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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기 한단고기2
삼한관경 본기 제4
태백산은 북쪽을 달리는 산으로 높고 높게 비서갑의 땅에 우뚝 서 있다. 물을 뒤로 업고 산을 끌어 안고 있는데, 크게 둥그렇게 돌아 모이는 곳이 있으니 곧 대일왕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라. 세상에 전하기를 [한웅천왕이 여기까지 순수하시사 사냥하시었기 때문에 그를 제사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우사는 북을 치면서 돌아가며 춤을 추고, 운사는 백검으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가 산에 임하실 때의 의식은 이처럼 장중하였다. 산 이름은 불함이라 하더니 지금은 또 완달이라 하니 그 음이 비슷한 바 있다. 뒤에 웅녀의 군이 천제의 신임을 받아서 세습하여 비서감의 왕검이 되었다. 왕검은 속어로 말하면 대감이니 땅을 관리하고 지키며, 포악함을 제거하여 백성을 돕는다. 천왕은 나라 사람들의 뜻을 살펴서 저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길, [부모는 공경해야 하며, 처자는 보호 양육해야 하며, 형제는 사랑하고 장노는 존경하고, 어리고 약한 자에겐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뭇백성은 믿어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또 의약, 공장, 축산, 농사, 측후, 예절, 문자의 법을 제정하고 땅을 하나같이 평등하게 하여 이로써 잘 교화시키니 멀리 떨어진 백성들까지 모두 서로 의심치 않게 되었다. 웅씨가 갈라져 나간 자에 소전이라고 있었는데 안부련의 말기에 소전은 명을 받고 강수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한웅 아들 신농은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뒤에 열산으로 이사하였는데 낮에는 교역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편리하게 하였다. 소전의 별고에 공손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였으므로 헌구로 유배시켰다. 헌원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와라 한웅 초기의 일이다. 웅녀군의 후손으로서 여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에 책봉받아서 왕검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나아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는 자 처여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 지나 신인 왕검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이 되었다. 섭정하신 지 24년에 웅씨의 왕은 전쟁하다가 붕어하시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곧 나라의 인물들을 불러 약속을 세워 가로대,
[앞으로는 백성의 뜻을 물어 공법을 만들고 이를 천부라 할지니, 그 천부란 만세의 강전이며 지극히 존중하여 아무도 이를 어길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삼한으로 나라를 나누어 통치하시니, 진한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시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여시사 조선이라 하시고, 이를 일세 단군이라 한다.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했다.
마한세가 상
곰 무리와 범 무리가 서로 다투던 옛날 한웅천황께서 아직 군림하시기 전 묘한은 곧 구황의 하나였다. 옛적 이미 우리 한족이 유목 농경하던 때에 신시의 가르침이 열렸다. 땅으로써 다스리기 위하여 적을 하나로 하고, 음은 십거를 세우고 양은 무궤를 만들고 충은 여기에서 생했다. 봉황은 날아모여들어 백아강에 살고 선인은 법수교로 오고 갔으니 법수는 선인의 이름이다. 사람과 문물이 어느덧 풍숙하였으니 때마침 이때에 자부선생께서 칠회제신의 책력을 만드시고 삼황내문을 천폐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였다. 삼청궁을 세우사 그곳에 거하시니, 공공, 헌원, 창힐, 대요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 이에 윷놀이를 만들어 이로써 한역을 강연하니 대저 신지 혁덕이 적은 바로 천부의 유의였다. 옛날 한웅천왕께서는 천하가 크다함을 아시고 한 사람이 능히 교화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시며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사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마와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무릇 인간 세상의 360여 사를 주관케 하시더라. 책력을 만드사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일년으로 하니 이것이 바로 삼신일체의 윗어른이 남긴 법이다. 고로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세워 뜻을 펴는 기치로 삼았다. 그 글에 가로대 [일신은 충에 내리고 성은 광명으로 통하니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에 따라 교화하여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고 했다. 이때부터 소도가 세워지는 곳마다 신의 형상의 웅상을 보게 되었다. 산꼭대기에는 어디나 사방에서 온 백성들이 있었는데 동그랗게 둘러 부락을 이루었으니 네 집이 한 우물을 썼으며, 20분의 1의 세를 냈다. 해마다 풍년이 드는 언덕과 산에는 곡식이 쌓이고 이를 즐겨 춤추며 태백환무의 노래를 지어 이를 전했다.
계속하여 치우씨가 있었는데 구야를 만들어서, 광석을 캐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돌을 날리는 기계도 만들었다. 이에 천하는 감히 그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때에 헌구가 굴복치 않으니 치우는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이를 크게 정벌코자하여 크게 탁록에서 싸웠다. 탁록은 지금 산서성의 대동부이다. 싸움이 있기 전에 탁록이 격문을 만들어 81종당의 대인을 소환했다. 먼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분포하더니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게 하고는 가로대,
[그대 헌구야! 짐의 고함을 밝히 들으렸다. 해의 아들이라 함은 오직 짐 한 사람뿐으로 만세를 위하고 공동생활의 옳음을 위해 인간의 마음을 닦는 맹세를 짓노라. 그대 헌구여! 우리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모독하고 삼윤구서의 행을 게을리 하였으니 삼신은 오래도록 그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짐 한 사람에게 명하여 삼신의 토벌을 행하도록 하였으니 그대 일찌감치 마음을 잡아서 행동을 고칠 것이다. 자성은 너에게서 찾을 것이니 그대의 머리 속에 있음이로다. 만약 명령에 순응치 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진노하여 그 목숨이 제 목숨이 아닐 것이다.
네 어찌 두렵지 않은가?]
라고 했다. 이에 헌구가 평정되어 복종하니 천하는 우리를 기둥처럼 여기더라.
때에 유위자가 묘향산에 숨어 살았으니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나가다가 웅씨군을 알현하니 웅씨군은 [나를 위해 도를 말하라]고 청했다. 대답해 가로대
[도의 대원은 삼신에게서 나오나니 도란 도라고 할 것도 없으며 그 나타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도라고 할 것이 있다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며 나타남이 있다면 역시 도는 아닌 것이지요. 도는 항상 같은 것이 없고 때(경우)에 따르는 것이니 이에 도의 귀함이 있는 것이라, 나타남(쓰임)도 항상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는 않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나니 이에 나타남의 귀함이 있는 것이요, 그 겉모양이 크지도 않으며 그 속이 작지도 않는 것이 도니 이에 감싸지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기틀이 있으니 내 마음의 기틀에서 볼 수가 있고, 땅에는 모양이 있으니 내 몸이 모양에서 볼 수가 있으며, 사물에는 주관함이 있으니 내 기의 주관함에서 알 수가 있음이라. 이에 하나를 잡아도 셋을 포함함이며 셋을 모으면 하나로 돌아감인 것입니다. 일신이 내려옴은 사물을 다스림이니 바로 천일이 물을 낳은 이치요, 세상에서 교화를 폄은 마음을 다스림이니 바로 인삼이 나무를 낳은 이치인 것입니다. 대개 대시에 산신님은 삼계를 만드셨으니, 물은 하늘을 본뜨고 불은 땅을 본떴으며 나무는 사람을 본뜬 것입니다. 무릇 나무라는 것은 땅에 뿌리를 두고 하늘을 향하였으니 역시 사람도 땅을 밟고 서서 능히 하늘을 대신함이라.]
라고 하니, 임금께서는 [옳을시고 그 말씀이요!] 하시더라.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으로 나누어 관경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를 봉하여 마한이라고 하였다. 달지국에 도읍하였으니 역시 백아강이라고도 불렀다. 마한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하니 처왕께서 조서를 내려 가로대,
[사람이 거울을 보면 그 곱고 미운 것이 저절로 나타난다. 백성들이 임금을 보면 그 치란은 정치에 나타난다. 거울을 보면 반드시 먼저 형체를 보고 임금을 보면 반드시 먼저 정치를 보느니라.]
라고 하니 마한은 글을 올려 가로대,
[거룩할손, 그 말씀이시어! 성주는 능히 대중의 뜻에 따르는 고로 길이 넓고, 무능한 임금은 즐겨 독선을 쓰는 고로 길이 좁사오니, 속으로 반성하여 게으름 없을 것입니다.]
고 하다.
단군왕검 51년 천왕은 운사인 배달신에게 명하여 삼랑성을 혈구에 쌓고 제천의 단을 마리산에 만들었으니, 강남의 장정 8000인을 선발하여 이들에게 일을 하도록 하였다. 신유 3월 천왕은 몸소 마리산으로 행차하여 하늘에 제사지냈다. 웅백다가 재위 55년에 죽으니 아들 노덕리가 즉위하였다. 노덕리가 죽으니 그의 아들 불여래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단군부루 12년 임자 가을 10월이다. 명을 내려 칠회의 책력을 백성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듬해 봄 3월 처음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버들을 백아강에 심고 도정을 지었다. 병진년에 삼일신고의 비를 새겨 남산에 세우게 하다. 경신년에 도전을 일구고 기해년에 소도를 세우고 삼윤구서의 가르침을 폈다. 이에 치화가 크게 행해졌다.
단군 가륵 제3년 불여래가 죽고 아들 두라문이 즉위했다. 을사년 9월 천왕께서 칙서를 내려 이렇게 말하였다.
[천하의 대본은 우리 마음의 중일에 있나니 사람이 중일을 잃으면 일은 성취되지 않는다. 물건으로서 중일을 잃으면 물체는 곧 뒤죽박죽이 되나니 임금의 마음은 오직 위태롭고 뭇중생의 마음은 오직 어두울 뿐이다. 전인은 통찰하여 골고루 한 가운데에 서서 잃는 일 없게 할지며, 그러 후에라야 마침내 하나로 평정되나니라. 유중유일의 도는 아비가 되어서는 마땅히 자애롭고,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성스럽고, 임금된 자로서는 마땅히 의로워야 하고, 신하된 자로서는 마땅히 충성스러워야 하며, 부부된 자로서는 마땅히 서로 공경해야 할지며, 형제된 자는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할지며, 노소는 마땅히 순서가 있어야 할지며, 친구된 자는 반드시 신의가 있어야 할지니라. 식신, 공검, 수학, 연업, 계지, 발능, 홍익에 서로 힘쓰며 성기, 자유, 개물, 평등하면 천하는 절로 맡겨도 된다. 마땅히 국가의 대통을 존중하여 나라 법을 지키고 각자가 맡은 바 직책에 힘써서 부지런히 산업에 힘쓸 것이다. 나라에 일이 생겼을 때는 몸을 던져 옳음을 따르며 힘껏 앞으로 나아간다면 만세의 무강한 나라를 이룸을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이는 짐이 그대들 국인과 더불어 절절하게 행하여 바꾸는 일 없을 것이라. 성현 모두의 지극한 뜻이나니 다 받들어 공경할 것인저]라고 하였다.
두라문이 죽었다. 아들 을불리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죽으니, 아들 근우지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단군 오사구의 을유년이다. 경인년에 장정 30인을 파견하여 선박을 살수에서 건조케 하였다. 곧 진한의 남해안이다. 임자년에 한은 명령을 받고 상춘에 들어가 구월산에서 삼신님께 제사지내는 것을 도왔다. 10월에 이궁을 모란봉의 중턱에 세워 천왕이 순수하다가 머무르는 장소로 삼다. 3월이 될 때마다 마한에 명하여 열병하도록 하고 사냥하게 했다. 16일에 기린굴에 제천하고 조의를 하사하여 가관의 예를 행하였으며 가무백회끝에 파하였다.
갑인년에 근우지가 죽자 아들 을우지가 즉위하였고, 을우지가 죽으니 동생 궁호가 즉위하였다. 궁호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니 두라문의 동생인 두라시의 증손 막연이 명을 받아 마한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무신년에 단군 우서한은 백아강에 머무르면서 명하여 밭을 나누어 땅을 주어 네 가문을 한 구로 만들게 하시고, 각 구는 일승을 내서 향토를 지키도록 하였다. 단군 노을제의 임인년 막연이 죽었으니 동생 아화가 즉위하였다. 때에 단군 도해가 바야흐로 개화할 것을 결심하고 평등하게 다스렸다. 명을 내려 대시전을 대성산에 세우고 큰 다리를 대동강에 세웠다. 삼홀로 전을 삼아 경당을 설하여 칠회제신의 의식을 정하고 삼윤구서의 훈을 강론하게 하니, 한도의 문명이 번성함은 먼 나라까지 들려서 하나라 왕 근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정사년 아화가 죽으니 아들 사리가 즉위하였다. 단군 아한의 을묘년에는 사리가 죽었으니 동생 아리가 즉위하였다. 단군 고불제의 을유년에 아리가 죽고 아들 갈지가 즉위하였다. 갈지가 죽으니 단군 대음제의 무신년에 갈지의 아들 을아가 즉위하였다. 기유년에 탐모라 사람이 말 30필을 바쳐왔다.
을아가 죽고 단군 여을제의 신미년에 아들 두막해가 즉위하였다. 임신년 3월 16일 몸소 마리산에 행차하여 삼신을 참성단에서 제사하였으니, 하나라 왕 외임이 사신을 파견해 제사를 도왔다.
두막해가 죽으니 기축년에 아들 독로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죽고 단군 고홀제의 경오년에 아들 아루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죽고 무오년에 동생 아라사가 즉위하였다. 이 해에 고등이 모반을 일으켜 개성에 웅거하면서 천왕에게 항거했다. 마한이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이를 토벌코자 하여 홍석령의 경계지점에 이르렀을 때 천왕께서 고등을 용서하고 우현왕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곧 토벌을 멈추다.
을미년에 천왕은 해성에서 욕살 서우여에게 선양하시고자 하니 마한은 이의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현왕의 아들 색불루가 즉위하니 마한은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마한세가 하
단군 섹불루가 아버지께서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대병을 장악하니, 진한은 스스로 무너졌고 나머지 두 한도 역시 이길 수 없어 패해버렸다. 전제는 사람을 시켜 옥책과 국보를 전하여 제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새 임금이 백악산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들이 아무도 승복하지 않았으나, 여원흥과 개천령 등이 명령을 받아 저들을 설득했다. 이에 모든 욕살들이 빠짐없이 따르게 되었다.
병신 원년 정월 마침내 녹산에서 즉위하니 이곳을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한다. 3월에 조서를 내렸다.
[그대들 아사달에 사람을 보내 옥책과 국보를 전함으로써 전제의 왕위를 선양케 하였느니라. 이제 이름을 세습하여 존귀함을 칭한다 하더라도 나라 안의 산천은 이미 그 이름이 장부에 실렸고, 제천의 예는 마땅히 나라의 법에 정한 바니, 남용할 일이 아니다. 반드시 옛 실례에 따를 지니라. 이에 성실하게 공경을 다하고자 하는 자는 이제 마땅히 제사를 환영하여 이전의 재물들을 골라 삼가 신의 영역을 깨끗이 하고 정결히 한 후, 생폐를 갖추어 이를 가지고 삼신에 보답할지어다.] 이에 단제는 날을 택해 7일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 향과 축문을 여원홍에게 내려주었다. 16일의 이른 아침에 경건하게 삼한의 대백두산의 천단에서 제사를 행하고, 단제가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 제사를 올렸다.
그 백두산의 서고문에 이르기를 [짐 소자 단군 색불루는 손을 모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옵니다. 친히 천제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닦고 이로써 백성에 미치게 하여 반드시 제천하고 공경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상은 삼신의 밝은 명을 받으사 큰 덕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이미 삼한 5만리의 땅을 주시고, 더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베풀어 누리도록 하셨으므로, 마한 여원홍을 보내어 삼신일체인 상제의 단에 제사올리게 하였습니다. 신은 밝고도 밝으신지라 물건에 근본이 되시어 버리심 없나니, 맑고 깨끗한 재물로써 정성드려 바쳐올리오니 내리시어 드시옵고 말 없이 도우시옵소서. 반드시 새 임금의 기틀을 도우시옵소서. 세세토록 삼한의 천만년 무강한 왕업을 보전하고 해마다 곡식이 풍성하여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풍족하게 하소서. 바라노니 밝으신 우리의 성제시여, 나를 비워서 만물이 있기를 염원하옵니다]라고 하였다.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다. 조선이란 관경을 말한다. 진조선은 천왕이 몸소 다스리고 땅은 곧 옛날의 진한대로 하고 정치는 천왕이 친히 다스리도록 하니, 삼한이 모두 하나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여원홍에게 명하여 마한이 되어 막조선을 통치케하고 서우여로 하여금 번한을 삼아 번조선을 통치케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여 단군의 관경이라 한다. 이것이 곧 진국으로 역사에서 단군조선이라 함은 이것이다.
여원홍이 이미 대명을 받아 대동강을 장악하니 역시 왕검성이라 한다. 천왕도 역시 매년 봄에는 반드시 마한에 머무르시며 백성의 근면하기를 정치로써 장려하였으니 이에 자공후렴의 폐단이 마침내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조서를 내려 가로대 [생각컨대 짐 한 사람을 공양키 위하여 백성들을 들볶아 공물을 내게 함은 곧 정치가 없다는 말이니, 정치 없고서야 왕이 무슨 필요가 있으리오] 하시고는 엄하게 명하여 이를 철폐하였다.
무자년 마한은 명을 받고 도읍에 들어와 간하기를, 도읍을 영고탑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가하다고 하시며 이에 따르지 않았다. 여원흥이 죽으니 기축년에 앋르 아실이 즉위하였고, 아실이 죽으니 동생 아도가 ㅈ그위했다. 기묘년에는 은나라가 망했다. 3년 뒤의 신사년 아들 서여가 거처를 태행산맥의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가니 막조선은 이를 듣고 모든 주와 군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을 하고 돌아왔다.
