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미술선생 김씨이야기
50年代 - 김씨 이 세상에 태어나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광복을 맞이하고, 미 ․ 소 대리전인 6.25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어느 한 시골 마을에서 세상이 자기 것인 냥 고요한 새벽녁의 적막감을 깨뜨린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가 바로 대한민국의 미술선생 김씨인 것이다.
아버지는 법조계 공무원이시며 말이 적고 엄한 성품으로 철두철미하시고, 어머니는 보통학교를 나오시고 수산업을 경영하시는 집안의 장녀로 매사에 적극적인 성품은 나의 인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신 부모였으며, 맏아들인 나는 1년 뒤 남동생이 태어남으로 해서 어머니의 따뜻한 온정보다는 이곳저곳 동네 아낙네들의 품속으로 젓 공양을 할 수 밖에 없는 여건이었으나 꽤 인기가 좋았다고들 고모로 부터 전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뒤 여동생과 남동생 둘이 태어났다.
소년시절 나는 자연과 벗을 삼아 성장해 오면서 아버지의 교육열에 이어 할아버지의 농촌생활의 산교육은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나의 성격 형성에 또 다른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현재 도시계획으로 사라진 내서면의 평온하고 광활한 넓은 평탄의 토지들은 찾아볼 수 없지만 언덕 넘어 기차 길, 조그마한 교회당 그 뒤로 이어지는 낮은 하늘 아래 금강산은 어린 시절 뜀박질하던 놀이동산으로 조용한 풍경 속에 드라마를 발견하는 듯 한 폭의 수채화 그림인 것이다. 그리고 앞산의 단조로운 나무들로 형성된 수직선 아래 협소한 곰방(하천)은 우리들의 낙원이자 파라다이스 실로 심상풍경으로 정리해 놓은 듯 자연의 조형예술이 아니 어떤가?
60年代 - 소년시절
민족상잔의 불행한 전쟁이 이 땅을 초토화하는 비극적인 아픔으로 그 당시 생활상과 정신세계가 온통 변모, 붕괴되고 미국의 신식민주의적 지배의 영향으로 어려운 환경과 궁핍 그 자체인지라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던 어린 시절 산과 들이라는 자연의 좋은 벗들과 마음껏 어울리면서 폭 넓은 시각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고, 대자연 속에서 친구들과 노닐던 그때는 사탕발림에 언덕 위 조그마한 교회당에 드나들곤 했을 때가 아마도 취학 전 이었을까? 하루는 교회당에서 그림그리기 시간에 순수한 마음으로 그려진 나의 작품이 여러 친구들 앞에서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오늘날 나로 하여금 화가의 꿈을 꾸도록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책 보따리를 등에 올가매던 그 시절에는 자연 속에서의 먹거리(메뚜기, 개구리, 원두막 서리 등)와 할머니가 운영하고 계시던 가계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군거질의 낙원인지라 학교가 파하고는 곧장 가계로 직행 이때부터 막내 아제와 나는 할머니 몰래 사탕, 과자 등으로 배를 불리기도 하고, 한번은 무더운 여름철 목이 말라 시원한 막걸리 생각이 들어 가계 안쪽에 놓여있던 술독에서 한 바가지를 퍼서 단숨에 해치웠던 일들이 때로는 한살 어린 막내 아제만 꾸지람을 듣곤 하였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지금에 와서는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또 다른 추억거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후 소년기에는 자연 환경에 젖어들 무렵 부모님의 잦은 전근으로 인하여 고향에서 마산으로 또 마산에서 부산으로 이사 오는 동안 어린 나로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바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고집이 센 나는 누구와 다를 바 없이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그 당시 또래 학생들의 꿈인 만큼 열심히 노력해 오던 중 공부한다는 일은 어려운 일 일뿐 아니라 네가 가고자 하는 목표의식을 넘을 수 없는 거리를 많이 느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시절 우연한 기회에 친구들과 화랑에 들렸을 때 화가의 길도 멋진 것이라고 생각하긴 하였지만 그때까지도 나의 꿈은 평범한 가정을 꾸미고 아이들에게 둘려 싸인 평화로운 생활을 원하는 것으로 그렇다고 해서 네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때의 마음은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도 하였으나 공부보다는 오히려 그림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 이경훈 선생님은 실향의 아픔을 지니신 분이었으며 나에게는 오늘이 있기까지 꿈과 희망을 주신 은사이시다.
