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개신교의 한국개신교 흡수(2)
● 장로교 역시 혁신교단 문제로 진통을 겪다가 1943년5월4일 ‘피어선 성서학원’ 내에 있는 장로교 총회사무실에서 과 제31회 총회(총회장 김응순)에서 선출된 상치위원(上置委員) 및 헌법개정위원, 교파합동위원들이 모여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초안)을 심의하는 줄 알고 왔다가 일본기독교조선교단(본안)이 나오자 극심한 논쟁이 벌어졌다. 총회장 김응순이 규칙초안은 총독부 보안과의 검인을 이미 받은 것이니 본론에 붙여 통과시키자고 주장하였지만 찬반이 엇갈려 회의를 계속하지는 못하였다. 5월5일 제2차 회의는 규칙안을 별다른 수정 없이 통과시켰고, 채필근이 제안한 대로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명칭은 조금 수정하여 가결하였다. 1943년5월7일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의 총회임원과 의장이 선출되었는데 통리(通理)에 채필근, 부통리(副通理)에 김응순, 총무에 김종대 목사, 의장에 조승제가 임명되었다. 당일 오후 임원들의 취임예배가 시작되면서 한국장로교는 일본기독교에 예속되어 주구 노릇을 하는 일본장로교로 거듭나게 되었다.
1941년 심명섭(감리교 본부위원)은 “교파합동에 기함”(「감리교보」, 1941년 5월 1일.)이란 「감리교보」사설에서 ‘교회 내 분파적 항쟁을 자성 회개해야 한다.’고 전제한 후, ‘교파마다 특색과 습관이 있겠지만 겸양의 태도로써 노력하면 난(難)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1년 9월 도미다(富田, 일본기독교단 대표)는 조선호텔로 각 교파 간부들을 초대하여 한국교회의 합동을 강조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각 교파대표들은 박연서, 이동욱, 최지화, 정인과, 전필순, 이명직 등이었다. 이 회합 후 장로교단은 1942년 10월16일부터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열린 제31회 총회에서 ‘조선 내 기독교 교파합동의 건’을 가결하고 그 교섭위원 선정은 중앙상임위원회에게 일임한다고 결정했다.
감리교단도 동년 12월 2일에 열린 제 2회 총회에서 교파합동을 가결하였다. 합동에 관한 명분은 ‘그리스도 정신에 기인하여 조선기독교 각파를 합동하여 단일교단을 조직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 교파합동 전권위원 8인을 선임하여 타 교파와 교섭할 것을 결의했다.
●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합동․창립
1943년1월12일 조선기독교 교파 각파 합동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제1회 모임이 중앙교회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모인 교단은 5개 교단(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일기(日基)조선교구회)으로 김자종대(金子鐘大)의 사회와 국민의례, 기도(이명직 목사)로 시작하였다. 5개 교단들이 합동하여 다음 사항을 결의하였다.(「기독교신문」, 1943년 1월 20일.)
① 합동의 범위 ② 준비위원 비례 : 장로회(9명), 감리교(9명), 성결교(4명), 일기조선교구회(4명), 구세 군(4명) ③ 제 1차 준비위원 모임 : 1월 26일, 새문안 예배당 ④ 합동 임시 근무소 : 정목장로교회 사무실 |
이 준비 모임에서 결의한 대로 1943년1월26일과 3월16일에 열린 두 번의 회합을 새문안 교회에서 가졌지만 각 교파마다 역사가 다르고 교리적 배경이나 교회법이 달랐기 때문에 합동문제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이러한 각 교단의 상황 속에서도 재차 교파합동을 강요하자 1945년7월19일 교파합동창립위원회를 정동교회에서 개최하여 장로교 대표 27인, 감리교 대표 21인, 구세군 대표 6인이 참석하여 교파합동을 추진한다는 합의가 이뤄졌고 1945년 8월 1일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조직하였다. 이때 임원단을 투표로 선출하려 했으나 무산되고 총독부가 요구하는 대로 김관식 목사를 통리로 결정하고 총독부 정무총감의 치리(治理)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 소결론
종교적 의미의 친일파로서 결국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일본기독교에 흡수되어 친일부역을 행한 당시 한국 개신교 지도층의 잘못은 ‘피해를 당했다’의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패배했다’ 또는 ‘올바른 신앙을 소유하지 못했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일제(日帝)의 강요와 협박의 정황 속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소수의 인물과 신사참배 거부가 힘겨워서 국외로 탈출한 분들이 나온 것은 그나마 소극적인 전개와 저항을 한 것이었다.
