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으로 이어지는 터닝 포인트
2020 대구의 봄
처음 코로나19 사태가 중국 우한에서 일어났을 땐 큰 걱정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국력과 의료 수준을 굳게 믿었다. 2월 18일 31번 확진자가 나왔을 때다. 외출했다 집에 들어오니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31번 확진자가 우리 아파트에 산단다. 관리사무소에서 소문일 뿐 아직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방송이다. 이튿날 그녀가 우리 아파트 거주자가 맞다. 아파트 외부와 출입구까지 철저히 소독할 예정이다. 주민들의 협조를 바란다는 관리사무소의 공지다. 괜히 불안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다행인 것은 그녀와 함께 사는 남편과 아들의 항체검사 결과 모두 음성이란 보도다.
대구 경북지역 전체에 불안을 키운 것은 신천지 교회와 청도 대남 병원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오기 시작하고부터다. 환자 숫자가 매일 십 단위에서 백 단위로 불어나고, 각종 학교에서 3월 개학을 연기하면서 우리 가정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집에 손자 둘이 있다. 큰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진급, 둘째 아이는 입학 예정이다. 특히 둘째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이 제 아비와 어미의 잘못인 양 연일 울며 조른다. 처음은 텔레비전 뉴스를 함께 보면 달래니 어느 정도 수긍하는가 싶더니 창살 없는 감옥살이가 이어지자 억지를 부리며 고집을 피운다.
아들 내외는 맞벌이 부부다. 집에는 학교 가지 않는 손자 둘과 나 그리고 아내가 있다. 나도 나이가 많아 자가격리된 사람들처럼 종일 집에 머무는 날이 많다. 나이던 사람이 자식 걱정시키지 않으려면 아프지 않아야 한다. 대부분 시간을 손자들과 보낸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고 다른 방 다른 곳에서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손자들이 책이나 읽고 TV 교육프로그램이나 보면서 조용히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은 나의 소망일 뿐 매일 전쟁터가 된다.
우리의 삶에는 열리고 닫히는 많은 문이 있다. 어떤 문은 조금 열어둔 채 떠난다. 다시 돌아올 희망과 포부를 안고, 또 어떤 문은 쾅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닫히고 만다. “더는 안 돼!”하며, 어떤 문은 “괜찮았어, 하지만 끝난 일이야”하며 후회 속에 조용히 닫힌다. 떠남은 다른 곳에 다다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 문을 닫고서 그 문을 뒤로하고 떠나는 것은, 새로운 전망과 모험, 새로운 가능성과 동기를 일으키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코로나19를 피해 집에 머물며 기약 없는 날을 기다린다. 처음 얼마 동안은 견딜 만했다.
정부의 질병관리본부에서 3월 말까지 정한 자가격리, 사회적 거리 두기는 자꾸 연기되었다. 두 손자는 끝없이 새로운 장난을 만들며 이것저것 요구가 많다. 큰놈을 달래 함께 책 읽기라도 하려고 하면 작은놈이 살며시 다가와 장난을 건다. 이것저것 장난감을 던지고 서로 잡고 씨름하며 하하 호호 웃다가도 곧 싸움이다. 손자들을 꾸중하다가 교사 초년시절에 읽은 《꾸짖지 않는 교육》(霜田靜志 저, 朴重信 역, 문화사) 책이 생각나 찾아 읽었다.
책 저자는 아이들 교육에서 ‘꾸짖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언제 어디서나 자라나는 자녀와 청소년을 함부로 꾸짖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 그리고 꾸짖지 않아야겠다면서도 이내 꾸짖고 말 때가 많다. ‘꾸짖는 것’은 ‘미움’이다. ‘미움’은 ‘미움’을 더하고 그것은 반발과 위축을 낳아 상대를 왜곡할 뿐이라 한다. 자라는 아이에게는 사랑만이 필요하다. 사랑은 성장을 가져온다. 아이들의 본래의 모습은 선(善)이므로 아이들의 천성 그대로, 하고 싶은 대로 꾸짖지 않고 사랑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스스로 선(善)하게 된다고 한다. 책에는 교육 실천을 위하여 훌륭한 실적으로써 많은 예를 들어 증명하고 있다. 영국의 교육자 A.S 니일의 교육사상, 교육 실천 그대로 ‘사랑은 사랑을 기르고 미움은 미움을 기른다.’라는 진리를 실천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사람이든 사물이든, 생명이 있는 것이든, 생명이 없는 것이든 다 소중하고 아름답다. 좁은 집이란 공간에서 두 손자와 싸움 반, 사랑 나눔 반으로 보낸 봄이 그대로 또 다른 의미를 지닌 세월의 한 자락이 되고 있다. 코로나19가 나에게 준 것은 고통이고 지루함이고, 짜증 나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것도 분명 내 삶의 한 토막이다. 손자들이 자라 2020년 봄을 이야기할 때 어려움을 함께한 이 시간도 좋은 추억이 되어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움으로 남기를 기대한다.
