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자들이 듣는 음성
본문<요5:24~29>
오늘 핵심되는 용어가 25절과 28절에서 언급되는 ‘죽은 자들’과 ‘무덤 속에 있는 자’입니다. 둘 다 같은 말이지요(죽으면 무덤 속에 있게 되니까.) 자, 우리는 이렇게 펄펄 움직이고, 먹고, 말도 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 같은데 ㅎ님은 모든 인간을 죽은 자로 보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 죽은 자가 어디에서 온 말인지 ‘죽은 자’에 대한 개념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겠지요.
선악과 따먹고 에덴에서 추방된 인간은 ㅎ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자들이 되었습니다. 에덴은 천국을 상징하는 데, 천국에서 추방된 이 세상은 저주와 사망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ㅎ님은 범죄한 인간이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천사와 화염검으로 지키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죄로 인해서 인간은 생로병사의 운명을 걷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태어나면 늙어가고 병들고 마침내는 죽는 길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인류의 운명이지요.
이러한 저주의 존재들 중에서 창세전부터 ㅎ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을 구원키 위해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 IX 이십니다. 그래서 택함을 입은 ㅎ님의 백성들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사 ㅎ님과 화평케 해서, ㅎ님의 생명인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알고보면 IX의 십자가는 바로 생명나무를 지키던 화염검(불칼)에 자신이 찔려 죽음으로 열어 놓으신 대 사건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히10:19~20)에는 이렇게 증언 합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19절 지성소(ㅎ님 보좌를 상징), ㅎ님과 분리되어 죽은 자들이 되었는데, IX피로 ㅎ님과 연합된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ㅎ님의 생명인 영생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말임/영생의 의미)
그렇다면 이런 저주의 존재들이 어떻게 IX를 통해 영생의 존재가 되었을 까요?
ㅎ님의 말씀을 잘 지켜서요? 착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해서요? 혹은 고상하고 훌륭한 인격을 도모해서요? 이렇게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사람의 의’로는 결단코 구원인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성경은 단언 합니다. 오직 구원은 ‘ㅎ님의 의’가 되시는 IX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지요. 즉 구원은 행함으로 되는 게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놀랍고 고귀한 구원이, ㅎ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택함을 입은 백성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바로 ㅎ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ㅎ님은 ㅎ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백성을 창조하셨고 또한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엡1:5~6) ㅎ님이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다면 ㅎ님께서 세세토록 찬양 받으시기 위해서 하셔야 할 ㅎ님의 수고는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이 롬5장에서 역설적 진리를 언급~힌트)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함
-죄가 많을수록 용서 받은 은혜가 더더욱 감사할 테지요..(가령, 살인죄를 범한 사형수를 사면한 경우와 사기죄를 사면한 경우 누가 더 감사가 넘치겠는가? 단연히 살인죄다)
성경은 곳곳에서 인간의 영적 현주소가 죄와 허물로 죽은 자요, 진노의 자식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악의 종합세트란 말이지요(롬2~ 모든 불의, 살인, 간음, 추악, 탐욕, 음란, 미움, 분쟁, 거짓과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로서 구원은 고사하고 지옥 자식이라고 폭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인간이 자기 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안다고 해도 별거 아닌 것으로 자가당착에 빠져 사는 존재가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죄를 가리고 남의 죄는 정죄하고 심판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즉 자기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을 지적하는 불한당들이 인간들입니다.
내로남불(해석)의 비뚤어진 선악관을 가지고 사는 불법한 자들입니다. 창6장에서는 인간의 그 모든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 존재라고 고발하는데, 이걸 모르고 사는 자들이 바로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후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 주제를 알아먹으라고 율법을 주시게 됩니다. (네 죄를 알렸다: 율법의 목적)
율법을 주신 경로를 살펴보면 이러한 ㅎ님의 의도를 잘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조상 대대로 종살이 하던 ㅎ님의 언약백성,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을 아무 공로도 없이 어린양의 피로 출애굽 시킨 후에 광야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십니다.
-즉 먼저 구원을 하시고 그런 자들에게 나중에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려 하심(율법목적: 죄를 알게 하려고, 그래서 죄에서 자유케 하신 구원에 대해 감사에 넘쳐 찬송케 하려고요..)
출19장 이후에 내용을 보면, 이러한 ㅎ님의 의도가 아주 분명합니다.
