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cyh062@wonkwang.ac.kr)
사주팔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사주팔자의 역사적 맥락을 추적해 보자. 그 사람의 생년, 월, 일, 시를 간지(干支)로 환산해 운명을 예측하는 명리학은 중국의 도교 수련가였던 서자평(徐子平)이라는 사람에 의해 그 이론체계가 정립되었다. 오늘날 명리학의 대표적인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연해자평’(淵海子平)이란 책은 서자평의 저술이고, 책 제목 자체도 그의 호를 딴 이름이다. 서자평에 대한 신상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생몰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가 도사(道士)인 진단(陣 :871~989)과 함께 중국의 화산(華山)에서 수도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대략 900년대에 활동했던 인물인 것 같다.
따라서 서자평의 명리학은 10세기 후반쯤 세상에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것이 언제 한국에 유입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시 서자평의 명리학은 중국의 왕실과 소수의 상류 귀족들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유통되고 있었을 뿐 일반 대중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던 고급스러운 지식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외국으로 쉽게 반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감안하면 빨라도 100~200년 후에나 우리나라에 명리학이 들어오지 않았나 싶다.
<경국대전>의 잡과 과목
우리나라에서 사주팔자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조선왕조의 법전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다. 경국대전은 세조 6년인 1460년에 편찬을 시작해 성종 16년인 1485년에 최종 완성되었으므로 조선 초기에 성립된 법전인데, 여기에 보면 전문적으로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을 국가에서 과거시험으로 선발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경국대전에 나타나 있는 과거시험 분류를 보면 중인(中人) 계급들이 응시하는 잡과(雜科)가 있다. 잡과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전문 기술직이다.
잡과 가운데 하나로 음양과(陰陽科)라는 것이 있었다.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전문가를 선발하는 과거가 바로 음양과다. 음양과를 다시 세분하면 천문학(天文學)·지리학(地理學)·명과학(命課學)으로 나뉘고 초시(初試)와 복시(復試) 2차에 걸쳐 시험을 보았다. 초시에서 천문학은 10명, 지리학과 명과학은 각각 4명씩 뽑았다. 복시에서는 천문학 5명, 지리학·명과학은 각각 2명씩 뽑았다고 나온다.
지리학은 풍수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관료로 채용하는 과목이고, 명과학이란 사주팔자에 능통자 자를 관료로 채용하는 과목이다. 과거시험은 매년 있었던 것도 아니고 3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자·오·묘·유(子·午·卯·酉)년에 시행하는 식년시(式年試)에서 ‘명과학 교수’를 초시에서 4명, 복시에서 2명씩 채용하였다. 3년마다 시행되는 명과학 과거시험에서 최종적으로 2명만을 선발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적은 인원만을 선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명과학의 시험과목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을까. 그 시험과목을 보면 ‘서자평’(徐子平) ‘원천강’(袁天綱) ‘범위수’(範圍數) ‘극택통서’(剋擇通書) 등이다. 서자평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주팔자의 원리에 대한 내용이고, 원천강은 사람의 관상(觀相)을 보는 책이며, 범위수는 어느 날짜에 혼사를 하거나 건물을 짓는 공사를 시작할 것인가를 논하는 택일(擇日)에 관한 책이다.
‘극택통서’는 현재 전하지 않고 있어 어떤 책인지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없고, 나머지 과목들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명과학의 시험과목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과목을 꼽는다면 서자평의 ‘연해자평’이다. 서자평은 오늘날에도 명리학을 처음 공부하려는 학인들이 필수적으로 섭렵해야 할 교과서로 평가되는 책이다. 사주팔자를 해석하는 모든 기본 원리는 서자평에 들어 있다. 아무튼 명과학의 시험과목에 서자평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주팔자의 원리는 경국대전이 성립되던 1400년대 후반까지는 조선사회에 전래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공식적인 확인이고 비공식적으로는 15세기 후반 이전에 서자평의 명리학이 이미 조선사회에 유입되어 있었다고 추측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팔자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CD롬에서 ‘팔자’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태종 17년(1417)에도 공주의 배필을 구하기 위해 남자의 팔자를 보았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왕실에서 사주팔자를 보고 혼사를 정하는 풍습이 그때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로 미루어 기록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고려말 조선 초에 서자평의 명리학이 중국으로부터 이미 들어와 있었으며, 왕실을 비롯한 일부 계층에서는 사주팔자를 통해 그 사람의 운명을 예측하거나 혼사를 정할 때 궁합을 보는 풍습이 유행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때까지는 명리학을 전공한 전문가가 따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이 분야를 공부한 사람들이 임의로 사주팔자를 보아 주었을 것이다.
그러다 아예 이것을 공식화하자 특히 왕실에서 그 필요성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왕실에서는 많은 왕자와 공주들이 출생했다. 이들을 시집·장가보낼 때는 사전에 궁합을 보는 일이 필수적인 일이었고, 궁합을 보기 위해서는 생년월일시와 같은 인적사항이 노출되어야 하는데, 그 신상정보를 외부에 함부로 공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명리학 전문가를 왕실 전용 관료로 선발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던 것 같고, 결국 명과학 교수라는 직책이 과거 가운데 하나로 채택된 것 아닌가 싶다.
명과학 교수의 인원은 2~4명이다. 3년마다 돌아오는 전국 규모의 과거시험에서 이 숫자만 뽑았으니 매우 적은 인원만 채용한 셈이다. 이들은 말하자면 왕실 전용 사주 상담사들이라서 근무처도 서울의 궁궐 내에서만 근무했다. 지방에 출장간다거나 일반인들의 사주팔자를 보아 주는 일도 허락되지 않았다. 허가 없이는 궁궐밖 사람과의 접촉도 불가능했다고 한다.