소결론을 내린다면, 고신∙재건파∙동아기독교를 제외하고 ‘개신교 각 교파는 교단적으로 신사참배를 실시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다음 신사참배 성명서는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飯沼二郞․한석희 공저, 남영환 역, 「일제통치와 일본기독교」, 260.).
< 성 명 서 >
우리들에게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 또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반대되지 않는 본의(本義)를 이해하여 신사참배는 애국적 국가의식인 것을 자각한다. 그리하여 여기서 신사참배를 솔선여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함으로써 시국하에 있어서 후방황국신민으로 하여금 정성을 다할 것을 기함. 위 성명함 소화13년9월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
(다음 회에 계속)
첫댓글 피어선
아서 태펀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 한국어: 피어선(皮漁鮮), 1837년 3월 6일 ~ 1911년 6월 3일)은 미국의 장로교목회자이자 성경교사 양성가이며 선교운동 지도자이다. 피어선성경기념학원(현 평택대학교)을 세우는데 기반을 놓았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84%9C_%ED%83%9C%ED%8E%80_%ED%94%BC%EC%96%B4%EC%8A%A8
pierson을 한국식 한문이름으로 음역하여 피어선 이라고 했군요. 학교 장소가 불의한 모임의 개최지로 사용되었지만 설립자 피어선의 선교와 생애는 훌륭한 것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평택대학교
평택대학교(平澤大學校, Pyeongtaek University)는 대한민국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개신교 계열 사립 대학교이다. 1910년 12월에 한국을 방문했던 선교사 아더 태펀 피어선 박사의 유지에 따라서 1912년에 설립되었다. 신학과를 모태학과로 시작되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8F%89%ED%83%9D%EB%8C%80%ED%95%99%EA%B5%90
피어선이라는 원래 이름이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홍택기
장로교도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를 열어 홍택기를 총회장으로 당선시킨 뒤, 바로 다음날부터 홍택기의 사회로 속회를 진행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9월 10일 그의 명의로 발표된 성명서에는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비상시국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 하기로"한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 이날 총회에는 신사참배 반대론자인 주기철 등을 조선총독부가 미리 옥에 가두어 참석하지 못하게 하면서 측면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신사참배 결의에 반발하는 의견은 무시되었고, 곧바로 부회장 김길창이 각 지역노회장들 이끌고 평양신사를 참배하였다. 홍택기 총회장 이후 장로교단은 국방헌금을 모금해 헌납하고 기독교 계열 학교를 폐쇄하는 등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광복 후 38선 이북 지역에서 계속 활동했으며,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장로교회 수습 방안이 활발히 논의되면서 일제강점기 말기의 친일 활동에 대한 반성 요구가 있었을 때 교회를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한 것 뿐이라는 변명을 하여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9%8D%ED%83%9D%
하필이면 그 당시 최고지도자가 되어 최악의 선택을 하고 악명으로 남았으니 참 안스러운 인물입니다.
