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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길어요. 초신자나 배경지식이 짧은 분은 시간을 많이 두고 틈틈이 찬찬이 보셔야 할 거에요. 저는 읽고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독성의 효율을 위해 핸드폰보다는 피시나 노트북으로 읽으시기를 더 권장합니다.
눈여겨 볼 부분 - 필자(목창균)는 성경의 무오성을 확신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다. - 근본주의는 20세기 초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의 도전으로 부터 성서적이며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어난 종교운동이다. - 1977년 성경 무오에 관한 국제 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가 조직되었다. 그것은 성경에 관한 역사적, 정통적 입장을 옹호하려는 보수주의 학자들의 모임이었다. 그것은 시카고 무오성명(1978)과 시카고 성경해석학 성명(1982)을 발표했다. 전자가 성경 무오의 의미와 그것을 성경이해와 해석에 응용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면, 후자는 정당한 성경연구와 해석을 위한 25개의 조항을 제시한 것이다. - 루터와 칼빈을 비롯,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전체에 어떤 오류도 없다고 믿었다. 특히 칼빈은 구술설을 주장했다. |
복음주의와 성경 (목창균)
서론
성경은 신학의 유일한 원천이요 규범이며, 신앙의 표준과 준칙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에 최고의 권위를 두었다. 그것은 전통과 교황에 권위를 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항거요 반작용이었다. “오직 은총”이 종교개혁의 내용적 원리라면, “오직 성경”은 종교개혁의 형식적 원리요, 방향타였다.
성경의 권위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다. 자유주의자들뿐 아니라 복음주의자들 중에도 성경의 무오성을 포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미국 복음주의 신학자 중 거의 40%가 성경 무오성에 대한 신념을 버렸으며, 복음주의 신학교 학생 중 53.8%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현대 복음주의는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최대 전쟁터는 성경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경의 권위 문제가 신학적 논쟁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성경에 대한 논쟁은 크게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번째 단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진행된 현대주의자와 근본주의자의 싸움이다. 이는 성경의 전적 무오를 비롯하여,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들을 비판하는 자들과 옹호하는 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현대 정신과 경험의 조명 아래 성경을 읽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현대성과의 일치도에 따라 성경의 진리성을 판단한다. 성경의 영감을 재해석하고 성경 무오의 교리를 부정한다. 반면, 근본주의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책이므로 어떤 종류의 과오도 없다고 주장한다.
두번째 단계는 20세기 후반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에 관한 복음주의자들의 싸움이다. 그것은 무오(inerrancy)와 불오(infallibility)의 구별에 대한 논쟁, 즉 성경 원본에는 오류가 전혀 없다는 주장과 성경의 중심 주제가 아닌, 그 주변 문제들에는 오류가 포함될 수 있다는 주장 사이의 대립이다.
필자는 성경의 무오성을 확신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다. 무오 교리가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보증서다. 무오 교리를 포기하게 되면, 복음주의 신앙으로부터 이탈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는 신학적 신념의 분수령이 된다. 그것에 대한 인정 여부에 따라 신앙 양태가 결정되고 신학 노선이 갈라진다.
현대 복음주의 성서관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필자는 현대주의와 근본주의의 논쟁을 개괄함으로써 복음주의 성경관의 형성배경을 밝히고, 최근 복음주의 안에서 일어난 “성경을 위한 전투”의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무오성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한다.
1. 현대주의와 근본주의
1) 현대주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개신교회와 신학자들은 성경에 최고 권위를 두었으며,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의심치 않았다. “오직 성경”을 주창한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를 지배한 인간적 사상에 대한 승리였다. 루터는 성경의 최고 권위와 무오를 주장했고, 칼빈 역시 그것을 의심치 않았다. 칼빈에게 있어 성경은 단순히 종교 경험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아닌, 하나님의 신탁이었다. 웨슬리는 성경 전체가 영감으로 기록된 무오한 책이라고 믿었다. 그는“성경에 만약 하나의 작은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천개의 오류가 있는 것과 다를바 없다고 주장했다.
현대는 17세기 계몽주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계몽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이성의 능력을 무한히 신뢰하고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 계몽사조는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 두 갈래로 전개되었다. 경험론이 경험 중심의 이성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합리론은 사유 중심의 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계몽주의는 인간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이성을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는 현대 정신의 길을 열었다. 현대 정신은 전통 기독교에 큰 도전이요 위협이다. 그것은 서구 세계를 신 중심적 관점에서 인간 중심적 관점으로, 그리고 교회중심 문화에서 세속주의 문화에로 전환시켰다.