70年代 - 청년김씨 화가를 꿈구다!
70년대에 미술 학도가 된 나는 또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이랄까? 같은 분야에서 꿈을 키우기 위해 한정된 울타리의 틀을 벗어나 큰 세상으로 나온 듯 한손에는 캠퍼스 한쪽 어깨엔 화구통을 짊어진 모습은 정말 누가 보더라도 그림을 하는 학도로써 비춰졌을 거고 그렇다고 해서 남달리 외적으로 다른 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당시의 미술학도들의 여건은 어려운 시기인지라 제대로 된 화구 하나 준비하기가 여의치 않았지만 그런대로 그림에 빠져보기도 하였고, 군 재대하고는 작업실을 마련하여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했던 시절의 작품경향은 추상일변도로 변해가고 있음을 반증하듯 추상표현주의의 열풍은 전체적인 화단의 지배적인 흐름이 되었다. 이렇듯 초장기 나의 창작 활동은 주로 밝은 색채와 명료한 형태 구성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형상을 중요시 하면서 각각 다른 이미지를 느낄 수 있게끔 비구상 회화작업의 시발점에서 내면의 세계를 추구한 추상회화로 나아가고자 노력하였고 또한 자연 대상의 관조와 깊이의 시선을 통해 느끼고 파악한 본질을 포착하려는 시도에서 동양화 매제의 물성을 살려 새로운 표현에 자연스럽게 다가가 비록 형상화된 대상이 시간적인 개념을 추상적인 화면으로 형상을 만들어 전통적 미감이 변화하여 되살아나는 독특한 회화세계를 연출해 보고자 하였으나 때로는 창조적 ․ 추상적이라는 압력이 저를 짓눌렸기도 하였다. 이후 여러 공모전에도 출품하였지만 기대만큼 어려움도 느껴보았고 때로는 그림의 시각적인 척도가 어느 방향에 놓여 있는지 궁금하기보다는 나의 부족한 탓으로 돌려보기도 하였던 시기인지라 나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던 것 같았다.
이후 80년대 초반에는 졸업한 몇몇 학과 친구들과 그룹을 형성해서 시우회라는 창립전을 통해서 교우들과 작품을 대하게 된 일은 지금까지 고립된 나의 예술분야에 있어 풍부한 양식이며 격려가 되기도 하였고, 서로 그림에 대한 견해 등을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대학시절 김종식 교수님이 먼저 떠오릅니다. 교수님과의 인연은 학부 때와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함께 했던 지난 시절을 돌리 켜 생각해보면 야외학습 및 방과 후 남포동의 주막집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이 그리 하실 이야기가 많으신지 야간 통행금지를 피해 다니면서까지 함께 했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80年代 - 선생 김씨 제자를 만나다!
1980년 3월 경남에서 부산으로 교직을 옮긴 곳이 바로 동원공업고등학교 현재는 동명정보공업고등학교로 개명되었지만, 그때는 막 태동하는 학교라서 나는 젊음을 앞세워 혼신의 힘을 쏟을 각오로 학습지도 및 생활지도를 통해 존경받는 교사로 태어나고자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재능에 많은 꿈과 현실을 담아 줄 수 있는 것이 무언인가 생각하면서 방과 후 미술활동이라는 특기적성교육을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성을 알고 나아가서는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지식인이 될 수 있게끔 방향을 제시코자 미술부원들을 모집하게 되었다. 그때 만난 얼굴들이 김동수, 성윤기, 박승규, 윤명국, 류상규......... 등등 이후 제자들은 시각물을 통해 하나하나 등장하겠지만 초창기 19명이라는 숫자는 미술부실이 좁을 정도로 가득 채워졌고 활기가 넘쳐흐르는 듯 생동감이 있었다. 그림을 처음 접해보고 배우는 이들은 실수도 하고 힘에 겨워했고 때로는 적성에 맞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따라준 그들에게 나는 그림지도에 있어 우리의 마음도 갈고 닦지 않으면 더러운 때가 자주 뀌듯이 실력이 자꾸 쌓이면 쉬지 않고 공부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채찍을 가했던 시절의 아픈 마음을 그들도 알았는지 지금 제자들을 보면 대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나는 그들의 배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겸손이며 정신 ․ 미래 지향적 창조의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것 같다. 이제 생각해 보면 스승의 길, 그것은 가장 보람 있는 인생의 길이다. 그리고 이번 기획 전시를 통해 나는 나의 능력과 천분이 말을 하고 글을 쓰는데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나에게 그러한 재능이 부여된 것을 내 운명에 감사하고 싶다. 행복한 생활은 부단한 노력과 슬기로운 지혜를 필요로 하고 기쁨의 원천이요 미래의 목적인만큼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다짐으로 사제 간의 관계와 현재 나에게 주어진 일에 있어서 묵묵히 나아가고자 합니다.