채필근
채필근은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으로 가담하였고 조선전시종교보국회와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도 장로교 대표로 참여했다.[2] 이처럼 드러나는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 패망 이후 투옥되는 등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한국 전쟁 중 월남하여 피난민 위주의 교회인 산돌교회를 세우는 등 목회자로 일하면서 신학교에 출강해 강의를 병행했다. 《비교종교학》, 《신구약주석》 등의 저술을 남겼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B1%84%ED%95%84%EA%B7%BC
아이고, 이분도 위 홍택기 못지 않내요ㅠㅠ
김응순
목사가 된후 홍수원교회와 해주제일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으며, 1937년에는 황해노회 노회장이 선임되어 황해도 지역의 장로교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김응순은 평양기독교친목회 회원이었는데, 이 모임은 개신교 목회자들을 대거 친일 활동에 끌어들인 평양 출신의 교육자이자 언론인 오문환이 설립한 단체였다. 조선총독부는 이 단체를 이용하여 기독교 황민화를 추진했고, 김응순은 오문환을 따라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일본 각지의 신사를 순례했다.[1] 194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올라 전쟁 지원을 위한 예배를 거행하고 교인들에게 헌금을 걷어 전쟁에 필요한 전투기와 무기 등을 기증하기도 했다. 전국 교회의 종을 모아 헌납한 일도 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D%91%EC%88%9C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했네요: "1920년 의용단이라는 독립운동 조직에 가담하였다가 이듬해 체포되었다." 이후에 변절을 한 것인데요. 도가 지나치고 선을 넘었네요.
김종대
일제강점기 말기에 전북노회 회장과 총회 간부를 지내면서 친일 행적이 있다. 일본기독교 장로교단 총무국장직을 맡았고, 창씨개명이나 신사참배 강요, 일본어 사용 등 조선총독부의 종교 황민화 정책에 부응하여 활동했다. 1941년 《장로회보》에 기고한 〈조선기독교의 진로〉라는 글에서는 "종교인도 국민이므로 국법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바울이 전도를 위해 로마 제국 시민권을 갖고 로마식 이름으로 개명했다거나 신약성서가 아람어가 아닌 헬라어로 기록된 사실 등 성서의 일화를 다양하게 인용해가며 각종 친일 주장을 펴고 있다.
광복 후 1947년에는 배은희, 함태영 등과 함께 장로교 총회 재건에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미군정의 후원을 받았다. 미군정 관제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일본인의 종교재산을 인수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일본기독교가 세운 경성교회 건물을 인수해 교회를 운영하고, 천리교 건물 등을 접수해 신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A2%85%EB%8C%80_(%EB%AA%A9%ED%9A%8C%EC%9E%90)
이 분은 처세술에 능했네요. 위 링크 타고 들어가서 동명이인 제끼고 김종대 목사를 보니
"한국 전쟁 때는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을 환영하는 개신교 행사에 장로교 대표로 참가해 설교를 하기도 했으나, 인민군 후퇴 시 납북되지도 않고 이후 부역 혐의를 받지도 않고 살아 남았다.[2] 안동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62년 은광교회로 부임하여 1979년까지 근무했고,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서울장로회신학교 이사장, 한국기독공보사 사장, 방파선교회 초대 회장직[3] 도 역임한 바 있다."
라고 나와요. 친일과 신사참배를 한 후 용공 행위까지...ㅠㅠ 처세보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분이 되었어야지요.
조건이 되면 하나님을 믿고 위험과 고난이 없어야만 하나님을 믿겠다는 심보를 가진 것은 아직 믿음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가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그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네, 매우 공감합니다.
한국의 대표적 교단인 장감이 앞장 서서 친일행위를 한 것을 보니 참으로 씁쓸하고 슬퍼집니다.
윗물이 맑지 않으니 후대의 교회들이 계속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지탄을 받게끔 된 것 같습니다. 부모가 올바르면 자식도 올바르게 성장하는 것처럼 교회 전통도 내림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신사참배가 종교적 행위가 아니고 국민의례라고 합리화하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하고 친일을 했다는 말로 변명을 한 사람들은 신앙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겁니다. 개인적인 회개는 물론 공개적인 회개를 했어야죠. 한경직 목사는 그래서 공개적인 회개를 하긴 했지요.
교회들이 친일 부역에 앞장 섰던 목사들에게 단단히 회개를 하도록 요구하고 징계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절차도 생략하고 교회 요직을 차지하고 버젓이 행세를 하도록 내버려둔 것은 큰 실책이었습니다.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정리할 것은 정리를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친일 문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서 나라의 위신이 서지 않고, 계속해서 약소국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씀이십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는 민족의 앞날은 초라하고 그리 밝지 못할 것입니다.
공감합니다.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