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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48
출애굽기 20장 16절
십계명의 여덟 번째 명령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래 창조주 하나님만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지만 그 가운데 일부를 소유하게 하셨습니다. 때문에 개인의 소유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개인의 소유로 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소유로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소유로 주셨다고 할 때 그것을 함부로 도둑질해서는 안 됩니다. 도둑질과 강도질 등 국가가 벌하는 것만 금하신 것이 아니고, 이웃의 소유를 우리 것으로 만들고자 사용하는 모든 악한 속임수와 계교들까지 도둑질로 간주하시며 금하십니다. 구체적인 예로 하나님은 부정한 저울이나 계량, 불량품, 위조 화폐, 그리고 고리대금 등 강제로 혹은 합법성을 가장하여 저지르는 모든 것을 금하십니다. 또한 그가 베푸신 은사들을 남용하거나 낭비하는 일도 금하십니다. 오히려 할 수 있거나, 해도 괜찮은 경우에는 어디서든 이웃의 유익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요리문답은 특별히 마태복음 7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를 설득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본성적으로는 남을 대접하기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대접받기를 바라지만, 네가 바라는 마음이 다른 사람도 동일하게 바라는 마음인 줄 알고 먼저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가난한 자들의 형편을 도울 수 있도록 신실하게 일해야 한다는 것도 가르치는데, 일을 통해 자신만 유익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유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홉 번째 계명을 살펴보겠는데, 출애굽기 20장 16절입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9계명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제77문. 제9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9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슥8:16) 그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명예의 유지와 증진을 요구합니다(요삼1:12). 특히 증거 할 때에 더욱 요구합니다(잠14:5,25). 제78문. 제9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9계명은 진실(진리)에 해가 되거나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합니다(삼상17:28, 레19:16, 시15:3). 모든 소유가 본래 하나님의 것이듯 하나님은 진리, 진실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반면 사단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그러므로 하나님은 진리, 진실을 기뻐하시며 거짓에 대하여는 미워하십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거짓이 아닌 진리, 진실을 따라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아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제9계명과 관련해 한 문답으로만 설명합니다.
112문. 제9계명에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답. 내가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거짓 증언하지 않으며(잠19:5,9, 21:28), 어느 누구의 말도 왜곡시키지 않으며(시15:3, 50:19-20), 헐뜯거나 모략하지 않으며(롬1:29-30),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데에 참여하지 않으며(마7:1-2, 눅6:37), 오히려 모든 거짓말과 속임수를 마귀의 일로 알아(요8:44) 피함으로써 하나님의 무거운 진노가 내게 임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잠12:22, 13:5), 또한 법적인 송사에서와 다른 모든 일들에서도 진실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진술하고 고백하며(고전13:6; 엡4:25), 또한 할 수 있는 만큼 이웃의 명예와 평판을 보호하고 증진시켜 주는 것입니다(벧전4:8).
제9계명의 목적과 의도는 사람들 사이에 진실을 확립시키고 보존시키는 데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거짓 증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거짓을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다음의 말씀을 통해 알리십니다. 잠언 19장 5절입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 9절에서도 재차 말씀합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잠언 21장 28절에서는 비교적으로 말씀합니다.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그만큼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시는 반면 진리, 진실, 정직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진리, 진실보다는 거짓을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가 그와 함께 타락했다고 할 때 구속함으로 얻기 전까지는 거짓의 아비 마귀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본성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거짓조차 거리낌 없이 행합니다. 혹 진실을 말하는 일이 있다면 진실 자체보다는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거짓을 말함으로 다른 사람이 해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더 이상 거짓의 아비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진리 자체시요 진실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우리는 거짓 증언하지 않아야 합니다. 소위 선한 거짓조차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간혹 선한 거짓은 그 의도가 선하기 때문에 괜찮다고 여깁니다. 구체적으로 출애굽기 1장에 히브리 산파가 나오는데,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 수의 증가로 인해 남자 아이면 산파가 해산을 돕다가 죽이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거짓을 고하게 됩니다. 여호수아 2장에서는 라합에 관해서도 나옵니다. 여리고 성을 정탐하러 온 두 사람을 숨겨놓고도 숨기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거짓을 고하게 됩니다. 