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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12집(은발의 원고 방)
대산, 김장용
학교바로새우기 전국연합. 전남회장.
전남교원 단체 총 연합회. 전. 회장
광주사랑 범 시민운동 연합. 고문
빛 고을 건강타운 문학반. 은가람 회원
1. “늦가을 의 추억”
대산/ 김장용
봄날에 아름다웠던 꽃 봉우리
새 들도 즐겁게 노닐 던 정원
젊은 날에 추억안고 흘러서 가고
세월 따라 지난 삶 더듬어 보니
하늘아래 곱게 물든 단풍 되어
뒤안길에서 생각만 깊어진다.
등산로 산책길에서
소담하고 겸허한 갈대 꽃길
가을날에 애환 얽힌 추억 안고
힘들었던 삶 은발 역 에 내려놓고
묵묵히 고개 숙여 걸어왔던 길
지난세월 그리움에 추억 달랜다.
늦가을 낙엽 밟으며
한해가 저물어 간다는 애잔함에
다가 옴 보다 멀어지고 떨어져가는
인생의 늦가을 황혼 역 에서
지난세월 쓸쓸 한 상념 안고
즐거웠던 삶의 추억이 다가 온다.
2. “은발의 천국”
대산/ 김장용
빛 고을 노인 건강 타운
바람결에 댓잎 스친 체육관 뜰
각양각색 빛바랜 은발님 들
애환 얽힌 지나날 추억 안고
살아온 이야기 뒤안길 더듬어
숨 가쁘게 돌아간다.
늦가을에 빛 고을 은발님 들
자식자랑. 연금자랑. 건강자랑.
때지어 앉자 큰소리 떠듬거리며
지난 삶 이야기 꽃 만발 하고
품격에 맞는 천오백 점심 밥상
행복에 젖어 웅성거린다.
빛 고을타운 은발들의 천국
이곳에 내 한 몸 내려놓고
매서운 눈보라 겨울바람도
옷깃으로 감싸 보듬어 안아
창가에 머문 강추위 몰아 담아서
은빛날개로 날려 보내자.
3.“ 야속한 세월아”
대산/ 김 장 용
덧없이 흘러온 야속한 세월아
한 세상 살아오며 미운 情, 고운 情
앞뒤 없이 뒤섞인 너와나의 운명
이제 나는 쉬엄쉬엄 가겠으니
뒤 돌아보지도 말고 너만 가거 라
따라 가기도 너무 힘이 든다.
운명 앞에 손사래 치며
뿌리칠 수도 없이 흘러간 세월
한 평생 너 따라 있는 힘 다해서
바람같이 구름같이 고통도 걸머지고
삶의 골목 찾아 숨 가쁘게 달려 왔는데
지처서 못 딸아 가겠으니 너만 가거라.
哀歡(애환) 안고 살아온 삶
너털웃음 깔깔 대며 즐거웠던 삶
수많은 세상일 뒤안길 되돌아보며
좋은 추억 되새김하고 감회에 젖고
오래 토록 이 세상에 머물고 싶어도
못 따라 가겠으니 세월아 너만 가거라.
4., “코로나19, 의 아픔 ”
대산/ 김장용
모두가 보고 싶고
그리움만 커져 가는데
그때 그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지난날이 그리워 오는데
아! 오늘도 코로나19 아픔은
끝이 아련해서 보이지 않는다.
계절은 바뀌고 있는데
어디든 가고 만날 수 있었던
지난날 그날은 언제 오려 나
햇살 드리운 문 닫힌 창가에서
겨울이 오는 소리 들으면서
따뜻했던 지난 세월 그리워진다.
코로나19.의 아픔에 움 추렸던 날들
노을 앞에선 빛바랜 은발의 삶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망각의 늪 속으로 흘러 보내고
우리 은빛들 희망 안고 무탈하게
머물다 갈수 있기를 기원 한다.
5,“ 만나보고 싶은 사람”
*(동반의 인생길)*
대산/ 김장용
고독한 삶의 길목에서
인생길에 마음 열고 다가와
애틋한 情 나누며 어깨동무 하고
다정한 손길로 등을 도닥여 주고
애틋한 사랑담긴 사람 만나
오순도순 함께 걷고 싶다.
