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핑퐁
컴백을 발표한 여배우가 레드카펫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다
적의 심장부로 침투하는 마타하리
마타리꽃이 피었다 방가지똥 박주가리 괴불주머니
해국과 함께 남단에 앉아 그녀를 기다린다
내리막길일수록 우아하게
절대 곤두박질치지 않도록, 아니 곤두박질쳐야 한다
핑!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야 한다 바닥에도 문은 있어
퐁! 그 문을 박차고 올라 다시 컴백을 해야 한다
인기라는 거대한 시소를 타고 핑퐁을 즐겨야 한다 여름과 겨울 사이
꽃과 꽃 사이 무단으로라도 네트를 넘어야 한다
가을은 높은 곳에 있는 것들이 슬픈 계절이다
바이올린의 E선이 그렇고 옥탑방 나일론빨랫줄의 덜 마른 옷가지가 그렇고
날마다 주가가 떨어지는 여배우의 얼굴이 그렇다
추락을 견디는 시간이란
은퇴와 컴백을 반복하는 오만한 여배우처럼 아슬하다
내게로 반쯤만 기울던 가을빛과 캐스팅을 기다리는 들꽃
돌아올 수 없어 차츰 잊혀져가는 옛사랑도 가을 놀이터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여배우의 낡은 어깨와 편편해진 가슴은 전성기 때의 기억으로 또 한 번
사무치게 폭발할 것이다
겨우 착지했다고 안도했을 때
모든 걸 버리고 퐁! 튀어 올라야 한다 저기 수평선 너머
해가 기울면 달이 차듯 이곳에선 곧잘 주객이 전도된다
보이다가 보였다가 어제의 조연이 오늘 주연이 되고
오늘 만난 너는 어제의 네가 아니다
가을이 붉은 치맛자락을 끌고
하산 중이다
이재린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흥 문학상 대상
바다 문학상 대상
<시집>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