계몽주의 정신은 독일 개신교에 침투하여 성서비평을 통해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계몽주의자들은 성경의 영감을 부정하거나 재해석했다. 영감을 정확성이나 무오성이 아닌, 고상하고 심오한 통찰력과 전달능력으로 이해했다. 성경 저자의 영감은 예술가나 시인의 영감과 다를바 없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오류를 지닌 인간의 책으로 간주했다.
계몽주의는 자유주의 신학 형성에 중요한 자원을 공급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와 조화하여 또는 계몽주의의 관점으로 부터 기독교 신앙을 해석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최고의 권위를 성경 자체가 아닌,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두었다. 자유주의의 성서 비평은 기독교가 계몽시대의 새로운 학문과 학문방법에 적응해 보려는 시도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문학비평과 역사비평에 근거하여 복음서 기록의 역사성을 문제시했다.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기적과 같은 성경의 초자연성을 부정했다.
2) 근본주의
근본주의는 20세기 초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의 도전으로 부터 성서적이며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어난 종교운동이다. 저명한 근본주의 연구가 샌딘(Ernest R. Sandeen)은 근본주의를 세대주의와 프린스톤신학이 공동의 적인 현대주의와 싸우기 위해 형성한 일종의 연합운동이라고 정의했다. 근본주의는 극우파 보수주의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전투적 반작용이다. 전투성이 근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다. 그 전쟁은 성경을 위한 싸움이다. 성경에 대한 현대적 해석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다. 논쟁의 중심 주제는 성경의 권위문제였다. 현대주의는 성경이 인간의 유오한 기록이기 때문에 신적 권위가 거의 없다고 본 반면, 근본주의는 신앙과 생활의 궁극적인 권위를 성경에 두었다.
근본주의는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고전적 기독교의 입장이며, 근본주의자는 전통 신앙을 가진 극우파 보수주의자다. 근본주의는 신학적으로 찰스 하지(Charles Hodge)와 워필드(B.B. Warfield)로 이어지는 구프린스톤 신학전통에 크게 힘 입고 있다. 특히 프린스톤 신학의 축자영감설이 근본주의에 신학적 구조를 제공했다. 프린스톤 학파의 성경관은 완전 영감과 전적 무오설로 요약되며, 찰스 하지에 의해 구성되었다.
찰스 하지에 따르면,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서가 무오하며 신적인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 때문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그 책이 성령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는 영감을 성령의 초자연적 영향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영감의 목적은 오류를 막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책들과 모든 부분은 꼭 같이 영감된 것이다. 그것은 도덕이나 종교적 진리에 행된 것이 아니고“과학이건 역사이건 지리에 관한 것이건 사실의 진술이다.” 또한 교리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성경기자들이 기록한 모든 것이 사실이다. 그 성서적 근거는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요10:35)라고 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다.
워필드 역시 축자영감과 성경원본 무오설을 지지했다. 그는 영감을“성령이 성경 저자들에게 역사하여 그들의 말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고 완전히 무오하게 한 비상한 영향”이라고 정의하고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요10:35, 딤후3:16, 벧후1:20,21)이 영감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영감은 성경기자들의 손으로 기록된 원본에만 주어진 것이며, 사본이나 번역본은 해당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원본에는 절대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 “교리건 역사건 하나님이 무오성을 보장했으니 그의 문자적 표현에도 무오해야 한다.”
근본주의 신학은 "한 주요한 교리, 즉 성경 무오성의 신학"으로 이해된다. 성경의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이 근본주의 신앙 원리의 핵심이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다. 성경 원본에는 어떤 종류의 오류도 없다. 성경의 모든 역사적, 과학적 주장과 내용은 정확하다. 성경은 전체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그것은 심지어 각 단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별 계시가 하나님께서 죄인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구속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편이라면, 영감은 그 특별계시가 말씀 안에서 모든 오류와 누락으로부터 보호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방법이다.