은발의 삶 미풍에 날려 보내고
뭉게구름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날
하얀 솜사탕 부드럽게 녹여서
튼실한 사랑주머니 가슴에 안고
흩어진 골목길에 꽃을 피워서
진한 향기 안고 동반의 인생길 걷자.
곱고 아름다운 마음 안고
주고받았던 사랑이 행복 이였다고
훨훨 손 사례 치며 하늘 높이 날아올라
행복 찾아 헤맸던 인생여정 의 삶
애틋한 사랑이 가득 담긴 멋진 사람
꼭 한번 만나 손잡고 걷고 싶다
( 회고록)
5.18. 40주년을 맞아
( 내가 격은 5,18,을 회고 한다)
대산/ 김 장 용
5.18 역사적 배경은 1980년 5월 17(토) 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전두한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퇴진 및 계엄령철폐를 요구하며 조속한 민주정부수립
전개를 위한 대한민국 광주시민의 민주화 운동 이였다.
1997년에서야 5.18 민주화 운동의 이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여 지금까지 정부주관 기념행사로 이어 오고 있다
국가의 민주화 과정에서 우리 광주, 전남인 들의 호국정신과 민주화 투쟁은 순수한 그 시대의 우리고장 광주. 전남 사람들이 군부독제와 인권탄압 으로부터 국민주권 회복 운동으로 세계화로 검증되어 내 고장 광주. 전남은 우리역사의 근대사에서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 매김 해가고 있다.
1,공무원 교육연수원 에 입교 하던 날.
나는 당시 1980년 광주5.18을 직접 광주 시가지 에서 체험하고. 지난 과거의
아파든 기억을 더듬어 보면서 내 삶의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싶어 필 을 들었다
순수한 내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이기에 각자 보는 시각에 따라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80년 고향땅에서 교직에 몸담고 있을 무렵에 교감승진 규정에 교육경력. 연수점수.
주임교사, 도서벽지, 포상, 등 의 부과점수 에 따라 교감연수를 지명하던 시기였다.
학교에서 학생주임 직을 맡아 임무를 수행 하고 학생들과 교수학습에 임하던 중에
전남도 교육청으로부터 새마을 교육연수를 지명 받고 전남 공무원 교육연수원
(광주시 매곡동 소재)에서 4주간 합숙 연수를 위해서 생활필수품과 옷가방
챙겨들고 5월 18일(일) 오후에 해남에서 버스로 광주에 도착하여 광주 북구 매곡동에
있는 공무원 교육연수원에 찾아들었다.
그 당시 새마을 연수생의 구성원은 소방 공무원. 경찰직. 교원 해서 186 명
으로 공무원 교육원장 백ㅇㅇ 의 주관으로 5월 19일 (월) 연수 개소식을 했었다
그런대 개소식을 끝내고 연수활동에 들어가 강의를 받아야할 시간에
강의실 배치도 하지 않고 강의실 앞 휴게실에 설치된 텔래비죤 앞에
삼삼오오 때지어 모여 tv시청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도 연수할 강사들이
하루 종일 내내 나타나지도 않고 연수를 시작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5월19 일 개강 첫날이 지나갔다
또 그다음 날도, 그다음날도, 마찬가지로 교육과정이 운영 되지 않아 연수생들은
여기저기서 들려온 소문들만 가지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무렴 오후시간에 연수원이 북구 매곡동 산중턱 높은 지대라서 광주 시가지가 내려다
보였는데 그때당시 내 눈에 보인 데로 깜짝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늘에는 헬리콥터 5~6 대가 때지어 날고 광주시내 한 복판쯤 에선 검은 연기가
이곳저곳 에서 올라오고 있어 무슨 일 인지도 알 수 없어 자리에 모인 연수생들은
겁 에 질려 전전 열열 하고 있을 때 무슨 소리인지 저쪽에 앉은 연수생 한분이
광주에 폭동이 일어나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19 (월) -- 22(목)요일 까지 연수강의 도 없이 연수생들이 모여 앉자
광주시내 형편 궁금증과 하늘 위 날아다닌 헬기와 시내 한 복판에서 올라온 검은 연기를
몇 일간 계속 보면서 불안감 에서 밤잠도 잘 이루지 못하면서 5일간을 견디어 온 고역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 가슴 에 땀이 솟아올라 무서움에 전율을 느낀다.
