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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이 구역의 미친 여잔 나야">의 줄거리:
“이 구역의 미친 여잔 나야!” 가십걸(gossip girl)라는 미국 드라마 시즌1의 제18화에서 나온 대사입니다. '미치다'는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거나, 상식을 벗어남을 가리킵니다. 지금 여기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존재감에 충만한 마음은 내 말과 행동이 상식을 초월하게 만듭니다. 내 삶의 구역의 미친 사람은 나여야 합니다.
“이 구역의 미친 여잔 나야”
(말라기 2:1~17)
1.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3.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7.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8.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9.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이 구역의 미친 여잔 나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이 구역의 미친 여잔 나야”
이 제목은 2007년에서 2012년까지 방송된 가십 걸(gossip girl)이라는 미국 드라마 시즌1의 제18회에서 나온 대사입니다. “너 들어 본 적 없어? 이 구역의 미친 여잔 나야”라는 이 대사가 인상적이어서 인터넷 상에서 유행했다고 합니다. “미치다”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정신에 이상이 생겨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되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매우 괴로워하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좀 바꾸어보겠습니다. “정신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는데도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되다, 정신이상이 아닌데도 상식을 초월하는 말과 행동을 한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매우 기뻐한다.”라고 바꾸면 바로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가 됩니다.
사도행전 26장 24절에서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고 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이방의 지도자 앞에서 자기변호의 마지막 기회를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또 오순절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2장을 12~13절을 보면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교회가 시작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세상 사람들은 교인들을 향해 술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또 사도행전 4장 32절을 보면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유무상통이 일어나던 초대교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상식적이고 미친 사람들이 모인 그룹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모습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은 그 구역에서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기준에서 보자면 말과 행동이 상식적이고 보통 사람들 중에 섞여있어도 구분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남들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어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존재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람들의 상식과 말과 행동은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들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감에 사로잡혀 나오는 말과 생각과 행동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전혀 이상하다 여기지 않는다면 나 역시 세상 사람들과 같은 기준에서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들로부터 얻는 존재감으로 충만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계 차원에서 꼭 기억하고 반성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몇 십년간 부흥만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전도를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고 강조하며 교인들을 전도현장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교인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만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전도의 진짜 의미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서 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지금 내가 있는 구역에서 미친 사람이 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전도는 미친 것으로 여기던 것이 진리임을 깨닫고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입니다. 우선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세상에 대한 전도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다가 진리를 발견하여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전도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없다면 전도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바람은 기압의 차이에 의해 만들어지고, 열전도(熱傳導)는 온도의 차이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복음전도(傳道)는 인격의 차이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전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구역 내의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대제사장에 대한 하나님의 참담한 경고가 나타납니다. 3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제물로 드려지는 가축들이 외양간에 모여 있는 동안 똥을 싸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똥을 제사장들과 그 자손들의 얼굴에 바르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사장을 똥 취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서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만 오늘 본문에서는 직접적으로 똥이라는 단어를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이 제사장들을 얼마나 더럽게 여기셨는지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갖는 존재감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존재감에 충만해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나에 대해 가지고 계신 존재감이 어떠한지가 나옵니다.
제사장이라는 사람은 선민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존재감이 가장 커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제사장들을 똥 취급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존재감이 제로인 것을 넘어서 마이너스인 사람으로 취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평생을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지구 위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두신 장소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그 성전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가장 큰 존재감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이 제로인 상태로 살아갑니다. 오직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들에 대한 존재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는 제사장은 가장 미친 사람처럼 보여야만 했습니다. 지구라는 구역 내에서 미친 사람들의 첫 번째 집단이 제사장들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7절에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자는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청와대의 특사로 미국 백악관에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해야 되는 일은 청와대의 결정권자인 대통령이 백악관에 와있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특사는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입이 되어서 미국 대통령과 관리들에게 말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만들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사자인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존재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한 가운데에 성전을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두셨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것과 똑같은 상황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존재감에 충만해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삶의 현장에서 성전을 생활화하게 함으로써 미친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의 존재감을 전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은 곧 전도의 시작점이고 발화점이어야만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제사장들이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것을 지적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방 여인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감이 없는 구역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적인 기준으로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과의 결혼은 세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영향을 받으면 받을수록 선민들은 하나님의 존재감에 충만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미친 사람으로 살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세상에서 정상적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역전도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많아야 기뻐합니다. 돈이 많을 때 기뻐하는 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매우 정상적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합니다. 돈이 안 벌려도 기뻐하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회사에서 승진해야만 기뻐합니다. 그러기 위해 윗사람인 사장님과 부장님과 과장님에 대한 존재감으로 충만해지고자 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입니다. 이러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한 사람은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래대로 전도가 이루어진다면 미쳤다고 생각한 그것이 참된 진리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하나님 존재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정상으로 여기는 기준에 함락되고 전도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교인이 늘어났다고 기뻐하고, 예산의 풍부함을 기뻐하고, 멋진 예배당을 기뻐한다면 세속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목사님으로부터는 하늘의 기운이 조금도 전도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라기 선지자가 지적했던 제사장들의 현실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상가건물에서 교인이 열 명도 되지 않는 개척교회를 하시는 목사님이 늘 싱글벙글 웃고 다닙니다. 월세 내는 것도 빠듯하지만 얼굴에 걱정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기준에서는 이 구역의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있는 열 명도 안 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충만함에 전도되어 갈 것입니다. 또 열 명도 안 되는 성도들이 세상에 나갈 때에 이 구역의 미친 여자와 미친 남자가 되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존재감이 전도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개척교회의 목사님과 성도들을 미쳤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에 진짜 전도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어떠한 전도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전하는 십자가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에 내놓으면 미쳤다는 소리 밖에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미친 사람을 자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제사장들이 그렇게 미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성전에서 평생 산다고 해서 특별할 줄 알았더니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들에 대해서만 존재감을 느끼면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이방인들과 결혼함을 통해 신앙의 싹조차 사라져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똥처럼 존재감이 없는 자들로 여기시리라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 마지막에는 아내를 학대하고 이혼하는 것에 대한 경고가 나타납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첫 구역은 바로 부부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채워진 상태에서 맞이했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여성의 인권이 낮아 물건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기에 남자에게 귀속된 존재였습니다. 아내가 마음에 안 들면 때렸고 그래도 마음에 안 들면 쫓아내고자 이혼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면 아내를 그렇게 대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기준으로는 아내를 소중하게 여기고 인간답게 대우하는 것이야 말로 이상한 일이었으나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는 자들에게는 아내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지금 있는 구역에서 여러분은 미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의 존재감으로 충만해져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느낄 수 있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죽은 자가 되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비법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는 있지만 십자가 생활화 없이 마음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고 느낄 수는 없습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내가 죽었음을 굳게 붙잡을 때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는 가운데 말하고 행동하는 나는 이 구역에서 미친 남자요 미친 여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달려 죽었음을 고백하는 일에 목숨을 걸게 하여 주셔서 나의 삶의 구역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고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해져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셔서 이 구역의 미친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미쳤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이야 말로 정상적인 진리임을 전도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