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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버려진 기쁨거리 재활용 인생>의 줄거리 :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성막을 짓기 위함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바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새삼스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너무나도 기가 막히는 은혜를 받습니다. 이 은혜중에 포함된 정말 굉장한 복음의 한 측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물을 바치는 일입니다.
버려진 기쁨거리 재활용 인생
(출애굽기 25:1~40)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4.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5.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예물을 바치는 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에서는 증거궤 혹은 언약궤라고 불리는 법궤의 모양과 규격, 그리고 진설병 열두 덩이를 놓을 떡상에 대한 규격, 등잔대와 부속 기구들에 대한 규격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버려진 기쁨거리 재활용 인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제목을 자세히 풀어보자면 내게서 버려진 기쁨거리를 하나님께서 재활용하시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내 마음에서 탈락한 기쁨거리들이 있습니다. 버려진 기쁨거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재활용하셔서 이 땅에서 나를 향해 갖고 계신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막 안에 들어갈 증거궤의 뚜껑인 속죄소, 진설병을 놓는 떡상, 등잔대와 부속 기구들에 대한 규격이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어떻게 만들라는 지시의 단계이지만 출애굽기 후반부를 보면 실제로 만들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때 성소 기물들의 영적인 의미를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은 2절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라는 말씀에 주의를 집중해 보겠습니다.
성막을 짓기 위해서는 재료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가져오는 예물들을 받아서 지을 것을 명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범상치 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 7절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마음가짐을 기록한 다양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목회할 때 교인들에게 예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진짜 너무 싫었습니다. 교인들 처지가 넉넉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말씀하셨지만 사실 먹고살기도 빠듯한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말 그대로 기쁨으로 자원해서 내면 되는 것이지 굳이 목사가 강단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기쁨으로 예물을 드렸는가? 자원하여 얼마나 드렸는가?’라고 자문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성경에 기록된 예물에 대한 말씀은 결코 부담을 가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은혜 속에 어마어마하게 굉장한 부분으로 들어있는 내용이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이러한 내막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 이어지는 증거궤의 속죄소나 떡상이나 등잔대에 관한 말씀도 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소의 기물들에는 영적으로 상징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굳이 오늘 다루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성전 기물들이 가진 의미의 총합이 결국 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물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쁨으로 자원하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적 변화가 이루어지는 놀라운 상황이 기쁨으로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자원하여 예물을 드리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본문을 보면 다양한 예물들의 이름이 망라됩니다. 여기서 먼저 애굽의 노예에 불과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이러한 귀중품들을 갖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직 노예가 아니었던 시기에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가보가 있었을 것이며, 출애굽 때는 애굽 사람들이 금은 패물과 의복을 내어주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기에 가지고 나왔던 것들도 꽤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물들을 기쁨으로 드리라는 요청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 자체를 기쁨으로 생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생겨난 기쁨의 힘으로 예물을 드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슨 기쁨이 있었을까요? 앞서 우리는 시내산 언약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 인생을 책임지겠다.’라고 약속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나는 하나님만 가지겠습니다.’라고 약속한 사건입니다. 선민은 번제의 취지를 따라 세상 것에 끌려가는 죄악 된 나를 죽이고, 화목제의 취지를 따라 마음이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만 가지는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인생을 책임지시고 계획하신 바대로 끌고 가십니다. 이것이 선민과 하나님의 결혼 서약이라 할 수 있는 시내산 언약의 내용입니다.