지금 같으면 휴대폰이 있어 시내 형편을 곧 연락받을 수 있었겠지만.
40년 전에 유선 전화기로만 상황을 연락 할 때라서 연수원에서 합숙하고
있는 연수생들은 밖의 세상일을 자세하게 알 수가 없었다.
22일 목요일 아침에야 연수원에 근무한 직원 한분이 강의 대기실에 들어오면서
광주시내 형편을 큰 사태가 일어나 사람이 많이 다치고 전라남도까지 난리가
났다고 대충 전달하고 자기도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연수원장 및
연수원 직원들이 출근을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자기는 연수원 근처에 집이 있어
집 에서 자전거로 출근 했다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차분하게 기다리자고 한다.
2. 귀가조치 와 연수시험
이렇게 시간이 흘러 5월 22일(목요일) 연수생을 모두 강당에 모아놓고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주지도 않고 연수생들의 합동 급식 조달 품목이 바닥나서 급식을 할 수 있는
길이 없어 더 이상 연수원 생활을 진행 할 수 없기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게 할 수 없으니
귀가하도록 귀가명령을 내린다고 연수원장이 단상에서 연수생들 의 귀가 조치 명령을 한다.
참! 귀가 막힐 일이다.
이 난국에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해남까지 가야 한단 말인가?
구체적 상황을 모르는 연수생들은 광주시내에 난리가 났다면.
여기가 가장 안식처인데 모든 교통수단이 끈긴 상태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연수생들의 불편한 의견이 이곳저곳 터져 나오기 시작 한다.
이때 승부욕이 강하고 과업 지향형인 나는 참을 수 없는 성질이 올라와 발동 한다
손을 치켜들고 건의 사항 있습니다.
라고 했더니 원장은 건의 요지를 말하라고 한다.
지금 이 난국에 여기가 우리 연수생들은 가장 안전한 피난처라고 모든
연수생들이 의견을 모아 가고 있는데 여기서 지금 당장 나가라고 한다면,
원지에서 올라온 고흥, 여천. 보성. 해남. 강진. 진도. 완도, 신안 등에서
온 연수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방향을 제시해 주라고 건의 했더니
원장 말씀은 연수원 에서도 충분이 알고 있지만 오늘 저녁부터는 급식 조달물품
품목이 바닥나서 연수생들의 식사 제공을 못하게 되어 버렸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오히려 연수생들 에게 연수원의 딱한 형편을 이야기하고 방향을 묻는다.
참 답답할 일이었다,
연수원 형편도 듣고 보니 어쩔 수 없는 형편이고......
생각 다 못해 아왕 이렇게 된 바에 여기 연수 목적이나 이야기 해야겠다
생각하고 필요한 연수 성적 처리에 대해서 또 건의를 한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발상을 했을까??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연수생들에게 성적점수를 모두 100 점, 이곳 새마을연수 목적이 연수성적
확보차원 이었기에 처리해 주면 퇴원 하겠노라고 건의 했더니 수강자들 로 부터
나의 건의 사항에 동조의 뜻을 담아 우레 같은 박수를 받는다. .
그 결과 강의실로 들어가 오전에 시험에 임 하게 되는데 한 강의실에 40명씩
무작위 로 들어가 시험 준비에 임 한다
프린트도 되지 않은 시험문제가 강사도 아닌 연수원 직원들이 시험 문제를 칠판에
분필로 15 문항을 기록으로 게시하고 감독 한다
세상에 살면서 아무리 난리 통 이라도 이런 시험 방법이 있을까?