두 사건 다 거짓을 고했지만 그 목적이 생명을 살리는 데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칼빈의 출애굽기 1장, 여호수아 2장에 대한 주석을 읽어드리겠는데, 우선 출애굽기 1장 히브리 산파에 대한 내용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본질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죄악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여인들이 거짓말했다는 점과, 거짓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므로 그들은 죄를 범했다는 점은 모두 인정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여호수아 2장 라합에 대한 내용입니다. “허위진술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이 비록 좋은 뜻에서 나온 거짓말이라 해도 거기에 잘못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요컨대 소위 말하는 직무상의 거짓말을 완전히 정당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진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한 것인가 하는 점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의 의도가 형제들을 돕고, 그들의 안전을 도모하며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거짓말이 합법적일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나는 것이 옳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다... 전반적으로 정탐꾼들이 구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그는 거짓 진술을 통해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행동은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히브리 산파에 대한 설명 가운데는 다음의 내용도 있습니다. “이 두 산파들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으로 인해 칭찬받고 있다는 점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답하셨다는 점에는 사실상 어떤 반박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아버지로 돌보실 때, 그들의 선한 행위가 더러운 것들로 어느 정도 오염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정결한 것처럼, 그 선한 행위를 여전히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즉 거짓 자체는 미워하시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 때문에, 달리 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는 믿음의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그들의 점과 흠이 가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거짓 자체는 앞에서 언급한 잠언의 말씀대로 결코 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패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패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짓 자체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점과 흠도 그리스도의 의로 덮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거짓도 괜찮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거짓 증언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참고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저자인 우르시누스 역시 제9계명에 대한 설명에서 칼빈과 다르지 않는 내용을 말합니다. “진실을 숨기고 덮은 모든 거짓말은 물론 예의로 하는 거짓말이나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선의로 하는 거짓말도 여기서 정죄하는 것이다... 산파들이 왕에게 거짓말을 했으나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선의의 거짓말을 변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신 것은 그들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선의의 거짓말에 대해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해를 주는 법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거짓말이 누구에게 유익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발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의 거짓이 저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거짓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혹 “당신이 히브리 산파 위치에 있다면, 또 라합의 위치에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란 질문을 한다면 저도 저들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지 않을까란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만 답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에스더 4장 16절에 보면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물론 거짓과 관련된 내용으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애굽 왕이 주의 말씀과 합당하지 않는 명령을 할 때, 또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라합이 정탐꾼에 대하여 물을 때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있다면 거짓을 고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은 죽을 수 있겠지만 거짓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이 아닌 진리와 진실을 보존하는 자로 있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계속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면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거짓 증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의 말도 왜곡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제8계명과 관련해서도 시편 15편을 인용했지만 제9계명과 관련해서도 시편 15편을 인용합니다.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시15:3) 여기서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또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않는다는 것은 허물을 들어 꾸짖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개역한글 성경을 보면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번역합니다. 참소한다는 것은 남을 헐뜯어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고하여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허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허물이 없는데도 허물이 있는 것처럼 꾸며 말하는 것, 이것도 거짓이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을 비방하는 것, 소위 이웃이 없는 자리에서 뒷담화하는 것도 거짓이라는 겁니다. 또한 요리문답은 헐뜯거나 모략하지 않아야 한다고 설명하는데, 모략이라는 말은 계책이나 책략이라는 뜻도 있지만 사실을 왜곡하거나 속임수를 써 남을 해롭게 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거짓에 속합니다.
