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
취미생활은 우리에게 활력을 준다. 아주 개인적인 활동도 많지만 주로 여럿이 어울려 지내는 활동이 주를 이룬다. 이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동호인 모임이 생겨났고 주기적인 모임이 주를 이룬다.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으니 대화도 활발하고 친분관계도 깊어진다. 더구나 나이가 들수록 사회활동이 제한됨에 따라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모임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몇 년 전 어느 봄날에 제대로 바둑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어 마땅한 도장이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한 곳으로 전화를 하니 여성분이 친절하게 안내를 하였다. 뜻밖에 놀란 것은 그 분이 나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아무개가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알고 보니 같은 분야에서 근무하던 옛 동료였다. 아주 업무 역량이 뛰어나 모든 이의 칭찬을 받았던 분인데 두 아들 모두가 프로 기사의 길을 걷게 되면서 본인도 이 분야로 발을 딛게 된 것이었다. 너무 반가워 사무실을 찾아가 반갑게 저간의 사정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원장님이 바로 세계적인 고수인 「이 세돌」의 스승으로 바둑계의 최고 교육의 권위자인 「권 갑룡」 도장의 사범이었다. 따님도 현역 프로로 활약하고 있는 바둑 집안이다. 권 사범과도 인사를 나누고 기본기를 시작으로 배우게 되었다. 일주에 1회씩 지도를 받기로 했지만 날마다 나와서 연습생과 다른 사범에게 배워도 좋다 하였다. 나 같은 연장자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어서 특별히 지도를 받고 주로 많은 숙제를 받아 해결하는 과정을 거쳤다. 교재를 받아 나름대로 연구를 했지만 수시로 오답을 가지고 갔으며, 문제 풀이의 과정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여러 차례 한계를 절감하였다.
권 사범이 지정한 프로 선수가 과제를 점검하고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 많았다. 도장에 나오는 어린이 모두 상당한 실력으로 장차 프로 기사가 되려는 아이들 이었다. 물론 두뇌 훈련과 차분하고 심사숙고하는 문제 해결 능력을 연마하기 위한 목적으로 배우는 아이도 많았다. 특히 방학 기간에는 전국과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 합숙을 하며 배우는 열기가 뜨거웠다. 나로서는 혹 분위기를 흐리게 할까봐 내내 조심스럽게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에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와 바둑을 두게 되었다. 한 판을 두고 연이어 두 판을 두었다. 한참을 몰두해 있는데 상대 어린이가 응수를 하지 않았다. 생각 중이라 생각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그냥 침묵만 흘렀다. 드디어 그 어린이가 하는 말에 쇼크를 받았다. “할아버지께서 한 수를 물렸기 때문에 이미 패배한 것인데 더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동료들과 두던 버릇대로 한 행동이 큰 잘못이었던 것이다. 권 사범에게 이야기하니 처음부터 그렇게 가르친다고 하였다. 돌을 놓기 이전에 충분히 생각하고 일단 돌을 놓았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하였다. 모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가 져야한다는 간단한 논리였다. 냉엄한 승부사의 자세였다.
성인들도 다양한 게임을 하면서 내기를 한다. 특히 다수가 즐기는 골프 운동간 에도 간단한 시합을 하게 된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다수가 규정을 잘 준수하지 않는다. 첫 홀은 예외 없이 모두 파를 한 것으로 하면서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모두가 프로는 아니지 않느냐며 서로 공감한다. 일종의 공동 정범인데 어지간한 실수는 덮어주고 재 시도를 하도록 해준다. 마치 이런 행동이 동반자를 배려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규정의 위반이요, 지키지도 않을 경기를 하면서도 누구하나 시비를 하지 않는 것은 신사도를 벗어나는 일이다. 끝까지 홀 아웃을 하지 않고 OK를 남발한다. 이의를 제기하면 자칫 인정머리 없이 행동한다고 비난받기 안성맞춤인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본인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하라하니 사실 말처럼 쉽지는 않다.