국가적 환난에 할 일이 너무 없다. 매일 매스컴에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 진료에 열중이다. 무엇인가 공공의 이익이 되는 일에 참여하고 싶으나 가진 재능이 없을 뿐 아니라 용기도 없다. 의료진을 돕는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상을 연일 보면서도 나약한 성품으로 안으로만 수그린다. 겨우 한다는 것이 개인을 위한 손 씻기, 종일 마스크 작용하기, 잠깐이라도 바깥출입 할 때 사회적인 거리 두기를 지키는 정도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소극적인 활동이 국가적 환난에서 내가 하는 일의 전부다.
종일 집에 머무르면서 손자들에게 좋은 할아버지라도 되고 싶다. 그들에게 좋은 이야기도 들려주고 다정하고 정겨운 모습 보여주고 싶으나 내 이야기와 사랑의 표현에는 관심이 없다. 그 서운함이 새록새록 싹이 돋으면 꾸중이 시작된다. 아이들이 가진 순수함에 상처를 준다. 잘못을 꾸중하고 엄하게 체벌해 다시 그런 짓을 할 생각이 못 들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빠진다. 평소 손자들에게 하던 버릇이 나온다. 쓸데없는 욕심을 버려야 하는데 피붙이에 대한 사랑이 늘 이 모양이다. 《꾸짖지 않는 교육》에서 그때그때의 대책을 찾아본다.
책에는 반대다. 꾸중이나 체벌은 아이들을 반성하고 잘못을 고치도록 하는데 거의 소용이 없다. 도리어 증오와 반항심을 심어 준다고 한다. 아이들이란 자기가 한 일이 확실히 좋지 못한 것이라고 알고 있을지라도 꾸지람을 들으면 그렇게까지 꾸중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하고 반항심을 품게 된다. 만약 나의 꾸중이 아이들이 별로 잘못하지 않았는데 오해로 하고 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 있단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다. 사랑이 막히고 바라는 만큼의 사랑이 얻어지지 않을 때 그것이 증오의 모습으로 바뀐다. 꾸짖지 않는 교육은 이해와 사랑을 의한 교육이다. 손자들을 어떻게 해서든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바르게 길러 모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가 되게 하고 싶은 작은 바람도 실천이 참 어렵다.
올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다. 싱그런 봄 햇살은 어디로 갔는지 내 마음에서 사라졌다. 있어도 없는 듯 살아도 안 산 듯 코로나19의 급습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내 삶의 근원까지 흔들어버린 것은 총칼도 핵무기도 아닌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먼지보다 작은 바이러스다. 나뿐만 아니다. 자영업자, 중·소상공인, 서비스업, 일용직 근로자, 여행업, 각종 강사직, 아르바이트생 등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 산야의 풀들이 뿌리를 내리고 수목이 잎을 틔우듯이 우리는 이 봄에 위기를 이겨야 한다. 아들딸이 생활에 활기를 다시 찾아야 하고, 손자들이 밝게 웃으며 학교 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다.
중앙방역대책본부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 45일 만에 ‘생활방역’으로 전환했다. 5월 중으로 각급 학교의 ‘등교 개학’이 순차대로 추진하고, 굳게 잠겼던 공공시설물의 출입문도 열릴 전망이다. 예상하지 못하고 뜻하지 않은 코로나19 사태로 전 국민이 많은 상처를 입었다. 하루라도 빨리 국난이 끝나야겠다. 올봄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이들의 심신에 위로와 치유에 도움이 되고, 절망에 빠진 이에게 밝은 미래의 꿈을 찾아주는 시간으로 남을 것을 확신한다. 희망의 시간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2020년 봄이 보다 행복한 미래로 이어지는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다. (대구문화재단 주최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2020 대구: 봄>시민공모전 입상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