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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무심하면 불성은 저절로 현전<現前>
불교신문/2905호/2013년4월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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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탁/연세대 철학과 교수 |
오늘날, 화엄교학이
각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보살행을 통한 점검이
없기 때문이고
간화선이 외면당하는 것은
대화를 통한 점검이
없기 때문이다
선이든 화엄이든
우리에게 감동을 주려면
경전ㆍ조사어록을 읽고
지난 선배들의 경험을
십분 살려서
지금의 언어로 그리고
현실의 행동으로
저마다의 ‘불성’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어 정착하는 과정에서 ‘남종선’이라는 중국 지역만의 고유한 불교가 만들어진다. 중국의 ‘남종선’과 똑 같은 형태의 불교가 인도 땅에도 존재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종선’이 인도 불교의 교학 사상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남종선’은 인도 불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당시 중국에 전파된 불교 교학과 연결 지어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후대의 선종 역사에 따르면 중국 양나라 시대에 인도의 보리 달마 스님이 선불교를 이 지역에 전했다고 한다. 그러면 달마 스님은 무엇을 이 땅에 전하려고 했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이니,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니,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니, ‘견성성불(見性成佛)’ 등을 떠올릴 것이다. 언어나 문자를 넘어서서 자신의 본성을 깨쳐 깨달음을 완성하자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말이나 글에 매이지 말고, 그 말이나 글이 궁극적으로 지시 또는 지향하는 것을 알아차리자는 발상은 비단 ‘남종선’에만 유독 부르짖는 것은 아니다. 언어나 글로 표현된 ‘교리’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의 하나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의미’의 전달과 체험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종선’에서 ‘불립문자’ 등을 제창하는 이유는 당시의 불교가 그렇지 못했다는 반성과 또 그에 대한 새로운 대안의 제시에 있다. 이 점은 기성의 불교에 대한 새로운 태도 표방이다.
선불교가 이렇게 새로운 태도 표방을 하면서도, 역시 대승불교 고유의 교학 이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 이론이다. 개인의 본성 속에는 부처와 똑 같은 본성이 간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불성(佛性) 사상이라 한다. 이렇게 보면 선불교는 ‘불성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점에서는 기존의 교학 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면도 ‘불성’을 ‘체험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기존의 교학과는 입장을 달리한다.
상대가 저마다의 불성을 체험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중국의 선사들은 ‘대화’라는 불교의 전통적인 방식을 채용한다. 대승이나 소승을 막론하고 불교 경전에 ‘대화’가 많이 나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대방광(大方廣)’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경전에는 특히 여러 명이 묻고 질문하는 대화가 등장한다. ‘방광(方廣)’은 대화를 의미하는 범어 ‘바이풀리야 vaipulya’의 번역어이다. 중국의 선종에서는 경전의 주석이나 해설의 방법 대신, 상대와의 대화를 통해서 ‘불성’을 일깨우고 있다. ‘불성’은 아트만처럼 ‘고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만, 우리들 마음의 작용 속에서 항상 작동한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작용하는 ‘불성’의 존재 양상을 대승불교의 전통에서는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불성’의 기능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소승과 대승이 구별된다.
대승 불교의 전통에 서 있는 ‘남종선’은 ‘불성’을 인정하는 명상 수련을 채용한다. 반면에 초기 불교의 명상 수련에서는 ‘불성’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명상’이라는 범주에서 보면 초기 불교의 ‘위파사나’와 선종의 ‘간화선’은 큰 차이가 없다. 큰 차이는 ‘불성’에 대한 인정 여부에 있다. 원각경「보현장」의 다음 구절을 보면, 이런 맥락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선남자여. (무명이) 허망한 것임을 알아차리면 곧 허망함은 사라진다. (허망을) 없애기 위한 조작이 필요 없다. 허망함만 사라지면 그게 바로 부처이니 점차적인 과정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무명’이란 무엇인가? 원각경「보현장」에 따르면,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4대를 ‘제 몸’으로 오인하고, 6근과 6경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마음을 ‘제 마음’이라고 오인하는 것이 ‘무명’이라고 한다. 즉 색・수・상・행・식 등의 5온이 공(空)한 줄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권하고 있다.
우리말의 ‘알아차리다’는 용어는 한자어의 ‘지(知)’ 또는 ‘각찰(覺察)’을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5온의 무상을 알아차리는 명상 공부를 제시하는 점에서 보면, 교종이나 선종이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 점은 초기 불교의 명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점은 이렇게 무상한 것들이 사라진 상태에 나타는 ‘불성’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느냐이다.
