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1월 6일 평양중앙교회에서 시작된 사경회는 한국 기독교회의 부흥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성령의 운동으로 출발한 이 집회는 회개 운동과 함께 철야기도, 새벽기도 통성기도, 간증과 전도운동 등 각종 기도회의 문을 열었다. 간혹 성령운동은 신비운동을 동반하여 부작용이 적지 않게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1930년대에는 이용도 목사를 위시하여 도처에서 많은 신비운동가들이 속출하였다.
본 교단의 펜윅 선교사는 특별히 교인들이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지도했다. 그런 가르침이 본 교단이 신비운동에 빠지지 않았던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방침에 의해 교육을 받았고, 신학교에서도 역시 같은 내용으로 배웠다. 그래서 나는 성령 강림이 오순절 때 그쳤고, 또다시 오시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 때는 찬송가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를 거의 부르지 않았다.
신학교를 졸업한 뒤, 자신감을 갖고 다시 목회에 임했다. 수석졸업이라는 영예 때문이었는지 대흥침례교회에서 초빙하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좋은 기회였지만, 그 자리에 가려고 애쓰던 장일수 목사에게 양보했다. 나는 젊고 패기가 있을 때였다. 신학교 시절 늘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은 터라, 목회도 곧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그래서 개척교회였던 홍성교회에 그대로 남기로 했다.
개척교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일꾼이 턱없이 부족했다. 주일학교 아동 2-30명을 모아 놓고 목이 터져라 설교하고, 이어서 장년 십여 명 앞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나면, 온 몸이 기진맥진해졌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님께 충성을 다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회의 부흥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경제난까지 봉착하고 나면, 더욱 힘이 들었다. 신학교 시절, 목회 초기는 열심으로 하고 5년이 지나면 꾀로 하고 10년이 되면 정치로 한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나 역시 꾀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교사 한 분을 영입하여 교회를 돕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어성경반을 만들어 중고등학생을 포섭하고 재정적으로도 도움을 받자는 인간적인 계산이 나왔다. 계획서를 작성하여 광천에 있는 지방회장 신혁균 목사에게 설명했다. 신목사는 나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말하기를, 그렇잖아도 선교부에서 지역교회를 육성한다는 차원으로 1개 도내에 세 곳을 선정하여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때마침 대전 오정동에서 선교부 총회가 개최되고 있으니, 충서지방 각 교회의 이름으로 초청서를 보내기로 했다. 나는 이것이 주님의 뜻이구나 생각하며 기뻐했다.
광천교회의 전도사로 있던 김성수(金成洙) 씨는 남부 교회들(담산, 화계, 죽림, 주포, 미산교회 등)을, 나는 북부 교회들을 방문하며 서류를 작성하기로 했다. 길을 떠나 월림교회, 홍원교회, 장곡(長谷)교회, 예산(禮山)교회, 발현(勃現)교회까지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었다. 하는 수 없이 발현교회에서 하루를 머물기로 했다. 발현교회는 예산 본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회로, 이회남 안수집사가 교회를 돌보고 있었다. 1957년 6월 26일 수요일. 나는 저녁을 대접 받고, 이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함께 드렸다.
천막을 치고 남포등 5개를 걸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데 약 40명 가량의 신자들이 모였다. 나는 설교를 부탁받아 사도행전 2장 1절 이하를 읽고, “성령 강림”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성령 강림은 오순절에 임했으므로, 지금은 강림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하는 것이라고 설교했다. 그런데 설교가 모두 끝나고 기도를 드리는 동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어 모든 것을 휩쓸어 강단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수박덩이만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배 속까지 들어갔다가 불의 혀 같이 양어깨로 갈라져 나갔다. 나의 온 몸은 불덩이가 된 것 같았고, 기도하던 목소리는 몇 배로 커졌다. 끝날 줄 모르는 기도가 계속되었으나, 나는 절제하는 마음으로 끝을 맺었다. 아멘으로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뜬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 거센 바람 속에서도 촛불 하나 꺼지지 않았다. 내심으로 그 바람 때문에 천막도 날아가고 남포불도 모두 꺼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풍금 위에 있던 등잔불조차 꺼지지 않았다. 그 불은 신학생이었던 우제창이 반주하면서 찬송가를 넘기는 바람에도 꺼졌던 불이었기에 더욱 의아했다.
