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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에서 천안으로 오다가 우강 솔뫼성지에 들렀다
우강과 합덕(두 지역이 붙어있다)은 아들인 정훈과 석훈이가 태어난 곳이다 이곳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6년 넘게 살던 곳이다
이곳을 떠나 천안으로 옮긴지 이제 22년이 넘었나 보다
이곳 솔뫼성지도 그동안 많이 바뀌었다 예전엔 조그만 성당 한 채와 솔밭 그 사이 김대건 신부의 동상 한 개만 우뚝 솟아있던 곳이 이렇게 교황이 다녀간 후 바티칸시국 베드로대성당처럼 웅장한 장소로 바뀌었다
이곳 우강 솔뫼성지의 "솔뫼"는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땅 "내포"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1821년 8월 21일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탄생하셨으며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을 따라 용인 한덕동(현 골배마실)으로 이사갈 때인 일곱살까지 사셨다.
뿐만 아니라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한현(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1846년 순교)에 이르기까지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예전 솔뫼 성지의 소나무 그늘 아래에는 김대건 신부 동상을 비롯하여 기념탑이 세워져 있으며, 아래쪽으로는 개인과 단체 100여명이 피정을 할 수 있는 피정의 집만이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김대건 신부와 솔뫼성지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기념관과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성당을 신축하여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김대건 신부의 고택도 복원해 놓는 등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때 성인 품위에 오르게 되어 교황이 다녀간 뒤 대대적으로 천주교 최대 성지로 성역화되어 가고 있다
먼저 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 입구에는 김대건 신부의 가계도가 먼저 눈에 띈다
김대건 신부 가계는 초대 천주교 박해로 4대에 걸친 순교자를 낸 가계이다
증조할아버지 진후(震厚)는 50세 때 교인이던 아들의 권유로 입교(入敎)한 후 1791년의 박해 이래 수차례 검거되어 고문·귀양 등의 고난을 겪다가 1814년 충청남도 해미(海美) 옥중에서 순교했다. 이에 할아버지 택현(澤鉉)은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했으며, 김대건은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 제준(濟俊)은 다시 내포로 이사하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한양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기념관에 홍보한 김대건 신부의 가계를 증조부까지만으로 국한하여 전시하고 있는데 사실 이 가문이 천주교의 성인이 되기까지는 우리나라의 슬프고도 비상식적인 정치사가 그 전면에 깔려 있다
김대건 신부의 조상은 김해김씨 해녕부원군 김희철, 김희원 형제로부터 거슬러 살펴봐야 한다
김희철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조헌(趙憲)의 휘하에서 비장(裨將)으로 출전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무예가 뛰어났던 그는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육박전이 벌어졌을 때, 조헌의 휘하에서 김절(金節) · 변계온(邊繼溫) · 양응춘(楊應春) · 곽자방(郭自防) · 김헌(金獻) · 김인남(金仁男) 등 16인의 비장과 함께 혈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이런 연고를 살펴보면 당시 김희철은 서인의 당인으로 살았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그의 딸이 선조의 후궁으로 공빈김씨가 되어 광해군과 임해군을 낳는다
이에 비해 그 동생 김희원은 조용히 김해김씨 가계를 잇는다 두 아들 김의직, 김예직을 두었으나 형 김희철이 손 없이 순절하니 둘째 아들 예직을 형에게 양자로 입적한다 그렇지만 조카 광해군이 서인들에 의해 축출되고 이 가계는 은근히 북인과 남인에 손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김예직의 아들 김수검이 우리 오정위 선조의 장인이고 또 김예직의 사위로 한준겸의 손자가 인연을 맺는 것으로 보아 김예직의 손자대인 대자 항렬 증손자 대인 하자 항렬이 되었을 때엔 서인의 반대편에 섰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서인들이 대거 반대파를 살육하는 경신환국 갑술환국을 거치고 무신난을 거치면서 집안이 폐족이 되었을테고 그런 상황에서 김대건의 증조 김진후가 천주교에 입교(김의직-김수완-김대영-김정하-희서-김진후로 이어짐.천주교에는 김진후의 아들인 김종현 택현이 이존창에 의해 전교를 받아 먼저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 아들에 의해 아버지 김진후가 입교함)하게 된다
서인들에 의해 중앙관직이 독차지되고 남인의 후예 북인의 후예들은 당시 공부를 해도 희망이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천주교와 서양 과학은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돌파구 중 유일한 것이었다
내포지방 여사울의 이존창은 양반 출신은 아니지만 선조가 남긴 유산인 부유한 경제 덕택으로 원래 한양에서 이기양 밑에서 공부하다가 이익의 수제자 권철신의 문하로 옮겨 학문을 닦던 중, 1784년 겨울 무렵에 권철신 동생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그의 발길은 당진과 보령의 염전지역에서 삽교천 인근의 덕산, 그리고 공주와 청양으로 이어졌다. 김대건 신부의 집안과 최양업 신부의 집안도 그의 가르침으로 신자가 되었다. 후에 서울로 이주하여 지도층이 된 홍필주와 황심도 역시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 때 한양에서는 광암 이벽이 천주교 포교의 선두로 나서 한국 천주교 신앙의 시작이 이벽과 경신환국시 아버지 이하진을 잃은 성호 이익의 수제자 권철신의 제자들이 모인 천진암강학에서 출발하였듯이, 신앙의 전파도 이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벽으로부터 전교를 받아서 천주교를 믿게 된 이들은 먼저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와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들이었다.