왕실의 비밀이 유출될 가능성 때문이었다. 명과학 교수라는 직급은 잡과에 소속돼 낮은 편이었지만, 그 업무적 성격상 왕실 내부의 은밀한 정보를 접촉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직급이 낮다고 해서 함부로 볼 자리가 아니었다. 이들의 임무는 여러 가지였다. 공주나 왕자의 궁합을 보는 일, 합궁(合宮)할 때 그 날짜를 택일하는 일, 궁궐 내에서 왕자나 공주가 출생할 때 산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 그 사주팔자를 기록하는 일. 건물 신축을 할 때 길일(吉日)을 잡는 일, 임금의 명에 따라 대신들 개개인의 사주팔자가 어떤지를 보는 일 등이었다.
이 가운데 합궁일(合宮日)을 살펴보자. 사주팔자에서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양대 요소는 입태일(入胎日)과 출태일(出胎日)이다. 입태일(入胎日)은 정자와 난자, 그러니까 부정(父精)과 모혈(母血)이 결합되는 날짜로 합궁일이 된다. 출태일(出胎日)은 그 사람이 태어난 날, 정확하게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탯줄을 가위로 자른 시각을 말한다. 탯줄을 자르는 바로 그 시각에 천지의 음양오행 기운이 아이에게 순간적으로 들어온다. 사주팔자는 바로 그 탯줄을 자르는 시각에 들어온 음양오행 기운의 성분을 10간 12지로 인수분해한 것이다. 입태일은 ‘IN PUT’되는 시점이고, 출태일은 ‘OUT PUT’되는 시점이다. 문제는 출태일 못지않게 입태일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원료(?)를 투입할 때 과연 어느 시점에 투입하느냐에 따라 제품의 질이 결정되게 마련이다. 그 투입 시점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방정식의 핵심은 아이의 부모가 될 사람 사주를 먼저 본 다음 그 부모 사주의 약점과 강점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成三問이 成三問이 된 까닭
조선시대의 출산 타이밍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단종 때 사육신으로 유명한 성삼문(成三問,1418~1456)의 출산에 관해 구전으로 전해지는 비화다. 성삼문의 어머니가 성삼문을 임신하자 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으로 갔다. 딸의 진통이 시작되자 이제 막 산실에 들어가려는 부인에게 친정아버지(성삼문의 외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였다. “자네 산실에 들어갈 때 다듬잇돌을 들고 가소. 아이가 나오려고 하거든 이 다듬잇돌로 산모의 자궁을 틀어 막아 아이가 나오지 못하게 막아야 하네. 다듬잇돌로 막고 있다 내가 ‘됐다’고 신호를 보낼 때 아이가 나오도록 해야 하네.”
다듬잇돌이란 옛날에 빨래를 두드릴 때 사용하던 직사각형의 넙적한 돌을 말한다. 성삼문의 외할아버지는 명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외손자가 태어나려고 하는 사주팔자를 계산해 보니 예정보다 2시간 정도 늦게 태어나야만 외손자의 사주가 좋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산모의 진통이 극심해지면서 아이의 머리가 조금씩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자 친정어머니(성삼문의 외할머니)가 산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편에게 “지금이면 됐습니까?”하고 물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이었다. 얼마 있다가 다시 “지금이면 됐습니까?”하고 또 물었다. “조금만 더 참아라.” 다듬잇돌로 아이가 못나오게 막고 있던 성삼문의 외할머니가 세번째로 외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밖에서 ‘더 참아라’했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산모는 성삼문을 낳고야 말았다. 산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삼문의 외할아버지에게 ‘3번 물었다’(三問)고 해서 이름을 성삼문(成三問)이라 지었다고 한다. 만약 산모가 더 참고 기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성삼문은 39세에 죽었는데 1시간만 늦게 태어났더라도 환갑까지는 살았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삼문의 외할아버지가 그나마 다듬잇돌로 막는 처방을 한 덕택에 39세까지 살았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10대에 요절하고 말 운명이었다고 역술가들은 말한다. 어느 시간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명리학에서 팔자(八字) 가운데 두자(二字)가 바뀐다. 특히 태어나는 시(時)의 간지(干支)는 그 사람의 말년 운세와 관련된다고 해석하므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다. 인위적으로 출생시간을 조절하는 제왕절개를 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사주팔자가 계급차별에 대항하는 대항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아니더라도 사주팔자만 잘 타고나면 누구나 왕이 되고 장상이 될 수 있다는 기회균등 사상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풍수사상도 마찬가지다. 일반 서민도 군왕지지(君王之地)에 묘를 쓰면 군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풍수의 신념체계 아닌가.
조선 후기 서북지역에서 발생한 홍경래난의 주모자들이나 동학혁명의 전봉준도 모두 사주와 풍수에 전문가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주팔자는 정감록으로 대표되는 풍수도참설과 결합되면서 조선 후기 민란의 주요한 대중동원 메커니즘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시대에 남자들이 모이는 사랑채에서는 정감록이 가장 인기있는 책이었고, 여자들이 거처하는 안방에서는 ‘토정비결’이 가장 인기였다는 이야기는 바로 풍수도참과 사주팔자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사례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그랬었군요.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의 관심사는 한결같이 삶과 죽음, 잘살고 못사는거, 자식 잘되게 하고픈거. 다~~~ 같네요.
특히나 요즘처럼 중심없이 흔들리며 마구 치닫는 세상속에선, 명리학으로 중심을 잡으며 사는 것만으로도
참 복인거 같아요. 늘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