역시 난리 통이니 어쩔 수 없겠지 하면서도 이때 또 나의 불같은 성격이 발동한다,
질문 있다고 발언을 얻어서 (평가란 반드시 소정의 학습이후에 목표치에
도달 정도를 측정한 것이 평가인데) 연수원에서 언제 지금 제시한 부분에 대하여
우리 연수생에게 강의 한 사실이 있는가를 질의 했더니 시험 감독자(연수원 직원)는
답변을 못하고 안절부절 하면서 쩔쩔 매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연수생 들은 강의를 한 시간도 들은 적이 없다 고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무뢰한 적 행위였지만 그때는 젊은 혈기로 여기 우리반원 끼리
정답을 찾아 가도록 하자고 하면서,
1.번 문제는 목민심서 저작자는 누구인가 ? 인데
정답은. 정약용입니다
하고 내가 제일 먼저 밝히고 2번답을 아는 순으로 발표해서 15번 까지
우리 강의실 에 같이한 사람은 똑같은 답안지를 내고 오후에는 짐을 챙겨
귀가해야 되는데 나는 집이 그때 당시 버스로 2시간 30분 걸리는 해남이고
그 당시엔 모든 교통수단이 통제되어 광주시내에는 대포 튀는 총소리와 헬기소리만
요란한 난리 통의 판국 이였기에 어떻게 할까??????
걸어서 가더라도 100리 길이기에 너무 멀어서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다가
당시 전남도청 국장으로 계신 처숙 집으로 가서 신세 좀 지는 수박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곳에 처제가 고등학생으로 취학하고 있어 같이 살고 있기에 그곳에서
잠간 머물다가 해남 내려갈 방법을 찾기로 마음먹고 연수원에서 광주 시청 앞까지
걸어오는 길 에 엄청난 광주시내의 현장의 모습들을 목격하고
아랫도리가 덜덜 떨려 무서운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지나가는 시내 버스창문은 모두 뭉개지고 깨져서 몽둥이. 대창. 들고 난리를 피우고
지나가고 여기저기서 민중들의 함성으로 광주 시가지가 난리 통이다
도대체 무슨 일 이기에 이 난리 인가? 하고 무서움 증마저 찾아들어 동명동 처숙부집을
찾아가기가 아래 도리에 힘이 빠져 떨려오고 찾아갈 수없이 공포가 밀려온다.
모든 연수생들이 걸어서 전남대 후문 쪽을 지나려는데 무장한 군인들이 일일이 검열로
연수생들의 신분을 확인받고 공포에 떨며 각자 갈길 찾아 시내를 향해서 조심스레
광주역 근교를 지나 시청 근방을 가고 있었는데. 길거리를 누비는 시위군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포에 질려 공중전화에서 동명동 처숙 댁으로 전화했더니 처제가 받는다.
나의 형편을 이야기하고 나를 데리러 오라고하고 있는 곳은 시청 앞 금수장 앞에 앉아
있다고 했더니 얼마가 지난 후에 두 처제가 찾아와서 안내를 받아 동명동 처숙 집에
도착해 보니 국장인 처숙 부부님은 도청 간부들은 광주를 떠나있으라는 피난 지시가 내려
두 분은 집을 비웠다고 한다,
3. 광주에서 지낸 시간들
이것이 전쟁 이고 난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곳 처숙 댁에 머물면서 공포에 질려 시내 형편을 알고 싶어 동명동 골목길을 조심스레 걷다가 고인이 되신 화순 능주 초등학교 에서 근무하시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은사님을 만나게 된다.
내 형편을 들으시고 은사님께서도 크게 시국에 대한 걱정을 하시며 댁이 동명동이라고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좋아하는 술을 놓고 선생님과 취했던 생각이 40년이 지나간 지금 아련한 추억으로 하늘에 계신 은사님이 눈물겹도록 보고파지고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하루하루 불안한 마음 안고 3일을 그곳 처숙 댁 에서 지내고 고향으로 내려갈
방법을 생각하고 중고 자전거 하나 구해서 자전거로 가볼까 하고 계림동 자전거포에 가서
중고 자전거를 상담 했더니 별 볼일 없어 보인 중고품도 7만 5천원을 호가 한다
그러나 호주머니에 가진 것이 고작 3만7천원 밖에 안 되기에 포기하고
되돌아 와서 저녁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일은 일찍 걸어서 라도 해남으로
출발 해야겠다 고 생각하고 내짐과 옷가방을 챙겨서 준비해 두었다.
4. 걸어서 고향 길
5월 25일 아침 일찍 옷가방 걸머메고 나선다.