권철신의 제자들이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양근의 감호는 자연히 천주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특히 권일신이 그 주축이 되었다. 권일신은 가족과 하인은 물론이고 친구와 친지 등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하여 입교시켰다.
권일신의 전교로 입교한 집안사람들로는 아들 권상문, 권상학, 권상벽과 권상문의 아내 오숙혜(경신환국시 억울하게 사사된 오시수의 증손 오석충 女 ), 이윤하(지봉 이수광의 후손)의 아내가 된 누이 권씨와, 조숙의 아내가 된 딸 권데레사(동정부부), 조카 권상술(노방)과 권상립(기인, 요한), 권상익, 비 순덕과 구애 등이다
망설이던 그의 형 권철신도 권일신의 권유로 영세를 받아 입교하였고, 인근 마을에 거주하던 윤유일과 조동섬 등도 입교하였다. 권철신은 적극적으로 전교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인근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북경을 왕래하는 최초의 교회 밀사로 윤유일(바오로)이 선정되는데, 그가 거주하던 한강개는역시 한강 물길로 연결되는 곳이어서, 강 건너 이웃 감호(갈산) 마을의 권철신에게서 신앙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충주지방의 천주교 전파도 권철신의 인척관계로 시작된다. 권철신의 조카인 권상익(권득신 子 )을 사위로 맞은 충주의 이기연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이기연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신앙을 전하여, 아들 이중덕, 며느리 권아기련, 조카 이종덕, 종질 이문덕, 종손 이관기 등과 집안의 비녀까지 교리를 배워 천주교를 믿었다.
권일신의 전교로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 전주의 유항검이 입교하여 지방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고, 서울에서는 진산의 진사 윤지충과 홍낙민, 최창현, 지황 등 10여명이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방의 경우도 전주와 진산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이는 양근의 권철신을 매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주의 유항검(윤지충 이종사촌,권상연 고종사촌)은 1784년에 권철신을 찾아갔다가, 권일신의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진산의 윤지충도 권철신의 제자인 정약전의 영향으로(정약용의 외사촌, 후에 윤지충과 그의 외사촌 권상연은 권상연 모의 신주를 태워 진산사건의 주모자가 되어 처형됨 ) 1784년에 입교하여, 1787년에 정약전을 대부로 이승훈에게 영세하였다. 이어서 윤지충의 영향으로 무안. 무장, 고산 지역의 신앙공동체도 생겨나게 되었다.
강완숙의 진술(사학징의)에서, ‘제가(주문모신부의 편지) 항시 편지를 주고받은 곳은 정약종, 약용, 오석충, 권철신, 문영인(폐궁 나인), 권철신의 손아래 누이(이윤하) 등의 집입니다.
이렇게 양근 감호에 사는 권철신, 일신 형제가 이벽의 전교로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이어서 그 제자들에 의하여, 충청도의 내포지역과 충추지역, 그리고 전라도의 전주와 진산 등지로 널리 전파되어 갔다. 그리하여 정조 19년1795에는 금정, 예산, 충주 등 호서지방에 천주교인들이 많았으므로, 같은 남인 당인에 해당하는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을 보내어 천주교를 회유 탄압하고자 할 정도였다.