아도가 죽자 경술년에 앋르 아화가 즉위하였고 아화가 죽자 병술년에 동생 아사지가 즉위했다. 아사지가 죽자 단군 마휴의 정해년에 형의 아들 아리손이 즉위하였다. 아리손이 죽으니 아들 소이가 즉위했고 소이가 죽으니 정해년에 아들 사우가 즉위했다. 무자년에 주나라 왕 의구가 사신을 보내 신년을 축하했다. 사우가 죽으니 갑진년에 아들 궁홀이 즉위하더니 갑인년에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궁홀이 죽으니 아들 동기가 즉위하였고 동기가 죽자 단군 다물의 계유년에 아들 다도가 즉위했다. 다도가 죽자 임진년에 아들 사라가 즉위하였고, 사라가 죽자 아들 가섭라가 즉위했다. 가섭라가 죽으니 아들 가리가 즉위하였는데, 을묘년에 융안의 사냥족들 수만이 모반을 일으켰다. 관병이 싸울 때마다 패하여 적이 마침내 심히 급하게 도성에 쳐들어오니 가리도 역시 출전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병진년에 상장 구물이 마침내 사냥꾼들의 두목 우화충을 죽여버리고 도성을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보다 먼저 가리의 손자라는 이유로 전나가 들어가 막조선을 계승하니 이때부터 정치가 날로 쇠퇴하였다.
전나가 죽으니, 아들 진을례가 즉위했다. 진을례가 죽으니 을묘년에 아들 맹남이 즉위하였다. 무술년 수유의 사람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자립하여 번조선 왕이라 칭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와 우리와 함께 기후를 치자고 했으나 막조선은 따르지 않았다.
계해년 단군 고열가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셨다. 진조선은 오가와 함께 진시황 정에게 복종하게 되더니 끝내 미처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
번한세가 상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를 평정하셨다. 산을 뚫고 길을 내시니 땅 넓이는 만리에 이르더라. 단군왕검은 제요도당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 형제가 다시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공경스럽게 효도함을 앞세우게 되었다. 9년 홍수를 당해 그 피해가 만백성에게 미치니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과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인 우를 파견하여 우리의 오행치수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우를 낭야성에 두어서 이로써 구여분정의 뜻을 정하였다. 바로 <서경>에서 말하는 바의 [동순하여 망제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를 찾아뵙다]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진국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하는데 낭야에 한번씩 이르른다. 순의 제후는 때문에 진한에 조근하기를 네번씩이었다.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게 세상에 소문난 자를 골라 번한이라 하고 부를 험독에 세우게 하였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한다.
치두남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 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의 정치를 감독케 하였다. 경자년에 요중에 열두 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 영지, 탕지, 용도, 거용, 한성, 개평, 대방, 백제, 장령, 갈산, 여성이 그것들이다.
치두남이 죽으니, 아들 낭사가 즉위하다. 이해 경인 3월 가한성을 개축함으로써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사성이라 하니 번한의 낭사에 세워진 때문이다.
갑술년에 태자 부루는 명을 받들어 도산으로 가는 길에 반달 동안 낭사에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했다. 우순도 역시 사악을 인솔하고 치수의 여러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은 회와 대지방의 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을 통해서 우사공에게 고하여 가로대,
[나는 북극 수정의 아들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 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또 황거종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 이것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
고 하였다. 이에 우나라 사공은 삼륙구배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천제 아드님의 명을 게으름 없이 업으로 삼아 우리 우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 보답함은 크게 기꺼운 일로 반드시 그리 하리이다]
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부터 금간옥첩을 받으니 대저 오행은 치수의 요결이다. 태자는 구려를 도산에 모으고 우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곧 우공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이른바 우공이 그것이다.
낭사가 죽으니 계묘년 아들 물길이 즉위하였다. 물길이 죽으니 갑오년에 아들 애친이 즉위하였다. 애친이 죽으니 아들 도무가 즉위하였고, 도무가 죽으니 계해년에 아들 호갑이 즉위하였다. 정축년에 천왕께서 순시하사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번한이 사람을 보내 문상하고 병사를 보내 경계하도록 했다. 호갑이 죽으니 단군 달문의 기축년에 아들 오라가 즉위했다. 갑신년에 하나라 왕 소강이 사신을 보내 새해 인사를 올렸다.
오라가 죽으니 병술년에 아들 이조가 즉위했다. 이조가 죽으니 단군 아술의 병인년에 동생 거세가 즉위했다. 거세가 죽고 신사년에 아들 자오사가 즉위했다. 자오사가 죽으니 을미년에 아들 산신이 즉위했고, 산신이 죽으니 무자년에 아들 계전이 즉위했다. 경인년, 명을 받아 산신의 단을 탕지산에 세우고 관리들의 집을 옮기게 하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이다. 계전이 죽었다. 정사년 아들 백전이 즉위했고, 박전이 죽은 뒤 을미년에 중제 중전이 즉위했고, 그가 죽자 신묘년에 아들 소전이 즉위했다. 갑오년에 장군 치운을 파견하여 탕을 도와 걸을 치게 하였다. 을미년에 묵태를 파견 탕임금의 즉위를 축하했다. 소전이 죽고 갑자년에 아들 사엄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동생 서한이 즉위했다. 서한이 죽으니 정축년에 아들 물가가 즉위했고 그가 죽은 뒤 신사년에 아들 막진이 즉위했다. 막진이 죽으니 정묘년에 아들 진단이 즉위했다. 이해 은나라 왕태무가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그가 죽으니 계유년에 아들 감정이 즉위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소밀이 즉위하였다. 계사년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을 치게 하니 그 왕 하단갑이 이에 사죄하였다.
소밀이 죽자 아들 사두막이 즉위하였다. 사두막이 죽으니 계부 갑비가 즉위했다. 갑비가 죽고 경신년에 아들 오립루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아들 서시가 즉위했다. 그도 죽으니 무신년에 아들 안시가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니 아들 해모라가 즉위했다. 해모라가 죽고 단군 소태 5년 우사의 소정을 번한에 임명하였다. 대저 고등이 항상 그 지모를 탄주하고 무리에 뛰어났기 때문에 제에게 권하여 임명하도록 한 것이라 때에 은나라 왕 무정이 막 병사를 일으켜 치려하매 고등이 이를 듣고 마침내 상장 서여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에 이르매 병사를 보내 불지르고 약탈한 뒤 돌아왔다. 서여는 북박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번한세가 하
단군 색불루는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은나라 왕 무정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약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을 삼았더니 서우여는 몰래 좌원에 돌아와 사냥꾼 무리 수천인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니 개천령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단제께서는 몸소 삼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 이에 먼저 사람을 보내 서우여를 비왕에 봉할 것을 약속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서우여가 이에 따르므로 단제께서는 서우여를 번한으로 삼으셨다. 4년 기해에 진조선은 천왕의 칙서를 전하였는데 가로대 [그대들 삼한은 천신을 위로 받들고 백성들도 이에 따르도록 교화하라]고 하다. 이때부터 백성들에게 예의, 누에치기, 베짜기, 활쏘기, 글 등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법을 만들었으니,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케 하고,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해 버리고는 그 집의 노비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며,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하게 하고,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는 자는 부역을 시키며, 음란한 행동ㅇ르 하는 자는 태형으로 다스리고, 사기치는 자는 훈계 방면하나 스스로 속죄하려 하면 공표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면하여 주지만 백성들이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겨서 결혼도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로써 백성들은 끝내 서로 도둑질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 문을 닫거나 잠그는 일도 없었고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이나 들, 도읍지를 막론하고 음식을 바쳐 제사올리니 어질고 겸양하는 풍속이 가득했다.
신축년에 은나라 왕 무제가 번한을 거쳐 천왕께 글을 올리고 방물을 바치다.
병진년에 서우여가 죽고 정유년에 아락이 즉위하더니, 그도 죽었다. 정축년에 솔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읜 갑자년에 임나가 즉위하였다. 신미년에 천왕의 조서로써 천단을 동교에 설치하고 삼신께 제지내다. 무리들이 둥글게 모여 북치며 노래하기를 다음과 같았다.
임나가 죽으니 병신년에 동생 노단이 즉위하였다. 북막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노일소를 보내 토벌하고 이를 평정케 하였다. 그가 죽으니 기유년에 아들 마밀이 즉위했다. 마밀이 죽으니 정묘년에 아들 모불 즉위했다. 을해년에 감성을 두다.
모불이 죽으니 정해년에 아들 을나가 즉위하였다. 갑오년에 주나라 왕 하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을나가 죽으니 정묘년에 마휴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에 동생 등나가 즉위했다. 이극회가 말씀올려서 소련, 대련의 묘를 세워 삼년상의 제도를 정할 것을 청하니, 이에 따르다. 등나가 죽으니 무술년에 아들 해수가 즉위하였다. 임인년에 아들 물한을 파견하여 구월산에 가서 삼성묘에 제사지내게 하였으니 묘는 상춘의 주가의 성에 있다. 해수가 죽으니 기묘년에 아들 오문루가 즉위하였고, 그도 또 죽었다. 정묘년 아들 누사가 즉위하더니 무인년에 천자를 찾아 뵙고는, 태자 등올과 작은 아들인 등리가 별궁에서 한적하게 기거하고 있음에 태자 형제들에게 노래를 바쳤다.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마땅히 형을 공경할지니라.
항상 터럭 같은 일로서
골육의 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요.
말도 오히려 같은 여물통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 줄을 만드나니
내실에서 비록 환락하나
세언일랑 삼가 듣지 마소서.
누사가 죽으니 을미년에 아들 이벌이 즉위하였다. 병신년에 한수 사람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 기미년에 상장 고력을 파견, 회군과 합쳐 함께 주나라를 치게 하였다. 이벌이 죽으니 신유년에 아들 아륵이 즉위했다. 병인년 주나라의 이공이 사신을 보내와 특산물을 바쳤다. 아륵이 죽으니 을축년에 아들 마휴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은 뒤 병진년에 아들 다두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축년에 아들 나이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미년에 아들 차음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에 아들 불리가 즉위하였고, 그도 죽고 을사년에는 아들 여을이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니 갑술년에 엄루가 즉위했다. 무인년,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엄루가 죽으니 아들 감위가 즉위했고, 그가 죽으니 무신년에 아들 술리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무오년에 아들 아갑이 즉위하였다. 경오년에 천왕은 사신 고유를 파견하시어 먼저 한웅, 치우, 단군왕검의 삼조의 상을 나누어 주시더니 이를 관가에서 모시게 하였다.
아갑이 죽고 계유년에 고태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아들 소태이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에 아들 마건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고 병진년에 천한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병인년에 아들 노물이 즉위하였고, 그도 죽으니 신사년에 아들 도을이 즉위했다. 계미년에 노나라 사람 공구는 주나라에 가서 노자 이이에게 예를 물었다. 이의 아비의 성은 한이요, 이름은 건이니 그의 선조는 풍의 사람이라. 뒤에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 내몽고로부터 이리저리 돌아 아유타에 이르러 그 백성을 개화시켰다. 도을이 죽고 병신년에 아들 술휴 즉위했다. 그가 죽자 경오년에 아들 사양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무자년에 아들 지한이 즉위하였고, 지한이 죽고 계묘년에 아들 인한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신사년에 아들 서울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병오년에 아들 가색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경진년에 아들 해인이 즉위하였다. 일명 산한이라 했는데 이 해 자객의 시해를 당했다. 신사년에 아들 수한이 즉위했다. 임오년에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 와서 안촌골을 공격했다. 또 험독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의 사람 기후가 자식과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 싸움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 번 2한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의 남쪽에서도 싸우려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무술년에 수한이 죽었는데 후사 없으매 이에 기후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다. 이 해 연나라도 왕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니 기후도 역시 명을 받아 번조선 왕이라 칭하고 처음에는 번한성에 머무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이 즉위했다. 기욱이 죽고 신미년에 아들 기석이 즉위했다. 이 해 각 주군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인이었다. 기묘년 번한이 교외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다. 을유년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기석이 죽고 경술년에 아들 기윤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에 아들 기비가 즉위하였다. 처음 기비는 종실의 해모수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려 했으니 열심히 명령을 받들어서 보좌했다. 해모수가 능히 대권을 쥐게 된 것은 생각컨대 기비 그 사람 때문일 것이다.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이 즉위했는데 정미년에 떠돌이 도적인 위만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마침내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소도경전 본훈 제5
신시 때에 선인 발귀리가 있었는데 대호와 동문으로 학문을 배우고 도를 이미 통하여 바야흐로 저와 풍산 사이에서 노닐으니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아사달에서 제천의 예가 끝나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었으니 그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대일 그 극은 이를 이름하여 양기라 하니,
없음과 있음이 섞여서, 빈 듯하면서도 갖추어 묘함이 있도다.
삼일은, 그 체는 일이요, 그 용은 삼이라.
혼묘가 한 둘레에 있으니 체와 용은 따로 갈라질 수 없도다.
대허에 빛 있음이여, 이것은 신의 형상이고
대기의 오래도록 존재함이여, 이는 신의 화로서
참 목숨이 근원으로 만물이 여기서 나는도다.
해와 달의 아들은 천신의 충에 있음으로써 비추이고
이로써 원각을 긋고 능히 크게 세상에 내려오니
뭇중생이 그 무리를 이룬다.
원은 일이 되어 무극이고
방은 이가 되어 반극이며
각은 삼이 되어 태극이라.
무릇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이란 천제 한웅에게 주어진 바니
일신은 내려와 충만하사 성은 광명에 통하고
재세이화, 홍익인간 함은 이를 신시가 단군조선에 전하신 바이라.
한역은 우사의 관리로부터 나왔다. 대에 복희는 우사가 되어 여섯 가지의 가축을 기르게 하였으며 또 신용이 해를 쫓는 것을 살펴 하루에 열두번 색을 바꾸는 것을 보고 이에 한역을 만들었다. 한은 곧 회와 같은 뜻이고 역은 곧 옛날 용자의 본 글자다.
자부선생은 발귀리의 후손이다. 태어나면서 신명하여 도를 얻어 날아 오르사, 일찌기 해와 달을 측정하여 이를 정리하고 다음으로 오행의 수리를 따져서 칠정운천도를 저작하니, 이것이 칠성력의 시작이다. 뒤에 창기소가 또 그 법을 부연하여 이로써 오행치수의 법을 밝혔다. 이 역시 신시황부의 중경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자허선인을 통해 창수 사자 부루를 뵙기를 청하여 <황제중경>을 받으니 바로 신시황부의 중경이다. 우임금이 이를 취하여 쓰니 치수에 공이 있었다.
한역이 체는 원이며 용은 방이다. 모양 없음으로부터 실을 알게 되니 이것이 하늘의 이치다. 희역의 체는 방이며 용은 원이다. 모양있는 것에서 그 변화를 아니 이것이 하늘의 체이다. 지금의 역은 서로 체이면서 용이니, 스스로 원이면서 원하고, 스스로 방이면서 방, 스스로 각이면서 각이라. 이것이 하늘의 명이다. 그러나 하늘의 원은 스스로 이것이 하나의 커다란 허무의 공일 뿐이니 어찌 체가 있다 하겠는가. 하늘은 스스로 본래 체가 없으면서 스물 여덟 가지의 별자리를 체로 한다. 대개 천하의 사물은 모두 이름을 갖고 이름있는 것은 곧 모두 수를 가진다. 수가 있으면 곧 모두 힘을 가진다. 이미 수가 있다고 말함은 곧 유한과 무한의 틀리는 바 있음이고, 또 힘이 있다고 함은 곧 유형과 무형의 구멸이 있음이니, 고로 천하의 사물은 말이 있으면 모두 있는 것이고, 말이 없으면 곧 모두 없는 것이다.
<천부경>은 천제 한국에서 말로만 전해지던 글이니 한웅대성존이 하늘에서 내려온 뒤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이를 기록케 하였다. 최고운 치원은 역시 일찌기 신지의 전문을 옛 비석에서 보고 다시 이를 첩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거늘 본조에 이르러 뜻을 애오라지 유가의 글에 두더니 다시 조의와 더불어 의논하여 보존할 것을 바라지 않으니, 이 또한 한스러운 일이라! 때문에 특히 표하여 이에 내어 뒤에 오는 자에게 보이고자 한다.
천부경
일의 시작은 무에서 시작하나 일이라 삼극으로 석해도 본은 무진이니라.
천일은 일이요, 지일은 이요, 인일은 삼이라 일에서 적하여 십으로 거해도 화함에는 궤함이 없느니라.
천에도 이,삼이 있고, 지에도 이,삼이 있고, 인에도 이,삼이 있나니, 대의 삼에 삼극이 합쳐서 육이 되니 일,이,삼을 합하면 칠,팔,구가 생긴다.
운의 삼은 사로써 성환하고 오와 칠은 일로써 묘연하여 만왕하고 만래해서 용변해도 본은 움직이지 않느니라.
본심은 태양에 본해서 앙명하며
인중에서 천지는 일이라
일의 끝은 무로 끝이나 일이라.
<삼황내문경>은 자부선생이 헌원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맘을 씻고 의에 돌아오게 한 것이다. 선생은 일찌기 삼청궁에 사셨으니 궁전은 청구국 대풍산의 남쪽에 있었다. 헌원이 몸소 치우를 배알했는데 가는 길에 명화를 거치게 되어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경문은 신시의 녹서로 기록되어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추연하고 주를 더하여 따로 신선음부의 설이라고 한 것이다. 주나라, 진나라 이래로 도가의 무리들에 의지하는 바가 되어 민간에 연단복식하는 자가 생기고 허다한 방술의 설이 어지럽게 마구 나와서 의혹에 빠지는 자가 많았다. 서복에 이르러 한나라는 망했지만 역시 회사의 출신이기에 평소에 진나라를 배반할 뜻이 있었으니, 이에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찾는다고 말로는 하고 도망쳐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의 기이에 서불이라는 제명의 각자가 있다. 이국의 신궁에는 서불의 묘지와 사당이 있다. 서복은 일명 서불이니 불은 복의 음이 혼동된 것이다.