축자 영감과 완전 영감은 영감의 과정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영감의 범위에 관한 설명이다. 영감이 성경의 개념이나 사상뿐만 아니라 그 낱말들에까지 확대되었다는 견해가 축자 영감설이고, 영감이 성경의 어떤 부분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부분에까지 확대되었다는 견해가 완전 영감설이다. 성경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의 토대는 디모데 후서 3장 16 -17절과 베드로 후서 1장 20 -21절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이 본문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여,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3) 근본주의 논쟁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기독교가 아닌 전혀 다른 종교요 기독교 내의 치명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근본주의 논쟁은 성경의 권위, 진화론의 타당성, 성서비평의 기술 문제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1920년대에 그 절정에 달했다. 특히 미국장로교에서 현대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성경의 무오에 대한 논쟁이 격렬했다. 근본주의는 본래 개혁신학에 뿌리를 둔 장로교와 침례교도들 그룹에서 일어난 것이며, 감리교회에는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1910년 북장로교 총회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등 5개조의 교리를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으로 선언했으며 1916년과 1923년 총회에서 그것을 재확인했다. 이 선언은 근본주의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한편, 근본주의자들이 주도한 총회선언에 맞서 자유주의자들은 1924년 1월 어번선언(the Auburn Affirmation)을 통해 그들의 입장을 천명했다. 이 선언에는 150명이 서명했으며, 그 후 1274명이 더 서명에 참여했다. 이 선언의 주 내용은 총회가 어떤 교리를 본질적인 것으로 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과 총회가 선언한 5개조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 무오의 교리를 "매우 해로운 교리"로 간주했다.
이 어번 선언을 둘러싸고 찬성과 반대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 논쟁의 여파로 1929년 프린스톤 신학교가 분리되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것은 성경의 무오에 대한 논쟁이 얼마나 격렬했는가에 대한 증거이기도하다. 웨스트민스트신학교는 미국 장로교가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기 시작한 것에 대한 저항으로 설립된 것이다. 그 후 미 연합 장로교회는 성경의 무오 교리를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미국 침례고 역시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현대주의자와 근본주의자의 논쟁의 결과로 두개의 침례교단이 창립되었다. 1932년의 일반 침례교 총회와 1947년 창립된 보수 침례교협회가 그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지지했다.
1942년 미국 교회 연방 회의(Federal Council of Churches)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결정을 내리자, 성경의 권위를 수호하기 위해 국제 복음주의 협회(National Associatiion of Evangelicals)가 세인트 루이스에서 창립되었다. 국제 복음주의 협회는 성경의 권위와 진리성을 옹호했으며, 오류가 없는 성경으로부터 신학적 입장을 구축할 것을 강조했다.
2. 무오주의와 불오주의
1) 복음주의의 분열
현대 복음주의가 성장하게 된 모체는 20세기 초 자유주의자와 근본주의자 사이의 논쟁이었다. 현대 복음주의는 이 논쟁을 통해 발전된 독특한 신앙 및 신학집단이다. 1940년대 근본주의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출현한 것이 신복음주의다. 근본주의 안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성적 표현을 추구하는 젊은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헤롤드 오켄가(Harold J. Ockenga), 칼 헨리(Carl Henry),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등이다. 신복음주의란 용어는 오켄가가 1948년 파사데나의 시민회관에서 행한 연설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개신교 정통 교리를 유지하면서도, 학문적 연구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회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가졌던 온건한 근본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옛 근본주의의 문화적 고립주의와 반지성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는 신학 보다는 양태에 있다. 양자 모두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 신학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성서의 영감과 절대 권위에 대한 확신, 그리스도의 유일성 , 체험적 신앙, 세계 선교 등에 대한 강조가 그것이다. 그러나 교리적 관심을 추구하는 방법에서 복음주의자는 보다 지적이고 개방적이다. 근본주의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를 강조하는 반면, 복음주의는 이 세상과 신학적 대화를 하려고 한다.
복음주의 운동은 출범 초기부터 학자들간에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특히 영감론에 대한 불일치는 복음주의 운동의 존립을 위협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있으나,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거나 수정하려 했다. 복음주의 내의 분열과 대립은 성경 영감과 무오성에 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신복음주의가 두 구룹으로 분열된 것도 이 문제 때문이다.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무오가 성서의 권위를 정의하는 방법으로는 너무 편협하다고 생각한 반면,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은 무오를 신앙에 대한 테스트로 강조했다. 신복음주의 교육센터인 풀러신학교는 이 문제로 분열되었으며, 진보주의자의 손에 넘어갔다.