섹션1-화가 김씨, 미술을 논하다!
미술 - 여러 분야 - 여러 특수 분야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실제로 있는 것은 ‘미술’이라는 낱말이 아니고 그 미술을 실제로 만드는 사람인 ‘미술가’와 그 미술가가 만든 ‘미술품’이라는 점에서 미술을 대하는 우리들의 관심은 점점 그 폭을 넓혀간다.
미술가 - 어떤 시대나 사회 속에서 실제로 생활하면서 창작하는 사람인만큼 그의 개성에 따라서는 물론 그가 속한 시대나 사회에 따라 서로 성격을 달리하며 그가 만든 미술품 역시 개성이나 시대 사회 등 그것을 낳은 배경과 표현에 따라 달리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고 보면 우리들이 흔히 쉽게 쓰는 ‘미술’이라는 말 매우 복잡한 내용이 있고 그런 만큼 미술을 이해한다는 일이 결코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미술을 어렵고 귀찮은 것으로 생각 할 필요는 없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갸우뚱거리는 사람들에게 피카소 - 왜 사람들은 그림을 이해하려 들까? 새 소리는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냥 즐기면서.............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가 좋아서 그리는 것이고, 또 누군가가 그 그림을 보고 즐기기 위해서 그리는 것이다.
- 자신이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는 - 이해하기 위해서 보는 것도 아니다 - 그리는 것이 좋아서 그리고 본다. 제일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보고 즐긴다는 것이다. 보고 즐김은 작품과 감상자만의 은밀한 속사임이다. 은밀한 속사임에 말이 있을 리 없고 보고 즐김에 설명이나 해설이 필요할 리 없다.
시는 말없이 읽고 음악은 말없이 듣는다. 그런데 왜 미술은 모르겠으니 말을 하자는 것일까? 한 사람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기고 있다면 그는 그것으로 곧 창조적 체험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을 실제로 보고 즐기는 행위 자체가 예술에 참여하는 하나의 형식이고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남에게 해석하고 전달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게 하여 주는 일도 예술이라고 부르는 넓은 인생 체험의 한 측면이 된다. 예술가는 살아가는 태도가 예술 그 자체여야 한다.
우리는 예술가를 시대와 사회 속에서 이해할 수 있고 예술품을 완전성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예술가가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이며 그 예술품이 참으로 위대한 걸작이 아니라면 최소한 우리에게 감동을 던져주는 예술성이 없다면 또한 우리가 예술가와 예술품을 아무리 잘 알아도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여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직 감동을 위해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삶을 이루기 위해 예술을 즐기자?
창작 또한 그 시대의 변천을 말하여 주듯이
60-70년대는 근대적 성향의 미술 활동이 주류를 이루면서 실질적으로 근대적 성격의 미적 산물이 배가되는 시기로 일종의 근현대적 미술의 전환기라 볼 수 있다.
70년대 이 시기는 모노크룸운동으로 50년대 후반부터 전개되기 시작한 추상미술운동은 미술계에 새로운 양상으로 부각되면서 추상은 해외 화단의 미니멀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서구적인 의미에서 미니멀리즘과는 그 본질을 달리하는 추상이 등장하였고, 회화가 갖는 색채라는 장점을 무시하고 단색에 의한 독자적인 우리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한 회화세계를 그 속에 담고 있다.
80년대에 새로운 미술운동은 탄압을 자행한 정부에 의해 민중미술이라는 관제용어가 공식화 되었다. 이러한 민중미술의 본격적 태동은 1979년 창립된 ‘현실과 발언’그룹에 의해서 이뤄졌고, 광주항쟁 등 본격적인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민중미술’이 등장하고 도시적 정서를 토대로 하여 미술의 민주화를 주장 리얼리즘의 새로운 전개에 따라 형식과 내용을 추구 하였으며 현대미술 운동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90년대에 이르러 민중미술계열의 퇴조와 동시에 다원주의적 특성을 갖춘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설치미술의 유행을 비롯한 사진. 비디오. 애니메이션 등 시대의 매체를 도입한 다양한 표현들이 이루어졌다.