<삼일신고>는 본디 신시개천의 시대에 나와서 책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대저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옴의 뜻으로 근본을 삼는다. 5장으로 나뉘어져 천신조화의 근원과 세상 사람들과 사물들의 교화를 상세히 쓴 것이다. 그 일에는, [허공은 일로함께 시작되지만 같지 않고, 일에서 시작하여 끝나지만, 끝을 같이 함이 없다. 밖은 허하고 안은 공한 가운데 항상함이 있다]라고 하였고, 그 이에서는 [일신은 헛 것은 가고 실재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주재하는 듯하나 삼신이 대제로서 실로 공이 있음이라]하였으며, 그 삼에서는 [천궁은 진아의 거처하는 곳이라. 만 가지 착함을 스스로 갖추어 영원토록 쾌락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 사에서는, [세계의 뭇별은 해에 속해 있으니 모든 백성들과 큰 인물들이 여기에서 태어난다]라고 하였다. 그 오에서는, [사람, 물건은 같이 삼신에게서 나와 하나의 참으로 돌아가나니 이를 대아라 한다]라고 하였다. 세상에서는 혹은 <삼일신고>를 가지고 도가의 제사지낼 때 올리는 말씀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 한국은 한웅으로부터 개천하여 천신에게 제사지내고 신고를 조술하였으며, 산하를 널리 개척하였고 백성을 교화하였다.
오호라, 신시는 천황께서 세우신 이름으로 이제 이미 삼신상제께서 열으신 끝없는 큰 은혜를 받아 웅 호를 잘 다스려서 이로써 세상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천신을 위해, 홍익의 뜻을 높이 하고, 아래로는 사람 세상을 위해 무고의 원을 푸나니 이에 사람은 절로 한르에 순종하여, 세상엔 거짓과 망령됨이 사라지니, 하는 바 없이도 절로 다스려지고 말 없어도 절로 교화되었다. 풍속은 산천을 존중하여 서로 간섭하거나 침범하지 않고 서로 굴복함을 귀하게 여겼으며 목숨을 던져 남의 위급을 구제하였다. 이미 먹는 것과 입는 것이 고루 나누어졌지만 또 권리를 평등하게 하였다. 함께 삼신에게 돌아가 의지하여 서로 기쁘게 맹세하고 원을 세웠다. 화백으로 의견을 모으고, 서로 함께 책임지는 것으로 믿음을 지켰으며, 힘을 모아 일을 쉽게 하였고 직업을 나누어 서로 도왔으니 남녀가 모두 그 직분이 있었고 늙은 이와 어린 아이도 똑같이 복과 이익을 누렸다.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어 재판하는 일도 없었으며 나라들끼리 서로 침입하여 빼앗는 일도 없었으니 이를 일러 신시태평지세라고 한다.
삼일신고
제1장 허공
제 가로대, [너희들 오가의 무리들아. 파아란 것이 하늘이 아니며 까아만 것이라고 하늘인 것은 아니다. 하늘은 얼굴과 바탕이 없으며 첫끝과 맞끝도 없으며, 위 아래와 사방도 없고 겉은 황 하며 속은 텅 하여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싸지 않은 것이 없나니라.
제2장 일신
신은 위 없는 첫 자리에 계시사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을 가지사 하늘을 내시며, 셈 없는 세계를 차지하시고 많고 많은 물건을 만드셨나니 티끌 만치도 빠진 것이 없으며, 밝고도 영하여 감히 이름하여 헤아릴 수가 없다. 소리, 김으로 원하여 빌어도 친히 보임을 끊나니 성품으로부터 씨를 찾으라. 너의 머리 끝에 내려 계시나니라.
제3장 천궁
천은 신국이라. 천국이 있어서 온갖 착함으로 섬돌 삼고 온갖 덕으로 문을 삼나니 일신께서 계시는 곳이요, 신장과 선관들이 모셨나니 크게 좋으며 크게 빛난 곳이라. 오직 성품을 트고 공적을 이룬이라야 널리 영원토록 쾌락을 얻을지니라.
제4장 세계
너희들 총총히 벌린 별들을 보라. 셈이 다함 없고 크고 적음과 밝고 어두움과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같지 않으니라. 일신께서 뭇세계를 만드시고 또 일세계의 사자를 시켜 700세계를 거느리게 하시니, 너희 땅이 스스로 큰 듯하나 한 둥그런 세계이니라. 땅속 불이 울리어서 바다가 변하여 육지로 되었고 이에 보이는 모양을 이루었나니라. 일신께서 김을 불어 싸시고 밑까지 해의 빛과 더움으로 쪼이시니, 기고 날고 되고 헤엄하고 심는 물건들이 번식하니라.
제5장 인물
사람과 만물이 한가지로 삼진을 받나니 생각하면 사람들은 땅에서 헤매어 삼망이 뿌리를 내렸고 진과 망이 서로 삼도를 지었다.
가로대 성품과 목숨과 정기라. 사람은 온전하고 만물은 치우치니라. 참 성품은 착함도 악함도 없으니 상철이 통하고, 참 목숨은 맑음도 흐림도 없으니 중철인이 알고, 참 정기는 두터움도 엷음도 없어 하철인이 보전하니, 참으로 돌이키면 일신이 될지니라.
가로대 심과 기와 신이라. 심이 성에 의지하여 선악을 이루나니 선은 복이 되고 악은 화가된다. 기가 명에 의지하여 청탁을 이루나니 맑은 것은 오래 가고 탁한 것은 쉬 사라진다. 신이 정에 의지하여 두텁고 엷음을 이루니라. 두터움은 귀하고 엷음은 천하다.
가로대 느낌과 숨쉼과 부딪침이라. 굴러 열 여덟 지경을 이루나니 느낌에는 기쁨, 두려움, 슬픔, 성냄, 탁함, 싫음이요, 숨쉼에는 향내, 술내, 추위, 더위, 번개, 습기요, 부딪침에는 소리, 빛, 냄새, 맛, 음탕, 다침이니라. 뭇사람은 착하고 악함과 맑고 흐림과 두텁고 엷음을 서로 섞어서 가닥길을 따라 함부로 달아나다가, 낳고 성장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에 떨어지고, 철인은 느낌을 그치며 숨쉼을 고르며 부딪침을 금하여 한 뜻으로 되어가서, 가닥을 돌이켜 참함에 나아가서 큰 고동을 여나니, 성품을 트고 공적을 완수함이 이것이니라.
<신지비사>는 단군달문 때의 사람 신지 발리가 지은 것이다. 본래 삼신께 올리는 옛 제사에서의 서원의 글이다.
저 상고제천의 참뜻은 백성을 위하여 복을 기원하고 신을 축복하여 나라를 일으킴에 있다. 지금 호사가는 <신지비사>를 가지고 도참 성점과 서로 혼돈시키고 수를 추리하여 부연해서 말하기를 그것은 <진단구변도>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구결로 예연하는 것의 본보기라고 하는데 역시 잘못된 말이다.
말하기를 [저울의 대는 부소량이다]라고 했으니 곧 진한의 옛서울을 말한다. 역시 곧 단군조선이 도읍한 곳으로서 아사달이 그곳이니, 즉 지금의 송화강의 하르빈이다. 또 [저울의 추는 오덕지라 함은 번한의 옛서울을 말함이니 지금 개평부 동북 70리에 있는 탕지보가 그곳이다. 또 고려사에 말하기를 [저울 그릇은 백아강이라]고 했으니 이는 마한의 옛 도읍지를 말하며 지금의 대동강이다. 곧 마한의 웅백다가 하늘을 마한산에서 제사했다 함은 곧 이것이다. 삼가 삼한의 지세로써 여러가지 형석에 비유해 보면 부소량은 나라의 저울대와 같고, 오덕지는 나라의 추와 같고, 백아강은 나라의 저울 그릇과 같으니,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빼면 저울은 물건을 달 수 없고 나라는 백성을 보존치 못하리니, 삼신고제의 서원은 다만 삼한의 관경에 있는 백성을 기쁘게 하는 데 뜻이 있다. <신지비사>의 전하는 바도 역시 이에 벗어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나라를 위하여 뜻을 하나로 하고 아울러 충성과 옳음을 함께 장려하고, 제사하여 신을 기쁘게 하여 복이 내리기를 빈다면, 신은 반드시 가득히 내리고 복은 반드시 나라를 흥하게 할 것이다. 진실로써 행한다면 일을 함에 있어서, 실해앟여 이루지 못하였다고 추궁할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추궁함과 이루는 것이라, 어느 것을 공이라 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문자는 옛부터 있었나니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의 옛 조각이 있다. 부여 사람 왕문이 쓴 바의 법류부의전과 자부선생의 내문과 태자 부루의 오행은 모두 한단시대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은학과 한문은 아마도 왕문의 유범일진저!
<유기>에 [신획 일찌기 태백산의 푸른 바위의 벽에 있었거늘]이라는 글이 있다. 그 모양은 ㄱ과 같으니 세상에서는 신지선인이 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를 글자를 만든 것의 시작]이라고 한다. 곧 그 획은 직일과 곡이라 하는 모양이다. 그 뜻은 관제의 모양도 있다. 그 형과 그 소리는 계획된 바가 없지 않은 듯하니 생각컨대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고로 신인의 덕애로써 사람 세상을 고르게 하니 이에 참된 가르침이 행해지고 결국 세상의 일이 모두 바로 된다. 현능한 사람은 벼슬에 있고 노유는 공개적으로 봉양 양육하며 장년은 의에 복종한다. 많은 사람이 감화되니 간사한 자는 소송을 그치고 창칼은 음모의 문을 닫는다. 이것 역시 이화의 한 길이라.
<대변설>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의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있다]고 했다. 또 가로대 [대시에 옛 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에만 의지한 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대저 문자의 근원은 나라의 풍습에 믿음을 존중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하나의 기로부터 셋으로 갈려진 기는 곧 극이다. 극은 즉 무다. 저 하늘의 근원은 곧 삼극을 꿰뚫어 허가 되고 빈 것이다. 안과 밖도 역시 그런 것이다. 하늘의 궁을 곧 빛이 모이는 곳, 만 가지 변화가 나오는 곳이라 한다. 하늘의 일신은 능히 그 허를 체로 할 뿐 아니라 곧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고로 말한다. 일기는 즉 천이며 곧 빈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중일의 신이 있어 능히 삼이 된다. 삼신은 곧 천일, 지일, 태일의 신이다. 일기는 그가 스스로 능히 동작하여 이루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삼화의 신이 된다. 신은 즉 기이고 기는 곧 허이며, 허는 즉 일이다. 때문에 땅에는 삼한이 있으니 진, 변, 마의 삼경의 한이다. 한은 곧 황이며 황은 대이다. 대는 곧 일이다. 고로 사람에 삼진이 있다. 성, 명, 정의 삼수의 진이라 한다. 진은 즉 충이고, 충은 곧 업이고, 업은 곧 속이며, 속은 즉 일이다. 그리하여 일에서 시작하여 일에 끝난다는 것은 돌아서 진으로 되오는 것을 말한다. 곧 일은 즉 삼이라고 하는 것은 선에 대합하는 것이다. 미립의 작은 알갱이를 쌓아서 일로 되돌아 오는 미이다. 곧 성의 선이라 하는 것이고 곧 명의 청이라 하는 것이며, 곧 정의 후라고 하는 이유다. 다시금 또 무엇이 있어서 있다고 하고 없다고 하는 것일까? 진은 이를 <물들지 않음>이라 한다. 이 물듦을 망이라 하고 선을 불식이라 한다. 그 식을 악이라 하고 청을 불산이라 한다. 산을 탁이라 한다. 후를 불축이라 한다. 축을 박이라 한다. 하나를 잡아 삼을 머금는 이유는 곧 그 기를 하나로 하며 그 신을 셋으로 하기 때문이라,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하는 이유는 역시 신을 셋으로 하고 기를 하나로 하기 때문이다. 저 삶을 사는 자의 체는 일기이다. 일기란 안에 삼신이 있고 지의 근원도 역시 삼신에 있다. 삼신은 밖으로 일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밖에 있는 것은 일이고 그 내용도 일이며 그 통제도 일이다. 역시 모두 포함되어 있을 뿐 놓을 수 없다. 그것이 글자가 이루어진 근원이 된다. 회를 포함하고 잡고 돌아온다는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시엔 산목이 있었고 치우에게 투전목이 있었으며 부여엔 서산이 있었다. 그 산목이라 하는 것은 **********이다. 또 전목은 **********이다. 단군 가륵제 2년 삼랑을 보륵이 정음 38자를 찬하고 이를 가림다라고 했다 한다. 그 글을 보면 이렇다.
<이태백전서>의 옥진총담에는 [발해국에 글이 있는 바 당나라에서는 아무도 이를 해득하는 자가 없었다. 이태백은 능히 이를 풀어 이에 대답했다]라고 있다. <삼국사기>엔 [헌강왕 12년의 봄 북진으로부터 적국인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갔음을 상주하고는 마침내 그 나무에 쓰여진 15자를 취하여 바쳤는데 <보로국과 흑수국의 사람이 함께 신라국과 화통코자 왔노라>고 써져 있다]고 했다. 또 고려의 광종 때 장유는 접반사로서 저명한 사람이다. 처음 난을 피해 오월에 이르렀다. 월씨에 호사가가 있었으니 동국한송정의 곡을 거문고 바닥에 새기고 이를 파도에 띄워 보냈다. 월나라 사람들은 그 글을 풀지 못하더니 때마침 장유를 만나 절하고 그 글의 뜻을 물으니, 장유는 즉석에서 한시로써 이를 풀었다.
달빛 소나무에 하얀 밤.
파도까지 잠든 경포의 가을
애처로이 울며 오가는
한마리 바다 갈매기여!
아마 거문고 바닥에 각문한 글은 옛 가림다 종류의 글이었을 것이다.
원동중의 <삼성기>의 주에 [왜, 진, 여국은 혹은 횡서하고 혹은 결승하고 혹은 계목한다]고 있다. 애오라지 고려만이 영법을 모사했으니, 생각컨대 한단의 상고시대엔 반드시 문자의 모각이 있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일찌기 신지의 옛 비석에 새겨진 천부경을 얻어 다시 또 첩을 만들고 이로써 세상에 전했으니 낭하리의 조각은 바로 모두 그 실제의 자취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시엔 녹서가 있고 자부에겐 우서가 있고 치우에겐 화서가 있어, 투전문등은 즉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에게는 용서가 있었고 단군에게는 신전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들은 널리 백산, 흑수, 청구, 구려에 쓰여졌다]고 했다. 부여 사람 왕문은 처음 전문을 번거롭다 여기고 좀 그 획을 없애고 새로 부예를 만들어 이를 사용했다. 진나라 때 정막은 숙신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을 한수에서 얻었고, 또 그 획을 계승하여 조금 바꾼 형으로 고쳤다. 이것이 지금의 팔분이다. 진나라 때 왕차중은 또 해서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의 먼 후예이다. 지금 그 글자의 근원으로 삼는 것을 탐구해 보면 모두 신시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역시 그 지류를 계승한 것이 명백하다.
<삼일신고>의 구본에는 분장이 없고 행촌선생이 처음으로 장을 나누어서 1장에 허공, 2장에 일신, 3장에 천궁, 4장에 세계, 5장에 인물이라 했다. 저 허공을 하늘의 질량이라 하고, 일신을 하늘의 주재라 하고, 천궁을 하늘의 조화를 갖춘 곳이라 하고, 세계를 만세라 하였다. 인물은 곧 시이다. 인물은 우주의 삼계의 원훈이다. 대저 태백진교는 천부에 근원하여 지전에 합치고 또 사람의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정사를 일으킴에 있어 화백보다 앞섬이 없고, 덕을 다스림에 있어 책화보다 선한 것이 없다. 재세이화의 도는 모두 천부에 준하여 거짓이 없고, 지전을 취하여 게으름 없고, 인정에 합쳐서 어긋나지 않는다면, 천하의 공론이 어찌하여 한 사람인들 아니라 할 자 있으리요? 신고의 오대의 지결도 역시 천부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신고도 결국 역시 천부 가운데 하나의 이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처음으로 자의 근원이 오래됨을 알았다. 글자의 의미는 크고도 크도다.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 이색 휴애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하였다고 하는데 그렇지만 지금은 볼 수 없다. 지금의 풍속은 한자라 할지라도 정주에 합치지 않으면 뭇화살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을 정도로 유가의 예봉은 바야흐로 번득거린다. 저 천경과 신고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여도 어찌 쉽사리 논할 수 있으리오?
신시의 음악을 공수라 하거나 혹은 공수라 하기도 하고 또 두열이라고도 한다. 무리는 둘러서서 줄지어 합창으로써 삼신으로 하여금 크게 기쁘시게 하고, 나라가 번영하고 민심이 윤택해 질 것을 빌었다. <백호통소의>에서는 조리라 했고 <통전악지>에서는 주리라 하였고 <삼국사기>는 도솔이라 했다. 대저 즐겁고 건강하기를 신에게 기원하고 순리에 따라 족함을 안다는 뜻이 있음이라. 단군 부루 때 어아의 악이 있었으니, 대저 신시의 옛풍습으로, 삼신을 맞는 노래였을 것이다. 즉 가로대, 대조신을 삼신이라 부르고 하늘의 주재자라고 하였다. 고로 태양으로써 의상을 삼고, 광열로써 공능으로 삼고, 생화발전으로써 마음으로 삼고, 화복보응으로써 정의로 삼는다. 이때부터 풍속은 참전으로 계를 가졌고, 예복에도 법칙이 있었으니 의관한 자는 반드시 활과 화살을 차고, 잘 쏘는 자는 반드시 높은 자리를 얻었다. 마음을 착하게 가짐을 수업의 근본으로 삼고, 과녁을 가상의 악귀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제사는 반드시 조심하여 근본에 보답함을 알게 하고, 한마음으로 뭉쳐서 스스로 여러 목숨가진 것들을 가까이하여 교화하였다. 안으로는 닦고 겉으론 겸손하여 모든 것이 때에 알맞아 배달국의 영광은 백백 천천년이 되게 쌓여서 높아질 것이니, 이 커다란 은덕을 어찌 한순간인들 잊을 수 있을손가?