성경에 관한 두 대립된 견해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웬햄(Wenham)대회부터였다. 1966년 6월 20일부터 10일 동안 성경에 대한 세미나가 매사추세츠의 웬햄에 있는 고든대학교(Gordon College)에서 열렸다. 50여명의 세계 각 국 신학자들이 성경의 영감과 권위문제를 주제로 토론했다. 모든 참석자들은 성경의 진리성과 신앙과 설천에 관한 무오한 규율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다. "성경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으며, 신앙과 실천의 유일하게 무오한 규범이다.” 대회 참석자 중 성경의 오류성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서 웬햄대회는 복음주의자들의 심각한 견해 차이를 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1976년 현대 복음주의 역사에서 가장 큰 논쟁, 즉 “성경을 위한 전쟁”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성경의 무오(inerrancy)와 불오(infallibility)의 구별에 관한 싸움이었다. 논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린드셀(Harold Lindsell)의 저서 [성경을 위한 논쟁](The Battle for the Bible)이었다. 그 책은 복음주의 안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논쟁점은 몇가지로 정리된다. 무오성의 교리는 성경의 교훈인가, 아니면 단지 성경으로부터의 추론인가? 무오성의 개념은 과학과 역사적인 요소도 포함하는가, 아니면 신앙과 실천 문제에만 한정되는가? 무오성은 교회의 역사적 견해인가, 아니면 17세기 이후 발전된 것인가? 성경 무오 교리를 포기한 자를 복음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가, 없는가?
1977년 성경 무오에 관한 국제 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가 조직되었다. 그것은 성경에 관한 역사적, 정통적 입장을 옹호하려는 보수주의 학자들의 모임이었다. 그것은 시카고 무오성명(1978)과 시카고 성경해석학 성명(1982)을 발표했다. 전자가 성경 무오의 의미와 그것을 성경이해와 해석에 응용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면, 후자는 정당한 성경연구와 해석을 위한 25개의 조항을 제시한 것이다. 반면, 1981년 풀러신학교와 토론토의 기독교 연구소(the 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의 후원으로 개최된 성경 권위에 대한 토론토 대회(the Toronto Conference on Biblical Authority)는 불오주의자들의 제한된 무오개념을 대변했다. 전적 무오를 주장 하는 대표적 학자로는 헨리(Carl Henry), 린드셀(Harold Lindsell), 보이스(James Boice), 가이슬러(Norman Geisler)등이 있는 반면, 제한된 무오, 즉 불오를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로는 피노크(Clark Pinnock), 로저스(Jack Rogers), 풀러(Daniel Fuller) 등이 있다.
2) 전적 무오주의
복음주의의 영감교리는 축자(verbal), 완전(plenary), 유기적(confluent)이란 용어로 요약된다. 영감은 정경의 저자나 사상뿐만 아니라 모든 단어에도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축자적이다. 영감은 정경의 일부가 아닌, 모든 부분, 즉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전체에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완전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작용이 함께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에서, 영감의 과정은 유기적이다. 성령의 영향이 성경 저자의 개성이나 표현 양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의 목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만들었다. 이 축자, 완전, 유기적 영감의 결과가 성경의 무오다. 성경은 그 모든 교훈과 증언에서 오류가 없다. 성경은 전적으로 오류를 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성경 무오논쟁은 주로 미국의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은 린드셀(Harold Lindsell)이다. 그는 칼 헨리의 풀러신학교 동료교수요, 그를 뒤이어 [크리차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편집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을 위한 논쟁](The Battle for the Bible, 1976)에서 성경무오를 변호하는 동시, 성경 무오에 관한 복음주의의 논쟁과 분열상을 지적했다.
린드셀은 영감을 사람의 마음과 정신 속에 작용하는 성령의 내적 역사로 정의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며, 영감은 각 단어에까지 미쳤다. 영감은 성경 무오의 증거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면, 성경은 절대적으로 무오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오류가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영감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성경 저자들을 오류로부터 지킨 것이다. 따라서 성경 원본에는 전혀 오류가 있을 수 없다.
린드셀의 견해는 축자 영감설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그는 축자영감설과 구술설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구술설은 성경 저자들은 단지, 비서, 혹은 필기자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쓴 것이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이다. 구술설은 성경의 인간적 요소를 최대한 축소한 것이 특징이다. 린드셀은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면서도 성경이 사람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인간적 요소를 인정했다.
