣度)이고, 사위는 진사 정약련(丁若鍊)이다. 일명은 진사 오석희(吳錫禧)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으니, 사위는 이정수(李廷修)ㆍ이방(李埅)이다. 계취(繼娶)는 한덕기(韓德箕)의 딸로 1남 광경(廣敬)을 낳았다. 주명은 판윤(判尹) 이헌경(李獻慶)의 딸에게 장가들었다가 계취로 진사 이응경(李凝慶)의 딸을 맞이하여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광건(廣健)이고, 딸은 어리다. 효명은 진사 한덕수(韓德樹)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으니, 아들은 광규(廣逵)ㆍ광매(廣邁)이고, 큰사위는 홍신영(洪莘榮)이며 막내딸은 어리다. 남영로는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남이의(南履義)를 아들로 삼았다. 이종혁은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이원홍(李元弘)ㆍ이원필(李元弼)ㆍ이원채(李元采)이고, 사위는 오광진(吳廣鎭)ㆍ홍면주(洪冕周)이다.
아, 공의 여러 아들이, 내가 늘 공을 사모하고 좋아하며 공을 깊이 아는 자라 하여 공의 명(銘)을 쓸 것을 요청하니, 내가 어찌 차마 공의 명을 짓는다는 말인가. 명은 다음과 같다.
영조께서 세상을 다스리고 / 英考御世
충청도는기북이라 / 湖西冀北
군자가 여섯 있는데 / 君子有六
공이 실로 그중 우뚝했네 / 公實其特
살아서는 본보기 되고 / 生爲矜式
죽어서는 제사 받았네 / 歿議俎豆
겨와 쭉정이 겨우 시험했으나/ 試纔糠粃
태산북두처럼 우러러보았네 / 望猶山斗
풍파가 일 때언덕에 올라/ 風波登岸
외로이 웃으면서침부하였네 / 孤笑湛浮
가슴에 천고의 일 간직하고 / 胷藏千古
의리가 이긴한 언덕 되었네 / 義勝一邱
이나라 빛낸 분묻혔으니 / 斂此華國
운수가평피한 것을 어찌하랴 / 奈運平陂
언덕을 보건대 찾아가 볼 곳 있으니 / 觀原有歸
공이 아니고 그 누구이겠는가 / 匪公伊誰
[주-D001] 청렴하게 …… 것:
자신의 청렴을 유지하면서도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 의(義)를 실천했다는 말이다. 《예기(禮記)》 〈빙의(聘義)〉와 《공자가어(孔子家語)》 〈문옥(問玉)〉에 “청렴하게 하되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 것이 의이다.”라고 하였다.
[주-D002] 묘지에서 구걸하여: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출세하려고 권세가에게 빌붙는다는 뜻이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서 제(齊)나라 사람이 “동쪽 성곽의 묘지로 가서 제사하는 사람들한테서 남은 음식을 구걸해 먹고 부족하면 또 주위를 둘러보아 다른 사람에게 가서 구걸했다.”라고 하였다.
[주-D003] 밖으로 …… 했고:
의롭지 못하다고 여겼다는 말이다. 오릉중자(於陵仲子)는 제나라에서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 출신으로, 그의 형은 식읍(食邑)인 합(蓋)에서 많은 녹봉을 받고 있었다. 오릉중자는 형의 녹봉을 의롭지 못하다고 여겨 한집에서 살지 않고 오릉(於陵)에 은둔하였다. 훗날 집에 돌아와 형에게 뇌물로 거위를 바치는 자를 보고 “이 꽥꽥거리는 것은 무엇에 쓰자는 거요?”라고 하며 얼굴을 찌푸렸는데, 그 뒤 어머니가 요리한 거위 고기를 먹고 있을 때 형이 보고는 “이것이 꽥꽥거리던 고기다.”라고 하자, 밖으로 뛰쳐나가 먹은 것을 토해 버렸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주-D004] 군자로다, 이 사람이여:
이수일(李秀逸)이 주변의 군자들에게 배워서 훌륭한 인격을 이루었다는 칭찬의 말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자천(子賤)을 칭찬하며 “군자로다, 이 사람이여. 노(魯)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러한 인격을 갖게 되었겠는가.”라고 하였다
[주-D005] 떳떳한 …… 마음:
착한 본성을 지니고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마음을 말한다. 《시경》 〈대아(大雅) 증민(烝民)〉에 “사람이 떳떳한 본성을 가진지라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도다.[民之秉彝, 好是懿德.]” 하였다.