처제들은 걱정의 눈길 이였지 만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고 동명동 에서
출발하여 걸어서 도청 앞 을 지나는데 도청 앞 상무체육관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서성거리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넘겨다보았더니 세상에 깜짝 놀란 사실을 목격하게 된다,
채육관안에 사람이 죽은 시신이 가득 차 있고 태극기에 덥혀 있어 가족들은 시신 앞에서
통곡을 하고 있다
못 볼 것을 본 것 같아 무서움이 밀려오지만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서
걸어서 백운동 까치 고갯길을 걷는다.
걷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선생님하고 튀어 나온다
나를 아는 분 같은 데 나는 그분을 잘 모르는 분이다.
어디 가느냐고 묻기에 지금 해남까지 걸어서 집에 가려고 출발 해서가고 있다고 했더니
자기둘째 아이가 행방이 불명 되어서 집에 못 내려간다고 해남가시면 성동리 해남동교 앞에
빵집 상점이 자기 집 이니 미안하지만 집에 자기 형편을 꼭 좀 전해달라고 애원을 한다.
꼭 6,25 때 군대에 입대한 장병들 환송 하듯 한 기분을 받으며 걸어서 어떻게 해남까지
갈수 있을까?
염려와 고민을 안고 광주대학 앞을 지나가려는데
정문 앞 에 설치된 경비실에서 육군대위와 군인 두 사람이 나와서 나의신분을 확인 하면서
어디 가느냐? 길래 고향이 해남인데 새마을 연수 로 공무원교육원 연수중 시국 사태로
연수가 중단되어 귀가 조치되어 모든 교통수단 차단으로 걸어서 해남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형편을 이야기 했더니 지금 어떻게 걸어서 해남까지 가겠느냐고 광주에 친척이 있다니 되돌아가서 시국이 편안 해지는 날이 오는 날 까지 머물다 가라고 길을 안 열어주기에 사정해 봐도 들어주지 않고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되돌아오다가 주위를 살펴서 가던 길을 바꿔 효천역 가는 길로 돌아서 표충사 가는 길을 찾아들어 죽기를 각오하고 표충사 대촌가는 굴다리 밑에까지 왔는데 12시가 넘어 힘이 빠지고 아침도 먹지 않고 출발 했더니 배가 고파서 걷기도
무척 힘들어 길가 언덕배기 숲에 기대어 가다가 쉬었다 하면서 걸어갔었다.
다시용기 내어 가다 서기를 반복 하면서 걷고 있는데 힘들고 피곤이 엄습해온다.
나에겐 생애 처음으로 다가온 시련이고 난리다.
학생시절 4.19.때 학생운동에 참여 했을 때도 이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그때는 깃발 들고 모두 함께 어깨동무하고 뭔지도 모르고 소리 만 지르고
따라 다녔기에 개인적은 큰 문제는 경찰연행 으로 혼쭐날 때말고는 이처럼
혼자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허우적대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 듯 그중 에도 딸기 철이라 할머니 두 분이
딸기를 밭에 흙이 털리지도 않은 상태로 바구니에 담고 팔고 있었다.
흙 방울까지 묻어 있는 딸기를 배가 고파서 한 사발 사서먹고 그길로 지름길을 찾아
이름도 알 수 없는 저수지 곁길을 돌고 남평 에 도착 하였는데 물이 먹고 싶어 가게에 들러
콜라 한 병을 사서 전부 마셨더니 배가 꿀꿀 데는데 뱃속에서도 전쟁이 나 난리를 치고
배를 움켜쥐고 한참을 허우적댔던 생각을 하면 그때 그곳이 지옥이었던가 싶다
그러면서도 또 걸었다 전남농업기술 센터를 지나 버스길도 아닌 지름길 논둑길을 따라 무작정 걷고 걸어서 해도 저물어 오는데 나주 세지면 인근에 길가를 걷고 있는데 저쪽 광주방면에서 택시 한데가 굴러온다.
그 시절엔 모든 교통수단이 마비되고 긴급 상황 발생 시 택시를 이용하고
군 단위 택시업자들은 호황을 이루었다고 나중에 야 알게 되었다.