그런데 무상을 알아차리는 ‘방법’에 있어서는 교종과 선종이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어떻게 달리하는 가에 대한 대답은 잠시 보류하고,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자.
불성을 인정하던 아니던 우리 각 개인들에게 무명이 있음은 실존적으로 각자에게 지각(知覺)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명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무명이 공한 줄을, 다시 말하면 5온이 공한 줄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무명을 대치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움직이면, 이렇게 움직이는 몸과 마음도 이미 무명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그런 몸과 마음으로 과연 몸과 마음이 공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비유하면 흔들리는 배 위에서 어떻게 언덕의 고정된 사물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또 눈병 난 눈으로 어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제 눈으로 제 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止; 사마타)’의 수련을 통해서 각종 ‘고요함’을 체험하고, ‘관(觀; 삼마발제, 위파사나)’의 수련을 통해서 ‘자성 없음’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진정한 ‘고요함’일수도 없고, 또한 진정한 ‘자성 없음’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무명에 휩싸인 ‘자아’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무명이 제아무리 실체가 없는 공한 존재이지만, 그것을 적절하게 대치(對治)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안락’한 상태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은 반드시 대치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적절한 ‘방법’의 시설이 필요하다. 수련을 하자니 실존적인 무명이 움직이고, 그만 두자니 무명의 상태에 놓여있다. 어찌해야 할까? 이 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해야 끊을 수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교학과 선종이 방법을 달리한다.
교종 중에서도 특히 화엄종에서는 자신 속에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불성’을 이해하고, 그런 다음에 ‘지’와 ‘관’의 수련을 통해서 5온의 무상성을 ‘알아차리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무상한 무명으로부터 점점 벗어나게 된다고 한다. 이것을 세칭 ‘먼저 돈오하고, 다음으로 점수해야 한다.’고 한다. ‘돈오점수’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화엄교학에서는 ‘불성을 체험하면서 동시에 보살의 만행을 실천하라’고 한다.
반면에 선종에서는 ‘먼저 불성을 돈오하고, 그런 다음에 일체의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심하라’고 한다. ‘무심’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선종에서는 ‘화두’에 집중하여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을 쉬라고 한다. ‘화두를 드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무심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며 방법이다. 무심이 되기만 하면, 화두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수단’이다.
선(禪)이든 화엄이든 불교가 이 시대 사람들의 소통하려면 이 시대 언어로 감동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최근 종단에서 일고 있는 ‘신(新)대승불교운동’ 방향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
그러면 ‘화두에 집중하는 마음’ 역시 이 또한 ‘번뇌의 상태에서 작동되는 마음’이 아닌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분석하지 말라고 한다. 그저 화두에 집중하는 마음 하나만 오롯하게 남겨두라고 한다. 때문에 간화선의 역사 속에서 1,800 종에 달하는 다양한 화두의 사용이 후세로 갈수록 줄어들고, 결국은 ‘무(無) 자 화두’ 하나만이 최종적으로 애용된다.
여기에 또 궁금함이 생긴다. 즉, ‘무(無) 자 화두’에 집중하는 마음은 ‘번뇌의 상태에서 작동되는 마음’이 아니란 말인가? 물론 그것도 번뇌의 마음이다. 비록 그 마음이 다양한 경계에 대한 마음은 아닐지라도 ‘무’라는 ‘하나의 상태’에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또한 ‘번뇌의 상태에서 작동되는 마음’이다. 이런 모순성을 당나라시대 앙산 혜적 선사는 ‘사무사지묘(思無思之妙)’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무사(無思)’를 ‘사(思)’하는 참으로 오묘한 수도이다. ‘간화선’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이런 수도를 통해서 저들은 위에서 말한 ‘무명’에서 벗어나 ‘불성’을 체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선종의 선사들에게 있어서 ‘불성’은 누구에게나 원초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획득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경계에 ‘무심(無心)’하기만 하면, ‘불성’은 저절로 현전하는 것이다. 무심해졌는지를 점검하기 위해서 선승들은 다양한 ‘화두’를 사용하여 끝임 없이 대화를 한다. 한편, ‘불성’의 드러남에는 화엄의 교학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들은 보살행을 통하여 ‘불성’이 드러나는 정도를 점검하고 있다. 오늘날, 화엄교학이 각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보살행을 통한 검점이 없기 때문이고, 간화선이 외면당하는 이유는 대화를 통한 점검이 없기 때문이다. 선이든 화엄이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려면, 경전을 읽고 조사어록을 읽어서 지난 선배들의 경험을 십분 살려서 지금의 언어로 그리고 현실의 행동으로 저마다의 ‘불성’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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