옛날에는 제천에 무천의 악이 있었다. <요사> 예지에 말하는 바의 요천과 같은 것은 이것을 말한다. 이 제사는 반드시 먼저 생을 상징시켜 평상시 살아 있을 때처럼 정성을 드리려고 한다. 신주를 세우고 상을 차리고 공물을 올리는 것은 곧 친견을 표하려 하는 의식이다. 멀리 지나간 일을 되새겨서 근본에 보답함은 곧 금생을 거듭하여 뒤에까지 계속하여 보전코자 하는 가르침이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단군 구물은 국호를 바꿔 대부여라고 하고 수도를 장당경으로 바꾸었다. 지금의 개원이며 역시 평양이라고도 한다(한반도의 평양이 아님). 삼조선의 칭호는 단군 색불루에게서 시작된다. 그렇더라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더니 이에 이르러 갖추었다. 삼한이란 분조관경의 뜻이 있으니, 삼조선이란 분권관경의 제도가 있다는 말이다. 먼저 큰 가르침은 매우 복잡하였으니 사람들이 능히 행하지 못하였고 연나라의 침입이래 전화가 여러차례 있어 왔다. 해를 거듭하여도 일은 잘풀리지 않으니 치화를 잃고 국력은 날로 약해져 갔다. 어느날 단제께서는 꿈에 천제의 가르침을 얻으셨다. 이에 다스림을 크게 바꾸려고 했다. 천제의 묘마당에 큰 나무를 세우고 북을 매어 달도록 하고 3.7일을 기한으로 하여 연령순으로 서로 마시면서 권화하여 성책하였다. 이를 구서의 모임이라 하고 항상 구서의 글을 사용했다.
한 번 절한 뒤에 무리에게 말한다.
[너희들 집에서는 효함에 게으름 없을지며, 집에 부모처자 있거든 곧 성심 성경하여 밀어줌에 우애로써 할지니라. 제사를 성심껏 받들어 이로써 하나의 근본에 보답할지며, 손님을 경접하여 이로써 이웃과 사이좋도록 힘쓸지며, 자제를 가르침에 게으름 없이 하여 영재를 기르면 이것이 모두 인륜 교화의 큼이라. 이것이 효도하고 자애롭고 순종하고 예의 바름이니 이를 감히 수행치 않겠는가?]
이에 무리는 일제히 소리로 응해 가로대
[그리 하오리다. 못하겠다 하는 자는 이를 추방하겠나이다]
라고 하였다.
두번째 절하고 서약하여 말한다.
[너희들 형제엔 우애 있기를 힘쓰라. 형제는 부모가 갈라진 것이요, 형이 좋아하는 것이면 동생이 좋아하는 것이어야 하고, 동생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면 형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물래의 좋아함 좋아하지 않음은 다른 사람도 나도 서로 같나니라. 몸으로부터 물건에 이르고 친함으로부터 서먹한 사이에 이르기까지라. 이러한 길을 가지고 이를 조국에 미치게 하면 곧 조국은 흥융할 것이며, 이를 천하에 미치게 하면 곧 천하는 교화될 것이니라. 이것이 우애와 화목과 어진 것과 용서함이라. 이를 감히 수업하지 않겠다 하겠는가?]
무리는 소리로 응하여,
[그리 하오리다. 아니라 하는 자는 내어 쫓으리이다]
라고 하다.
세번째 절하고 서약하였다.
[너희들 스승과 벗에 믿음이 있기를 힘쓰라. 스승과 벗은 도와 법이 서는 곳이라. 덕과 의는 서로 연마하고 과실은 서로 경계하라. 학문의 세움과 사업의 성취는 모두 스승과 벗의 힘이라. 이것이 믿음과 진실함과 성실함과 근면함이라. 이를 감히 수행치 않을 수 있을까?]
이에 무리들 소리 맞춰,
[예 거부하는 자는 추방하오리다]
하였다.
네번째 절하며 맹세한다.
[너희들 나라에 충성하기를 힘쓰라. 나라는 선왕께서 세우신 것이라. 지금 백성들이 먹고 사는 곳이라. 국정을 쇄신하고 나라의 부를 늘리고 국토를 수호하고 국권을 회창하고 국세를 굳혀 역사를 빛나게 함은 모두 나라의 책임이라. 이것이 충과 의와 기개와 절개이니 이를 감히 연마할 수 없다 하겠는가?]
이에 무리는 소리 맞춰,
[지당한 말씀입니다. 아니라 하는 자는 추방하오리다.]
하다.
다섯번째 절하며 맹세하기를,
[너희들 뭇사람에게 겸손하기를 힘쓰라. 만인은 모두 천제의 백성이라. 나와 같이 모두 세 가지 참됨을 받아 주성의 바탕을 이룬 바이며 나라힘의 원천이 되는 바라. 위가 겸손치 않으면 밑이 떨어져 나갈 것이요, 바른쪽이 겸손치 않으면 왼쪽은 이탈하고 앞이 겸손치 않으면 뒤는 후퇴할지며, 아래가 겸손하지 않으면 위는 싫어하고, 왼쪽이 겸손치 않으면 바른쪽은 떨어지고, 뒤가 겸손치 않으면 앞은 서먹해 지리라. 이제 겸손하여 양보하고 서로 존경하면 군중이 화합하여 힘이 뭉쳐져서 외부로부터의 모욕 따위는 없어지고 안으로는 다스림을 이루리라. 이것이 겸손과 겸양과 공경과 삼가는 것이라. 이를 감히 수행치 않으리오?]
하니 무리는 소리내어,
[옳소이다. 아니라는 자는 쫓아내리이다]
하다.
여섯번째 절하며 맹세하기를,
[너희들 정사를 밝게 하는 일에 힘쓰라. 정사는 난리를 다스리는 것에 관한 일이라. 풍백은 약속을 세우고, 우사는 이를 정무로 시행하고, 운사는 형을 행하여 각각 직권이 있어 서로 침범치 못할 것이다. 지금 지혜와 보는 눈은 고매하고 언로는 널리 열렸으며 기예를 잘 연마하였고 경험을 쌓아나가면, 즉 나라일은 균등히 될지며 백성들의 일은 열리리라. 이것이 밝음과 지혜와 통달과 살핌이라. 이를 감히 수행치 않겠는가?]
하니, 무리는 소리내어 가로대,
[옳습니다. 거부하는 자를 추방하오리다]
고 하였다.
일곱번째 절하며 맹세하여 말하길,
[너희들, 싸움터에서는 용맹할 것을 힘쓰라. 싸움터는 존망이 결정되는 곳이라. 나라 있지 않으면 임금도 아비도 떨어져서 나무 우상처럼 되리니, 주인이 서지 않으면 처자는 몰락하여 노예가 되느니라. 사람의 일이나 물건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의 길이 아님이 없고, 세상에 전하는 가르침도 역시 나의 일이 아닌 것이 없도다. 나라 없으며 살고 주인 없으면서 존재함이 차라리 나라 있을 때에 죽고 주인 있을 때에 죽고 끝나느 것과 같겠는가? 이제 확연하게 자기를 비워 희생시키는 풍속있으니, 정숙하게 규제하여 잘 스스로 무리를 다스리고 상과 벌은 반드시 바르고 공평하게 할 것이다. 남과 내가 역시 믿음으로 서로 돕는다면 많은 사람들을 양육하고 능히 천만의 사람을 복되게 하리라. 이를 용기와 담력과 힘과 의협이라 하느니, 이를 감히 수행치 않겠다 하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
[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
라고 하였다.
여덟번째 절하며 맹세하여,
[너희들 행동함에 있어서는 청렴하기를 힘쓰라. 청렴하지 않으면 양심은 절로 어둡고 능히 청렴하면 신명이 저절로 트이리라. 하고 싶은대로 멋대로 욕심을 내면 반드시 중풍을 앓을지며, 스스로 교만에 떨어지면 곧 반드시 부패하고, 예절없이 스스로 만족하면 스스로 해를 입고 남에게도 해를 끼치게 된다. 이런 일이 계속해서 쌓이면 구제 받지 못하는 곳에 빠지리라. 이것이 겸손함과 곧음과 깨끗함과 맑음이라. 이를 감히 수행치 않겠는가?]
하니 무리들 소리내어 가로대,
[수행하오리이다. 거부하는 자는 추방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홉번째 절하며 맹세하여 말하길,
[너희들 직업에 있어선 의로움에 힘쓰라! 사람이 직업을 갖고 일을 행하면 반드시 책임이 있나니, 조금이라도 불의가 있거든 스스로 힘을 다하여 물리치지 못한다면 반드시 업신여겨 학대받고 무너져버릴 것이며, 만약 정의롭다면 백성들로 하여금 다 믿도록 하리니, 누가 있어 능멸하고 묘욕하며 침탈하리오? 의는 단체의 힘이 샘솟는 곳으로서 바른 기운이 일어나는 곳이라. 이를 잘 갈무리하면 한몸에 간직할 수 있지만, 이를 확대하면 천지에 가득하게 채운다. 이것이 바름과 옳음과 공평함과 도리이니 이를 감히 수행치 않을 구 있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외치기를,
[옳소이다. 거부하는 자는 이를 추방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풍속은 순박하고 도타운 것을 숭상하고, 의로운 싸움에 용감하고, 공동의 이익에 힘쓰며, 공동의 일에는 민첩하며, 공덕에는 밝았다. 선업은 권하고 과실은 바로 잡고 스스로 예의 있고 자애로운 풍속을 이루어 같이 삼신께 돌아와 의지하여 교화되었다.
<단군세기>에서 말한다.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키고 바른손을 올린 뒤에 삼륙대례를 행한다.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킴은 바른엄지는 자를 나타내고, 왼엄지는 해를 나타내기 때문이라. 그리고 바른손을 더함은 태극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옛날에는 꿇어앉기에 앞서 반드시 먼저 읍을 한 후 꿇어앉았으니 바로 보통의 예의이다. 읍은 이를 가리켜 취라 한다. 마음을 모아 손을 마주잡은 다음 하늘을 생각한다. 꿇어앉음은 순이다. 기를 순하게 하고 무릎을 합쳐서 땅에 감사하는 것이다. 배는 헌이다. 몸을 바치고 머리를 땅에 대며 선조에 보답하는 것이다. 헌은 또 현이라고도 한다. 머리가 손에 닿는 것을 배수라 하고 머리가 땅에 이르름을 고두라 한다. 고두는 곧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굽혀 절하는 것이다.
<참전계경>이 세상에 전해진 것은 을파소 선생이 전한 것이라 한다. 선생은 일찌기 백운산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하고 천서를 얻으니 이를 <참전계경>이라 했다. [대시에 철인은 위에 계시사 인간의 360여 사를 주재하시었다. 그 강령에 8조가 있나니 성, 신, 애, 제, 화, 복, 보, 응이라 한다. 성은 충심이 발하는 곳으로서 진실에서 나오는 정성을 관장하는 곳이라. 6체와 47용이 있고, 신은 천리의 필합으로서 인사의 필성이라, 5단 35부가 있다. 애는 자심의 자연으로 인성의 본질이다. 6범과 43위가 있다. 제는 덕의 겸선으로서 도가 잘 미치는 것이라, 4규 32모가 있다. 화는 악이 부르는 것이다. 6조 42목이 있다. 복은 선의 여경이다. 6문 45호가 있다. 보는 천신이 하는 것으로 악인에 보하는데 있어서는 화로써 하고 선인에 보하는데 있어서는 복으로써 한다. 6계와 30급이 있다. 응이란, 악은 악보를 받고 선은 선보를 받음이라. 6과 39형이 있다. 고로 하늘은 비록 말은 없으나 척강하여 두루 보호한다. 나를 아는 자 이를 열심히 찾아서 열매를 맺으리니, 하나같이 온전함에 이르고 모든 사람이 계를 받음이라.]
을파소가 덧붙여서 말했다.
[신시이화의 세상은 8훈으로써 경을 삼고 5사를 위로 삼아 교화가 크게 행해져 홍익제물하였으니, 참전이 이뤄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의 사람들은 이 전계에 의해 더욱 더 스스로에 힘쓸지면,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일이 어찌 어려운 일로 될까 보냐?]
고구려국 본기 제6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오나니 해모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곳이다. <조대기>에선 이렇게 말한다.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 일찌기 살다가 부여의 옛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라 한다. 까마귀의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오룡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500여 명이었는데 아침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절로 관경이 교화되었다. 산에는 도적 없고 벼와 곡식이 들에 그득했다. 나라에 큰일 없고 백성 또한 일 없었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 오심은 임술 4월 초 여드레로서 곧 진시황 정의 8년이다.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함에 있어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는 일찌기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즐겨 그녀를 맞아 들여 고주몽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 5월 5일이라. 곧 한나라 왕 불능의 원봉 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그므이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와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와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32년 갑오 10월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을미년에 졸본으로부터 서울울 눌현으로 옮겼다. 눌현은 지금의 상춘 주가성자이다. 유리명제의 19년 또 눌현으로부터 국내성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이라고도 했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일이 있으면 여기에서 머물렀다. 대무신열제의 20년, 제는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 속했는데 애오라지 해성의 남쪽, 바다 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산상제의 원년 동생 계수를 파견하여 공손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고주몽 성제는 조서를 내려 가로대, <천신께서 만인을 만드실 때 하나의 상으로서 균등하게 삼진을 주시었으니 이에 사람은 저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에 서게 되었다>라고 하셨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나와 천제의 아들이 되었다. 밝은 이의 마음이 비어 고요함은 계율에 뿌리를 두는 것이니 오래도록 사특한 기운을 눌러 그 마음이 안락하고 태평하다. 이에 뭇사람들과 함께 일하면 항상 잘 되는 것이라. 병력을 쓰는 까닭은 침범을 느슨하게 하려함이요, 형을 행함은 죄악을 없앨 것을 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가 지극하면 정이 생기며, 정이 지극하면 지혜가 가득하며,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융성하다. 때문에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가운데 헤아리며 지혜로써 사물을 이치대로 하고 덕으로써 사람을 다스린다. 이것이 곧 신시의 개물교화이다. 천신을 위해서는 성품을 열고 중생을 위해서는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서는 공을 다하고, 천하만세를 위해서는 지와 생을 나란히 닦는 교화를 이룸이라.]
을파소는 국상이 되더니 나이어린 준걸들을 뽑아서 선인도랑이라 하였다. 교화를 관장함을 참전이라 하였으니, 무리들을 선택하여 계를 지키고 신을 위하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라 하였으니 바른 행동을 거듭하여 규율을 만들고 공동을 위하여 몸을 바친다. 일찌기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신시이화의 세상은 백성들의 지혜가 열림에 따라서 날로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만세에 걸쳐서 바꿀 수 없는 표준이 되는 이유가 된다. 때문에 참전에 계가 있으니, 신의 계시에 따라 무리를 교화하고, 한맹에 율이 있으니 하늘을대신하여 공을 행한다. 모두가 스스로 마음을 써서 힘을 모아 뒤에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라고 했다. 을지문덕은 말한다.
[도는 이로써 천신을 섬기고 덕은 이로써 백성과 나라를 덮는다. 나는 이런 말이 천하에 있음ㅇ르 안다. 삼신일체의 기를 받아 이를 나누어서 성, 명, 정을 얻으니 광명을 마음대로 하고 앙연하여 움직이지 않으나 때가 되면 감동이 일어나니 도는 이에 통한다. 이것이 체가 삼물인 덕, 혜, 력을 행하고 화하여 삼가인 심, 기, 신이 되며 즐겨 삼도인 감, 식, 촉을 채우는 이유이다. 그 중요함은 날마다 재세이화하고 조용히 경도를 닦아 홍익인간함을 간절히 생각함에 있다. 한국은 오훈을, 신시는 오사를, 조선은 오행육정을, 부여는 구서를 말한다. 삼한의 통속도 역시 오계가 있어 효, 충, 신, 용, 인이라 한다. 모두 백성을 가르침에 있어 올바름과 공평함을 가지고 무리르 정리함에 뜻이 있다.
책성에 태조무열제 기공의 비가 있다.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대훈적의 비가 있다. 안주 청천강변에 을지문덕의 석상이 있다. 오소리강 밖에 연개소문의 송덕비가 있다. 평양 모란봉의 중간 기슭에 동천제의 조천석이 있다. 삭주 거문산의 서쪽 기슭에 을파소의 무덤이 있다. 운산의 구봉산에 연개소문의 묘가 있다.
<조대기>에 가로대 [동천제도 역시 단군이라 한다. 한맹의 절기가 될 때마다 삼신을 평양에서 제사하여 맞이한다. 지금의 기림굴은 즉 그 제사지내던 곳이다]라고 했다. 크게 맞이하는 의식은 처음에는 수혈에서 행해졌다. 구제궁에 조천석이 있었으니 길을 가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또 삼륜구덕의 노래가 있어 이를 권장하였다. 조의선인은 모두 선택되었으니 국인이 그 선출됨을 긍지로 여기는 바였다. 그렇지 않다면 영광으로써 왕의 사자와 동등하게 여겼겠는가?
광개토경호태황은 융공성덕하여 어느 왕보다 탁월했다. 사해안에서는 모두 열제라 칭한다. 나이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고 하늘의 음악을 예로써 연주했다. 군진에 나아갈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의 노래를 부르게 하고 이로써 사기를 돋우었다. 말을 타고 순수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에게 제사지냈는데 역시 천악을 사용하였다.
일단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국 사람들을 격파하였다. 왜인은 백제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 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술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오다. 때에 곧 백제, 신라, 가락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 평양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와 이왜의 무리는 신하로써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의 번성함은 이때가 그 극성기이다. 이보다 앞서 협보는 남한으로 도망쳐 마한의 산중에 살았다. 그를 따라온 자도 수백 가였는데 몇 해지나지 않아 큰 흉년에 시달려 유리하고 방황했다. 협보는 장혁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와 해포로부터 몰래 향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에 이르니 곧 가라해의 북안이다. 여기서 수개월동안 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의 시조라 한다.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을 세워 이를 통치케 하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처음 변진구야국의 사람들이 한때 모여 산 적이 있읐는데, 이를 구야한국이라 한다. 다파라를 다라한국이라고도 한다. 홀본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찌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므로 늘 열제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함께 이웃하며 성이 같다. 본래 웅습성을 갖고 있으니 지금의 구주의 웅본성이 그것이다.
