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주가 쓰시겠다 하라 Date 2019. 4. 14
Text Mk 11,1-6
(1)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1.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심리 중에 ‘인정 욕구 심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심리는 자기가 생존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여 살 맛을 느끼게 하고 삶의 목표까지 생기게 만든다고 합니다. ‘잘했어. 정말 대단한데~’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어쩌면 유형의 보상보다 이런 칭찬을 듣고 싶어서일지도 모릅니다. 고생스럽더라도 누구에겐가 어디에선가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훨씬 더 큰 행복감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복음 전파를 위해 숱한 고생을 하신 분입니다. 그 엄청난 수고를 하실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가 회심하여 첫 번째로 만났던 사람 다메섹 아나니아로부터 들은 말, “(15)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5-16)이 바울의 평생 동안 힘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올라간 예루살렘에서 자기를 죽이려 달려드는 군중들 앞에서(행22,21), 모두가 예상한대로 체포되어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 유대인 공회에서(행23,11), 왕과 총독과 관리들 앞에서 자기변호를 할 때(행26,17-18), 항해하다 파선의 위기를 맞았을 때(행27,23-24) 등등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 위해 선택된 일꾼이라는 확신이 그를 버텨내게 했다는 것을 성경은 알게 합니다.
오늘 종려주일에 주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입니다. 이 말씀이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오늘 읽은 본문이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종려주일’이 생긴 근거이고 유래입니다. 예수님께서 생의 마지막 한 주간을 시작하신 날 일어난 일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미리 고지한 대로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이 날 주님께서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선언하십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외침 ‘호산나!’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흔드는 가운데, 제자들과 호응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옷과 종려나무 가지들을 펴놓은 길을 밞고 지나가시는 것 등이 모두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상징하는 행동들이었습니다. 메시야라 주장하는 것 때문에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일부러 보라고 들으라고 그 광경을 연출하신 것이 바로 그날에 일어난 일이요, 구속사역의 완성을 위하여 공개적으로 하신 행동이셨습니다.
이런 이유와 목적으로 구성된 퍼포먼스에 2절에 나오는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등장합니다. 제자들에게 그 나귀를 끌어오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하셨는데,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3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귀새끼는 역사 이래 오늘날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나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나귀가 됐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 종려주일이 지켜질 때마다 이 나귀는 언급이 되니 얼마나 영광입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도 이렇게 주님을 위해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귀새끼가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라는 말씀과 직접 연관하여 나왔기에 나귀새끼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 그렇게 쓰임 받은 존재는 나귀 뿐만은 아니지요. 쓰임 받은 존재들 중에 우선 첫 번째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제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나귀새끼의 주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환호하던 군중들이 있고, 길바닥에 펼쳐졌던 옷가지들과 종려나무가지들이 있습니다. 군중들의 입에서 외쳐진 ‘호산나!’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모두들 그날 그 일을 위해 쓰임 받은 것들입니다.
무엇이 복입니까?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게 복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쓰셔야 복이 됩니다. 다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께는 ‘내가 너를 쓰겠다.’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가장 부러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사용되는 것보다 큰 복은 없습니다. 돈이 많은 것도 복이고, 건강한 것도 복이며, 장수하는 것도 분명 복입니다만 그 모든 것보다 더 뛰어난 복은 하나님께 아낌없이 쓰임 받는 복입니다. 세상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들 보면 부러우시지요? 저도 부럽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이 진짜로 부러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붙들려 하나님께서 귀한 일에 쓰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를 쓰시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 하나면 충분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그것보다 더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 부러움이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축복합니다.
3. 그런데 쓰임 받는 것에도 종류가 많습니다. 귀하게 쓰임 받는 것, 크게 쓰임 받는 것, 오래 쓰임 받는 것, 늘 쓰임 받는 것, 자주 쓰임 받는 것, 바르게 쓰임 받는 것, 꼭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 유용하게 쓰임 받는 것 등입니다. 딤후2,20-21 말씀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많은 분들이 위에 열거한 여러 쓰임 중에 아마도 귀하게 쓰임 받는 것이나 크게 쓰임 받는 것에 관심이 제일 많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포항 충진교회에 출석하는 김 아무개라는 집사님이 계신데, 어느 모임에서 어떤 사람이 아는 체를 하면서 말하기를 자기가 잘 아는 목사님이 계신데 당신이 그 목사님께 가르침을 받으면 아주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더랍니다. 이 집사님이 신학공부도 하고 ‘개혁주의 마을’이라는 회원수가 6,300명이 넘는 인터넷 까페도 운영하실 정도로 똑똑한 집사이셔서 그것이 유혹이라는 것을 얼른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답하기를 ‘나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것보다 바르게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신천지 신도였습니다.