이런 이상한 체험은 처음이었다. 내게는 한량없는 기쁨이 넘쳤다.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사회를 보던 이전도사가 나의 방문취지를 설명한 뒤에 나는 시간을 얻어 다시 강단에 섰다. 마지막 기도시간에 이 교회 안에 무슨 징조가 일어났는데, 체험한 분이 계시냐고 물었다. 반 정도는 급한 바람이 불어 닥치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은 눈을 떠보니 바람이 강대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나머지 반 정도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성령강림이 오늘날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교한 부분을 공식적으로 취소했다. 바로 “성령강림이 이렇게 오는 것이구나” 하며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이전에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라는 찬송을 부르지 않았으나, 그때부터는 이 찬송을 즐겨 부르게 되었다. 내가 염려하고 걱정하던 모든 문제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이 솟아 났다. 그동안 나를 도와준 분들에게는 너무 죄송한 일이었지만, 그런 일이 있은 뒤 나는 선교사를 초청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나의 은사(恩賜) 생활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영계(靈界)를 처음으로 맛보았다. 기도 중에 각 가지 은사체험이 계속 나타났다. 나는 이 체험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친히 낙원, 즉 천국에 갔다 왔다고 말한 고린도후서 12장 1-4절과,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천국을 보면서 말한 요한계시록 1장 9절과, 스데반이 환상적인 체험을 기록한 사도행전 7장 54-60절을 기쁨으로 대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 성령의 능력은 나에게서 사라지지 않았고, 나는 그 성령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그 뒤에도 성령의 역사는 계속 되었다. 특히 기도할 때 능력이 온 몸에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이 붙어 오르듯, 온 몸이 뜨겁게 타올랐다. 동시에 기쁨이 충만해졌다. 그리고 몸에서는 향취가 났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부흥강사로서 초빙을 받은 곳은 전북 황산교회였다. 그 교회는 전흥상(全興相)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집회를 인도하는 가운데 범상하지 않은 체험을 할 수 있었다. 하루는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는 데 교회 안에 안개가 앉은 키만큼 자욱하게 낀 것을 보게 되었다. 다음에는 조병우(曺秉宇) 목사가 시무하던 전북 고창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나의 부흥집회는 그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말처럼, 나의 은사체험 소문은 두루 퍼졌다. 본 교단 총회임원회까지 알게 되었다. 당시 우리 교단은 기도운동, 은사운동에 대해 매우 민감할 때였다. 같은 교단에 소속된 세도교회 이유성 씨를 비롯하여 몇 명의 교역자들이 이단성이 있다 하여 제명 대상으로 거론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를 같이 하여 내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총회임원들은 이 일로 고심을 했던 것 같다. 들은 바에 따르면 김갑수는 본 교단 태생이며, 교단의 정규 신학교를 졸업한 처지인지라 그들과 같이 취급할 수도 없고 해서 논의 끝에 당분간 지켜보기로 했다 한다.
나는 임원회에서 어떤 결론을 내린다 하더라도 주님이 허락하신 은사를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임원회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대부분 원로목사들이었고, 그분들은 펜윅 선교사의 신앙지도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펜윅 선교사는 기도하는 정성줄에 빠지지 말라고 가르쳤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말씀에 굳게 선 신앙생활을 하라고 했다. 말씀을 많이 보면 “주 양반” 된다고 했다. 사실 1930년경 한국 교계는 영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울 때였다. 이용도 목사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교회라는 명칭은 기독교 이외의 종교단체들도 사용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날로 세속화 되어갔고 성별단체를 구별할 수 없는 때였다. 그래서 본 교단에서는 성도들이 양무리라는 뜻이기 때문에 교회(敎會) 대신 대(隊)자를 넣어 교단명칭을 동아기독대(東亞基督隊)로 개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신학의 폭도 넓어지고 한국교계도 많은 발전과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는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배우고 연구하여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은사체험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생활을 지속하고 있었다. 감히 부언한다면, 주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커서 세상의 무엇과도 견줄 수 없었다. 세상부귀나 지위와 명예도 이 은혜와 바꿀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생활에서 남에게 실망을 준 일이 없었고, 문제가 될 만한 일도 없었다.
내 경험에 따르면, 은사체험은 변화를 가져온다. 그간 조급했던 마음이 평안과 기쁨으로 바뀌었고, 원망과 불만이 생기기 전에 이해심이 앞섰다. 내 맘을 속일 수 없어서 불가불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이지만, 내 마음에 미운 사람이 없어진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