왜는 회계군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으며 배로 9,000리를 건너 나패에 이르른다. 또다시 1,000리를 건너서 네시마에 이르른다. 네시마는 역시 도시마라고도 한다. 때에 구노인은 여왕과 서로 싸워 길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구야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자는 쯔시마, 가라산, 지가도로부터 비로소 말로호자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동쪽 경계는 곧 구야한국의 땅이다. 회계산은 본래 신시의 <중경>이 간직된 곳이다. 사공 우가 재계하기 사흘만에야 겨우 치수의 비결을 얻어 공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우는 돌을 벌채하여 부루 태자의 공을 산의 높은 곳에 새겼다고 한다. 즉 오월은 본래 구려의 옛 읍이며 산월과 좌월은 모두 그 후예가 나뉘어 옮겨 산 땅이다. 항상 왜와 왕래하며 무역하여 이익을 얻는 자가 매우 많았다. 진 때 서불은 동야현의 해상으로부터 곧 바로 나패에 이르러 다네시마를 거쳐 세도나이까이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에 이르렀다. 이세에 옛날 서복의 무덤이 있었다. 어떤 이는 말한다. [단주는 서복이 있던 곳]이라고도.
장수홍제호태열제는 건흥이라고 연호를 바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서 강역을 널리 넓혔다. 이에 웅진강 이북이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어 북연 실위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족속의 서열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 신라 매금 백제 어하라와 남쪽 평양에서 만나 납공과 수비 군사의 수를 정했다.
문자호태열제는 명치라고 개원하였다. 11년 제, 노, 오, 월의 땅은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더 커졌다.
[평강상호태열제는 담력이 있고 말을 타고 활쏘는 것을 잘 했으니, 곧 주몽의 풍이 있었다. 대덕으로 개원하더니 잘 다스려 밝게 교화했다. 대덕 18년 병신 제는 대장 온달을 보내 갈석산 배찰산을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에 이르러 북주를 크게 격파하니, 유림진 동쪽은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은 지금 산서성의 경계이다.
영양무원호태열제 때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 나라는 부하고 백성은 은성했다. 수나라 왕 양광은 본래 선비의 유종족인 바, 남북의 땅을 통합하여 그 여세를 몰아 우리 고구려를 모욕하고 업신여기더니, 상국을 업신여기고 자주 대병을 일으켰으나 고구려는 이미 대비가 있어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홍무 25년 양광은 또다시 동쪽으로 침략해 와서 먼저 장병을 보내 비사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케 했다. 관병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니 바야흐로 평양을 습격하려 했다. 제께서는 이를 듣고 왕병술을 쓰려 했다. 계략을 꾸며 곡사정을 보냈다. 때마침 조의 가운데 일인이라는 자가 있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한 끝에 함께 표를 양광에게 바쳤다. 양광이 배에서 표를 손에 들고 읽는데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소매 속에서 작은 활을 꺼내 쏘아 그의 뇌를 맞혔다. 양광은 놀라 자빠지고 실신했다. 우상 양명은 서둘러 양광을 업게 하여 작은 배로 갈아타고 후퇴하여 회원진에 명을 내려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하였다. 양광은 좌우에게 말하여 가로대,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몸소 작은 나라를 쳐도 승리하지 못하니 이는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라고 했다. 양명 등은 얼굴색이 검게 변하여 대답 못하고 말았다. 후인들은 이를 노래로 불러 가로대,
오호 어리석은 한나라 어린애들아
요동을 향하지 마라. 개죽음이 부른다.
문무의 우리 선조 한웅이라 불렀느니
자손들은 이어져서 영웅호걸도 많단다.
주몽 태조 광개토님
위세는 세상에 울려 더할나위 없었고
유유 일인 양만춘은
나라 위해 몸 바꿔 스스로 사라졌다
세상 문명은 우리가 가장 오래니
오랑캐 왜구 다 물리치고 평화를 지켰다.
유철 양광 이세민도
보기만 해도 무너져서 망아지처럼 도망갔다.
영락기공비는 천 척
만가지 기가 한 색으로 태백은 높단다.
라고 하였다.
을지문덕은 고구려국 석다산 사람이다. 일찌기 입산하여 수도하고 꿈에 천신을 보고 크게 개닫다. 3월 16일이면 마리산으로 달려가 공물하며 경배하고 돌아오고, 10우러 3일이면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했다. 제천은 곧 신시의 옛 풍속이다.
홍무 23년 수군 130여 만이 바다와 산으로 나란히 공격해왔다. 을지문덕은 능히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서 이를 초격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러 마침내 이를 대파하였다. 수나라 군사는 수륙 양군이 무너져 살아서 요동성까지 돌아간 자가 겨우 2,700인이었다. 양광은 사신을 보내 화해를 구걸했으나 문덕은 제장과 더불어 승승장구하여 똑바로 몰아부쳐 한쪽은 현도도로부터 태원까지 추격하고 한쪽은 낙랑도로부터 유주에 이르렀다. 그 주군에 쳐들어가 이를 다스리고 그 백성들을 불러다가 이를 안무하였다.
여기에서 건안, 건창, 백암, 창려의 제진은 안시에 속하고, 창평, 탁성, 신창, 용도의 제진은 여기에 속하고, 고노, 평곡, 조양, 누성, 사구을은 상곡에 속하고, 화룡, 분주, 환주, 풍성, 압록은 임황에 속했다. 모두 옛처럼 관리를 두고 다스렸다. 이에 이르러 강병백만으로 강토는 더욱 더 커졌다.
양광은 임신의 오랑캐라고 한다. 출사가 성대하기로는 예전에는 그 예가 없었다. 그런데 조의 20만인을 가지고 모조리 그 군을 멸망시켰는데 이는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과 같은 분은 곧 만고에 세상의 흐름을 만드는 한 성걸이다. 문충공 조준이 명나라 사신과 더불어 축배하고 함께 백상루에 올라 이렇게 시를 읊었다.
살수는 탕탕하게 흘러 푸르고 허하고나,
수나라 병사 백만은 물고기 밥이 되었지.
이제 가던 길 멈춰 어부에게 그때 얘기 듣나니
정부의 한마디 웃음 남기기엔 오히려 모자라네.
옛 역사에서 말하기를,
[영양무원호태열제의 홍무 9년 제는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잡아죽이게 하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나라, 노나라, 오나라, 월나라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 연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진흥치 못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로 돌아왔다. 성읍을 구획짓고 문무의 관리를 두었는데 수나라가 또 군대를 일으켜 말썽이 났다. 남북이 소요하여 사방이 온통 시끄러워지니 해독은 백성들에게 미치게 된지라. 제는 몹시 화를 내어 삼가 하늘의 뜻을 행하여 이들을 토벌하니, 사해에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수나라 왕 양견은 은밀하게 모반의 뜻을 품고 감히 복수의 군대를 내어 몰래 위충 총관을 파견하여 공명을 위해 관가를 부수고 읍락에 불지르고 노략질하게 하였다. 이에 제는 곧장 장병을 보내 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니, 산동지방은 이에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 이 해에 양견은 또 양량왕 세적 등 30만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때 물난리를 만나서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구는 병력을 모아 등주에 웅거하여 전함 수백척을 징집시켜 동래로부터 배를 띄워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를 알아차리고는 후군으로써 이를 방어하도록 내보냈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나서 전군이 물에 떠다니는 판에 백제가 수나라에 청하여 군의 향도가 되려 하다가 고구려의 타이름을 받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좌장군 고성은 은밀하게 수나라와 친할 마음이 있어 은밀하게 막리지의 북벌계획을 막았다. 이에 여러 차례 청해서 출사하여 백제를 공격함으로써 공을 세웠다. 그러나 홀로 막리지는 대중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수북벌의 정책에 집착하여 여러 차례 이해관계를 들어 말하므로 이 말에 따르게 되었다. 고성이 즉위하게 되자 전 황제의 모든 정책은 폐기되었다.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노자의 상을 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도덕경을 청강시켰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으니 부여현으로부터 남해부에 이르는 1000여 리이다. 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은 청하여 도교를 강하는 것과 장성 쌓는 일을 중지시키고자 했으나 제는 기꺼워하지 않고 소문의 병사를 빼앗고는 장성을 쌓는 일의 감독을 시키더니, 은밀하게 뭇 대인과 더불어 의논하여 연개소문을 주살코자 하였다. 소문은 앞질러 이 말을 들을 수 잇어 장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몸이 죽고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일은 급하다. 때를 잃지 말지라.]
하고 모든 부장을 모아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하고는 성대하게 술상을 벌려 뭇 대신을 초청하여 함께 이를 시찰하자고 하였다. 모두가 참석하자 소문이 소리를 크게 내며 격려하기를,
[대문에 호랑이 여우가 다가오는데 백성 구할 생각은 않고 되려 나를 죽이려 한다. 빨리 이를 제거하라]
하니, 제는 변고를 듣고 평복으로 몰래 도망쳐 송양으로 가서 조서를 내려 나라의 대신들을 모으려 했으나 한 사람도 오는 사람 없고 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저절로 숨이 떨어져 붕어하였다.
<조대기>에 가로대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라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라 하고, 증조부는 광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홍무 14년 5월 10일 태어났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하고 의기호일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마시며, 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때는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 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로 삼고 하늘을 경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 데 있어서 엄명으로써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면 권세 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 ]라고 했다. 스스로 [물 가운데 살아서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일 더욱 건장하게 피로할 줄 모른다]고 말하였다. 무리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대 [창해의 용신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이로다]라고 했다.
소문은 마침내 고성제를 내어쫓고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을 맞아들여 이를 보장제로 삼다. 소문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성기, 자유, 개물, 평등으로 하고, 삼홀을 전으로 하고, 조의에 율이 있게 하고, 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함이 매우 완전하였다. 먼저 백제의 상좌평과 함께 의를 세웠다. 또 신라의 사신 김춘추에게 청하여 자기의 집에 머무르도록 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은 백성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들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승의 뒤에 옛 영토에 따라서 연정을 실시하고 인의로써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
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하였으나, 춘추는 종내 듣지 않앗으니 애처롭고 가석할 일이었다.
개화 4년 당나라 이세민이 군신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제하의 땅이다. 수나라가 네번 출사하였어도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제 출병하여 제하를 위해 자제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고 하다. 세민은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이세적, 정명진 등 수십만 명을 이끌고 요택에 이르다. 진흙길 200여리,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었다. 도위 마문거가 말에 채찍질하며 달려가 공격했지만 이미 싸움을 벌였던 행군총관 장군차는 대패했다. 이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고 세민은 몸소 수백 기를 이끌고 세적과 합쳐 백암성의 서남쪽을 공격했다. 성주인 손대음은 속여서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게 하고 실은 틈을 엿보아 반격코자 했다. 세민은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으로부터 병사들을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북부의 욕살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진은 관병 및 말갈병 15만을 이끌고 똑바로 전진하여 안시에 연결되는 진지를 쌓고, 높은 산의 험악한 곳에 의거하여 진지를 쌓고 성의 곡식을 식량으로 삼고, 병력을 종횡무진으로 풀어 놓아 당나라 군마를 약탈했다. 당나라 군은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 돌아가려고 해도 진흙길이 가로 막았으니 가만히 앉아서 패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연수는 군대를 이끌고 똑바로 앞으로 나아가서 안시성에서 약 40리 떨어진 곳에 나아가더니, 사람을 보내 대로 고정의에게 물었으니 그는 나이가 많아서 모든 일에 익숙했다. 정의 노인은 대답하기를,
[이세민은 안으로 군웅들을 제거하고 집을 바꿔 나라를 이루었으니 역시 범상하진 않다. 지금 모든 당나라의 병력이 떨치어 나왔으니 업신여길 수가 없다. 우리들로서 바람직한 것은 군대를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 여러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며, 날랜 병사들을 보내 그 식량 보급의 길을 끊는 것 보다 좋은 계책은 없다. 식량이 이미 끊겨 싸우고저 하나 싸워 주지도 않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결국 이기기 마련이라]
고 하였다. 고연수는 그 계략에 좇아 적이 오면 막고, 적이 도망가면 곧 추격을 멈추고, 또 날랜 병사들을 파견하여 식량 길을 끊고, 불태우거나 빼앗게 하자 이세민은 백 가지 계략으로 적군을 유혹하여 뇌물도 썼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는 속으로는 거슬렀다. 수시로 습격을 감행하여 마구 무너뜨리니 적군의 사상자는 쌓여만 갔다. 고연수 등은 말갈과 병력을 합쳐 진지를 펴고 지구전을 벌이다가 어느날 저녁 표변하여 작전을 개시하여 급히 습격하여 번개처럼 치니, 이세민은 거의 포위될 뻔하게 되자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이세민은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재물과 보화를 보내면서 연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귀국의 힘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그 죄를 물으러온 것이다. 그대의 나라에 들어와서 싸움을 하게 됨에 말 먹이와 식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서 얼마간 노략질을 몇 곳에서 했었을 뿐이니, 그대의 나라가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리면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연수는 말했다.
[좋다. 그대의 군사가 30리를 후퇴하면 곧 나는 우리 황제를 알현코자 한다. 그렇지만 막리지는 국가의 기둥이다. 군법을 스스로 갖고 있으니 많은 말도 필요가 없다. 그대의 임금 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동생의 아내를 음란하게도 받아들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죄를 물을 만하다. 이 뜻을 이세민에게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시관을 보내 더욱 더 방비를 굳혔다. 산에 의지하여 진지를 굳히고 허를 틈타 기습하니, 세민은 백 가지 계략을 다 써도 어쩔 수가 없어 요동 출병의 불리를 통한히 여길 뿐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유공권의 소설에서,
[육군은 고구려의 조롱거리가 되고 거의 떨쳐 일어날 기미도 보이질 않았다. 척후병이 영공의 군기는 흑색 깃발 (고구려 군기 색깔)로 에워싸였다고 보고 하니 세민은 크게 놀랐다. 종내 저 혼자 탈출했다 해도 위험은 이와 같았다.]
라고 하였으니, <신구당서>와 사마공의 <통감>이 이를 적지 않음은 어찌 나라를 위해 치욕스러운 일을 숨기려 함에서가 아닐까보냐? 이세적은 세민에게 말한다.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습니다. 우리 군대의 양곡은 벌써 요동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을 습격하는데 만일 고구려가 수송로를 끊으면 군세는 궁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안시를 공격함만 같지 않을 것이니 안시가 함락되면 곧 북치고 행진하여 건안을 취할 뿐이옵니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이 덮어오는 것을 멀리 바라보며 성 위에 올라 북치고 떠들며 침을 뱉으며 세민을 조롱했다. 그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무리에게 떠들어 댔다. 세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성을 함락시키는 날 성중의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하겠다고 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때에 장량은 사비성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채 이르지 못하였고, 이리 저리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장량은 막 병력을 이동시켜 오골성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관병 때문에 패하고 말았다. 이도종도 역시 험악한 곳에 떨어져 떨치지 못하니 당군의 여러 장수들은 의논한 끝에 갈라졌다. 세적만이 홀로 생각하기를, [고구려는 나라를 기울여 안시를 구하려 하니 안시를 버리고 곧 바로 평양을 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장손무기는 생각하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의 정벌과는 달라 요행을 바라고 행동한다는 건 안될 일이다. 지금 건안 신성의 적은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의 군대도 역시 수십만이다. 국내성의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러 길을 차단할 것 같다. 그리 된다면 저들의 세력은 날로 성해지고 포위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적을 우롱하다가는 후회막급이 될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고 그런 후에 천천히 진격하느니만 못하다. 이것이 만전책이다]라고 했다. 이 문제가 채 결론도 나기 전에 안시 성주 양만춘은 이를 듣고 밤 깊음을 틈타 수백의 정예를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니 적진은 스스로 서로 밟고 찔러 살상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세민은 이도종을 시켜 흙산을 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였다. 관병 (고구려 병사)은 성의 틈 사이로 출격하여 마침내 토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키니 군세는 더욱 더 떨치더라. 당군의 여러 진은 거의 싸울 힘을 잃으니, 부복애는 패전으로 목잘려 죽고 도종 이하 모두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백 기를 이끌고 난파를 순시하며 상세하게 정세를 듣더니 사람을 보내 총공격하여 사방을 칠 것을 명하였다. 연수 등도 말갈병과 합쳐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 위에 올라가 싸움을 격려하니, 사기는 더욱 더 떨쳐져서 일당백의 용맹이 없는 자가 없었다. 세민은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서 감연히 나서서 싸우려 했다. 양만춘은 이에 한마디 소리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버렸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추격했다. 추정국은 적봉에서부터 하간현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다. 때의 마길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을 나누어서 일군은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일군은 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은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밖에서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 있었다. 문자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왕개보가 말한다.
[연개소문은 비상한 사람이다. 과연 막리지 있으니 고구려는 백제와 함께 존재하더니, 막리지가 없으매 백제는 고구려가 함께 망했다. 막리지는 역시 인걸이로다]
막리지 임종에 남생, 남건을 돌아보며,
[너희들 형제는 서로 사랑하기를 물처럼 하렷다. 화살은 합치면 강하고 이를 나누면 곧 부러진다. 반드시 이제 이 죽으려는 사람의 말을 잊지 말고 천하 이웃나라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할지니라]고 하였다. 때는 곧 개화 16년 10월 7일이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다.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다. 지금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은 것이다. 당의 번한은 고려성 회고의 시 한수를 세상에 전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외진 땅 성문은 열렸는데
구름 끝 성벽은 길기도 해라.
강변이 어둡자 촛불 별빛 반짝이네.
북소리 맞춰 구름이 보이니
새 꽃이 흙 털며 새단장하고
언제나처럼 아침의 거리는 밝아오건만
다시 들을 길 없는 관현의 소리여
가시밭 누런 먼지 속
옛 길 옆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먼지 따위에 묻힌 비취여
황량한 언덕엔 소와 양만 오르지.
어쩔거나 엣날의 일을
가을소리 고요하니 기러기만 날으네.
내 비록 운율은 따를 바 없지만 뒤를 이어보련다.
요서엔 아직도 옛 성터가 있다네.
생각컨대 큰 나라에 왕조는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 싸움도 많고
요하는 도도히 하늘빛으로 흘러라.
바람숲은 빈 골짜기에 흔들리는데
학은 높은 가지에서 울어 단장하네.
군기와 장수는 하룻밤에 변해도
장사꾼 방울소리 요란키도 해라.
연도 양도 본디는 우리 땅이었나니
고구려 군사 진치고 말먹이던 곳이었지.
영웅은 나지 않고 세상은 흘러가니
다시는 양떼처럼 적을 몰지 못하고
이제와서 끝없이 엣일을 슬퍼하며
핵랑의 만리붕정에 이별노래 부르네.