그런데 시편 15편은 1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할 때 2절 ‘정직하게 행하’는 자,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가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말하는 것이 3절입니다.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즉 남을 헐뜯어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미는 사람들, 사실을 왜곡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을 해롭게 하는 사람들은 결코 주의 장막에 머물 수 없고 주의 성산에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언의 표현과 같이 그만큼 하나님께서 거짓을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요리문답은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데에 참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요리문답은 마태복음 7장 1절과 2절을 인용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8계명과 관련해 마태복음 7장 12절을 언급했지만 사실 다르지 않는 정신이 마태복음 7장 1절과 2절입니다. 너희 스스로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너희도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함부로 비판한다면 그런 비판은 결국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겁니다. 특히 비판을 하는 자들이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몇 가지 근거로 경솔하게 판단하는 일이 있습니다. 굉장히 주의해야 할 자세입니다. 경솔하게 판단하게 되면 결국 경솔하게 정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모든 것이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경솔한 판단, 경솔한 정죄에 참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요리문답은 모든 거짓말과 속임수를 마귀의 일로 알아 피하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거짓의 아비라고 해서 그가 거짓의 모든 원인으로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거짓의 원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짓을 말할 때 우리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거짓의 아비라면 거짓을 말하는 자는 거짓의 아비를 둔 거짓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성도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성자의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으신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진실하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진리 가운데 있어야 하고 진실만을 말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거짓말과 속임수를 피하라는 것입니다.
요리문답은 모든 거짓말과 속임수를 피하도록 하나님의 무거운 진노가 내게 임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까지 설명합니다. 즉 거짓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무거운 진노를 야기합니다. 우리는 내가 거짓을 말할 때 지금 당장 무거운 진노를 받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괜찮은 것으로 여기고 오히려 더 담대히 거짓을 말하게 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긍휼로 참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무거운 진노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헛된 것처럼 들려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진노를 받지 않도록 모든 거짓말과 속임수를 피하고 오히려 진실하도록 해야 합니다.
특별히 제9계명은 법적인 송사에서 거짓 증언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19:15) 사도행전 6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질 때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이라는 복음 전도자를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행6:8) 이때 자유민들과 회당에서 논쟁을 하게 되는데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회에 잡아 거짓 증인을 세우는 일이 있는데(행6:13), 매우 악한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일은 알게 모르게 법정에서 비일비재합니다. 악한 소송을 위해 고의적으로 출두해서 변론하고 진실을 대적하고 뒤집어엎는 일도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그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행24:5) 그러나 거짓은 언젠가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당장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마지막 때만큼은 거짓을 숨길 수 없습니다. 악을 선이라고 하고, 또 선을 악이라고 하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심판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법정은 거짓을 말하더라도 숨길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누구도 거짓을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알지 못한 채 거짓을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런 거짓조차 하나님은 다 드러내십니다.