결혼은 신랑 신부에게 있어서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쁨으로 예물을 드릴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시내산 언약을 통해 나와 결혼했다. 이제 나를 남편으로 맞이한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 기쁨으로 예물을 드려라. 그러면 그 예물을 가지고 성막을 짓겠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다만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발짝 더 들어가서 봐야 합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대해 아실 것입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대장장이에게 금을 주어 왕관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대장장이가 금 속에 은을 섞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임금님은 왕관이 금으로 만들어졌음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 아르키메데스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르키메데스도 쉽게 답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던 중에 목욕탕 욕조에 들어갔는데 물이 넘치는 것을 봅니다. 이때 ‘알았다’라는 뜻의 유레카!(εὕρηκα)를 외친 것이 유명합니다. 아르키메데스는 물이 넘치는 정도를 통해 대상이 가진 질량과 부피의 비율을 알 수 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운 후에 왕이 준 금덩이를 담급니다. 그리고 넘친 물의 양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다시 물을 채운 후에 금관을 담급니다. 그 양이 똑같다면 똑같은 양의 금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무게일 때 은은 금보다 부피가 크기에, 만약 은을 섞었다면 금덩이보다 더 많은 물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한편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친 욕조의 상황을 신앙적 의미에 적용해 봅니다. 욕조의 물이 찰랑거릴 때 사람이 들어가면 그 사람의 부피만큼 물이 넘칩니다. 우리의 마음은 기쁨거리의 욕조와 같습니다. 물 대신 각종 기쁨거리에 대한 애착과 바람과 열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심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선민 각자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 언약을 통해 선민 각자는 개별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기쁨거리에 대한 애착과 기쁨거리에 대한 바람과 기쁨거리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의 욕조에 하나님이 들어오십니다. 이로부터 넘치는 부분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무르익고 마음의 욕조에서 하나님의 비중이 커질수록 넘쳐나는 부분도 많아집니다.
우리의 마음에서는 아직 갖지 못한 기쁨거리는 열망의 형태로 존재하고, 이미 가진 기쁨거리는 애착의 형태로 들어있습니다. 다만 어떤 형태이든 마음의 욕조에 기쁨거리에 대한 바람이 채우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기쁨의 대상으로써 마음의 욕조에 들어오시면 그 분량만큼 기쁨거리에 대한 바람은 밀려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쁨으로써 내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크기가 있고 비중이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436장에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라는 가사와 같습니다. 이로부터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바치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의 욕조에 들어오셔서 그 비중이 점점 커짐으로써 밀려난 기쁨거리만큼 기쁨으로 예물을 바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기쁨으로 예물을 바치는 자들’로 여기십니다.
본문을 보면 금과 은과 놋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패물들의 이름이 망라됩니다. 모두 값진 보물들이고 귀중한 재산들입니다. 이러한 소중한 품목들을 기쁨으로 바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마음의 욕조에 들어오시면서 기존에 기쁨거리였던 것들이 밖으로 흘러넘쳤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 마음의 욕조 바깥으로 밀려나고 버려지고 탈락한 기쁨거리들입니다. 그것들을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바치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서의 변화를 보면 더 이상 그것들은 기쁨거리도 아니고 아까울 것도 없습니다. 내 마음에서 아깝지 않는 것들을 드리게 됩니다. 내게는 기쁨거리가 아닌 것들을 드리는 것이 기쁨으로 드림이 된다니 참 모순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예물이란 내가 아깝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더는 기쁨이 아니게 되었다면 아깝지 않고 소중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아까운 것이기에 예물이지 아깝지 않다면 예물이라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헌금을 낼 때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정성이 문제라는 말을 합니다. 옛날에 저의 할머니는 꼬깃꼬깃한 지폐를 다리미로 다려서 봉투에 넣어놓습니다. 또 할머니께서는 집에 따로 헌금함을 만들어 두시고는 생각이 날 때마다 조금씩 돈을 모으셨습니다. 예배 때 임박해서 주머니를 뒤져 헌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헌금을 생각하며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성이 담긴 것일까요? 우리는 잘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아까운 것을 드리는 것이 정성일까요? 아깝지 않은 것을 드리는 것이 올바른 예물일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기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로 한 순간에 이삭은 전혀 아까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이게 참 묘한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아깝게 여기는 것 자체가 죄악입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이 죄악을 피하려면 이삭이 아깝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깁니다. 내 마음에서 아까운 대상이 있다면 그 자체로 다른 신을 섬기는 죄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깝지 않은 대상을 바치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간단한 해답이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를 붙여보면 쉽게 이해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제일 좋아할 만한 대상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때문에’를 붙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때문에 이삭이 아깝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까움의 딜레마가 사라집니다. 이것이 기쁨으로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쁨거리가 되시기 때문에 이제 기쁨거리로 취급되지 않는 것들을 바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너무나 좋아하고 아깝게 여기던 대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면서 그렇게 좋고 아깝게 여기던 것들이 이제는 전혀 좋지도 않고 아깝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된 것들을 바치는 것이 기쁨으로 드리는 예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내 마음에서 ‘하나님 때문에’ 기쁨거리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해서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을 바치는 것을 예물로 받으시고 좋아하십니다.