<조대기>에 말한다.
[태조 융무 3년 요서에 10성을 쌓고 이로써 한의 10성에 대비케 하였다.
첫째, 안시는 개평의 동북쪽 70리에
둘째, 석성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세째,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에
네째, 건흥은 난하의 서쪽에
다섯째, 요동은 창려의 남쪽에
여섯째,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에
일곱째,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여덟째,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에
아홉째,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열째, 요택은 황하의 북안 왼쪽에 있었다.
5년 봄 정월엔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았다.
<삼한비기>에서 말한다.
[옛 책에선 <요서에 창요현이 있다>고 했는데 당나라 때 요주라고 개명했다. 남쪽에 갈석산이 있고 그 밑은 곧 백암성이다. 역시 당나라 때의 소위 암주가 그것이다. 건안성은 당산의 경내에 있다. 그 서남을 개평이라 한다. 일명 개평이요, 당나라 때에는 개주라 한 곳이 이것이다.]
<자치통감>에 말하기를 [현도군은 유성과 노룡 사이에 있다. <한서>의 마수산은 유성의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 때 토성을 쌓다]라고 했다.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옯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 성제가 북부여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을 초무하고 왕사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에 봉작을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 3월이다.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찌기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 3월에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 번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 13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 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 등이 듣기로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드러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조가 [좋다]고 승락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골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만에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여, 오간 등 열 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컨대 이 하남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으로 정할 만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더 다른 곳을 찾지 마시옵소서]
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마침내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고 칭하니 백제라는 이름은 백 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의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사로의 시왕은 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뱄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에 와 닿았다. 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거세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으로 하고, 또한 사로라고도 하였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다. 어떤 자는 조공하고 어떤 자는 반한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때부터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구주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가 또 갈려서 삼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란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 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 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 가라는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 가라는 백제에 속함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영락 10년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
아유타는 <삼국유사>에서 서역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지금 여러 옛날기록을 고찰해 보면 곧 아유타는 지금의 섬라를 말함인 듯하다. 그렇다면 아유타의 사람들은 대식 사람들 때문에 쫓기어 이곳에 이르러 살았던 것인지?
이명의 <유기>는 말한다. [옛날 백제의 장사꾼이 있었는데 바다를 건너 아유타에 가서 많은 재보를 벌어 돌아 왔다. 그곳 사람도 백제 사람을 따라와 내왕했던 바, 날로 교제하여 친밀해졌다. 그렇지만 그 풍속은 겁이 많고 싸움엔 익숙치 않아 많은 사람에게 통제되고 제약을 받게 되었다.]
또 말하기를,
[평양에 을밀대가 있는 바, 세상에선 말하기를 을밀선인이 세운 것이라 한다. 을밀은 안장제때 뽑히어 조의가 되고 나라에 공이 있었는데 본래 을소의 후손이다. 집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배우며 삼신을 노래하고 무리를 모아 수련하니, 그 옳음과 용기에 공으로 봉해졌다. 일세의 조의로서 그의 무리는 3,000이었으니 가는 곳마다 구름처럼 모여서 다물흥방의 노래를 제창했다. 이에 의하여 그 몸을 던져서 의를 다한다고 풍속을 고취한 사람이었다]고 하였으니, 그 노래에서 말한다.
지나간 것은 법이 되고,
뒤에 오는 것은 위가 되네.
법이라는 것은 그래서 날 것도 사라질 것도 없으며,
위라는 것은 그래서 귀할 것도 천한 것도 없지.
사람 가운데 하늘도 땅도 하나일 뿐이고,
마음은 신과 더불어 근본에 닿나니.
하나이기 때문에 빈 것도 찬 것도 같은 것이며,
근본에 닿기 때문에 신이라 함이나 사물이라 함이 둘이 아닐 뿐,
참은 온갖 착함의 극치이고,
신은 참하나를 주관한다네.
극치이기 때문에 세 가지 참은 하나로 돌아오고,
참하나이기 때문에 일신은 곧 셋이라.
하늘 위 하늘 아래 다만 내가 스스로 있음이여,
다물은 나라를 일으킴이라.
스스로 있기 때문에 티 없이 일을 하고,
나라를 일으켰기 때문에 말 없이 가르침을 행하였지.
참천명의 큼이여, 성품을 낳아 광명에 통하네.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서면 충성함이라.
광명은 그래서 모든 선을 행하지 않음이 없고,
효와 충은 그래서 모든 악은 일체 짓지 않나니.
백성의 옳은 바는 나라르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나라 없이 나라는 건 어떻게 생겼을 것인가.
나라가 소중하기 때문에 백성은 사물이 있어 복을 누리고,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엔 혼이 있어 덕을 누린다네.
혼의, 생을 낳고 각을 낳고 영을 낳음이여,
일신의 그윽한 거처는 천궁이 되네.
삼혼은 그래서 지혜와 생을 함께 닦을 수 있고,
일신은 그래서 모습과 혼을 함께 이루는 것이라.
우리들 자손 착하게 나라를 이룸이여,
태백의 가르침은 우리의 스승일세.
우리들 자손들은 그래서 더 평등하고,
우리들의 스승은 그래서 가르침마다 새로워라.
을밀선인은 일찌기 대에 살면서 하늘에 제사 올리고 수련함을 임무로 삼았다. 대개 선인의 수련법은 참전으로 계를 삼아 스스로를 굳세게 하고 영광되게 한다. 나를 비워 사물이 있게 하고 몸을 버려 옳음을 지켜서 나라 사람들의 사표가 됨이니, 천추에 우러러 감흥을 일으킬 만한 것이다. 역시 사람들의 존경하는 상징이 되었으니, 후세의 사람들은 그대를 칭하여 을밀이라고 했으며, 바로 금수강산의 빼어난 곳의 하나이다.
대진국 본기 제7
<조대기>에서 말한다. 개화 27년 9월 21일 평양성 함락 때 진국장군 대중상은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을 듣고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겠다고 원하는 자 8000인이 재빨리 모여들어, 동쪽으로 동모산에 이르러 웅거했다. 성벽을 굳게 하여 스스로 보존하고 나라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기원을 중광이라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격문을 전하니 원근의 뭇 성들은 귀속해 오는 곳이 많았다. 다만 옛땅을 회복함을 자기의 임무로 삼다가 중광 32년 5월 대중상은 붕어하였다. 묘호를 세조라 하고 시호를 진국열황제라 하다.
태자 조영은 부사를 따라 영주 계성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당도하여 제위에 오르다.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군 10만을 모집하여 위성은 크게 떨치었다. 곧 계책을 세우고 제도를 세워 당나라에 대항하여 적에 복수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말갈의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의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병력을 연합하여 크게 당나라 장군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격파했다. 뭇 장수들을 나누어 군현을 두고 지키며 유망민을 초무하고 정착을 널리 보호하고 크게 백성의 신망을 얻어 모든 기강을 새롭게 했다. 국호를 정하여 대진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이라 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니, 땅은 6,000리가 개척되었다. 천통 21년 봄 대안전에서 돌아가시니 묘호를 태조라 하고 시호를 성무고황제라 하다. 태자 무예가 즉위하다. 개원하여 인안이라 하고 서쪽으로 거란과 경계를 정하니 오주목의 동쪽 10리에서 황수를 굽어 본다. 이 해 개마, 구다, 흑수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가 될 것을 청하며 공물을 바쳤다. 또 대장 장문휴를 보내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와 동래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다. 당나라 왕 융기가 노하여 병사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듬해 수비장수 연충린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의 대산의 남쪽에서 크게 당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다. 당나라는 비밀히 신라와 약속하여 동남의 여러 군과 읍을 급습하여 천정군에 이르다. 제는 조서를 내려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케 하다. 이때 큰 눈으로 신라와 당의 군사는 동사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하서의 이하에 이르러 국계를 정하니, 지금 강릉의 북이하가 그것이다. 해주 암연현은 동쪽으로 신라와 접했는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이다. 이로부터 신라는 해마다 입공하고 임진강 이북의 제성은 모조리 발해에 속하였다. 다시 이듬해 당나라는 신라의 병사와 연합하여 침입하였으나 결국은 아무 공도 없이 물러났다.
인안 16년 구다, 개마, 흑수의 여러 나라들이 항복해 오니, 이들을 성읍으로 삼았다. 이듬해 송막 12성을 쌓고 또 요서 6성을 쌓다.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니 원폭이 9,000리였다. 성대한 나라였다. 이 해 당나라, 신라 및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이라고 칭송했다. 이에 발해 사람 셋이면 한마리의 호랑이를 당한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때의 군민은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며 의를 즐겼다. 오곡은 풍성하고 사해는 안락했다. 대진육덕의 노래라는 것이 있어 이러한 대진국을 찬미했다. 다음해 3월에 안민현에 감로가 내리다. 예관은 계장을 올려 하의할 것을 청하여 이에 따랐다. 이달 16일 삼신일체의 상제를 서압록하의 강변에서 제사하다. 서압록하는 고리의 옛 나라의 땅이다. 19년 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광종이라 하고 시호는 무황제라 했다. 태자 흠무가 즉위 했다. 개원하여 대흥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기다. 이듬해엔 태학을 세우고 천경신고를 가르치며 한단고사를 강하고, 또 문사에 명하여 국사 125권을 편찬케 하니, 문치는 예악을 일으키고 인간을 홍익하는 교화는 이로써 만방에 미치게 되었다.
대흥 45년 치청의 절도사 이정기는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제는 장수를 보내 싸움을 도웁게 하더라.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이요, 평로에서 태어났다. 22년, 장수들은 군사 이희일을 쫓고 정기를 즉위시켰으나 죽었고, 아들인 납이 아버지의 백성들을 통솔하였다. 56년 납도 죽고 아들 사고가 그 자리를 이었다. 사고가 죽었을 때 그의 가인들은 상을 발하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사도를 맞아 그를 모셨다.
대흥 57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세종 시호를 광성문황제라 하다. 국인은 그의 족제 원의를 즉위시켰으나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갑술년 국인은 이를 폐하고 선제의 손자 화흥을 맞아 즉위시키고 개원하여 중흥이라 하였다. 이듬해에 붕어하시니 묘호는 인종 시호는 성황제라 하였다. 황숙인 숭린이 즉위하니 이를 목종 강황제라 한다. 의종 정황제 원유, 강종 희황제 언의, 철종 간황제 명충을 지나 성종 선황제 인수에 이르다. 타고난 모습이 영명하시고 덕은 신과 같고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곧 태조의 풍채가 있었다. 남쪽으론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 철원, 사불, 암연 등의 7주를 두고, 북은 염해, 나산, 갈사, 조나, 석혁 및 남북 우루를 공략하여 제부를 두고, 장백의 동쪽을 안변이라 하고 압록강의 남쪽을 안원이라 하고 모란의 동쪽을 철리라 하고 흑수의 강변을 회원, 난하의 동쪽을 장령, 장령의 동쪽을 동평이라 하며 우루는 북쪽에 있다. 대개마으 ㅣ남북에 자리잡고 땅의 넓이 9,000리로 영토는 크게 열리고 문치는 널리 가득 펴졌다. 위론 국도로부터 밑으론 주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식있고 구서오계를 아침저녁으로 읽고 익혔다. 춘추에 공적을 생각하여 뭇사람이 의논하여 인재를 추천하며 공물을 바쳤다. 사람들은 이미 힘을 길렀고 집집마다 모조리 나라에 쓰임을 기다리니, 이로부터 국세는 부강하여 나라의 안팎이 모두 편안하게 즐거웠으니 절로 도둑질이나 모사의 폐단이 없어졌다. 당나라, 왜, 신라, 거란할 것 없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천하만방은 모두 이로써 성인흥치의 해동성국이라고 흠송하였다.
오대가 바뀌었을 때 야율은 빈번하게 몇차례나 싸움을 일으켜 왔으나 종내 굴복시키지는 못했고 뒤에 장종 화황제 이진, 순종 안황제 건황, 명종 경황제 현석을 지나 애제 인선에 이르러 거란에게 멸망되니 세조로부터 15세를 전하여 259년을 누렸다.
목종은 개원하여 정력이라고 했고 의종은 영덕, 강종은 주작, 철종은 태시, 성종은 건흥이라 하고, 장종은 함화, 순종은 대정, 명종은 천복, 애제는 청태라고 개원하였다.
대진국의 남경인 남해부는 본래 남옥저의 옛땅이다. 지금의 해성현이 그것이다. 서경인 압록부는 본래 고리국이요,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였다. 고로 옛 책에서의 안민현은 동쪽에 있으며, 그 서는 임황현이다. 임황은 뒤에 요나라의 상경 임황부가 된다. 곧 옛날의 서안평이다.
정주는 의려국이 도읍으로 한 땅이다. 선비 모용괴에게 패하여 핍박받을 것을 걱정하다가 재빨리 생각하기를 [나의 혼이 아직도 오히려 망하지 않았으니 어디간들 이루지 못할 것인가?]라고 했다. 은밀하게 아들 부(의)라에게 맡겨서 백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너게 하였더니 따르는 자 수천이라,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자칭 삼신의 부명에 응한다고 하여 군신으로 하여금 하례의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혹은 말한다. [의려왕은 선비 때문에 패하여 도망쳐서 바다에 든 후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은 도망쳐서 북옥저를 보전하고 이듬해 아들 의라가 즉위하니 이때부터 모용괴가 또다시 국인을 침략하였다. 이에 의라는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해서 왕이 되다]라고.
일본은 옛날에 이국에 있었나니 역시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동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갔는데 고구려와 이미 친교를 맺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 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니 본래 남옥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는 모두가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의 유종으로서 산월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체는 변진 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와하는 고구려의 속노들이다. 때에 왜인들은 갈리어서 산도에 근거하여 살며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이 제일 크니 본래 구야 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가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 위, 만, 월의 무리들 모두 통상했다. 처음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대무국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쯤 된다. 또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리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여기는 사방 300여 리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곧 반여언의 옛 읍이다. <신당서>에서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붙어 있던 자로 성은 대씨이다.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루려의 여중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을 확보하여 오루하에 근거하였다. 중상이 죽고 아들 조영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도망쳐갔다. 곧 비우의 무리를 합쳐 거칠고 멀다는 것을 믿고 곧 건국하여 스스로 진국왕이라 이름하고 부여, 옥저, 변한, 해북의 뭇나라를 모조리 얻었다]고 하였다.
사씨는 말하기를 [걸걸중상은 패망의 나머지 무리를 데리고 험한 곳을 달려가 스스로 보전하였다]라고 한다. 태왕이 빈을 떠난 것과 같이 고왕 조영은 창업의 뜻을 갖고 가시밭을 갈아 다시 나라의 기초를 이룸은 구천의 월나라를 세움과 같다. 대저 폭원은 이미 설만하니, 곧 문덕을 가지고 이를 닦고 제도를 재정하여 관작을 세우고 군현을 늘어 놓아 대국에 저항하였다. 나라의 영역은 5,000리에 이르고 역사는 300년에 이르다. 당시 사방에 대진국을 넘볼 자가 없었고 역시 크게 성했던 나라라 할 만하다.
고려 현종 원문대왕의 20년 거란의 동경장군 대연림은 태조 고황제의 칠세손이다. 유수부마 소효원과 남양 공주를 사로잡고, 호부사 한소훈 등을 죽이고 즉위하여 요를 세운다고 하고 천경이라 개원했다. 고길덕을 파견하여 와서 건국을 알리고 겸하여 원조를 청했다.
요동의 유수 수보는 정치를 함에 혹독하였다. 고려의 예종 문효대왕의 11년 정월, 동경의 비장이요, 발해 사람인 고영창은 수십 인과 술김에 용기를 내어 칼을 들고 울타리 담장을 넘어 부위에 들어 갔다. 등청해서 유수가 있는 곳을 묻고 거짓으로 외부의 군대가 쳐들어 왔다고 하며 대비를 해야겠다고 청하였다. 수보는 먼저 나오다가 무리에게 죽임을 당하고, 가 유수 대공정과 부 유수 고청신은 싸웠으나 이길 수가 없자 서쪽 문을 뚫고 나와서 요나라로 도망했다. 영창은 스스로 대발해국 황제라 칭하고 융기라고 개원하니 요동 50여 주를 거느렸다.
<송사>에 가로대,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자들인데 요나라에 망하니 그 족장은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그 서쪽 변두리 땅을 확보하고 나라를 세우고 개원하여 스스로 정안국이라 했다.
개보 3년, 왕 열만화는 입공하는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태종 때 그 왕 오현명은 다시 여진을 통해 표를 올렸다. 거기서 요약하여 말하기를 [신은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 터로 발해의 유민으로서 이 한쪽 구석을 보전하는 바]라고 하였다. 태종은 답장에서 요약하여 이르기를 [경은 마한의 땅을 모두 남김 없이 보전하고 경파의 표를 올리니 운운]이라고 했다. 단공으로부터 순화 사이에 다시 여진을 통해 표를 올리더니 그뒤에는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대진국 애제의 청태 26년 봄 정월 야율배는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자 애제가 성 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대진국은 망했다.
2월. 병오 요의 태조가 동단국을 세우고 장자 배를 인황왕을 삼다. 왕은 감로라고 개원하고 홀한성을 천복성이라 개칭하였다. 천자의 관복을 준용하고 12류의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으니 바로 대진국의 옛날 제도이다. 숙부 질자를 좌대상을 삼고, 대진의 노상을 우대상으로 삼으며, 대진국의 사도 대소현을 좌차상으로 삼고, 야율우지를 우차상으로 삼다. 나라 안의 사형 이하의 죄인을 사면하고 해마다 표 10만 단, 말 1000필을 공물로 할 것을 약속케 했다.
감로 27년 겨울 경진에 요는 동경 중대성을 쳐서 동단국도 없앴다.
고려국 본기 제8
태조 신성태왕의 천수 2년 서울을 송악의 남쪽으로 정하다. 25년 어제훈요를 발표했다. 그 대략을 보면 이렇다.
[생각컨대 우리 동방이 옛부터 당풍을 사모하여 문물 예악이 빠짐없이 당나라의 제도를 따랐다. 방을 달리 하고 땅을 달리하는 사람은 성품 또한 각각 다르기 마련이고 적어도 반드시 같을 순 없는 것 아닐까?]