법적인 송사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도 거짓 증언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법적 송사에서, 다른 모든 일들에서 진실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진술하고 고백하며, 또 할 수 있는 만큼 이웃의 명예와 평판을 보호하고 증진시켜 주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고 권면하는데, 왜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하는가?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하나의 지체로 있다고 할 때 그 지체를 속이는 일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저 사람을 속여 내가 유익이 되고자 하지만, 한 지체로 있다고 할 때 저 사람을 속여 유익된 것은 결코 유익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된 자들은 더더욱 그러할 뿐 아니라, 사실은 아담 안에서 한 지체된 모든 사람에게까지 확대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말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도덕법으로 모든 인류에게 명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스누스는 제9계명과 관련한 덕과 그 반대되는 것을 여덟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진실함입니다. 이것은 의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견고한 목적이나 선택으로서 참된 생각과 견해를 끊임없이 포용하고 또한 우리가 처한 여러 처지들에 따라 그것을 의무감을 갖고서 공언하고 변호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이웃의 안전을 위해 약속과 계약을 그대로 지키며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모든 헛된 속임수를 피하는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 마귀는 때때로 진실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이웃의 안전을 위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겉으로 진실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거짓의 아비일 뿐입니다. 이러한 진실과 반대되는 덕은 거짓입니다. 거짓뿐만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고자 애쓰지 않는 소홀함도 진실함과 반대되는 것이요, 거짓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허영 혹은 경솔함도 진실함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적절하지 않은 진실의 공언도 진실함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필요하지 않는, 혹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호기심도 진실함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둘째, 공정함입니다. 이는 올바르고 정직하게 말하거나 행한 일을 적절하게 이해하며, 의심쩍은 일에 대해서도 정당한 이유가 있는 한 호의로 대하는 덕입니다. 나아가 충족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쉽게 의혹을 제기하거나 그것들 속에 탐닉하지 않으며, 그런 의혹에 근거하여 행동을 취하거나 어떤 일을 해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공정함과 반대되는 것으로는 중상, 의심 많음이 있고, 또 정당하고 개연성 있는 이유들이 없는 상태에서 성급하게 혹은 경솔하게 해석하고 동의하는 어리석은 경신이 있습니다. 여기에 아첨까지 생각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재물이나 사람의 호응을 얻어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칭찬해서는 안 될 것을 칭찬하고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단정함입니다. 이는 얼버무림이나 변명 같은 것이 없는 벌거벗은 그대로의 진실함입니다. 혹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진실하고 옳은 것을 정직하게 공개적으로 밝히고 행하는 덕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것은 가장된 단순함, 혹은 행동과 언사에 나타나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넷째, 일관성입니다. 이는 그대로의 진실에서 떠나지 않으며 필연적이며 충족한 이유가 없이는 그 목적과 계획을 바꾸지 않고, 항상 참되고 정의롭고 필연적인 것을 말하고 행하는 덕입니다. 혹은 이것은 한번 발견하여 알고 인정한 진실을 견고히 붙들며 항상 똑같이 공언하고 변호하는 덕입니다. 이 덕과 반대되는 것은 변덕과 완고함이 있습니다.
다섯째, 유순함입니다. 이는 참된 견해들의 이유들을 조사하는 덕으로서 더 낫고 더 설득력 있고 납득이 되는 것들을 가르치고 보여주는 자들에게 기꺼이 동의하고 기존의 생각을 굴복시키는 것이요, 동시에 참되고 만족스러운 이유들을 인정하고 동의하며 전에 가졌던 것을 기꺼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덕과 반대되는 것은 일관성의 경우와 같습니다. 변덕과 완고함이 그것입니다.
여섯째, 과묵입니다. 이는 언제나 어디서나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경우에, 모르는 일이나 말할 필요가 없는 일에 대해 침묵을 지키며, 동시에 해서는 안 될 말을 생각 없이 무절제하게 하기를 피하는 덕입니다. 혹은 참이든 거짓이든 은밀한 일들은 드러내지 않고, 불필요하고 무익한 대화를 피하며, 특히 시의적절하지 못하며 해롭고 악의로 계산된 말을 피하며, 진실만을 공언하는 것입니다. 이 덕과 반대되는 것은 수다, 어리석은 말, 배신, 그리고 까다로움, 지나친 유보적 자세가 있습니다.
일곱째, 친절입니다. 이는 어떤 필연적이고도 개연성 있는 이유로 하여 적절한 경우에, 선의를 갖고 듣고 답변하고 기꺼이 발언하는 덕입니다. 혹은 면담을 나누는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고 대화나 말이나 몸짓으로 선의의 증거를 보여주는 덕입니다. 이 덕에 반대되는 것은 과묵과 마찬가지입니다. 친절함이 없는 과묵은 까다로움이 되고, 과묵이 없는 친절함은 수다나 어리석은 말로 전락합니다.
마지막 여덟째, 세련입니다. 이는 어느 정도의 친절과 선의을 드러내며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전혀 불쾌감을 주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위로하고 사기를 높이고 감동시키는 능력입니다. 이 덕에 반대되는 것은 무례, 조롱, 험담이 있습니다. 또한 어리석음이 있으며, 무미건조함도 있습니다.
거짓과 관련해 우리가 가장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경우 공적인 거짓말과 관련해 재판장의 잘못된 판단을 말함과 동시에 사역자들에 대한 내용도 열거하는데, 바로 사역자들이 기초적인 교리를 가르치지 않거나 교리를 잘못 적용하는 것이 공적인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진리를 올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당연히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역자가 아닌 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것이 있는데, 올바른 교리를 가르칠 때 가르침에 대한 공적인 거부가 있다면 그것 역시 공적인 거짓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든 거짓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아 낼 것입니다(마15:13). 사람이 만든 것들은 다 폐하실 것입니다(겔6:6).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진리 안에 머물며 그 진리를 드러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으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의 것이 아닌 하나님이 만든 것은 무엇인지를 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만이 진리요, 진실이요, 정직임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