[주-D006] 곡(穀):
이곡(李穀, 1298~1351)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중보(中父), 호는 가정, 시호는 문효이다.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으로 당시 경학(經學)의 대가로 손꼽혔다.
[주-D007] 색(穡):
이색(李穡, 1328~1396)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 시호는 문정이다. 이제현의 제자로서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주-D008] 종선(種善):
이종선(李種善, 1368~1438)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경부(慶夫), 시호는 양경이다.
[주-D009] 계전(季甸):
이계전(李季甸, 1404~1459)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병보(屛甫), 호는 존양재(存養齋), 시호는 문열이다.
[주-D010] 지번(之蕃):
이지번(李之蕃, ?~1575)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형백(馨伯), 호는 성암ㆍ사정(思亭)ㆍ구옹(龜翁)이다.
[주-D011] 산해(山海):
이산해(李山海, 1539~1609)로, 본관은 한산,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ㆍ종남수옹(終南睡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D012] 경전(慶全):
이경전(李慶全, 1567~1644)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루이다.
[주-D013] 구(久):
이구(李久, 1586~1609)로, 본관은 한산, 자는 정견(庭堅), 호는 후곡이다.
[주-D014] 후(厚):
이후(李厚, 1585~1613)로, 본관은 한산, 자는 자후(子厚), 호는 주봉(酒峯)이다.
[주-D015] 정랑공(正郞公):
이수일의 할아버지인 이덕운(李德運)을 가리킨다.
[주-D016] 경사자전(經史子傳):
경사자집(經史子集)으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제자(諸子), 문집(文集) 등을 일컫는다.
[주-D017] 죽은 …… 한다:
《중용장구》 제19장에 “그 자리를 밟아 그 예를 행하고 그 음악을 연주하며, 그가 존경하던 바를 존경하고 그가 친애하던 바를 사랑하며,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고, 이미 돌아간 이 제사 모시기를 생존한 이 섬기듯 하는 것이 지극한 효도이다.”라고 하였다.
[주-D018] 관면(冠冕):
명문(名門)을 뜻한다. 이수일의 가문이 명문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19] 강좌(江左)의 벌열:
동진(東晉)을 일으켜 굉장한 영화를 누린 사안(謝安)의 가문을 이른다.
[주-D020] 건안(建安)의 울타리:
삼국 시대 위 문제(魏文帝) 때의 유명한 문장가들인 건안 칠자(建安七子)를 이른다.
[주-D021] 효도하려 …… 효도하겠는가:
증자(曾子)의 말 가운데 “군자는 돌이킬 수 없는 경우를 생각해서 먼저 베푸는 것이니, 부모가 돌아가시면 효도하려 한들 누구에게 효도하겠는가.”라는 내용이 있다. 《小學 明倫》
[주-D022] 면신(免新):
면신례(免新禮) 또는 면신벌례(免新罰禮)의 준말로 조선 시대 새로 관직에 나오는 신참 관원이 선배 관원들에게 성의를 표시하는 의식이다. 대개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성대하게 대접하였다. 부임하는 즉시 허참례(許參禮)라고 하여 일차 향응을 베풀고, 열흘쯤 뒤에 면신례라는 명목으로 다시 주연을 베풀었다. 이 기간 동안에 선배 관원은 온갖 방법으로 신참 관원을 시험하고 괴롭혔는데, 이때 선배들은 인격적 모독을 가하고 직무상의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물론 육체적인 가혹 행위나 구타도 행하였다. 면신을 잘 치르는 경우 선배 관원들로부터 재능과 인품을 인정받아 그 뒤의 관직 생활이 순탄하였지만, 반대인 경우에는 멸시를 받아 견디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신참 관원들은 허참례와 면신례를 성대하게 베풀고 때로는 금품을 상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런 악습을 타파하기 위해 면신과 관련하여 금품을 상납받은 자는 최저 장(杖) 60, 최고 장 100에 유(流) 3000리(里)로 처벌하였으나 근절되지 않았다.
