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애도자에게 격분하다 당신도 우신 이유>의 줄거리:
나사로가 죽었음을 슬퍼하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이 분노로 인해서 콧김을 내 뿜듯이 그렇게 격분하십니다. 그렇게 하시고는 곧이어 당신도 눈물을 흘리십니다. 격분과 슬픔을 동시에 드러내시는 종잡을 수 없는 예수님의 감정은 그 의미가 무엇일까? 나사로의 죽음이 가져온 상실을 보는 관점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애도자에게 격분하다 당신도 우신 이유
(요한복음 11:17~44)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애도자에게 격분하다 당신도 우신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애도자에게 격분하다 당신도 우신 이유”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에게 격분하시다가 당신도 눈물을 흘리십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감정이 예수님께 동시에 나타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이에 근거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 슬픔을 배워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계속해서 마시기, 먹기, 보기, 하기, 심지어 있기조차도 배워야 함을 반복해서 익히고 있습니다. 인격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들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배워야 할 것은 슬퍼하기입니다. 예수님께 슬퍼하기를 배워야 진정으로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첫 번째 특징은 기쁨입니다. 생명 없음을 슬퍼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쁨을 알 수 있으며, 기쁨을 아는 상태에서만 생명도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 애도하는 사람들에게 격분하시고 당신도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께서 격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음을 슬퍼하는데 격분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격분의 감정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시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의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표현들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읽지 않은 23~24절을 보면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화로부터 마르다는 부활을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부활하여 무덤에서 걸어 나온 사건은 마르다가 생각한 것처럼 예수님 재림 때의 종말론적인 심판과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나사로가 친했기에 살리신 것도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사랑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나사로와 예수님의 친분이 두터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것을 슬퍼하시고 서운해하시다가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살리신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의 의미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한편 본문 39절을 보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썩기 시작한 시체를 향하여 명령하심으로 다시 살려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러나 이렇게 기적을 일으키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받으실 수 있었다면 이제까지 행하신 기적으로도 충분하고 넘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38년 된 병자를 일으켜 걷게 하셨고,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사람을 보게 하셨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고,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셨기에 사도 요한은 21장 25절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이라면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새삼스러운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으며,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시기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들이 나사로를 살리신 이유가 아니라면 이 표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 사건을 직접적인 출발점으로 해서 유대인들은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작업에 착수하게 됩니다. 십자가로 귀결되는 예수님 탄압과정의 시작점이 바로 이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의 연관성 안에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도록 의도적으로 내버려두셨다가 시체가 썩기 시작한 후에야 찾아오셔서 살리십니다. 이 사건은 4차원의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일어날 일을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죽음과 부활은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개인의 인격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장 8절에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부활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천지가 개벽하는 사건이지만 개인의 인격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눈에 보이도록 펼쳐 주신 것이 바로 나사로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것을 위해 의도적으로 나사로를 죽도록 내버려두셨고 썩기 시작한 시체를 다시 살리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나야 하는 죽음과 부활을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진행되는 가운데 종잡을 수 없는 예수님의 감정적 기복을 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슬퍼하는 사람들을 향해 격분하시고 곧이어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33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비통히 여기신다는 부분의 원문을 보면 엠브리마오마이(ἐμβριμάομαι)로서 “격렬하게 불쾌감을 드러내다”라는 뜻입니다. 어원을 보자면 말이 분노하여 콧김을 내뿜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분노로 인해 말이 콧김을 내뿜듯이 격분하셨습니다. 그런데 또한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원문을 직역해보면 “스스로 마음이 흔들리셨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불쌍히 여기셨든 마르다와 마리아와 울던 유대인들을 불쌍히 여기셨든 예수님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눈물까지 흘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격노와 마음의 흔들림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셨고 격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격분하신 이유는 배반감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의식과 마음은 슬픔에 관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의식으로 있음을 느끼고 마음으로는 좋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의식으로 있음을 느끼고 마음으로 좋음을 느끼던 나사로가 세상을 떠나자 상실감을 느껴 슬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상실감은 좋은 것을 잃었을 때만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집 앞에 내다 버린 쓰레기가 없어졌다고 해서 상실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사람들이 나사로의 죽음에 상실감을 느낀 것이 예수님께서 격분하신 이유가 됩니다.
사람들이 육체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이유는 죽음이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상실감은 좋음에 기반을 둡니다. 다시 말해 육체의 죽음에 상실감을 느낀다면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3차원의 세상을 좋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있는 천국의 좋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부활하신 뒤에 곧바로 천국으로 되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좋음을 아시고 그 아버지가 계신 천국의 좋음을 아시던 예수님께서는 선민이라는 사람들이 육체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에서 격렬한 배반감과 분통을 느끼실 수밖에 없습니다. 선민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특별히 예수님의 측근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만 손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천국 전체를 모독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은 삶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이방인들에게 이러한 말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에게서 이러한 삶의 태도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신기척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있음을 알리시는 기척의 완성이십니다. 오감으로 포착할 수 없는 영역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알리는 기척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과 같은 인물들이 예수님의 예표로 존재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보면서 예수님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대 속에서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4차원의 세계에 천국과 하나님의 있음을 알려주시는 기척을 접하며 살 수 있었던 선민들이 육체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것은 예수님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육체의 죽음을 애도함에는 천국과 하나님에 대한 무시가 깃들어있었습니다. 천국과 하나님의 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기에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상실로 여겨서 슬퍼하였던 것입니다.