태봉국 왕 궁예는 그 선조가 평양 사람이라 본래 보덕왕 안승의 먼 후예이다. 그의 아비는 강직하여 술가의 말에 따라 어머니의 성을 따서 궁씨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의 수입성 사람 모잠 대형은 남은 백성들을 모아 안승을 받들어 후고구려 왕으로 삼고 원조를 신라에 청하였다. 신라 왕은 이를 나라의 서쪽 금마저에 두었다가 뒤에 개명하여 보덕왕이라 했다. 신문왕은 즉위하더니 보덕왕을 거두어 소판을 삼고 그의 족자 대문을 금마저에 살게 하였는데 모반하여 왕을 칭했기 때문에 주살되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에 근거하다가 다시 반역을 꾀하였으므로 신라의 평정을 받게 되었고 그곳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겼다.
대진국 명종 경황제의 천복 9년 5월 5일, 궁예가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 옥상에는 흰빛이 비추이고 긴 무지개의 끝은 하늘에 닿은 듯 보였다. 신라의 일관이 이를 보고 머지 않아 나라에 이롭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소식이 들리자 왕은 이를 미워하여 사람을 시켜 그 집을 파괴하고 그를 죽이려 했다. 그 어미는 진귀한 보물로 뇌물을 쓴 후에 애를 끌어안고 도망가 숨어 살며 고생하며 양육했다. 나이 10세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선종이라 했다. 장년이 되자 방일하여 원래부터의 계율에 따르지 않으며 크고 작은 일에 담이 컸다. 어느 때 바루를 들고 재를 모시러 가는데 까치가 부적 하나를 물어서 바루 속에 떨어뜨렸다. 이를 펴본즉 왕이라는 글자가 있는지라, 이를 숨기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매우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앞서 안승 때부터 왕을 모시는 일에 고생이 많았거늘, 신라는 이에 보답하지는 않고 도리어 그 땅과 백성들을 뺏고 다만 왕의 누이 하나를 아내로 삼게 하였을 뿐이었다. 고구려의 유민들은 이 때문에 대를 물려서 원망을 갖고 불만을 품고 있다가 변을 일으켰는데 빈번이 패했었다. 궁예 때에 이르러 나라가 어지럽고 쇠약함을 보고 이를 틈타 무리를 모아 조상의 옛 땅을 회복하고 쌓여왔던 원한을 씻으려 했다. 곧 궁예는 죽주의 도적이었던 기훤에게 투항했는데, 훤이 업신여겨 이를 예로써 대하지 않았다. 궁예는 울분을 터뜨리고 스스로 편치 못하더니, 몰래 훤의 휘하의 원회, 신훤 등과 결탁하여 친구가 되어 북원의 적, 양길에게 투항했다. 양길은 이들을 잘 대우하여 이들에게 일을 맡겼다. 병력 100기를 나눠 주고 동쪽을 공략하게 하니 주와 군이 모두 항복했다. 또 아슬나를 공략하여 무리가 600이 되자 스스로 장군이라 부르게 했다. 힘들고 쉬운 일들을 모두 사졸과 함께 하고 뺏은 것을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함께 나누니, 무리들이 마음으로부터 두려워하며 따르게 되었다.
천복 27년 태수 왕륭은 송악군을 바치고 궁예에게 귀순하며 그에게 설명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 숙신, 변한의 땅의 왕노릇 하고자 한다면 먼저 송악을 점령하고 나의 장자 건으로 하여금 그 주인이 되게 하는 것보다 상책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그 말에 따랐다. 때에 이훤은 병을 무진주에서 일으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근원을 상고해 본 즉 마한이 먼저 건국하고, 혁거세가 뒤에 일어나고 변진이 그 뒤를 따랐다. 백제가 개국하여 600년을 전했는데 신라가 당나라와 합쳐 공격함으로써 멸망시켰다. 이제 나는 덕이 없지만 의자왕의 분을 풀려고 한다]
고 했다. 마침내 완산에 도읍하고 왕을 칭하며 국호를 후백제라 하였다.
궁예도 역시 그 이듬해 왕이라고 칭하면서 말하기를,
[신라는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했다. 이는 치욕스런 일이다. 내 반드시 고구려를 위하여 그 원수를 갚을 터]
라고 했다.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하고 건원하여 무태라 하였다. 남쪽으로 나아가 흥주사에 이르렀을 때 벽에 신라 전 왕의 황상이 걸려 있음을 보고 칼을 뽑아 이를 쳤다. 궁예는 마음 속으로 신라를 합치고자 그 서울을 멸망시키겠다고 외치며 신라로부터 귀순해 오는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때부터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하고 머리에 금책을 썼다. 또 경 20권을 저술하고는 때때로 정좌하여 강설하였는데 승 석총은 말하기를 [모두 사설괴담으로 이를 들어 논할 가치도 없다]하니 궁예가 듣고는 철퇴로 때려서 죽였다.
천수 원년 무인 6월,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승겸, 복지겸 등의 제장에게 추대되어 새벽에 곡식더미 위에 앉아 군신의 예를 행하고, 사람들을 시켜 뛰어 다니면서 [왕건이 마침내 의기를 들었다]하고 외치게 하니, 달려와 모이는 무리가 많았다. 먼저 궁문에 이르니 북치며 기다리는 자 역시 만여 명이라 마침내 포정전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정하여 천수라 했다. 여기에서 태봉왕 궁예는 변을 듣고 평복을 한 채 문을 나서 도망하다가, 얼마 못가서 부양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거란의 성종은 장군 소손녕을 보내 침략하니 봉산을 격파하여 우리의 선봉을 몰아부쳤다. 성종 문의왕은 군신을 모아 의논하니 어떤 이는 항복을, 어떤 이는 땅을 잘라 거란에게 주자고 하는데, 중군의 서희만이 홀로 말한다.
[지금 적군의 기세가 크다는 것만을 보고 즉시 서경 이북을 적에게 준다는 것은 계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삼각산 이북도 역시 고구려의 옛 땅입니다. 저들이 끝없는 욕심으로 이를 가지려 한다면 막지도 못할 것이라 하여 모조리 줄 것입니까? 항차 지금 땅을 잘라서 준다면 실로 만고의 치욕입니다. 원컨대 어가를 돌려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한 차례의 싸움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 후에 이런 의논을 한다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서희는 국서를 가지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 상견의 예를 청하니 손녕이 말하기를,
[나는 대조의 귀인이다. 마땅히 마당에서 절을 하라]
하니 서희는,
[양국의 대신이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손녕이 또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갖고 있는 바라. 그런데 그대들이 이를 침략하더니 우리와 땅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넘어 송나라를 섬기고 있다. 때문에 오늘의 전란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쪼개어 이를 바치고 조공을 올린다면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하니 서희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를 선조로 한다. 때문에 고려라고 이름하고 평양에 도읍했다. 만약 국경을 논한다면 곧 귀국의 동경은 모두 우리의 땅이다. 어찌 이를 침식이라 할 수 있으랴. 만일 여진을 쫓아 우리 옛 땅을 되돌려 주면 곧 감히 교류하지 않을손가]
하니 말솜씨가 강개한지라 손녕은 강변함이 쓸모 없음을 알고, 병을 파할 것을 결정하고 연회를 베풀고 위로한 뒤 서희를 송별했다.
도원수 윤관은 여진을 공격하고 격파하여 비를 선춘령에 세워 경계를 삼았다. 아들 언이를 보내 표를 올리고 축하하게 하였다. 평장사 최홍사, 김경숙, 참지정사 임의, 추밀원사 이위 등은 선정전에 들어가 이에 대하여 극론했다.
[윤관과 오연농과 임언 등은 함부로 명분 없는 군대를 일으켜 군을 파하고 나라를 해롭게 한 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간관 김연과 이재 등 역시 계속하여 이를 탄핵하기를,
[임금이 토지를 취하는 것은 본래 백성을 키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을 다투며 사람을 죽였는데, 그 땅을 돌려 주고 백성을 쉬게 함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과 말썽이 생길 것이옵니다]
라고 했다. 제가 가로대 [무슨 말썽인가?]하시니 김연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처음 9성을 쌓았습니다. 거란에 표칭을 고함에, <여진의 궁한리는 곧 우리의 옛 땅이다. 그 백성도 역시 우리의 편맹이다. 근래 변두리를 노략질함이 끊이질 않기 때문에 수복하여 그 성을 쌓는다>고 하였습니다. 표사가 그렇다면 궁한리의 추장은 아마도 거란의 관직을 받은 자일 것이니 거란은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망언을 하며 우리를 책양할 것입니다. 만약 동쪽으로 여진에 대비하고 북쪽으로 거란에 대비한다면 신은 9성이 삼한의 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라고 했다. 간의대부 김인존도 역시 옛 땅을 돌려줄 것을 청했다.
제는 선유하여 가로대 [양원수는 여진을 정벌하여 선제의 유지를 받은 바라. 짐이 몸소 말하는 것을 행하여 몸은 활과 창을 무릅쓰고 깊숙이 적진에 들어가서 포로로 잡고 죽인 자가 이루 다 셀 수 없으며 100리의 땅을 열고 9주의 성을 쌓아 국가의 치욕을 갚았다면 그 공은 크다고 할 만한 일이라. 그렇지만 여진은 인면수심으로 변덕이 몹시 심하다. 저 남은 무리들이 있지만 의지할 곳 없다. 고로 추장이 항복해 오며 평화를 청해오매, 군신이 모두 좋다고 함으로 짐도 역시 차마 어쩌지 못하겠다. 유사가 법에 따라서 여러 차례 탄핵을 논하는 바 있어서 갑자기 그 직을 빼앗으려 한다. 짐은 종내 이를 허물로 여기진 않는다. 바라건대 속히 다시 복직하게 되기를 비노라]고 하였다.
예종 문효대왕 4년 가을 7월, 9성에서 철수하여 여진의 옛 땅을 돌려줬다. 이보다 앞서 여진은 요불과 사현 등을 보내 상주하여 가로대,
[옛날 우리 태사 영가는 말하기를 <우리의 조종은 대방에서 나와 자손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귀부하여야 옳을 것입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갑오 연간에 이르러 궁한리의 사람들이 스스로 안정하려 들지 않았는데 이는 본래가 태사의 지휘 밑에 있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국조가 죄를 앞세워 이들을 토벌하시더니 다시 수교를 허락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이지 않았는데, 작년엔 크게 일어나서 우리의 모아를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떨게 하고 말려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에 태사는 우리를 보내어 땅을 되돌려 줄 것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재상, 추밀원, 대, 성, 지제고, 시신, 병마판관 및 문무의 3품 이상을 만나 다시 9성을 들려주는 일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가 [옳다]고 했다. 옛 사서에선 말한다.
[두장군은 비를 선춘령에 세우고 이곳에 이르러 고려의 국경이라 한다고 했다. 선추령은 두만강으로부터 700리 밖 송화강의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한다.]
광주목 윤언이는 자해표에서 말한다. [중군 김부식이 상주한 것을 보건대, <언이가 정지상과 결탁하여 결사당을 만들어서 크고 작은 일들을 상세히 의논하더니 임자년에 서경으로 행차하셨을 때에는 건원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국학생들을 유혹하여 앞의 일을 상주하도록 하였으니, 대저 대금국을 격동시키려고 일을 벌리고는 틈을 탓 ㅓ제멋대로 처리해 버렸고 다른 사람들을 당파로 몰아 공모하여 법도에 맞지 않는 짓을 함은 신하된 도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은 재삼 거듭하여 읽고난 후에야 겨우 마음에 안정을 찾았습니다. 건원 칭제를 청한 근본은 임금을 높이자는 정성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태조와 광종의 고사가 있습니다. 지난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비록 신라와 발해가 황제를 칭했허도 대국은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고 작은 나라들은 의논도 끄집어낼 수 없었으니, 잘못될 바가 어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좋은 때에 오히려 쩔쩔매는 셈이니 신은 일찌기 이를 논했습니다. 죄라면 그것입니다. 지금 결사당을 만들었다거나 대금을 격노하도록 만들었다는 말 등이 매우 크지만 이는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가령 강한 적이 우리 땅에 침입해 오면 이를 막아내기에도 벅찰텐데 어찌 그 틈을 이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파를 만들었다고 하는 자는 누구이며, 누구를 가리켜 당파라고 하는 것인지요? 만약 무리가 화합하지 못한다면 싸워봤자 패하여 오히려 몸둘 곳조차 없어질텐데 어찌 멋대로 모반을 하겠습니까?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도 신은 지극히 자질이 약하나 서쪽으로 정벌의 전장에 나아가서 몸을 잊고 나라를 지켰으니 의로써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일의 이룸은 모두가 사람에게 달린 것인데 어찌 도에 맞도록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까?]
<금사>에 말하기를 [세종의 대정 15년 9월, 고려의 서경유수 조위총이 서언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자비령 이서와 압록강 이동을 가지고 내부코자 하였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있다.
<고려사>에 말하기를 [예종 11년 3월 을미에 상은 요의 내원과 포주의 두 성이 여진에게 공격을 받아 성중에 양곡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도병마록사 소억을 보내 쌀 1000석을 보냈으나, 내원의 통군이 이를 사절하고 받지 않았다. 8월 경진에 금나라 장수 철갈이 요나라의 내원, 포주의 두 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하게 되었는데, 통군 야율령은 무리를 데리고 도망치려 했다. 상은 추밀원 지주사 한교여를 파견하여 초유하니 야율령은 왕의 어지가 없다 하여 사양했다. 교여는 달려와 이를 주상했다. <추밀원으로 하여금 공문을 갖춰 이를 보내고자 한다>고 하였다. 재신과 간관은 말하기를 <저가 왕의 어지를 요구하지만 그 뜻을 알길 어렵다. 고로 이를 말리도록 요청한다>고 하니, 상은 곧 사신을 보내 금나라에 가서 청하기를 <포주를 본래 우리의 옛 땅이다. 바라건대 요나라를 이 때문에 만나 뵙고자 한다>하니, 금나라 왕이 사자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그 땅 내원성을 직접 취하라>]고 하였다.
후암 이존비는 고려 경효왕 때의 인물이다. 한때 서연에 있으면서 자주부강론을 논하여 상주하였다. [우리나라는 한단조선, 북부여, 고구려 때부터 모두 부강자주해 왔다. 또 원을 세우며 칭제하는 일은 우리 태조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사대의 논은 정해져서 국시가 되고, 군신상하가 굴욕을 감수하고 스스로 혁신할 기도를 하지 않음은 하늘이 두려운 바라. 나라를 보전함은 곧 진실로 옳은 것입니다. 어찌하여 천하 후세에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 하는가? 바야흐로 왜와 원한을 사려하다가 만약 원실에 변고가 생기면 장차 무엇에 기댈 것인가? 그리고 나라를 위해 칭제하는 일이 시기를 핑계로 기피하는 바 된다면 참으로 회복할 수 없는 나라일 것이니, 자강책을 강구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주하는 바가 비록 채택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를 듣는 자, 이를 그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뒤에 또 왜에 대비한 5사를 말했는데
첫째, 호구를 잘 파악하여 국민을 병사로 삼을 것.
둘째, 군대와 농사일을 하나로 하여 수륙 공히 나라를 지킬 것.
세째, 군량을 비축하고 전함을 수조할 일.
네째, 수군을 확장하며 겸하여 육전도 익혀둘 일.
다섯째, 지리를 상세히 익히고 인화를 확보할 일.
등을 말했다. 일찌기 회당상인에게 보낸 시 한 수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사물은 아름답고 더러움을 떠나서 쓰임이 있는데
누가 있어 쓴 오얏이 씨까지 많다고 싫다 하는가?
맏아들은 천자가 되어 조정에 남지만
둘째부터는 새로 법왕의 가문을 이룬다네.
충성을 바침은 진실로 신하의 본분이고
사랑하는 이들을 떠남은 그게 바로 출세가 아니런가.
돌아보며 웃는 늙은이 상념에 빠지면
때로 꿈속에 들어 하늘 끝까지 아득해라.
상께서 일찌기 연경에 계실 때에 연나라 여인의 유혹을 받았다. 헤어질 무렵 손에 연꽃 한 개를 쥐어 주며 [상께서 돌아가시는데 이 꽃을 보시고 혹시 시들면, 이 목숨 막상 다하는 것으로 아십시오]하다. 며칠뒤 꽃을 보니 꽃이 초췌하여 죽으려 하는 지라, 상은 여인의 죽음을 염려하여 다시 연나라로 가려 하니, 존비가 청하여 연나라로 가서 여인을 찾아보았다. 연나라 여인은 울며 시를 바쳐 가로대,
서로 바친 연꽃의 향기여
처음에는 붉은 빛 싱싱하였지.
가지를 갈라 며칠이 지나니
초췌하기가 님과 같아라.
라 했다. 존비는 임금이 시를 보고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커질까 염려하여 그녀를 대신하여 시를 지어 바쳤다.
어리석은 사람아, 어리석은 사람아,
수레를 멈출 것 없다오, 수레를 멈출 것 없다오.
이몸이야 연잎에 이슬 같아
거기서 구르면 여기서 둥글다오.
임금은 이 시를 보고 크게 노하여 마침내 귀국했다. 뒤에도 임금은 연나라 여인을 원망하기를 끊이지 않는지라 존비는 상주하여 [신은 그 때에 임금님의 봉환을 서두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권사를 했사오니 임금님을 속인 죄를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화가나서 그의 관직을 뺏고 유배시켰다. 문의태자와 조신이 반복하여 유배를 풀것을 장계한 고로 임금은 다시 후회하며 깨달은 바 있어 관직을 회복시켜 소환했다. 그러나 사자가 채 미치기 전에 존비는 숨졌다. 부음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크게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였다. 태자가 상을 치룸에 말하였다. [이 존비의 정직은 방가의 사직이다. 어찌하여 요절함이 이같을까?]라고. 곧 장사를 왕명으로 왕례를 써서 행하고 마침내 형강의 변두리에, 그 산을 에워싼 4리로써 그를 봉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을 왕묘라 하고 리를 산사라 한다.