ㅎ님이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율법을 먼저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쌍방간에 계약을 맺게 되지요. 너희가 지금 들려준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되, 어기면 저주를 받게 될 거야. 너희가 어찌하겠는가?(묻자),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아멘, 아멘,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키겠습니다. 염려 붙들어 매슈~)
그래서 계약이 성립되고 모세는 계약서에 도장 찍듯이 두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 정상으로 불려 올라가지요, 그리고 거기서 무려 40일을 머물게 합니다. 그런데 이 40일을 백성들은 못 견디고 아론을 부추겨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맙니다. 만일 40일이 아니라 좀 더 빨리 내려 왔으면 금송아지 사건은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ㅎ님은 일부러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ㅎ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폭로하는 셈이지요.
출32장 1절을 보면, 백성들이 아론에게 요구 합니다. 모세가 없어졌으니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라고 합니다. 이게 바로 죄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자...
십계명 2계명이 무엇?( 너희를 위하여 그 어떤 신이든 우상을 만들지 말라 임)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추구하는 ㅎ님은 어떤 ㅎ님 인가요?
-바로 이겁니다. 내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내 소원 들어주는 ㅎ님(병고침, 사업성공, 직장에서 승진, 자녀 형통함, 온갖 세상 축복을 들어주는 신을 ㅎ님, 예수님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왜 새벽예배가 성행합니까? 왜 십일조에 목을 매지요? 왜 충성봉사 합니까? 그들이 섬기는 신(일명, ㅎ님)께 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열심과 정성 받으시고 내 소원 들어 주세요..
-이것을 ㅎ님은 계13장에서 적나라하게 폭로(바다~짐슴은 짝퉁 예수 상징). 땅에서~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경배하라고 부추김(땅~짐승은 거짓 목사를 상징함, 세상 복주는 신을..)
다시 율법 주시는 현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ㅎ님 앞에서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키겠노라고 장담하던 이스라엘이 40일도 못되어 계약을 어긴 것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다구요? 인간은 ㅎ님의 말씀을 도저히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계약서에 찍힌 인주가 아직 마르기도 전에, 뒤돌아서 계약을 어기는 인간의 죄성이 폭로된 것이지요. 그래서 모세가 두 돌판을 던져서 깨뜨려 버린 겁니다. 이건 또 무얼 의미할까요? 왜 굳이 깨뜨렸어야 했을까요?
두 돌판은 인간의 죄를 지적하여 심판의 자리 멸망의 자리로 끌고 갑니다. 그렇기에 두 돌판을 깨드려 버린 것이지요. 이는 추상같은 ㅎ님의 법 앞에서 모든 죄인은 살아남지 못하기에 율법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엄위합니다. 인간 너희는 ㅎ님의 말씀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존재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게 죽은 자의 의미입니다. 인간은 ㅎ님이 원하시는 그 어떤 선과 의도 행할 수 없는 자-라는 의미에서 죽은 자입니다.
계약을 어긴 이스라엘은 모두가 계약대로 ㅎ님의 심판을 받고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3천여 명이 죽어나갈 때에, 모세가 ㅎ님께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중보를 하게 됩니다. <ㅎ님, 저들을 용서치 아니하시려면 차라리 나부터 죽여주세요.> 이같은 모세의 중보로 백성들은 용서받고 다시 두 돌판이 주어집니다. 모세의 중보는 참된 중보자이신 IX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다시 받은 두 돌판은 어디에 보관됩니까? 법궤 안에 감춰지죠(노출NO). 법궤는 싯딤 나무를 잘라 만들고 위에다가 순금을 입혀서 제작 합니다. 이는 인성 안에 신성을 가지신 IX를 상징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법궤는 십자가를 지신 IX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법궤 뚜껑 속죄소에 양의 피가 뿌려지는 것입니다. 엄위하신 ㅎ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율법을 IX의 피로 덮고 계신다는 메시지입니다. ㅎ님의 심판을 IX가 대신 담당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ㅎ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는 구도를 시청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게 법궤 속의 두 돌판 입니다.
당시에 법궤는 성막 안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지만, IX의 십자가 사건 후에는 죄사함 받은 성도 안에 성령이 오심으로 구약의 성막이 사람 성전으로 실제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 안에서 ㅎ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성령이 함께 거하시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사람성전=목표)
이것을 요14장 20절에서 밝히시고 있습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여기서 그날이란 성령을 받게 되는 그 때를 말합니다. 각자의 거듭나는 시점을 말함)
이렇게 구원은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행함은 일절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죄로 죽어 있기 때문에 거저 은혜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럼에도 구약 이스라엘은 조상 대대로 율법을 지켜 ㅎ님께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했고, 예수님 초림 당시에도 바리새인을 위시해서 모든 유대인들이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같이 사람의 행함으로 ㅎ님의 은혜를 따내고자 시도하는 유대교의 종교체제를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동하면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가 나음을 입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며 사는 것으로 비유된 것이지요.