린드셀은 성경 무오의 근거로 두가지를 제시했다. 성경 자체의 증거와 교회역사의 증거다. 영감론은 성경의 교훈이며, 그 성서적 증거는 디모데 후서 3:16-17과 베드로후서1:21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성경의 진정한 저자라는 뜻이다. 구약성경 저자들은 2천번 이상 그들이 기록한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한편, 교회의 역사는 성경의 무오를 중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였던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였다. 초대 교회의 저술가들 역시 성경의 무오성을 철저하게 믿었다. 특히 요세푸스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 중에는 아무런 모순점이 없다" 고 했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전체에 어떤 오류도 없다고 믿었다. 특히 칼빈은 구술설을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독교분파들은 성경의 무오를 믿었다.
린드셀은 성경의 무오성을 기독교 신앙의 분수령으로 간주했다. 성경의 무오성은 기독교 신앙의 방파제이다. 무오성의 포기는 제방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는 것과 다름 없다. 그 것을 막지 않으면, 제방이 무너지게 되고 물이 넘쳐 온 땅을 물 바다로 만든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포기는 기독교의 근본 신앙을 부정하는 길로 나아가는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과 같다. 성경의 무오성이 부정되면, 결국 기독교의 근본 진리들도 부정된다. 유니테리안 만인 구원론자들이 그 대표적 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완전한 신뢰심을 잃을 때, 역사적 기독교로부터 얼마나 멀리 이탈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쉐퍼(Francis A. Schaeffer) 역시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복음주의 세계의 분수령으로 간주했다. 성경관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타협적 성경관과 비타협적 성경관이다. 전자는 성경은 과학과 역사에 관해서는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견해인 반면, 후자는 성경에는 어떤 오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다. 쉐퍼는 두가지 이유에서 후자를 지지했다. 그것이 성경에 대한 성경 자체,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의 교훈에 충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는 것과 강력한 성경관이 없이는 다가올 고난의 시대를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이 정확하지 않다면, 우주의 존재나 인간의 특성에 관해 대답할 근거가 전혀 없다. “복음주의는 완전한 성경관을 가진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에 구획선이 그어지지 않는한 일관적으로 복음주의적일 수 없다." "성경은 그것이 가치, 의미 체계, 종교적인 일들을 말할 때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와 우주에 대해 말할 때도 오류가 없다." 따라서 쉐퍼는“복음주의자가 되려면 결코 성경관에 있어서 타협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성경에 역사적 또는 과학적 오류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성경 무오주의자들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복음주의적 접근방법은 문제점을 인정하고, 성경에 일치되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윗의 자손 문제에 대한 린드셀의 대응을 살펴보자. 모운스(Robert H. Mounce)에 따르면, 마태복음22:42과 누가복음20:41의 기록에 차이가 있으며, 서로 모순된다. 마태복음에는“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기록되어있는데 비해, 누가복음에는“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고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모운스는 마태와 누가가 예수님의 말씀을 서로 다르게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린드셀은 예수께서 두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들을 다 하셨을 것이라는 해석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두 기록 모두 예수께서 말씀하신 전체 대화의 일부다. 마태는 그 한 부분을, 그리고 누가는 다른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뉴우톤 신학교 교장 호베이(Alvah Hovey)는 소위 역사적 오류 문제를 몇가지로 반증했다. 첫째, 역사적 오류들로 지적되는 것은 대부분 연대기적 기술과 수자와 관련되어 있다. 둘째, 수자와 이름의 오류는 사본의 필사자들에 의해 생겨났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성경에는 같은 인물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표기된 경우와 같은 시대가 서로 다른 시대인 것 처럼 기록된 경우도 상당히 많다. 넷째, 어떤 특정한 사건을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인 숫자로, 또 다른 경우에는 대략적인 숫자로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따라서 이런 사례들을 고려해본다면, 소위 역사적 오류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는 것이다.