천국을 염두에 둔다면 육체가 죽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은 상실이 아닙니다.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사람이 졸업하는 것을 슬퍼하며 애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차원의 천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 전부터 계시다가 3차원의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육체의 죽음을 상실로 여기는 사람들이 선민이라는 사실에 격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천국의 있음과 하나님의 있음을 기척을 통하여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선민들은 육체로 접하는 3차원의 세상을 떠나는 것을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배반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상실로 여겨지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셔서 주시려는 구원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의 합작입니다. 이 죽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해서 죽어야 될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합작해서 만든 죽음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격분하게 하신 이유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듯이 십자가에서 인격의 핵심인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이 죽어야만 합니다. 육체가 죽어서 세상을 상실하는 것이 슬프다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수 없고 구원의 역사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에서 나사로의 죽음과 똑같은 죽음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 세상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죽음이 십자가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처럼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은 십자가에서 3차원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그럴 때 4차원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은 의식과 마음에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진심으로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석별에 대한 일시적인 슬픔을 느꼈던 것이 아니라 진짜 상실에 대한 슬픔을 느끼면서 애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식과 마음이 세상을 향하고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십자가 사건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육체의 죽음을 상실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죽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의 진짜 의미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스스로 마음이 흔들리셨다”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왜 격분하시다가 마음이 흔들리셨고 눈물을 흘리셔야 했던 것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후서 5장 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선민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정상적 반응입니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소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없다면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몸은 살아있는데 마음이 떠나기를 소원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와 연관하여 격분하시던 예수님이 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심지어 슬퍼하던 사람들에 대해 격분하시다가 스스로 슬퍼하시며 우십니다. 예수님의 슬픔의 이유는 다른 상실을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입니다. 십자가로 귀결되는 과정이 이 사건을 통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양의 문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앞선 10장에서 양의 문을 중심으로 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가 양의 문입니다.
4차원에 오감을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얘들아, 너희가 돈 문제로 고민하지만 돈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건강 문제로 고민하지만 건강 문제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들보다 내가 있다는 것을 느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있음을 가르쳐주시려는 기척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하나님의 기척 즉 신기척이신 예수님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께서 그토록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좋음과 천국의 좋음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양의 문인 십자가를 통과해 들어감으로써 3차원을 의도적으로 버리고 상실하는 것입니다. 몸은 살아있어도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이 의도적으로 3차원의 세상을 버리고 4차원의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양의 문인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도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양의 문이 만들어지기 전에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양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양의 문은 살아있는 동안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양의 문에 들어갈 수 없다면 4차원의 천국을 상실하게 됩니다.
마르다 마리아 자매와 선민이라는 유대인들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세상의 상실을 애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격분하시던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와의 관계에서는 슬픔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고 예수님을 사랑하였던 나사로가 4차원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양의 문인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죽은 것을 슬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눈물은 인류를 향한 눈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차원을 상실로 여기는 사람들을 4차원 세계로 들어가게 하시려고 양의 문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을 좋아해서 끝까지 십자가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예수님도 나사로를 사랑하셨지만 양의 문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을 슬퍼하셨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 슬픔이 있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슬픔입니다. 우리는 슬픔도 예수님께 배워야만 합니다. 슬픔을 배워서 진짜 슬퍼할 수 없다면 진짜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있기”를 배워야 했습니다. 또 “내가 보기”를 배워야 했습니다. “마시기”와 “먹기”도 배워야 했습니다. 우리는 밥만 먹으면 되는 줄 알았지만 의식으로는 하나님의 있음을 먹어야 하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좋음을 먹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먹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먹기에 대한 배움이 있어야 함을 알았듯이 예수님으로부터 진짜 슬픔 또한 배워야 합니다.
몸의 죽음은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몸으로 만나는 세상을 잃는 것이 슬퍼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잃는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갖고 있으면 잃게 되지만 버리면 잃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버리겠다는 마음 없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갈 수 없고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육체가 죽는 것은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죽음도 슬퍼할 일이 아니고 내가 느끼는 세상의 상실도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안 된다고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 자체를 버린다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안 되는 것이 슬퍼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통째로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3차원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것도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단 한 가지 슬퍼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살아있는 동안에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3차원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세상을 통째로 버려야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슬퍼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슬픈 것이지 3차원의 세상에서는 육체의 죽음까지 포함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3차원의 세상은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을 버려야 되고 빠져나가야 할 대상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몸이 죽는 것으로 우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물론 한 번에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십자가 생활화를 반복하는 중에 그러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 세상에서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 어떤 일로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양의 문이신 십자가로 들어가는 동안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은 4차원 세계를 들락거리며 기뻐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 몸으로 사는 동안 슬픔으로 느끼던 순간들이 기쁨의 순간이 됩니다. 이러한 일을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 슬픔을 배워서 진정한 기쁨을 누리실 수 있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그동안 슬퍼하고 기뻐했던 모든 것들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 진정한 슬픔을 배웠으니 또한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동안 슬퍼했던 모든 상황을 기쁨과 감사로 대하는 여생을 살아가는 아버지의 빛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