[주-D023] 소조(小朝):
장헌세자(莊獻世子, 1735~1762)를 가리킨다. 당시 영조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장헌세자가 1749년부터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영조를 대조(大朝), 장헌세자를 소조로 구분하였다.
[주-D024] 서연(書筵)에서 …… 파직하였다가:
이에 관한 내용이 《영조실록》 34년 2월 27일 기사에 보인다.
[주-D025] 김재로(金在魯):
1682~1759.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ㆍ허주자(虛舟子)이다. 1722년 신임사화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이듬해 울산(蔚山)에 안치(安置)되었다. 1724년 풀려나 이듬해 대사간에 등용되었으나 1729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등장하자 다시 파직되었다. 이후 관직 생활의 절반을 모두 대신으로 있으면서 노론의 선봉자로 활약했다.
[주-D026] 김치량(金致良)이 …… 요구했는데:
김치량이 창기(娼妓)를 강제로 끌어와 간음한 일이 밝혀져 유배당한 사건이 《영조실록》 24년 3월 23일 기사에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도 이와 유사한 죄를 저지른 것으로 생각된다.
[주-D027] 하고(下考):
근무 고과에서 하등(下等)을 이른다. 외직의 경우 고과에서 하고를 받으면 바로 파직되었다. 조선조에서 관리의 성적을 고과할 적에, 관장(官長)은 부하의 성적을 매년 6월과 12월 두 차례 임금에게 보고하는데, 외관(外官)은 8자로, 경관(京官)은 4자로 평을 달되 상ㆍ중ㆍ하의 3등으로 구별하여 포폄하였다. 《大典會通 吏典 考課》
[주-D028] 도배(徒配):
도형(徒刑)의 죄목으로 귀양을 보내는 것을 말한다. 도형은 오형(五刑)의 하나로 복역 기간은 1년에서 3년이고, 다시 다섯 등급으로 나누었다.
[주-D029] 민백상(閔百祥):
1711~1761.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지(履之),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주-D030] 팔조소(八條疏)를 올려 권면하니:
이수일이 상소하여 권면한 내용이 《영조실록》 38년 10월 15일 기사에 보인다.
[주-D031] 풍요(風謠):
민요를 말하는데, 이를 통해 민생의 고락을 살필 수 있으므로 민정을 시찰할 때 풍요를 채집하여 조정에 올렸다.
[주-D032] 후정시(後庭試):
정시(庭試) 후에 다시 향유(鄕儒)들에게 보이는 시험이다.
[주-D033] 세덕(世德)과 연기(年紀):
가문이 대대로 쌓아 온 아름다운 덕과 그 자세한 연보를 말한다.
[주-D034]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
1587년(선조20)에 선조는 유홍(兪泓)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통해 수정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가지고 명나라에서 돌아오자, 이 사실을 종묘에 고하고, 백관들과 연회를 열어 시를 지었고, 종계변무 과정의 기록과 시를 모아 이 책을 편찬하였다. 1744년(영조20)에 이조 판서 이여(李畬)가 영조의 서(書), 마유명(馬維銘)의 시, 유홍의 화시(和詩)를 비롯하여 특사교문(特使敎文), 이산해의 사은표(謝恩表), 태학 유생들의 헌축(獻軸) 등을 모아 중간하였다.
[주-D035] 승선(承宣)은 …… 지친(至親)인데:
승선은 승지로, 여기서는 이수일을 가리킨다. 인원성모는 숙종의 둘째 계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7)를 말한다. 인원왕후의 외조모가 곧 이수일의 고조인 진사 이상빈(李尙賓)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이기 때문에 지친이라 한 것이다.
[주-D036] 나의 선군(先君):
채응일(蔡膺一, 1686~1765)로, 자는 경언(敬彦)이다.
[주-D037] 성력(星曆)의 영허지수(盈虛之數):
천문 역법(天文曆法)에서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도수를 말한다.
[주-D038] 용요(龍繇)의 가배지법(加倍之法):
용요는 괘(卦)이고, 가배지법은 1에 1을 더해 2로 하고 2에 2를 더해 4로 하는 셈법으로 일명 가일배법(加一倍法)이라고 하는데,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태극(太極)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는다.”라고 한 것에 기초하여 소옹(邵雍)이 수리(數理)를 유추할 때 사용한 방법이다.