거꾸로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의 기쁨거리들이 내 마음의 욕조 안에서 열망의 형태이든 애착의 형태이든 넘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세상 거리가 새롭게 들어와서 기존의 것들을 밀어냈습니다. 이렇게 밀려난 세상 것들을 하나님께 바친다면 그것은 기쁨으로 드리는 예물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여전히 마음에서 기쁨으로 여겨지는 대상은 세상 것이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때문에’ 내 마음에 있던 세상 것들이 기쁨거리에서 밀려났습니다. 이렇게 더는 내게 기쁨거리가 될 수 없는 것들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예물로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은 네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인데 나 때문에 이것들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정말이냐? 인간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내가 너의 기쁨거리가 되는 바람에 그것들이 기쁨거리에서 박탈을 당했다고?’라고 말씀하시며 활짝 웃으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까워 죽겠는데 그럼에도 억지로 드립니다. 실제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 것을 아깝게 여기는 것이 죄악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드리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물이 아닌 투자일 뿐입니다. 투자가들이 돈을 버는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투자가들은 무엇보다 돈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물 쓰듯이 돈을 씁니다. 이들이 아까운 돈을 쓰는 이유는 투자하면 더 많은 돈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 것들이 아까워 죽겠는데 드리면 하나님이 더 많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까워 죽겠지만 바칩니다. 내가 이렇게 투자하니 아깝게 여기는 것들을 더 많이 주시리라 믿습니다.’라고 여기는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심정으로 십일조를 바칩니다. 내 피 같은 돈을 하나님께 바쳤으니 꽉꽉 눌러서 더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또 하나의 형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드리는 예물을 받아서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나와 결혼했다. 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너희 삶을 이끌어갈 것이다. 이제 나 때문에 너희 마음에서 기쁨거리의 자격을 박탈당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다 모아서 내 이름을 둘 성막을 지어라.’라고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선민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기쁨거리의 욕조가 찰랑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으로 그 마음의 욕조를 다 채우는 것입니다. 증거궤 뚜껑인 속죄소와 떡상과 등잔대 같은 기물들이 의미하는 바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충실히 해나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럴 때 결과적으로 버려진 기쁨거리는 재활용됩니다. 내게 주어진 것은 많거나 적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세상 것을 가지기를 열망하는 기쁨거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들어오시면서 마음의 욕조를 가득 채우시자 넘쳐나는 분량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이제 내 마음에서 기쁨거리로서의 효용가치를 잃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하셔서 이 땅에서의 나를 향한 삶의 계획들을 수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내 마음에서 하나님 때문에 기쁨거리 자격을 상실하고 버려진 것들의 재활용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내가 버린 기쁨거리들을 재활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의 욕조에서 하나님 때문에 흘러넘쳐 버려지는 부분이 없다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갖고 계신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계획을 이루어 가실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내 마음이 이 세상과 엉켜있는 상태를 바로잡기 위한 교정적 주권을 가동하실 수 있을 뿐입니다. 두드리시든, 패시든, 깎으시든, 넘어지게 하시든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마음의 방향을 주님의 십자가로 향하게 하는 일에 집중하십니다. 번제와 화목제의 취지를 생활 속에서 활성화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내산 계약을 맺었을 때의 마음가짐이 되도록 인도하시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자발적이고 건설적인 본래 계획은 발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적인 계획으로 나를 이끄시기 위한 모든 재료는 재활용되어야 합니다. 갖고 싶어서 열망하는 것이든, 이미 가져서 애착하는 것이든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바람에 내 마음의 욕조에서 흘러넘쳐야 합니다. 더 이상 내 마음에서 기쁨거리가 될 수 없는 것들이 되어야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재활용하셔서 나의 삶을 이끄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굉장히 가지고 싶어 하던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돈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들어오시게 되자 돈에 대한 열망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열망의 형태로 갖고 있던 그 돈도 이 사람의 삶에서 실제로 동원하실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이나 건강을 비롯한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조금의 기쁨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마음의 욕조에는 이 세상의 기쁨거리가 단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아버지의 비중이 크셨습니다. 