여하튼 이를 계기로 바둑돌을 더욱 신중하게 되었다. 사실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제대로 된 기량을 구비하게 된다. 고위직에 있다 보면 스코어도 좋다가 현직에서 물러나면 점수도 크게 후퇴한다고 하였다. 실수를 봐주지 않고 컨시드(OK사인)를 쉽게 주지 않으니 좋은 점수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인생사가 다 비슷하다. 본인이 제대로 실력을 구비해야 매사에 자신감이 생기고 존경을 받는 것이지 직위와 연공서열만을 생각하면 큰 낭패를 본다. 말로는 공정과 상식을 외치면서도 본인과 주변에는 눈을 감아주는 행태와 유사하다.
한 여름에는 권 사범을 따라 일주간을 마닐라로 갔다. 마침 그곳에 그의 개인주택이 준비되어 있어서 낮에는 운동을 하고 오후에는 바둑 수업을 하였다. 아침 이른 시간이면 근처에 거주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아예 개인 골프카를 타고 마치 출근이나 하듯이 선착순 도착을 위해 골프장으로 몰려간다.
전직 국회의 서초구 P의원님과 그의 경기고 동창인 C회장님이 함께 어울렸다. 두 분 모두 매너와 언행이 매끄럽고 여유가 있어 보기에도 참 좋았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으며 고고한 태도로 오직 자신에게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소위 관록이 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느꼈다.
오후에 바둑은 4명이 짝을 맺어 두고 복기를 하면서 오류를 시정해 주었다. 사실 바둑에 집중하다보면 복기가 절로 이루어진다. 여하튼 쉬운 과정은 아니지만 복기를 잘해야 바둑도 향상이 된다. 이웃에 거주하는 한국인도 몇이 찾아와 함께 바둑을 두거나 권 사범에게 배웠다. 그동안 바둑을 가르치면서 겪은 다양한 일화를 재미나게 듣기도 하였다. 여하튼 틈틈이 시원한 맥주와 양주로 신선놀음을 하며 지냈다. 특히, 사모님이 맛있는 요리를 준비함은 물론이고 귀국 길에는 선물도 한 아름씩 안겨 주셨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 반이 지난 과거의 추억이 되었다.
귀국해서 배우다가 학원의 교육시스템이 바뀌면서 중단하였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5급으로 행세하라고 자격을 부여받았다. 1년만 더 배우면 아마 5단까지는 도달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왜 더 배우지 않았는지 후회스럽다. 권 사범이 혼자서도 연습하라고 AI 바둑판을 전해주어 가끔 활용을 하지만 그 효과는 대면 교육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기회를 더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언제 다시 문을 두드리고 싶다.
어린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은 바둑과 한문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이르면 이를수록 가르치는 효과가 있음을 경험하였다. 둘 다 두뇌 훈련에 좋으며 생각하는 사고력을 향상시키는 좋은 과목이다. 특히, 한자는 미숙할지라도 한문 문장을 외워두면 오래토록 암기와 논리적 학습에 큰 도움이 된다. 더구나 이들 교육은 할아버지가 주관하여 손자를 가르친다면 여러 가지의 부수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오래 전에 전 대통령이 권 사범을 초대하여 손자들 교육을 시켰다는 이야기도 동일한 심정의 발로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취미생활도 경쟁하는 것보다 오히려 고독한 시간을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는 힘을 기르는 활동이 더 값진 것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혼자서 집중하여 몰입하는 예술이나 문학 등의 고상한 절대취미 활동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타인과 억지로 어울리지 않아도 시간을 활용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이득이 아닐까?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에 달린 것이라 무엇이 우선한다고 섣불리 단정 지울 수 없다. 오직 만족하고 기쁨을 주면 그것이 바로 좋은 취미일 것이다. 가능한 동적인 활동에 더하여 정적인 취미를 병행하면서 부부가 함께한다면 금상첨화일 듯싶다.
(2022.12.31.작성/2023.2.28.발표)
※ 안타깝게도 권 사범님이 지난 1월 24일에 지병으로 떠나셨습니다. 세계적인 지도자를 잃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생전에 써둔 글인데 재삼 추모하며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