호베이는 소위 과학적 오류들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과학적 언급들은 단순히 보조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적 용어가 아닌, 일반 생활용어로 되어 있다. 그것은 과학지식을 전하고자 의도한 것이 아니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성경에는 과학적으로 오류에 해당한 것이 기록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요약하면, 근본주의적 또는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전적 무오를 믿는다. 성경의 무오성은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성경의 진정한 저자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거짓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은 무오한 것이다. 또한 성경 자체가 그 무오성을 선언하고 있으며,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무오는 성경 원본에만 해당되며, 그것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것은 오랜 전수 과정을 거친 사본들과 번역본들이다. 따라서 약간의 문제점, 불확실한 것, 오자 등이 성경에 들어올 수 있었다. 현재의 성경은 엄밀한 의미에서 무오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무오”한 것이다. 성경 무오주의자들은 현재의 성경은 원본에 매우 근사하게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무오주의의 약점은 원본의 무오성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 원본이 현재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약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성경 무오를 명백히 증거하는 성경 본문이 없다는 것이다. 흔히 무오교리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되는 딤후3:16, 벧후1:21 등은 성경의 무오가 아닌, 성경의 영감을 증거한 것이다. 따라서 무오론자들은 영감에 무오가 수반된다는 것을 전제해야한다.
3) 불오주의
복음주의자들 중에도 성경의 무오성을 포기하고,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는 이들이 있다. 그럼에도 성경의 무오성을 전적으로 부인하거나 성경의 모든 부분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목적을 틀림 없이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절대 확실하다고 믿는다. 동시에 성경저자들이 문화적이며 역사적 제한 아래 있었다는 것과 성경에 문화적이며 역사적 우연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의 전적 무오가 아닌, 제한된 무오를 지지한다. 그들은 불오주의자, 비무오적 복음주의자 또는 온건한 유오론자로 불리운다. 그 대부분은 진보적 복음주의와 중도적 복음주의에 속한다.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역사적 정통주의가 고수해 온 축자적 영감설이나 완전 영감설을 재검토하고 그것을 수정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개인적 증언에 의한 영감설과 성경의 유일한 목적에 따른 영감설이다. 개인적 증언에 의한 영감설은 신정통주의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된 것으로 오늘날 매우 인기 있는 이론이다. 그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증언 혹은 지침이기는하나, 그것은 죄를 범한 인간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므로 자연히 그 안에 오류가 끼어들었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비록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증언이다. 한편, 성경의 유일한 목적에 따른 영감설은 성경 전부가 아닌, 그 일부, 즉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 대한 기록은 오류로부터 보호되었다는 견해다. 이것은 신복음주의 일부에서 주장되는 것이다.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영감을 주장하면서도, 성경의 전적 무오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은 그 중심 주제와 목적에서는 무오하며 신뢰할만하다. 그러나 과학이나 역사상의 문제, 혹은 연대나 지리적인 문제 등과 같이 주변 문제들에서는 오류의 가능성이 있을뿐만 아니라 실제로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클라크 피노크는 무오성에 관한 7가지 질문을 제기했다. 무오성은 성경적인가, 영감의 논리적 결과인가, 과연 의미있는 것인가, 인식론상의 필연인가, 신학적으로 결정적인가, 비평적으로 정직한가, 복음주의적 진정성의 시금석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피노크 자신의 대답은‘아니오’였다. 그는 성경의 영감은 인정했으나 성경의 완전 무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성경의 전적 무오성를 믿는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과도한 숭배와 지나친 신뢰의 죄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성경의 중심 주제인 신앙과 생활에 관한 문제들은 무오한 것으로 간주했으나 성경의 주변 문제들은 무오하다고 간주하지 않았다. 역사나 지리, 혹은 자연과학상의 오류가 성경 안에 존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강조점을 두어야 할 곳은 구원에 관한 진리이지 사소한 세부사항들이 아니다.
복음주의자임에도, 어떻게 성경 원본에 오류가 있다고 믿는가? 피노크에 따르면, 그것은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전통적 신앙과 계몽주의의 성서 비평적 관점 사이의 충돌로 일어났다. 계몽주의는 성경을 단지 인간의 불완전한 영적, 도덕적 진화에 관한 기록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해 대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피노크에 따르면, 성경의 신적 측면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그것의 인간적 측면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성경 안에 어떤 오류의 여지를 남겨두고 그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 성경의 인간적 측면을 정당하게 다루는 것이다.
