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복음교회, 2022년 11월 20일
♱기도로 마음을 모읍니다♱
[공동체고백] 사도신경
[어린이시간] 찬양; 190장(엉금엉금 뽕나무 위에), 294장(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네)
말씀; “예수 그리스도(요1:14, 눅2:52)”
[광 고]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내일(11월 21일 월요일) 목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제71회 총회에 총대로 파송되어 다녀옵니다(서울 한신대학교).
-11월 27일 주일은 공동식사 후에 2023년 교회운영에 관한 의견을 나눕니다. 미리 의견을 충분히 나누어 대표자들이 원활히 소통할 수 있도록 협조바랍니다.
-마지막 남은 한 주간 건강히 시험 잘 치르도록 현정자매를 위해 기도합시다(26일).
[성시 교독] 교독문 77번(요한복음 3장)
[찬 송] 20장(큰 영광 중에 계신 주)
[강 론]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마5:13-16)
성경은 천국의 건설과 파괴 그리고 회복. 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림으로 끝이 납니다. 둘째 아담인 예수께서는 첫째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해 애쓰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를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부활을 믿고 역사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기다립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우리에게 팔복을 가르치셨습니다. 참된 행복(복된 삶)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행동에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가난한 마음, 애통해 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해야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했습니까? 긍휼을 입고 긍휼히 여길 때, 마음을 깨끗이 할 때, 화평(평화)을 이루며 살아갈 때, 의(하나님의 뜻)를 위한 박해를 피하지 않을 때라고 했습니다(우리가 지금 불행하다면 그 원인은 팔복의 삶과 반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겠죠). 오늘은 예수께서 팔복을 가르치신 후에 하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는 말씀을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우리의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입니다. 머리가 둘 일 수 없듯이 우리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마6:24). 이렇듯 머리가 하나이듯이 몸도 여러 지체가 있지만 둘이거나 그 이상일 수 없습니다. 이 땅에 교회도 수없이 많지만 단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교회연합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온통 재물을 섬기는 세상에서, 그 물신이 아닌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한국교회를 걱정합니다. 심지어 세상에서도 교회를 걱정해 줍니다. 이미 한국교회가 자정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세상권력으로라고 교회를 정화시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저도 공감은 갑니다. 그러나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13)”라는 말씀에서 교회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노력으로만이 정화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역사에서도 외부의 압력으로 교회가 변화된 적은 없다고 기억합니다. 우리 개개인도 아무리 외부의 설득과 노력이 있다하더라도 변화는 자기 스스로의 자각과 결단으로 일어나지 않습니까? 교회가 스스로 그 맛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다시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할 때, 소금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방부제역할입니다. 우리교회가 울산에 살고 있다면 바로 이곳에서 소금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신숭배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심지어 가족까지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 자체가 소금으로 살아가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고, 경제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고 그 뜻을 공동체에 이루어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 교회당은 염전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경고도 하십니다. 13절 하반절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 경고대로 교회가 소금으로서의 맛을 잃어 쓸모없게 되어 버려져 짓밟히는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런데 맛을 잃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물질입니다. 소금에 이물질이 많이 섞이게 된다면 그 정도에 따라 맛을 잃어가겠죠. 그래서 우리는 순(純)한 교회를 추구해야 합니다.
2.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예전에 비해 밤하늘에 별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코로나19의 영향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저의 어린 시절보다 별이 줄어든 것은 분명합니다. 세상이 더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별이 쏟아진다는 말이 있죠? 그 광경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쉽지 않을 것입니다. 별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 원인은 너무나 많은 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세상은 더 어두워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왜일까요? 현대인들이 비추는 ‘세상의 빛’은 참 빛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참 빛인 교회가 그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되겠죠.
우리교회도 세상에 있는 빛, 예수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불을 켜긴 켰는데 말(됫박)아래 숨겨 놓으니 우리 주변이 어두운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먼저 우리 주변을 밝히도록 신앙의 빛을 말(됫박)이 아닌 등경(등잔)에 두어야 합니다. 불을 켜서 등경위에 둔다는 말은 우리의 신앙을 서로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감사절에 공동체에서 감사를 고백하는 것도 말이 아닌 등경위에 빛을 두는 작은 행위입니다). 빛은 등경위에 두어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15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빛을 비추지 않는데 우리 공동체가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교회당을 얻어 들어 온지 1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산 위의 동네(공동체)”입니까? 우리의 빛을 등경위에 두었습니까? 아니면 됫박 안에 두었습니까? 우리가 서로에게 빛을 비추고 있습니까?
그렇게 우리의 빛을 등경위에 둘 때 우리는 산 위에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되는 것입니다. 참 빛 즉, 우리의 “착한 행실(16)”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알게 되지요.
우리 안에서 서로에게 “착한 행실”이라는 참 빛을 비춥시다. 그리하여 우리 공동체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되게 합시다. 그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빛을 보고 세상은 “하늘에 계신 너희(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16).
말씀마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 안에 불순물은 없는지, 우리가 맛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만약 우리가 맛을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버려지고 짓밟혀 비웃음꺼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거짓된 빛이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지만 정작, 참 빛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에서 우리의 착한행실을 사람들에게 비추어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목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우리 안에서 신앙의 빛을 비춥시다. 그 빛이 우리를 “산 위에 있는 동네(공동체)”가 되게 해 줄 것이고, 그 동네는 세상 사람들의 빛이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더 큰 등잔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찬 송] 503장(세상 모두 사랑 없어)
[주님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