그러나 38년된 병자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는 베데스다에 모여 있던 다른 병자들보다 가장 병세가 심했기에 물이 동한들 먼저 들어갈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불쑥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참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이게 ㅎ님께서 펼치시는 은혜의 구원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사람의 행함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ㅎ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아주 중대한 ㅎ님의 언약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ㅎ님의 의이신 IX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이지요. 이것은 창세전에 미리 정하신 ㅎ님의 예정섭리에 속한 ㅎ님의 설계입니다. 엡1장을 보면, 창세전에 IX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늘의 신령한 복인 ㅎ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비책으로 IX의 십자가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얻게 하신다는 언약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로 죽은 자가 사는 방법은 오직 IX의 대속으로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일을 구약에서도 곳곳에서 예표적 사건으로 암시를 해 놓았는데 두 군데 보겠습니다.
<왕하 4:32-35> 32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배경은 이렇습니다. 한번은 엘리사가 수넴이라는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어떤 여인이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인 줄 알고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앞으로 오고가는 길에 자기 집에서 머물라고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엘리사가 너무 고마워서 보답을 하고 싶어서 물으니 자식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엘리사의 말대로 그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이가 죽고 맙니다. 이에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가서 죽은 아들을 살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품어서 자기에게 있던 생명의 기운을 집어넣어서 살려냅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품어서 살려낸 것이지요. 산 자의 기운을 죽은 송장에게 줌으로서 살려 낸 것입니다.
이것은 IX의 십자가 사건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롬6장~,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홀로 죽고 부활 한 게 아니라, ㅎ님의 언약 백성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고 함께 부활 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생명으로 성도들을 감싸서 함께 죽음을 통과 한 것이었지요. 주님은 ㅎ님의 생명인 영생을 가지신 분이기에 죽음이 예수를 가두어 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3일 후에 다시 일어날 때에 성도들도 같이 부활 한 것이지요. 그래서 성도도 더 이상 죽음이 없습니다.
또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죽은 자를 살려낸 사건이 있습니다.
이번엔 엘리사가 죽고 나서 그 뼈에 죽은 자가 닿아서 살아난 사건입니다.
<왕하 13:20-21>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강도떼)이 지경을 범한지라 21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강도떼)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어 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모압 강도떼가 침범을 하자 사람을 장사하던 자들이 혹 강도떼가 시체를 훼손할까 염려해서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졌는데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놀랍고 신비스러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도 이러한 놀라운 기적과 신비스러운 일이 영적인 세계에서 계속 발생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알지 못할 뿐입니다.
엘리사의 이런 불가사의한 사건들은 모두가 장차 메시야가 오시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죽은 자를 살려 내실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계시입니다. 이러한 상징은 모두가 예수님을 겨냥하고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오시면 죽은 자를 살려 낼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에스겔서 37장에서도 장차 죽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 날 것을 해골들이 가득한 골짜기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서 죽었던 해골들이 살아나는 이야기로 비유적으로 말씀해 주셨어요.
이러한 일들을 오늘 본문에선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죽은 자들에게 소리를 외쳐 살려 낸다고 하십니다.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8절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고 합니다.
마치 해골골짜기에 생기가 분 것 같이 죽은 자들에게 생명의 음성이 들려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음성을 듣는 자는 다 살아납니다.
아니 죽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에 음성을 듣습니까?
사람이 죽으면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죽은 자가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은 자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 일이 있었어요.
바로 나사로 사건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풀 풀 나는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려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가 묻혀 있던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라고 부르자, 죽었던 나사로가 꽁 꽁 묵인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 난 겁니다.
이 사건을 통해 ㅎ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IX가 바로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엘리사를 통하여서 보여 주셨던 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에서 해골을 살려내는 사건으로 미리 계시 하셨던 그 장본인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죽은 나사로를 살림으로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에 곧바로 가시지 않고, 죽고 나서 장사 지낸 후 나흘 만에 무덤에 가서 죽은 자를 살려 내신 것입니다. 나사로는 단순히 육신의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에서 살려내는 모형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이렇게 살려 내실 것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예수님께서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려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믿었고, 어떤 사람은 의심하여서 예수를 오히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세상엔 예수님이 믿어지는 사람과, 믿어지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온 인류가 모두 한 통속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오시고 나니 두 부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믿어지는 사람과, 믿어지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믿어지는 사람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영생 얻기로 작정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 됩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이 되셔서 다 살려 내십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대신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다 살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고 하십니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이 원하는 자를 살린다는 말은 예수님께 속한 자들만 살려 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이 세상엔 예수님 것과, 예수님 것이 아닌 자들로 구분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이 내꺼!와 니꺼!~를 구분해 내고 계신 겁니다.