그 집사님은 많은 사람들이 ‘크게’, ‘귀하게’라는 말에 혹해서 넘어가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크게, 크게’를 외치면서 진짜 크게 쓰임을 받기는 했는데 그만 종말이 좋지 않은 사람들 많지요? 크게 쓰임 받는 것이 좋습니다만 반드시 바르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사실 오늘 다른 주제의 설교를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종려주일이어서 종려주일과 관련된 본문 말씀을 선택하여 전달할 하나님 말씀을 찾다가 한 가지 메시지를 선택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쓰임 받은 존재들을 살펴보면서, 특별히, 끝까지 계속해서 주님 뜻대로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자는 말씀을 전하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전달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끝까지, 계속해서, 주님 뜻대로 쓰임 받읍시다.’ 무슨 얘긴고 하니 그냥 1회용으로 쓰이고 잊혀지거나 버려지는 존재들이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나귀나 제자들이나 군중들, 나뭇가지, 옷가지, 환호성 등이 다 쓰임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날 그렇게 쓰임 받은 것이 그냥 전부였다면, 그렇게 한 번 쓰임 받은 것만 가지고 박수를 쳐줄 수 있을까요? 맨날 그날 일만 자랑하면서 평생을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인생은 길거든요. 긴만큼 쓰일 ‘곳’도 많고 쓰일 ‘때’도 많습니다. 성경에는 한 번 등장했다가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크게 위대하게 쓰임 받았지만 종말이 좋지 않은 사람들 얘기도 있습니다. 왜 그런 인물이 기록이 되어있을까요?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그런 존재가 되지 말라고 거울로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럴 위험성이 많으니 조심하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지금 인정받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직 가야 할 인생길이 얼마인지 우리는 모르잖아요? 계속해서 끝까지 주님 뜻대로 쓰임 받으시기를 결심하십시다.
4. 스피브 파라라는 분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파라는 책에서 세 사람을 언급하며 ‘삶이란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마치느냐의 문제다.’라는 주제를 말합니다. 그는 1945년 미국 전역에 돌풍을 일으키며 등장한 20대의 명 설교자 세 명 이야기를 합니다. 척 템플턴, 브론 클리포드, 빌리 그래함 등이 그들입니다. 10년 후, 템플턴은 그의 신앙에서 멀어져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클리포드는 가족을 버려둔 채 방탕한 생활을 하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아무도 울어주는 사람 없이 허름한 여인숙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 빌리 그래함은 마지막까지 사역의 전면에서 헌신하다가 생을 마친 것을 언급합니다.
스피브 파라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자리에서 이탈해있는 사람들을 연구하면서 그 수가 너무 많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인내와 순결로 끝까지 헛된 유혹을 물리치고 주님만 바라보면서 믿음의 경주를 잘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스피브 파라는 말합니다. “꿈을 꾸고, 그 꿈을 간직하며 그 꿈을 내 후손에게까지 물려주는 자”가 되자고.
여러분, 우리는 모두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입니다. 그 세월 동안 여러분은 어떤 일에 어떻게 쓰임을 받으셨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까? 쓰임을 받다가 역경이나 유혹이 왔을 때, 그때 얼마나 하나님만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종착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자굴 속 다니엘 얘기를 아시지요? 저는 다니엘을 생각할 때마다 두 가지를 떠올립니다. 한 가지는 단1,8의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 뜻대로만 살겠다는 첫 결단이고, 또 한 가지는 단6,28인데,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입니다. 바벨론제국이 페르샤제국이 되고 그 사이 수많은 왕들이 교체되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다니엘 이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고 있었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