행촌 이시중 암은 일찌기 권신의 무리가 국호를 폐하려 하자, 이를 말려 청하여 행성의 의를 세웠으니, 그 소의 략에 이르기를 [하늘 아래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나라를 가지고 나라를 삼고 또 각각 그 풍속을 가지고 풍속을 삼는다. 국계를 허물지 말라. 민속 역시 섞지 말라. 하물며 우리나라는 한단 이래로 모두 천제의 아들을 칭하고, 제천을 행하는 일 있어, 절로 분봉의 제후와는 근본이 서로 같지 않다. 지금 일시로 다른 사람의 발 밑에 있기는 하나 이미 혼과 정신과 피와 살이 있어 한 근원의 조상을 갖게 되었으니, 이게 곧 신시개천으로부터 이를 삼한관경으로 하고 크고 이름난 나라를 하늘 아래 만세에 만들게 된 연고이다. 우리 천수태조께서 창업의 바탕으로 고구려가 다물국을 세우신 풍습을 계승하사 온세상을 평정하시고, 나라의 명성을 크게 떨치었었다. 때로 강한 이웃이 생겨 틈을 타 횡포를 일삼았으니, 유영의 동쪽이 아직도 우리의 것이 되지 못했다. 이것이 곧 군신이 낮 밤으로 떨치고 나서서 도모하고 자주부강의 계책을 감히 세우고 있는 이유인데, 잠청과 같은 간사한 무리가 있어 기량을 자랑하며 남몰래 꾀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작다고 하지만 국호를 어찌 폐하려 하는가? 세력이 비록 약하다 한들 위호를 어째서 깎고 낮추려 하는가? 이제 이러한 행동거지는 모두 간사한 소인배의 포도에서 나온 바요 국민이 아닌 자의 공언일 뿐, 마땅히 도당에 청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릴진저]라고 하였다.
행촌시중은 저서가 세 가지 있으니 <단군세기>는 원시국가의 체통을 밝힌 바 현저하고, <태백진훈>은 도학심법을 소개한 것이요, <농상집요>는 곧 경세실무의 학문이다. 문정공 목은선생 이색은 이에 서문을 붙여 가로대
[대저 의식에 말미암아 족하게 되는 것, 재물을 쫓아서 풍부해지는 것, 자식 후손들이 의지하여 두루 갖춰야 할 것에 이르기까지 문을 가르고 비슷한 것을 모아 자세하게 나누어 밝히고 비추지 않음이 없다 할지니 실로 이치를 살리는 좋은 책이라]라고 하였다.
행촌선생이 일찌기 천보산에 노닐 때 밤에는 태소암에 묵었던 바, 한 거사가 있어 말하기를 [소전은 많은 기이한 옛날 책을 가지고 있다. 이에 이명 범장처럼 신서를 얻으니 모두 옛 한단의 진결이라. 그 통탈박고의 학문은 탁연하다고 칭찬할 만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그 참전수계의 법은 대저 성을 엉기게 하여 지혜를 만들고, 명을 엉기어 덕을 이루고, 정을 엉기어 힘을 이루게 한다. 그래서 우주에 있으며 삼신은 오래도록 존재한다. 저 사람과 사물에 있어 삼진이 멸하지 않음은 마땅히 천하만세의 대정신과 혼연히 그 체를 같이하고 생화하여 무궁한 때문이라]고 했다. 선생은 가로대 [도는 하늘에 있을 때 삼신이요, 도는 사람에 있을 때 이를 삼진이라 한다. 그 본을 말한다면 곧 일이 된다. 유일을 도로 하고 불이를 법이라 한다. 클지로다. 한웅은 우두머리로서 서물에 나오셔서 길을 천원에 얻으시고 가르침을 태백에 세웠도다. 신시개천의 뜻을 처음으로 크게 세상에 밝혔노라. 지금 우리들 곧 글로 도를 구하고 참전하야 계를 받는다. 나의 가르침을 높이는 일도 아직 이루지 못했다. 또 듣는 일은 백 가지라 하나 만나기 어렵고, 나이 들어 백발은 어느덧 발치에 이르렀으니 한스럽기 짝이 없어라]고 했다. 선생은 시중 벼슬을 하시다가 강도의 홍행촌으로 퇴거하시고, 스스로를 홍행촌의 늙은이라고 부르시며 마침내 행촌삼서를 쓰시어 집에 간직하셨다.
헌효왕의 뒤 5년 3월 행촌 이암은 명을 받들어 참성단에서 제천하시고 백문보에게 말씀하시기를 [덕을 믿고 신을 수호함은 첫째로 신념에 달려 있고, 영재를 기르고 나라를 지킴은 공이며 발원이다. 곧 신은 사람에 의존하고 사람은 신에 의존해서 백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야만 나라는 영원토록 안강을 얻으리라. 제천의 성은 보본으로 필경 돌아가는 것이니, 사람의 세상에서 그것을 구해 봐야 갑자기 사라질 거품같은 것을]이라 했다.
정지상은 하동 사람이다. 일찌기 그의 누이로 인해서 원나라에 왕래하다가 경효왕을 만나 입시하여 수종함에 공이 있었으므로, 왕이 즉위하게 되자 즉시 뽑히어 감찰 지평에 이르렀는데, 일을 처리함에 큰소리를 치지 않았다. 일찌기 전라도의 안염사가 되어 임지에 가서는 세도가를 만나보더니 별안간 그를 사로잡아 문초하고 여러 고을에 이를 공시하니, 온 도가 다 가슴이 써늘했다. 야사불화라는 자는 본국 사람이다. 원에 있으면서 순제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의 형 서신주는 육재가 되고, 동생 응여는 상호군이 되었다. 세력을 믿고 위복을 갖춰 국인이 그를 꺼렸다. 불화는 향사로서 본국에 이르러 이르는 곳마다 횡포를 멋대로 하였으니, 존무사나 안렴사들이 대개 욕지거리를 얻어 먹거나 망신을 당했다. 이렇게 거칠게 굴다가 전주에 이르렀다. 정지상이 그를 맞아 근신하며 대접했는데 불화는 매우 거만하게 대했다. 반접사 홍원철은 지상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지만 지상이 듣지 않았다. 원철이 격노하고 불화는 말하기를 [지상이 천사를 업신여긴다]고 했다. 불화가 지상을 결박하니 지상은 성을 내며 크게 주의 관리를 속여 외쳐 말하길,
[국가 이미 모든 기씨를 주살하고 다시는 원나라를 섬기지 않는다. 재상 김경직을 원수로 임명하여 압록강을 지키게 했다. 이 사신은 제어하기 쉽다. 너희들은 무엇이 두려워서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 장차 너의 주가 강등되어 작은 현이 되는 꼴을 보려느냐?]
했다. 읍리들은 소리지르며 달려들어 결박을 풀고 도와 주었다. 지상은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불화, 원철 등을 사로잡았다. 이들을 가두고는 불화가 차고 있던 금패를 뺏아 서울로 달려 돌아왔는데, 공주를 지나면서 응여를 체포하고 철퇴로써 이를 치니 며칠만에 죽어 버렸다. 지상은 달려와서 왕께 고했다. 왕은 경악하여 순군을 내리고 행성원외랑 정휘에게 명하여 전주목사 최영기 및 읍리 등을 체포하고, 또 차포온을 보내 내온을 주고 불화를 위로하며 그 패를 돌려주었다. 원나라는 단사관 매주를 보내와 지상을 국문케 하였다. 왕은 뭇 기씨를 주살하고는 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을 삼았다. 다시 호부시랑 어사중승을 거쳐 벼슬이 판사에 이르러 죽었다. 성품은 엄격하여 대개 큰 죄를 다스릴 때에는 그를 보내었다. 지상의 처는 과부로 담양에 살다가 왜인의 해를 입어 죽으니 앋르이 박위를 따라 대마도를 정벌했다.
문대는 고종 안효대왕 18년, 낭장으로 서창현에 있다가 몽고병에게 잡혔다. 몽고병이 철산성 밑에 이르러 문대로 하여금 성 안의 사람들을 큰소리로 설득하게 하였다. 말을 시키기를 [진짜 몽고병이 왔다. 재빨리 나와서 항복하라]고. 그러나 문대는 [가짜 몽고병이다. 그러니 나와서 항복하지 말라]고 하니 몽고인이 그를 죽이려 하다가 다시 한번 시켜 보았다. 다시 해도 전과 같이 하므로 마침내 그를 죽였다. 몽고병이 성을 공격하는데 아주 급하게 하였다. 성에는 양곡이 떨어지니 마침내 지키지 못하고 함락되려고 했다. 판관 이희적은 성중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모아서 창고에 들어가게 한 다음 창고에 불을 지르고는 장정들을 인솔하여 모두 자결했다.
경순왕 12년 신묘 3월에 은밀히 직사 이강은 명을 받고 참성단에 제지내고 나무판에 글을 새겨 시를 읊었다.
봄바람에 풍경은 풍년인양 화사롭고
명을 받고 오는 길은 멀기도 해라.
날쌘 말에 채찍을 더해 아침에 궁궐을 떠났는데
배 띄운 저녁엔 하얀 갈매기 파도만 쫓네.
창공은 푸른 빛에 비취빛 산 색깔 묻어나고
골짜기엔 가득 기운이 차서 풀잎 절로 꽃피우지.
묻노라 봉래산은 어디라 할꼬
사람들은 이 땅을 선가라 한다네.
마음 고요하고 몸이 한가로우면 뼈는 절로 신선이 되려 하는데
사람 세상 여러가지 일은 참으로 정신없지
부평초 가득한 신비의 자리 중흥한 뒤에나
돌 쌓은 제단은 옛날로 돌아갈까.
이미 눈으로 천리 땅을 바라보는데
어찌 몸이 구중 하늘에 있음을 의심할까.
이 길은 짝도 없는 길이지만 있는 것만 같아
모름지기 서울의 일년과도 같아라.
강능왕 우의 5년 3월 신미, 사자를 보내 참성단에 제사올리도록 명하고 대제학 권근이 서고문을 지어 바치니 그 글에 가로대, [초헌에, 바다 위에 산은 높고 멀리 뜬세상의 번요를 끊었노라. 단의 가운데는 하늘에 가까와 선어의 강림을 맞을지며, 조촐한 공물을 진열하니 명신은 있는가 싶네. 재배에, 신이 들으심은 미혹하지 않으사 사람의 소원을 들으시며, 하늘의 덮으심은 삿됨이 없어 땅을 다 덮으시니, 이를 예로써 섬기면 마침내 트일지니.
그윽히 생각컨대 마리산은 단군이 제사하신 곳. 성조로부터 백성을 위해 극을 세우시고 옛 것을 이어 휴식을 드리우시었네. 후왕에 이르러 오랑캐를 피하여 도읍을 옮기셨지만, 역시 여기를 의지하사 근본에 보답하시었고, 때문에 우리 가문은 이를 지켜 끊기지 않았도다. 그래서 짐은 작은 지식으로 이를 계승하여 더욱더 경건하였다. 하늘이시어, 어찌 왜구의 개같은 도둑떼에 의해서 우리 백성을 어란으로 하시겠는가? 먼나라의 수모를 받는다 하더라도 아직도 우리의 표문의 길을 막지 않으시고 들으시노라. 하물며 저 읍민들이 오랑캐에 침략되는 것을 옳다고 참고 계시겠는가? 어째서 이름 떨칠 효험이 없을까 보냐? 그럴 리 없다. 덕의 좋음이 없음이로다. 참말로 남을 책하기 어렵고 오직 스스로를 책하는 데 있나니. 그렇지만 사람이 만일 그 업에 주저않지 않는다면 신이 막상 돌려주려고 해도 줄 곳이 없을지며, 이에 구전의 준법에 쫓아 감히 당시의 우환을 고하노라. 진실은 관관하며 보감은 명명이라. 바다로 하여금 파도를 일게 하지 않으려면, 크게 제항의 폭주를 받으리라. 하늘이시어, 명을 밝히시옵고 크게 사직의 반석을 이루도록 빛을 받게 하소서]라고 하다.
천수 기원 439년은 경효왕 5년이다. 이해 여름 4월 정유에 기철, 권겸, 노이 등이 모반하다가 주살되었다. 정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을 삼고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물리치게 하였다. 때에 원나라는 매우 쇠폐하여 오왕 장사성은 강소에서 기병하였고, 여러가지 일로 소란했다. 최영등은 이때 고우로부터 돌아왔다. 상께서는 처음 최영등과 함께 의논하시사 서북지방 회복의 계획을 정하시고, 먼저 정동행성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인당, 최영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사 압록강 이서의 8첩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또 유인우, 공천보, 김원봉 등을 보내어 쌍성등의 땅을 수복하도록 하였다.
10년 겨울 10월, 홍두적 번성, 사유, 주원장 등 10만의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 삭주를 침략해왔다. 11년 적은 안주를 습격하니 상장군 이음과 조천주가 이 싸움에서 죽었다. 12월 상께서는 복주에 이르러 정세운으로 총병관을 삼으니, 정세운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깨끗하여 파천 이래 낮밤으로 울분하며 우려하며 홍두적을 소탕하여 경성을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였으니 상께서도 그를 신임하셨다. 세운은 종종 애통의 뜻을 조서로 내리시고 민심을 가엾이 여기실 것을 청하여 사신을 각 도에 보내 병력을 독려하도록 청하였다. 상께서는 마침내 조서를 내리시니 수문하시중 이암은 전하여 말하기를
[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쏟아 백성을 다스리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뜻을 쏟아 장수를 따라야 하리니, 나는 문신이기에 약해 빠져서 군에 몸 담지는 못한다. 그대는 내 뜻을 알고 힘을 다하라!]
라고 했다. 세운은 도당을 뵙고 분언양성하여 유숙에게
[군대를 점검하라. 뒤로 미루었다가는 문책을 당하리라]
라고 했다. 막 떠나려는데 이암이 세운에게 말하였다.
[지금 강력한 적들이 갑자기 황성에 밀어닥쳐 이를 지키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파천하였으니 천하의 웃음거리요 삼한의 치욕이라 할 것이다. 공은 대의를 부르짖어 무장하고 군을 통솔한다. 사직의 안녕과 왕업의 중흥은 이번 공의 이 일거에 달려있으니 우리의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으로 공의 개선만을 빌 것이오]
라고 했다. 이렇게 격려하여 이를 내 보내고 매일 제장을 독려케 하였다. 의를 부르짖으며 모의에 나아가서 계책을 주어 이를 도왔다. 이암의 종질 순과 한방신 등의 장수들이 이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20년 신해 2월 갑술에 여진의 천호 이두란 첩목아는 백호 보개에게 백가구를 보내어 투항해 왔다. 윤3월 기미 북원 요양성의 평장사 유익과 왕우승 등은 요양이 본래 고려의 땅이라는 뜻에서 우리나라에 투항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이를 청해왔다. 이때에 조정의 의견은 통일되지 못하였고 국사는 다난했다. 그렇지만 임금은 정몽주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촉을 평정함을 축하하도록 하였다. 김의는 명나라 사신 채빈을 죽여 버렸지만 조야가 모두 조용할 뿐, 이 일을 말하려는 자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에 이 사실을 회보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유익 등은 마침내 금주, 복주, 개평, 해성, 요양 등지를 가지고 명나라에 투항하였다. 오호라! 청론을 떠드는 자들의 무기력함이여, 스스로 좋은 기회를 잃고는 마침내 옛 강토를 회수하지 못하였고나. 뜻있는 이의 원한 이처럼 깊은 것을!
강능왕이 선제의 명을 받아 즉위하였다. 이때에 요동도사가 승차 이사경 등을 보내 압록강에 이르러 방을 붙여 가로대, [철령 이북 이동 이서는 본래 개원의 소관에 속한다. 군인, 한인, 여진, 달달, 고려는 곧 요동에 속한다] 운운하니 조의는 분분하여 하나같지 않더니 마침내 전쟁을 결정하여 사방에 병마를 징발하고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삼았다.
한단고기 끝
태백일사 발
세는 갑자년, 괴산에 유배되어 적소에서 마땅히 근신하니 매우 무료한 터라, 집에 간직한 여러 상자들을 취하여 조사해 본즉 사전으로 가치가 있는 것과 또 평소에 여러 고로 들에게 들은 것들을 합쳐서 채록하였는데 책으로는 채 만들지 못했던 바라. 뒤 16년 경진에 내가 찬수관으로 뽑혔기 때문에 열심히 내각의 비밀의 서적들을 얻을 수 있어, 이를 읽고 이를 앞의 원고에 곁들여 편차하고, 이름지어 <태백일사>라 하였다.
그렇지만 감히 세상에 내지 못하고 이를 비장하였다. 때문에 이 글을 문밖을 나서지 못했던 글들이다.
일십당 주인이 쓰다.
한단고기 발
기축년 봄, 나는 강도의 마리산에 들어가, 때마침 대영절을 맞아 대시전에서 이정산 유립씨를 뵈니, <한단고기>의 정서의 역할을 나에게 위촉했다. 나는 뭇이 거칠고 그 중임을 감당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조의 옛 역사를 알고자 하여 이를 승락했다. <한단고기>에는 <삼성기 상,하>, <단군세기>, <북부여기 상,하>, <태백일사>가 있었으니 옮겨 쓰기에 한 달 이상이 걸렸다. 한인은 7세까지 전하였다고 했으나 상세한 연대는 모르고, 한웅은 개천하여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지났으며, 단군은 47세를 전하여 2096년을 지났으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개 5846년이라 기자 어찌 그 사이에 끼어들 틈이 있으리오. 오호라, 천부경, 홍익훈, 신고 전계가 오히려 남아서 명명하게 나를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심법이 되고, 당당히 경세제민의 대전이 되는구나. 때문에 천하는 모두 감복하여 이를 존숭하며 신성하다고 일컫는다. 그런데 동토의 유생은 불가와 함께 고전에 어둡고 작은 성취 달콤함에 빠져서 서토에 무릎 꿇고도 이를 수치스레 여기지도 않는다. 아, 뒤에 이 책을 보는 자 반드시 숙연히 일어서 공경하리니, 청하여 이 글을 써 이 책의 뒤에 붙인다.
신시개천 5846년 기축 5월 상순, 동복 오형기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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