현대의 보수당 윤땡땡정권같이 당시 나라의 권력을 쥐고 흔들며 정치 깡패처럼 백성을 잡는 서인들. 그 틈바구니에서 아버지 사도세자가 희생되고 본인도 목숨을 잃을뻔한 정조는 정권을 잡고 남인을 우대하여 남인재상 채제공 같은 이를 정승으로 세웠는데 그 남인에서 천주교가 퍼지니 정조는 난처하게 된다 그래도 정학에 매진하면 사학은 알아서 소멸되리라 외치며 은근히 천주교 박해에 소극적이었는데 그 정조가 죽자 순조를 앞세운 서인들은 철두철미하게 천주교를 박해하며 또다시 남인들을 몰살한다 이게 신유박해이다
그런 나라 그런 시대에 태어나
이같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자라난 김대건은 1831년 조선교구 설정에 이어 1836년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방침에 따라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적합한 소년을 물색하던 모방(Pierre P. Maubant) 신부에 의해 최양업(崔良業)·최방제(崔方濟)에 이어 선택되었다. 모방 신부는 이들에게 라틴어와 함께 성직자로서의 기본소양을 가르친 후 이들을 12월 2일 한양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 유방제(劉方濟) 신부편에 마카오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모방 신부는 가장 늦게 선정된 그의 마음을 잘 몰라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김대건이 "앞으로 조선성교회를 위하여 몸을 바치겠다"고 굳게 맹세하여 함께 보냈다고 한다. 이들은 만주·내몽골·중국을 거쳐 8개월 만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東洋經理部)에서 정식 교육을 받게 되었다. 먼저 중등과정을 마친 후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했으며, 이들 중 최방제는 1838년 병사했다.
1841년 9월 김대건은 아편전쟁을 틈타 중국과 조선에서의 이권을 위해 파견된 프랑스 군함 2척 중 1척에 동승하여 1842년 양쯔강(揚子江)에 이르렀으나 난징조약(南京條約)의 체결로 군함이 되돌아가자 중국인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만주로 향했다. 이어 1842년 12월에는 압록강을 넘어 평안도에 진입했으나 여러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다음해 1월 만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또 1844년에는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éo) 주교의 명으로 외국인 신부들의 조선입국을 위해 두만강을 넘어 조선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전한 탄압의 분위기와 악화된 건강 때문에 천주교회의 수습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채 1845년 4월 배편으로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여기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로부터 8월 17일에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았다. 이로써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10월에는 배편으로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조선으로 향하여 천신만고 끝에 강경 황산포(黃山浦) 부근의 나바위에 상륙했다. 이어 그는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한양으로 잠입하여 활발한 전교활동을 펼쳤다. 1846년에는 아직 만주에 머물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 등의 입국을 위해 서해안 길을 개척하다가 6월에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옹진군 감옥을 거쳐 해주감옥에서 황해감사로부터 심문을 받고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성장하고 천주교를 펴기 위해서 귀국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이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가의 금령을 어기고 출국한 사실 및 천주교의 신부임이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몇몇 대신들의 부탁으로 세계지리의 개략을 책으로 만들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번역하여 2벌의 지도를 채색하여 바치기도 했다. 이 당시 조선정부는 그동안 권세를 누리면서 천주교 박해에 앞장서 왔던 풍양조씨의 세도가 막을 내리는 등 큰 권력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김대건 등의 옥사가 크게 중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해박해 때 프랑스인 신부 3명이 처형된 것에 항의하기 위해 1846년 프랑스 함대가 충청도 홍주 앞바다에 기항하고 조선국 정대감 앞으로 된 문책서를 전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크게 놀란 조선정부는 그의 처형을 결정했고, 마침내 김대건은 같은 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교인들이 수습하여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산중에 안치되었다.
조선의 정치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천주교의 포교와 박해 그리고 현재까지
아직도 그리고 영원히 이 세상은 악의 무리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인간사가 계속됨을 개탄하며
이 우강 솔뫼성지 김대건 신부를 통해 모두가 행복한 새로운 이상 세상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