최근 미주리 루터교회에 속한 부리처((Paul G. Bretscher)는 하나님의 말씀은 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하나님 자신이 저자인 오류가 없는 성경을 가리키는 반면, 다른 하나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성령의 선포를 의미하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그릇이다. 부리쳐는 전자를 쓰레기와 같은 개념으로 간주했으며,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후자를 지지하고, "성경은 복음 이외의 것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리쳐에 따르면, 복음에 관련된 것만이 영감받은 것이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성경의 영감과 권위 및 무오성은 복음의 테두리 안에서만 인정된다. 복음과 관계 없는 다른 기록들은 오류를 포함할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은 결코 오류가 없는 책이라 말할 수 없다.
스탠포드 대학교 교수요 복음주의 신학협회 회원인 리챠드 부베(Richard H. Bube)는 [기독교와 과학과의 만남]에서 성경에는 오류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계시적 의도를 직접 포함하고 있지 않은 천문학, 지리학, 지질학 등에 관한 성경 기자들의 진술은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는 반면, 성경의 계시적 요소들, 즉 하나님과 구원에 관련된 요소들은 신뢰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성경의 부분적 무오성을 주장했다. 그것은 필수적 부분들에만 무오성이 제한되어 있다는 견해다.
풀러신학교 교수 다니엘 풀러(Daniel Fuller) 역시 성경을 계시적 부분과 비계시적 부분으로 나누고, 전자를 신앙과 실천에 관련된 부분으로, 그리고 후자를 그 이외의 것을 포함하는 부분으로 취급한다. 그는 성경의 계시적인 부분에는 오류가 없으나, 비계시적인 부분에는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가 지적한 오류의 예는 겨자씨 비유(마13:31-32). 겨자씨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라 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폴 실리(paul H.Seely) 역시 성경의 과학적인 언급은 항상 무오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성경은 지구가 원형이 아닌, 평면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우주론에 구속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의 목적은 구원을 위한 진리를 전달해주는데 있는 것이요, 과학적 진리를 전달해주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듀이 비글(Dewey N.Beegle)은 복음주의적 배경을 갖고 있었음에 불구하고, 성경의 무오성을 공격하고, 그에 관한 저술을 하기도 했다. 그는 무오성이 오직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은 오류가 있는 인간에 의해 기록, 전달, 해석되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오류가 끼어들었다. 따라서 성경에는 다양한 종류의 오류가 있다.
풀러 신학교 교수 잭 로저스(Jack Rogers)는 성경의 권위를 이해하는 두 다른 신학 전통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하나는 합리적 추론이나 증거 보다 신앙에 우위를 두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신앙 보다는 이성적 추론에 우위를 두는 것이다. 전자는 성령의 증거를 통해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어거스틴 신학전통을 말한다. 성경의 목적은 인간의 죄를 경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 목적을 오류없이 확실하게 성취한다. 오류는 의도적으로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권위는 그 과학적 정확성을 통해 보증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알려진 그리스도의 구속적 권위를 통해 보증되는 것이다. 한편, 후자는 구 프린스톤신학 전통을 말하며, 아퀴나스와 투레틴(Turretin)신학에 뿌리를 둔 것이다. 성경은 교리와 교훈, 역사적, 과학적 사실 등 모든 것에서 오류가 없다. 오류는 문자적 정확성을 의미한다. 로저스는 구 프린스톤신학의 성경 무오 교리는 기독교가 2천년 동안 가르쳐온 역사적 신앙도, 유일하게 타당한 복음주의 신학 전통도 아니라는 것과 성경무오는 성서적 개념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된 철학적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웨슬리안 복음주의자 미키(Paul A. Mickey)는 성경의 무오성에 회의적이었다. 오히려 그는 성경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영감받았다는 사실이 곧 오류 가능성의 면제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구원에 필수적인 신앙문제로 한정했다. “진리를 위한 성경의 기준은 오직 신앙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한 명확성과 진실성이다.” 따라서 그는 성경의 무오성 보다 성경의 정확성을 강조했다. 성경은 무오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것이다. 그렇지만 정확성 역시 성경의 과학이나 역사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면을 말한다. 미키는 성경 가운데 신앙적 요소 이외 다른 것에는 오류가 포함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요약하면,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대부분 성경의 제한된 무오를 주장한다. 성경 가운데 계시된 부분, 복음에 관련된 부분, 성경의 중심 주제, 즉 신앙과 실천에 관련된 부분에는 오류가 없는 반면, 비계시적인 부분, 복음과 관련 없는 부분, 성경의 주변적인 문제에 관련된 부분에는 오류가 있다. 과학, 역사, 지리적인 오류가 그것이다. 그들이 이 견해의 주 근거로 삼는 것은 성경의 인간적 요소다. 그들은 성경 저자들의 불완전한 인간성이 성경에 오류가 포함된 요인이라다고 주장한다.