잔여물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세상의 기쁨거리가 다 빠져나간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세상 것 전체를 다 동원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이 세상 전체는 버려진 기쁨거리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 전체를 재활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돈의 입장에서는 ‘예수님! 나도 가져볼 만 합니다. 일단 가져보신 다음에 버리시든지 하시지요.’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예 가져본 적도 없으신 것들까지도 기쁨거리에서 박탈하셨습니다. 세상에는 건강과 장수로부터 시작하여 기쁨거리가 될 만한 대상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요즘 목사님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다면 온 세계의 매스컴이 다 오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몰려온 사람들을 다 흩으시고는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놀라운 기적 뒤에 따라올 인기와 명예를 마음의 기쁨거리에서 탈락시키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것은 단 하나도 마음의 욕조에 들여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욕조를 하나님이 꽉 채우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에는 이 세상 만물이 재활용되어 동원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의 기쁨거리에서 이 세상 전체를 탈락시키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이 세상 전체를 예물로 드리셨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닮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세상의 기쁨거리들을 탈락시키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에’입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되고 하나님만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서 하나님만이 기쁨이라는 실감이 커지는 만큼 세상 기쁨은 밀려납니다. 그리고 세상은 밀려난 만큼 하나님의 재활용의 대상이 됩니다. 반대로 마음에서 하나님의 비중이 커지지 않아서 세상 것들이 기쁨거리로 유지된다면 하나님께 무엇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예물이란 내가 아까워하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악 가운데 투자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 마음에서 애초에 기쁨거리가 아닌 휴지 조각처럼 무가치한 것들을 드리는 것 또한 모독입니다. 반드시 ‘하나님 때문에’가 붙어야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버려진 기쁨거리들만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전에 기쁨거리로 여겼지만 ‘하나님 때문에’ 기뻐서 기쁨거리로 여기지 않게 된 것들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물질적인 요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에 들였던 돈은 물론이고 행동에 들였던 마음과 시간까지도 하나님이 재활용하실 수 있는 예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통해 우리를 향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림이란 ‘하나님 때문에’ 내 마음에서 기쁨거리의 자격을 잃어버린 것들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것들을 예물로 받으십니다. 이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금과 은과 놋으로부터 시작하여 각종 귀중한 실과 가죽과 향료와 보석들을 언급하셨습니다. ‘하나님! 이것들은 우리의 기쁨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 때문에 이것들이 기쁨거리가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들을 하나님께 바칩니다.’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지긋이 웃으시다가 나중에는 껄껄 소리 내서 웃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쁨거리의 자격을 박탈당한 것들이 예물이 됩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감으로써 마음의 욕조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비중을 키워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하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기쁨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은 예수님이 그러하셨고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완전히 마음의 욕조에서 흘러넘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날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그것들을 재활용하셔서 계획하신 바를 막힘없이 이루어 가시는 복된 영적 현상들이 우리의 일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생각만 해도 신이 납니다. 아버지가 마음의 욕조에 들어오셔서 기존에 있던 기쁨거리들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넘쳐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오직 주님 안에 마음이 머물게 하셔서 하나님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으로 배불러서 하나님으로 부자 되는 일에만 총력을 기울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버려진 모든 기쁨거리들을 모아 재활용하시고, 나를 향해 갖고 계신 아버지의 모든 계획이 차질 없이 성취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