[주-D039] 국포(菊圃) 강공(姜公):
강박(姜樸, 1690~1742)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순(子淳), 호는 국포이다.
[주-D040] 대비과(大比科):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정규 과거로, 자(子)ㆍ묘(卯)ㆍ오(午)ㆍ유(酉)가 드는 해를 식년(式年)으로 하여 3년마다 거행되었으므로 식년과라고도 하였다. 대비란 주(周)나라 때에 3년마다 향리들을 평가하여 현자(賢者)와 능자(能者)를 가리는 일을 칭한다. 《주례(周禮)》 〈지관사도(地官司徒) 향대부(鄕大夫)〉에 “3년이 되면 대비를 하는데, 그 덕행과 도예를 상고하여 현자와 능자를 등용한다.”라고 하였다.
[주-D041] 경시(京試):
각종 과거 시험의 초시(初試) 중에 한성부(漢城府)에서 실시하던 시험으로, 한성시(漢城試)라고도 한다.
[주-D042] 보배를 …… 했으나:
현인이 초야에 묻혀 알려지지 않게 버려두지 않으려 했다는 말이다. 당(唐)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이 변주(汴州)의 판좌(判佐)가 되었다가 서리에게 무함을 당했는데, 당시 하남도 출척사(河南道黜陟使) 염입본(閻立本)이 그를 보고 “중니(仲尼)는 허물을 보고 그의 인(仁)을 안다고 하였는데, 그대는 창해(滄海)의 버려진 보배라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舊唐書 狄仁傑列傳》
[주-D043] 기북(冀北):
기주(冀州)의 북쪽으로 훌륭한 말이 많이 나는 곳으로,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곳을 뜻한다.
[주-D044] 겨와 …… 시험했으나:
이수일의 재능 중 극히 일부만 쓰였다는 말이다. 겨와 쭉정이는 미천하고 쓸모없는 물건을 비유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그분은 먼지와 때 그리고 쭉정이와 겨 같은 것을 가지고도 요순(堯舜)을 빚어낼 수 있는 분인데, 뭣 때문에 외물을 일삼으려고 하겠는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5] 언덕에 올라: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 그에 넘는 것을 바라거나 부러워하지 않는 도의 경지에 오른 것을 뜻한다. 《시경》 〈대아(大雅) 황의(皇矣)〉에 “상제가 문왕에게 이르기를 ‘그렇게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잡으려 들지 말며 그렇게 흠모하고 부러워하지 말아서 크게 먼저 도의 경지에 오르라.’ 하셨다.[帝謂文王, 無然畔援, 無然歆羨, 誕先登于岸.]”라고 하였다.
[주-D046] 외로이 웃으면서:
한유(韓愈)의 〈별지부송양의지(別知賦送楊儀之)〉에 “어지러운 마음속에서 미묘한 말을 찾고, 뭇사람 근심하는 중에서 외로이 웃노라.[索微言於亂志, 發孤笑於群憂.]” 하였다.
[주-D047] 의리가 이긴:
마음속에서 선왕의 의리가 부귀의 낙을 이겼다는 말이다. 증자(曾子)가 자하(子夏)에게 살찐 이유를 물으니, 자하가 “내가 집에 들어가서 선왕의 의를 보면 이것이 좋고, 밖으로 나와서 부귀의 낙을 보면 또 이것이 좋았으므로, 양자가 나의 가슴속에서 싸우며 승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몸이 여위었는데, 지금은 선왕의 의가 이겼으므로 이렇게 살쪘다.”라고 답한 이야기가 《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에 나온다.
[주-D048] 나라 빛낸 분:
한림원(翰林院)이나 사관(史館)의 직위에 있으면서 제고(制誥)나 외교(外交)에 관한 문장을 지을 적에 그 문장이 뛰어나면 나라를 빛낼 수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여기서는 죽은 이수일을 묘사한 것이다.
[주-D049] 평피(平陂):
세상의 길흉화복이 필연적으로 변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역》 〈태괘(泰卦) 구삼(九三)〉에 “편평하기만 하고 치우치지 않는 경우는 없고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법은 없다.[无平不陂, 无往不復.]”라고 한 데서 온 표현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정기 이유찬 정문채 (공역) | 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