한편, 불오주의자들은 성경에서 계시적 것과 비계시적 것, 복음적인 것과 비복음적인 것, 신앙과 실천에 관련된 것과 관련 없는 것을 어떻게 결정하는가에 대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순전히 자의적으로 결정하고 있다.
결론
성경의 권위가 도전을 받고 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성경의 무오성이 공격받고 있으며, 복음주의자 중에도 성경의 무오성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성경에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는 진보적 견해가 복음주의의 지배적 견해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성경은 전적으로 무오하다는 견해는 성경의 신적 요소를 강조하는 전통적 해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성격 및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본질을 믿는 신앙고백이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므로, 성경은 무오하다.
한편, 성경에 오류가 포함될 수 있다는 진보적 견해는 성경의 인간적 요소에 기초한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 역시 불완전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성경에 오류가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류 개념은 성경에서 신앙과 실천에 관련된 부분에는 오류가 없으며 그것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적 무오와 제한된 무오, 즉 무오와 불오 개념은 외견상 큰 차이가 없고 오히려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전자는 현재의 성경이 아닌, 성경 원본의 무오를 주장한다. 따라서 원본 무오를 강조하는 것은 현재의 성경에 오류가 포함될 수 있는 가능성을 묵인하는 것이다. 한편, 후자는 성경은 본질적인 면에서 무오하다고 주장한다. 무오를 제거해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는 손상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양자의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라기 보다 유연성의 차이, 형식의 차이로 이해될 수 있다.
전적 무오와 제한된 무오의 차이가 질적 차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결과는 심각하다. 제한된 무오 개념은 역사 비평주의로부터 복음주의 영감론에 미치는 압력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오 교리를 포기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은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거나 기독교 교리를 변질시키며 교회를 분열시킬 우려가 있다.
불오주의가 지닌 문제점은 몇 가지로 지적된다. 첫째, 그것은 성경의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기초하여 교리를 주저 없이 말씀하셨으며, 성경은 폐할 수 없다고 하셨다(요10:34-5). 둘째, 그것은 주관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누가 성경의 어떤 부분이 신앙과 실천에 관계된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셋째, 신앙과 실천의 문제와 다른 비계시적 문제 사이의 구별이 인위적이다.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과 관련된 메시아 예언이 특정 장소와 관련되어 이루어지는 예도 있기 때문이다(미5:2).
출처: 목창균, “복음주의와 성경”, 『신학과 선교 25권』(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신학연구소, 2000년8월), pp.171~193.
첫댓글 내용이 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읽으면 큰 유익이 있을 글입니다.
원글자가 성경의 정확무오성을 믿는다고 서론에서 밝혔으니 괜찮은 내용일 것입니다.
네, 공감합니다. 근본주의 등 개념에 대해서 알 수도 있고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노베 읽어보니 참 좋은 글이네요!
현대신학 역사에 대해서도 조금 엿볼수 있고요,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의 구별, 무오성과 불오성의 구별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 수준에선 한 번 읽어서 소화하긴 어려울거 같아서 여러번 읽으며 유익함을 더 누리겠습니다.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제목은 복음주의와 성경으로 부드러워 보이지만, 살상은 신학교 학술지에 기고한 교수의 소논문입니다. 아마 아파르님이 그렇게 느끼셨다면 다른 분이나 초신자는 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글은 여유를 가지고 야금야금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장코뱅 네, 공감합니다.
길어서 그렇지 좋은 글이에요.
신학 개념과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도 알게 하는 유익함이 있네요.
공감합니다.
신학 개념도 궁극적으로는 성경에서 끌어온 것입니다. 교회사도 인물, 교회, 교파의 성경의 해석에 대한 관찰이 많고요. 그래서 이런 긴 글을 찬찬히 읽으면 그런 유익함을 읽고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도 너무 길어서 대강 스킵하면서 읽어 보았는데요. 조금은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쓴 글로 이해됩니다. 성경의 권위를 지켜가려는 신학자들의 고투가 느껴지는 글 찬찬히 잘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