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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내리는 이런 밤에는
새싹을 재촉하는 봄비가 촉촉이 내린다. 이 밤에도.
나는 요즘 일간지에 실리는 연재물들을 흥미있게 읽고 있다. 지난날의 신문은 주로 시국과 사회문제 등을 신속하게 보도하는 사회적 공기라고 말해왔었다. 이제는 TV나 라디오 등에 밀려서 속보성에 문제가 생겼다. 그리하여 흥미를 끄는 연재물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묵은 신문 속에 끼었던 ‘하우스만 회고록'’에 ‘전쟁(戰爭)의 익살꾼 이지형 법무감(李智衡 法務監)’이라는 표제가 눈을 끌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줄거리를 훑어보니 역시 '이지형(李敎術)'의 오식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미국 정보장교였던 하우스만이 한자(漢字)까지 알아서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의 원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음만 따서 이름을 잘못 적은 듯하다. 이형은 나의 대선배이지만 재학 중에는 잘 알지 못했다. 일본 학도병의 초년병으로 같은 부대에 입대하면서 처음으로 알게 된 사이다. 학도병은 해방 전 해의 1월 20일에 일제히 입대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일본 본토 부대의 입대자들은 그날 부산시공관에 집결하여 편법으로 입대형식을 취했던 것이다. 그 뒤는 부대별로 인솔자가 붙어서 현해탄을 건넜다. 입대할 부대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입대는 했다고 하지만 우선은 다들 학생복 차림이어서 출신교는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는 부대의 소재지는 오사카(大阪)였으므로 시모노세키(下關)에서 탄 기차는 동쪽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수학여행과 재학 중에 고향을 드나들 때 가끔 타본 노선이다. 보통여행 같으면 즐거운 추억이 남을 터인데 강제로 끌려가는 그 길에는 우울하고 어두운 회상만 남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래 잊혀지지 않는 한 대화의 장면이 지금도 역력하게 머리에 떠오른다. 같은 부대의 한 초년병이 나의 복장에 관심이 끌렸던 것 같다. 내가 후배인 것을 알고 나에게 반갑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키가 훤칠한 호남형인데 복장을 보니 같은 대학의 선배였다. 그가 바로 뒷날 우리 국군의 법무감을 역임했고 5·16 군사쿠데타 후에는 국민재건운동본부의 부본부장을 맡았던 이지형 장군이었다. 선배로서의 배려에서였을까. 그는 이것저것 나의 신상에 대해서 물어왔는데 출신 중학교도 알고 싶어했다. 학생간의 대화에서는 흔하게 있는 일이다. 당시의 중학교는 지금의 중, 고를 합친 것과 비슷한 5년제였다. 졸업하면 곧 바로 대학 예과나 전문학교 등에 입학할 수 있어 오늘날의 학제와는 차이가 있었다. 내가 졸업한 뒤에는 한때 4년제로 단축이 되기도 했다.
내가 학교이름을 대자 그는 자신의 고향친구라며 김선진(金宣鎭)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나의 중학과 대학 예과의 1년 선배인데 아는 정도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김선진 형은 같은 중학 출신으로는 유일무이한 대학 예과의 1년 선, 후배 사이였다. 그런 인연으로 하여 나는 예과 재학 중에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정말 고맙고 다정한 선배였다. 그는 특히 독서문제에 힘을 기울여서 지도해 주었다. 책을 잘 골라서 사고 또 읽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고르는 방법은 도쿄제대의 가와이(河合) 교수가 제시한 '학생필독도서'를 참고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이라면서 더러는 책이름을 들어서 해설도 해주었다. 그리고 예과 3년간은 매년 100권씩 300권의 책은 읽어야 하는데 문학, 철학, 역사의 순으로 단계적인독서를 권장했다. 나는 김형 덕분에 낯선 객지에서 한눈팔지 않고 꽤 알찬 대학생활을 해 나갔다.
일본은 그 당시 2차대전의 와중에서 극도로 물자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도서출판도 거의 중단상태였던 것 같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은 시간이 나면 주로 간다(神田)의 헌책방을 뒤지고 다니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었다.
