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우체부는 더 빨리 걷지 않는다
볼록볼록
사루비아
새장을 기르다
해바라기
세한(歲寒)의 끝
하이 눈
빨간 모자의 레이스
달마는 눈썹이 길다
토란 잎 우산
와불(臥佛)은 더 주무시오
서쪽
포란(抱卵)
콧수염
맨드라미 광장
오늘은 공일
시인과 선인장
풍경을 화두 삼아
화창한 날
그는 어디로
비 개인 날의 우산
정처여 가자
멀리 가는 향기
군대
동백꽃
행인
탁란(托卵)
별사탕의 탄생
눈싸움
축제
그냥 서 있으라고
지붕 위에 십자가
참회(懺悔)
빛나는 아침
헌집주께새집다오
이후
영원 혹은 찰나
야 단풍이다
댓바람 소리
아무 표적도 없이
미인도(美人圖)
나비 날다
봄에 병을 부름
전야
구파발 부근(附近)
키스
박쥐우산을 쓰고
민들레 곁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보면
해설 | 엄경희
외로운 호모 루덴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속으로
집을 돌았다
분꽃을 따 입술에 물고 분꽃을 불면서 돌았다
분꽃 꽁무니가 달착지근했다
장닭을 불면서 돌았다
볏이 불볕 같은 장닭을 불면서 돌았다
나도 목을 길게 빼올리고는 꼬끼오도 해보면서 돌았다
개를 불면서 돌았다
담장을 훌쩍 넘어가라고 애드벌룬만 하게 개를 불면서 돌았다
고무호스를 불면서 돌았다
고무호스를 하늘로 치켜올리고 부웅부웅 불며 돌았다
벌 떼 소리를 내면서 돌았다
먼 골짜기 물소리를 내면서 돌았다
맨발로 돌았다
집아 사방을 뺑돌아 열려져라
집을 불면서 돌았다.
― 「화창한 날」 전문.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출판사서평
“신현정, 이 세계를 밝게 물들였던 외로운 호모 루덴스”
신현정의 유고 시집 『화창한 날』이 그의 1주기에 맞춰 출간되었다. 1974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이 2009년 지병으로 타계하기까지 그의 시에 대한 열정이 오롯이 녹아 있는 시집이다. 신현정은 자신의 슬픔이나 외로움을 극도로 절제하고 그것을 명랑성으로 바꾸어 놓는 데 주력했던 시인이다. 그의 시 세계는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에 대한 지속적인 옹립이며 철저한 긍정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정면성을 벗어나 놀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신현정의 시 속에서 딱딱한 세계는 비로소 다정해지며 천진난만한 꿈을 품는다. 시인은 이 천진난만한 꿈을 끊임없이 생성시킴으로써 삶의 어둠과 슬픔을 닦아내었다.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면서 유고 시집인 『화창한 날』에서는 이러한 시적 몽상을 고스란히 연계하고 있다.
“우울과 외로움, 슬픔을 함축한 명랑성”
「화창한 날」에서 화자는 집을 맨발로 뺑뺑 돌며 분꽃과 장닭, 개, 고무호스, 집을 불며 논다. 장닭과 개와 집처럼 불 수 없는 것들까지 모두 악기가 되고 풍선이 된다. 신현정은 이처럼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 그러나 꿈꾸었던 세계를 마술적 상상으로 빚어낸다. 빙빙 도는 혹은 돌리는 놀이는 이 시집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놀이의 방식이다. 이러한 돌고 돌리는 놀이의 이면에는 언제나 미세하게 드러나는 우울과 외로움이 숨어 있다. 시 「박쥐우산을 쓰고」에서 그는 “내 마음의 동굴 속에 사는 박쥐야//거꾸로 매달려 있는 박쥐야//고독한 박쥐야”라고 박쥐와 자신을 동일화한다. 자신의 슬픔이나 외로움을 극도로 절제하고 그것을 명랑성으로 바꿔놓는 데 주력했던 시인, 검고 무거운 박쥐의 날개를 달고라도 놀이의 세계에 헌신했던 그의 상상 세계가 이제 이 시집에서 문득 멈춰 선다.
[추천평]
좋은 시의 특징은 고요하고 강렬하고 천진난만하고 투명하다는 것이다. 신현정의 시들이 그러하다. 그는 애써 지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의미를 버린다고 하면서도 의미의 강박증에 매여 있는 이들과는 뚜렷하게 변별된다. 이게 바로 무의미의 경지다. 2류 예술가들은 사물이나 대상을 재현하거나 모방한다. 초일류 예술가들은 곧장 득도로 넘어간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정상과 광기의 경계에서, 어른과 어린애의 경계에서〈해태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해태의 눈〉을 하고, 오가는 사람에게 연신 절을 하며 인사나 하겠다던 신현정이 이번에는 어떻게 나의 뒤통수를 칠지, 어떻게 웃음을 절로 나오게 할지 기대된다. 아마 그는 하늘 저 켠에서 능청스럽게 이곳을 슬그머니 바라보고 있을지도...
一장석주(시인ㆍ문학평론가)
[추천평]
좋은 시의 특징은 고요하고 강렬하고 천진난만하고 투명하다는 것이다. 신현정의 시들이 그러하다. 그는 애써 지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의미를 버린다고 하면서도 의미의 강박증에 매여 있는 이들과는 뚜렷하게 변별된다. 이게 바로 무의미의 경지다. 2류 예술가들은 사물이나 대상을 재현하거나 모방한다. 초일류 예술가들은 곧장 득도로 넘어간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정상과 광기의 경계에서, 어른과 어린애의 경계에서〈해태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해태의 눈〉을 하고, 오가는 사람에게 연신 절을 하며 인사나 하겠다던 신현정이 이번에는 어떻게 나의 뒤통수를 칠지, 어떻게 웃음을 절로 나오게 할지 기대된다. 아마 그는 하늘 저 켠에서 능청스럽게 이곳을 슬그머니 바라보고 있을지도...
一장석주(시인ㆍ문학평론가)
신현정 시인은 저 건너편 어떤 나라로 가셨다. 그러나 이 한 권의 유고 시집에는 그의 체적이 남아 있다. 조그마한 무람도 없이 세상과 상면(相面)한 대화가 담겨 있다. 명랑하고, 천진하고, 또 부럽기까지 한 장난기도 섞이어 있다. 순응과 긍정과 운치와 웃음과 신명과 상승은 그의 시 특유의 소유이다. 이 아름다운, 우주를 달통한 시 묶음을 나는 지금 이편에서 읽노니, 그가 사는 나라가 예서 멀다고 생각하니 또 눈물을 감출 수 없다. 다시 올 요량으로 시인은 두고 가신 것이라 믿는다.
一문태준(시인)
[작가의 말]
나 무지개를 뛰어넘어 어떤 나라에도 가보지 않았다.
一「이후」전문
신현정 시인은 저 건너편 어떤 나라로 가셨다. 그러나 이 한 권의 유고 시집에는 그의 체적이 남아 있다. 조그마한 무람도 없이 세상과 상면(相面)한 대화가 담겨 있다. 명랑하고, 천진하고, 또 부럽기까지 한 장난기도 섞이어 있...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