내 옆을 지나가던 택시가 조금 내려가더니 택시기사는 택시를 새우고 나를 바라보면서
형님 어쩐 일이냐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데 . 나는 낯은 익지만 잘 모르는 분인데
기사는 나를 잘 알고 대한 것 같아서 어찌된 일이냐고 했더니 광주에 환자가족 을 싣고 가서
일을 끝내고 해남으로 내려가는 길이라고 한다.
사람은 죽으란 법은 없는 듯 별로 좋은 일한적도 없는데 전능하신 신은 나를 버리지 않는
구나하고 한없이 택시기사 손잡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택시를 타라고 한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사람은 죽으란 법은 없는 듯 택시 안에서 택시기사의 이야기는 이번 광주
사태로 지방 택시업자들 흥행을 누렸다고 하면서 해남에서 광주 까지 한사람에게
삼 만원 을 받는다고 한번 움직일 때 네 사람 태우고 가면 12만원으로 평소보다
세배의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주머니 형편이 긴장되어 해남에 내리면서 호주머니 툭툭 털어 2만 여원 택시비를 주고
나머지는 다음에 찾아가 주겠다고 했더니 그냥 내려서 집으로 가시라고 하면서 극구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나는 기억이 나지 않은데 전에 나에게 신세진 일이 너무 많았다고
하면서 오히려 감사 인사를 받고 그길 로 성동리 318-9 번지의 내 가족이 있는 집으로 들어서니 아내는 깜짝 놀라고 며칠 동안 연락이 안 되어 잠을 못 잦다 면서 엉엉 울음바다가
된다.
그동안 여러 날 동안 연락이 없었으니 걱정 되었게구나 생각하면서 나의 처진 모습을 본
안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살다 왔느냐고 아이들까지 기쁨의 울음바다가 된다.
이렇게 해서 오후 늦게야 집에 도착하면서 오늘 만난 택시기사의 고맙게 도움 받은 형편을 이야기 했었다
그 이후에도 택시기사와는 형제간의 정을 맺고 고향 해남에서 20여 년간 까지도 소식주고 받으며 형제같이 살아왔는데 무심한 세월 따라 그 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나갔다는 소식을 접해 들었을 때 한없는 감회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고 지난날 나에게 베풀어준 고마운 마음 을 담아 5.18. 광주민주화운동 하면 가슴 아프게 스며든 것이 그 동생의 따뜻한 했던 마음을 생각하며 한없는 슬픔에 젖는다.
5) 귀향 후 해남에서
다음날 학교에 출근했다.
모두들 깜짝 놀란다. 광주 연수중인 사람이 그리고 교통이 두절된 형편인데
언제 어떻게 왔느냐고 어떻게 된 사연이냐고 난리가 났다,
여기도 군대 트럭이 우슬제(옥천에서 해남 넘어온 재)와 상등제(마산에서 해남 넘어온 재)
를 넘어와 군민들까지도 공포에 떨고 학교까지 들어와 속없는 아이들은 군용 트럭에 올라타 어께를 휘두르고 학교 정문 앞을 나가다 어께를 크게 다쳐 보성병원에 입원중 이라고
동료 교원들도 당혹스런 표정으로 이야기 한다.
학생과장으로 호랑이 선생이란 별명으로 아이들을 회초리로 심하게 다루었던 나는
부재중이라 무사히 넘겨갔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으면서 참 기구한
혼란 이었구나 하면서 그 시절을 지내고 군 교육청으로부터 연수원 형편 이야기를
전해 달라 기에 학교와 교육청에 보고했던 기억들은 내 삶에 잊을 수 없는
큰 체험이고 5.18민주화를 위한 운동은 나에게 정말 힘들었고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왔던 광주 ,전남 시민들의 아픔 이었지만
결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내 고장 사람들의 투쟁의 길은 군사독재로부터
국민의 권리회복 찾아 민주화의 발판을 굳혀갔다는 역사의 뒤안길 앞에서
지난날을 회고하며 투쟁으로 희생한 선열들의 명복을 빌고 유족과 함께 역사에
기록 될 것이 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시절에 내가 당했던 아파든 체험을 회고해 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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