신간도서의 경우 어쩌다가 서점에서 선착순으로 팔기도 했는데 그 수량은 기십 권에 불과했다. 새 책이 나온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친한 친구끼리 은밀하게 연락하여 강의시간을 할애해가면서 서점 앞에 줄을 섰다. 김형에게 끌려서 나도 몇 번 줄을 섰었다. 기다리던 책이 나의 차례까지 돌아오면 큰 횡재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설레었다. 예외없이 저질의 재생지였지만 그런 것은 하나도 개의치 않았다.
뒷날 내가 교직생활을 하면서 이때의 경험을 들먹이며 학생들에게 독서를 권장했지만 큰 반응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너무 약삭빠른 세태가 학점이나 취직 등과 직접 관계가 없는 책들은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요즘은 어느 대학이나 학생들이 차분한 독서활동보다는 서클활동에 더 과열하는 느낌이 든다.
김형은 가끔 고엔지역에서도 도보로 10여 분 거리나 되는 나의 아파트까지 찾아와 주었다. 말이 아파트지 자취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간소한 셋방 하나를 빌리고 있었다. 지나는 길에 들렀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나의 서가를 둘러보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온 것 같았다. 오늘날 내가 책에 대해서 이만큼이나마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 근원은 김형의 감화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대학생활도 곧 된서리를 맞으면서 좌절되고 만다. 학도병 때문이었다. 그때 김형은 어느 부대에 끌려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형과의 기차 속에서의 대화 가운데도 그 일에 관해서는 주고받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방 후에 내가 김 형을 처음 만난 것은 서울 법과대학에서였다. 다 같이 편입해서 같은 학교에서 또 만나게 되었는데 나는 국대안 반대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교를 떠나고 말았다. 법률학에는 적성이 맞지 않는 데다 6·25 동란의 여파로 일찌감치 교직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이런 사연은 소생의 다른 졸문 '어느 훈장의 추억'에서도 적은 일이 있다.
김형은 법대를 졸업한 뒤에 뒷날 육군 훌병감을 역임한 김근배(金根培)와 함께 육군 검찰관으로 임명되었다. 마침 여순반란사건이 터진 때로 기억된다. 재판과정에서 가끔 그들의 이름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김근배는 평양부대의 학도병으로서 해방 전에 이태원의 육군 형무소에서 나와 함께 옥고를 치른 사이다.
6·25동란이 터지고 나서 나는 부산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집을 나설 때는 산 너머 마을에서 잠시 피아간의 포화만 피하고 돌아갈 셈이었다. 그것이 전세가 밀리다 보니 부산까지 쫓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뜻밖에도 김선진 형의 전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가 나의 아우를 비롯해서 몇 사람의 친구와 함께 부산에 당도한 것은 7월 20일경으로 짐작된다. 어느 날 부산역전통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앞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걸어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김근배가 몇 사람의 장교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그때 육본의 보도과장직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신문에 자주 김근배의 이름으로 전황이 보도되었다. 나는 막막한 피난생활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 그지없이 반가웠다. 양김(兩金)은 항상 단짝으로 군대생활을 했기 때문에 김선진 형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더욱 반가웠다.
김근배는 그때 몹시 바쁜 걸음인 듯 싶어서 노상에서 긴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다짜고짜 김선진 형의 소식부터 물었던 것이다. 그는 대답 대신에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반문해왔다. 그 표정이 예사롭지 않아서 나는 마음이 켕겼다. 혹시 김형이 월북이라도 해서 사상이 문제가 되어 나를 연루자쯤으로 의심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나는 김형이 학교의 선배일 뿐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지면서 김선진은 아주 먼 곳으로 떠나서 다시는 못 만날 거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듯 싶었지만 확실하게 다지기 위해서 멍청한 체하고 먼 곳이 어디냐고 재차 물었다. 김근배는 처연한 어조로 “미아리전투에서 전사했다”는 비보를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제서야 김근배가 반문했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예사롭지 않던 그 표정까지도.