이것을 마13,11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천국의 비밀이 하락되었으나, 저들에게는 하락되지 아니했다..(놀랍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2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렇다면 죽은 자들이 어떻게 아들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인가요? 나사로가 썩어가는 시체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 능력의 근거가 무엇일가요? 바로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요16장을 보면, 성령이 임하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 하신다고 합니다. 책망이란 바로 깨닫게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죄의 개념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외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들, 그것도 고작 윤리 도덕적인 범과들로만 알고 있었는데, 성령을 받고 보니 ‘나’라는 인간 자체가 죄로 죽은 자임을 알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나의 실존 자체가 죄악 덩어리이기에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고, 용서 받을 수도 없는 자인데, 그저 IX의 십자가 피로 용서함 받아 의롭게 되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ㅎ님의 의입니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사람의 율법적 행함이 의가 아니라 오직 IX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IX와 함께 십자가에서 ㅎ님의 심판을 통과 하였기에 성도에게는 심판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이며 영광 입니까? 죄와 사망에서 자유한 자, 그래서 사망이 건드리지 못하는 자, 그게 성도입니다. 그래서 IX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즉 성도에게는 심판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24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반복이지요? 이것이야 말로 참되고 참된 말이니 잘 새겨들으라는 말입니다. 내 말을 듣고(즉 십자가 복음을 믿고~), 나 보내신 자를 믿으면( ㅎ님의 언약을 믿으면~)
->같은 말을 약간 다르게 표현 한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게 곧 ㅎ님을 믿는 게 됩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었으니 심판은 없다는 것이지요.
영생은 ㅎ님의 생명을 말하는데, 영생을 소유한 자는 이미 ㅎ님 품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거기가 생명의 세계인 ㅎ님 나라이고 천국입니다.
같은 말을 26절에서도 합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일5장에서도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합니다.
-너희에게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라. ㅎ님이 생명을 자기 아들에게 주셨으니, 아들이 있는 자마다 영생이 있고, 아들이 없으면 영생이 없느니라.
-ㅎ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어요? 아들 예수에게 있지요. 아들을 영접한 자는 이미 ㅎ님의 생명인 영생을 가진 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안에 아들이 있습니까? (몰라요?)
아들이 있는지를 어떻게 알지요? 고후13:5절도 너희 안에 IX가 계신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만일 예수그리스도가 없다면 너희는 버리운 자니라(복음이 믿어지는 여부를 말함)
마지막으로 29절을 봅시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말씀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장차 온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를 상징하기도 하고,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과 악한 일이란? 인간의 윤리 도덕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대하는 모습을 말합니다(많은 사람이 문자에 잡혀 속는다. ㅎ님의 의도다. 단으로 묶음)
-여기서 종교냐 진리냐로 구분되기도 함(슈바이쳐, 마더 테레사, 밥퍼 목사-학하고 선항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고군분투한 자들임-종교인들/진리는 ㅎ님이 내게 찾아오심,=은혜)
그러므로 본문이 말하는 부활이란? 복음이 증거되면 자기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악한 자는 예수님을 대적하게 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고, 선한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대적한다는 말은, 십자가 복음으로만 구원되는 게 아니라 행함이 보태져야 구원된다고 여기는 신앙을 말함.. 거짓 신앙이고 다른 복음, 다른 영, 다른 예수, 다른 ㅎ님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선에 속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게 된 것이고, 악에 속한 사람은 심판에 부활로 나아오게 된 셈입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동일하게 예수님의 음성으로 부활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부활하고, 불신자는 예수를 거부하는 쪽으로 부활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과 배척하는 자들로서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나중에 받는 것이 아니고 현재 이미 받았습니다. 영생의 사람으로 나중에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살아났습니다. 성도는 영적으로 이미 영생의 사람으로 부활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도 다시 사는 겁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을 하늘의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살려놓았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놓았습니다.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증거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의 증거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현찰이지 외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믿어진다는 것은 곧 부활이 되었고 영생을 얻었고 천국 안에 들어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능력도 알고 비밀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은 현재 예수의 생명으로 하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의 삶을 나중에 살려고 하지 말고 현재 속에서 살아가십시오.
예수의 생명으로 현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영생의 삶입니다.
그것의 실제가 바로 자기 행위를 의존치 않고, 죽으나 사나 IX만 믿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부활로 나아온 자는 ㅎ님의 사랑의 언약만 붙잡고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