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이지만 성경과 교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읽으실 분이 있을 것 같아서 구분선 아래에 그리스도께서 (인성이 아닌) 신성으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우르시누스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을 구분선 아래에 올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구별(구분)되어 연합(결합)되어 있다는 기초교리를 알면 이해가 되는 내용입니다. 즐거운 연휴 기간 중에 짬이 나면 이 중요한 교리를 아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46문)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사"라는 말을 그대는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땅으로부터 하늘로 취하여지셨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거기에 계속 계시며, 장차 산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는 뜻입니다.
47문)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약속하신 대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입니까? 답)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시요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人性)과 관련해서는 더 이상 땅에 계시지 않으나, 그의 신성(神性)과 위엄과 은혜와 성령과 관련해서는 어느 때도 우리에게서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
[해설]
질문은 그리스도 편재론자들 편에서 제기하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예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 끝날 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가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해서 그가 그의 인성으로 더 이상 이 땅의 모든 곳에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답변). 결론이 전제로부터 정당하게 이어지는 내용 이상으로 비약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위격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신성에 합당하게 속하는 바를 그것과 결부시키신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승천 이전에도 자신이 하늘에 계시는 것으로 말씀하시기도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고난당하시기 전 아직 제자들과 함께 이 땅에 계실 때에,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의 신성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으로, 그는 신성에 따라서 하늘을 비롯하여 어디에나 계시며, 또한 성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 신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논지를 되돌려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간다”(요 14:28), “세상을 떠난다"(요 16:28),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26:11)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다른 본성, 즉 그의 인성에게 부적절한 의미를 부과하는 것이다. 그의 인성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위격적 연합 덕분에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 연합은 이 두 본성들이 한 위격 속에 신비스럽고도 놀랍고, 또한 분리되지 않도록 연합되어 있는 것이요, 이렇게 연합된 두 본성들이 그리스도의 위격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본성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와 분리되면 그것은 파괴되고 만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이 각 본성은 그 자체의 고유한 속성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어서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은 그의 위엄과 섭리와 말할 수 없는 은혜에 따라서 성취된다. 그러나 '말씀'이 취하셨고, 그것에 따라서 그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고, 유대인들이 붙잡았고, 십자가에 못 박았고, 십자가에서 끌어내렸고, 세마포로 감싸서 무덤에 장사지냈고, 또한 부활 이후에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 바 된 그의 인성에 따라서는, 그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지 않으실 것이다. 왜 그런가? 사십 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육체로 거하시며 함께 지내신 후에 그가 하늘로 올라가셔서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게 되신 것을 그들이 몸소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하늘에서 하나님 유편에 앉아 계시며, 또한 그의 위엄의 임재에 따라서 여기 계신다. 그의 위엄의 임재는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은 것이다. 아니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위엄에 따라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지만, 그의 인성의 임재에 있어서는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라는 그의 말씀이 진정 옳다 할 것이다. 교회는 그의 인성의 임재에 있어서는 단 며칠 동안만 그렇게 있었고, 이제는 오직 믿음으로만 그를 감지하며 육체의 눈으로는 그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1. 그의 영과 신격으로, 2, 우리의 믿음과, 또한 우리가 그를 바라보는 바 신뢰로. 3. 상호간의 사랑으로, 우리가 그를 사랑하며 그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잊지 않으시도록 함이기 때문에. 4. 그의 인성과 연합함으로, 우리 속에 계신 성령과 그의 안에 계신 성령이 동일하여, 그가 우리를 그와 연합시키시므로. 5. 완성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이것이야말로 그에게 나아오는 확실한 소망이다. |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pp.247∼248.
첫댓글 그리스도 위격의 두 본성(신성&인성)에 관한 좋은 설명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문에서 우르시누스가 비판하는 그리스도 편재(遍在, 어디에나 계심, omnipresent)론은 그리스도의 위격을 오해한 것 또는 이단적 사상입니다.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편재하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은 이 땅에 계시지 않고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신앙의 기초를 정리한 사도신경의 내용을 알면 이해됩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맞아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조차도 모르니 오류와 이단에 빠지는 것이지요ㅠㅠ
@노베 공감합니다.
카톨릭, 자유주의 및 이단의 주장은 살펴볼 가치가 없고요. 루터와 칼빈이 차이가 나는데, 칼빈의 주장이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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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 단일하고 동일한 본질 안에 세 위격(Person)이 존재하는데, 위격으로서의 성자는 성부로부터 출생 (generation)되었다.
· 본질로서의 성자는 자존한다.
· 그리스도 위격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결합되었으나, 두성은 각 특성을 보존하며 구분(별)되면서도(distinct, distinguish), 분리되지는 않는다(never separate).
·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두 본성은 상호 침투됨이 없이 속죄사역을 위해서 역동적인 결합을 한다. 즉, 한 위격 안에서 두 본성의 협력으로 구속 사역을 한다. - "사역의 교류"(Communicatio operationum)
· 한 위격이 각각의 동력을 가진 두 본성의 협력에 의해 구속 사역을 함으로, 성육신과 속죄가 상호보완적이 된다.
루터
· 그리스도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속성이 상호침투(mutual interpenetration)하며, 그의 인성이 신적 속성들에 관여한다. - "속성의 교류"
· 이런 상호침투 교리는 결국 성찬론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물리적인 빵에 실제 임재한다는 교리(공재설)가 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도 그리스도의 인성이 이 땅과 편재한다는 주장을 낳았다.
@장코뱅 루터와 칼빈 모두 막상막하 훌륭한 개혁자들이지만 두 본성과 성찬에 대한 이해에서는 루터에게 미흡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위격 안에 두 본성이 혼합, 분리됨 없이 연합되어 있다는 교리가 아주 중요함을 새삼 느끼게 하는 좋은 포스팅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으로는 편재하지 않으시고 신성으로서는 어디나 다 계신다는 교리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포스팅이네요.
성령이 내주하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은 그의 인성과 신성 사이의 위격적 연합 덕분에 인성도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 정교하네요. 좋습니다.
정리해 주셔서 제게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