섹션2-가장 김씨, 생활을 보이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것인 냥 두 손을 움켜지고 태어나지만 돌아 갈 때는 또한 모든 것을 놓고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 또한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에 대한 허망한 욕심을 부려보기도 하였으나 모두가 부질없는 공산일 뿐, 그렇다고 해서 남달리 특별한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닌 오늘날 중산층의 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정을 꾸러오기까지는 지금의 아내가 있었던 것 같다. 지난날 아내와의 만남은 첫사랑이라기보다는 만남그자체가 아닌가 싶다. 졸업 후 첫 발령지로 내가 꿈꾸어 왔던 옛 시골 정서가 담겨진 경상남도 밀양소재에 근무지로 결정이 된 상태에서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근무지를 거제도로 옮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의 운명인 것 같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서 첫사랑이 있다고 하건만 나에게는 고등학교시절 한 여학생과 빵집에서의 만남, 대학시절 한 여대생과 에덴공원의 데이트, 거제도의 한 여선생님과의 로맨스 등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들일뿐 남들이 말하는 진정한 만남은 첫 발령지인 거제 중 ․ 고등학교 전체교원수라 해봐야 20여명 그중 여선생님들이 과반수를 차지할 정도로 교무실 분위기는 꽃밭으로 꾸며진 정원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다 예쁜 꽃들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저마다 제각각 향기를 가지고 있다지만 누군가가 그 꽃을 찾아 주었을 때 비로소 열매가 맺히듯이 나보다 2년차 선배 인 한 여교사는 그리 돋보이는 꽃은 아니었으나 보면 볼수록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꽃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외형적인 아름다운 형태보다는 내면에서 울어 나오는 진한 향기가 나로 하여금 구혼의 손길이 가지 안할라 해도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우리들은 격지생활이라 많은 외로움으로 정이 그리운 터라 환경이 환경인만큼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사랑을 키워갔지? 괴정의 에덴공원 가로등 아래서의 뽀뽀, 하단 분뇨처리 다리난간의 좁은 공간속의 데이트, 태종대의 출입금지구역인 자갈 백사장사건-어둠속에서 총을 든 병사의 목소리 ‘손들어’ 등 잊을 수 없는 사랑의 확인으로 비로소 둘만의 행복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행복한 결혼생활은 부단한 노력과 슬기로운 지혜를 필요로 하는 만큼 사랑과 용서로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하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가족은 선택의 자유가 없는 운명공동체인 것 같다. 그래서 단결력과 결속도와 일체감이 어느 집단보다도 강하다고 본다. 오늘날 가족의 형태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뀌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제일 다루기 어려운 것은 가족 간의 애정문제인 것 같다. 평화로운 가정건설은 평화로운 가정건설의 근본이요 시발점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평화로운 가정을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건설에 있어 지금까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달려온 길에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운명처럼 만난 아내의 내조가 제일 크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자녀교육, 생활의 윤택한 기반, 부모 형제간의 우애 등등 맏며느리로써의 역할은 오늘의 네가 있도록 만들었고 앞으로도 또한 그렇게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파이팅!
섹션3-노장 김씨, 교육을 말하다
80년대 초 우리교육의 여건은 권위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학교운영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법적 제도적 장치 없이 교육민주화의 탄압을 스스럼없이 자행해온 정부 및 교육 관료들의 만행은 교육주체인 교사들의 목소리는 뒤로한 채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비민주적인 관리자들의 교육현장 모순은 결국 교육민주화를 외치는 전국교사들이 교육풍토를 쇄신하고 진정으로 학생들을 위하자는 교육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오늘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기틀인 교사협의회 혹은 평교사협의회라는 이름으로 학교현장을 휩쓸었고, 내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 역시 시대의 요청에 따라 88년 9월 온갖 회유와 방해 책동에도 불구하고 교사협의회가 창립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른 동료 교사들과의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고 나아가서는 서로 불신하는 풍조마저 만연하였고 부정적인 감정의 앙금이 남아 개인 간의 문제로 야기되는 이러한 시행착오를 격어지만 “교육의 주체는 학생이다”라는 엄연한 명제 아래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교육의 장으로 개선하여 나아가고자 하였다.