나는 망연자실하여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전쟁을 실감하게 되었고 아까운 선배 한 사람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허탈감에 빠졌던 것이다. 지금도 가끔 고지식하던 학생복 차림의 그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다시 기차 안의 대화의 장면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그날 저녁무렵에 부대에 도착하여 각자 내무반에 배속되었다. 이지형과는 내무반은 달랐지만 같은 소대로 편성되어 훈련은 함께 받았다. 3개월간의 훈련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헤어졌다. 나는 용산부대로전속되었고 이지형은 간부후보생으로서 일본에 남았다. 그때 우리는 창씨개명을 한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어서 내가 이지형의 본명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한 집에 살아도 시어머니 성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도 서로 이름은 고사하고 성도 모른 채 함께 부대생활을 한 것이다.
5 · 16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얼마 안 된 때였다. 천안에 사시는 나의 숙부댁에 일이 좀 있었다. 오래된 일이어서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데 이웃에 새로 들어선 기업체와의 불편한 관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는 그런 말도 생겨나기 전이었는데 그 업체가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공해업체인 듯 싶었다. 이웃 주민들의 생활에 적지 않은 불편을 주는데 해결이 안 되어서 고심하고 있었다. 군사정권의 요로에 진정할 것을 생각하다가 언뜻 왕학수(王學洙) 형이 머리에 떠올랐다. 왕학수도 이지형 등과 마찬가지로 나와 같은 부대의 학도병 동료인데 그 당시 군사정권의 요직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하여 수소문 끝에 동대문 밖의 신설동이던가의 그의 자택을 알아내서 찾아갔다. 오사카부대에서 헤어지고 나서 처음 만났다. 2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는 곧 나의 얼굴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가 찾아온 뜻을 말하자 왕학수는 그 문제라면 이지형을 찾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일러주었다. 이지형은 그때 준장으로 예편한 뒤였던가, 확실하지는 않는데 국민재건운동본부의 부본부장자리를 맡고 있었다.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려서 이지형이란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바로 기차간에서 대화를 나눈 선배이며 학도병 동료인 기다야마(北山晴久)인 것은 땅띔도 못했던 것이다.
재건운동본부는 태평로의 구 국회의사당 건물에 들어 있었다. 그곳에서 바로 이 부본부장을 만났다. 내 말을 듣자, 그런 일이면, 그곳의 소관업무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간부 한 사람을 불러서 지체없이 처리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숙부댁에 대해서 나의 낯도 서고 고마운 마음 그지없었다.
그 이후로는 나는 이 장군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그가 그 뒤에 ‘뉴서울’ 이라는 관광회사를 활기있게 운영한다는 소식을 들은 일은 있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을 보면 보험회사에도 관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얼마 전에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한 공정식(孔正植) 장군과의 사담에서도 우연히 이 장군이 화제에 오른 일이 있다. 기인이라고 말할 만치 여러 방면에 걸쳐서 재능이 뛰어난 비범한 인물이었다고 회고했었다. 하우스만도 역시 이 장군이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익살꾼이며 만능운동가에 주량도 만만치 않았다고도 끝으로 하우스만은 이 장군이 어려운 소용돌이 시절을 용하게 살아왔다고 회고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문맥으로 살펴볼 때 그가 소신있게 정력적으로 활동한 인물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만년에 그가 투병생활을 할 때 도미 주선 등 하우스만의 배려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본정도 없이 너무 일찍 세상을 뜬 것이 애석하기 이를데없다. 젊은 시절에 고인이 된 김선진 형은 말할 것도 없고 회갑도 못 넘긴 이지형 장군 역시 단명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보다 한 생애를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생각난다. 소신있게 정력적으로 활동하다 떠나간 두 선배를 생각할 때 그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더구나 봄비 내리는 이런 밤에는.….
(時學士 華甲記念文集, 1991. 10)
첫댓글 역사 수필을 보는 듯 긴장하며 단숨에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