오늘날의 교육은 교내 ․ 외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 왔으나 아직도 일부 기득권을 가진 관료들의 정치적인 빌미로 교육 민주화의 뿌리를 저해하는 요소들이 곳곳에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볼 때 정부나 교육 관료 및 관리자들이 법 ․ 제도, 정책 등을 자기네들 마음대로 이행하고 있는 모습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현장에 몸을 담고 있는 나는 학생들을 위한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아무리 어려운 환경일지언정 교육여건 및 참교육 실천을 위하여 순수한 열정과 당당함으로 문제해결을 위해 실천해 나아갈 것이다.
나는 교육자가 된 것을 한 번도 후회해본 일이 없다. 교사라는 직업에 큰 보람과 만족을 느끼듯 오늘날의 교육은 물건과 사람을 만드는 직업인만큼 학생들에게 얼마나 정성스러운 관심을 갖느냐 또 얼마나 정성스러운 태도로 가르치느냐에 따라서 교육의 성패가 결정지어지는 만큼 학생들은 선생의 태도와 자세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운다.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바로 정성인 것이다. 교육은 정성의 나무에 피는 아름다운 꽃인 만큼 모두 항상 배운다는 것처럼 즐기고 희망적이고 미래적이고 생산적인 것이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교육의 미래는 교사의 희생과 헌신의 노력에 따라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교육의 장으로 만들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창의적 미술수업을 지탱해 왔던 지난 교육은 요즘 들어 경제활동이 넓어지면서 세상의 속이 보일 정도로 상업적으로 변해가는 듯합니다. 이에 따라 인간화를 위한 인문과학예술은 저절로 위축되고 너무 경직되어 있는 것 같고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파괴하는 현상을 보면서 먼 장래를 생각한 인간교육에서는 너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오늘날의 미술이론의 교과과정은 현장의 미술에 맞지 않으며 어중간한 합리적인 것보다는 경험이나 실험, 대화, 열린교육의 장이 필요한 것이다. 동양화, 서양화 등으로 나누는 방식에서 서구의 이론을 따르기에 급급한 미술이론의 틀을 벗어나 진정한 미술전문인을 양성하는 미술교육으로 탈바꿈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김씨의 좌절
우리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환희와 좌절을 맛본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나의 세상사에 있어 좌절보다는 환희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나의 학창시절 그림에 얽힌 사연인 즉, 예술이란 정말 순수하고 보편적이고 세계적인가? 라고 생각해보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갖가지 효과를 표출해 보기도 하고, 자신의 심리나 내면세계를 형상화 시키는 구조적인 형태의 묘사 또한 흔히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현실에 충실하듯이 지나간 현상들을 다시 되돌아보고자 향수와 같은 무언가 내면상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토록 만들어 낸 작품 시리즈로 어느 공모전에 출품하였을 때 심사위원으로부터 미술발전 기부금을 요구받았을 때 오래전 화단의 병패가 현실로 다가왔고, 진정 그 당시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인지라 정말 용납할 수도 없고, 있을 수 없는 현실을 놓고 많은 갈등을 가져보기도 했던 그때의 실망은, 좌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큰 영향을 나에게 준 것 같다. 사람은 많지만 정말 사람다운 사람은 적구나 하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었고, 그 어렵고 험한 행로를 향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꾸준히 전진하고 향상하고자 한 나의 꿈은 산산이 쪼개지듯 아픈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붓을 집어 던져 버린 지가 근 수십 년 나로 하여금 추구하고자 하였던 예술적 창조는 더 이상 진전을 가지지 못한 어려웠던 과거가 아닌가 싶다.
또한 교육 현장에 몸을 담고 있는 나는 그동안 우리나라 미술화단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면서 자라나는 예술가가 무엇을 보고 배우고, 무엇으로 꿈을 키워 갈수 있게끔 여건이 조성되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해 봅니다. 오늘날의 일연의 여러 가지 쇠퇴된 우리미술 문화를 보면서 반성의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지만 그것을 받아 드리지 않는다는 데서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해마다 일어나는 위작시비, 공모전의 비리, 미술시장의 기능 등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미술화단의 전체가 다 부패되었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화가들은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들을 가지고 창작 활동에 묵묵히 노력을 기울인 작가가 오히려 더 많다는 것이다. 전후세대가 열악한 상항속에서도 그들만이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성실성과 열의를 가지고 작업하고 활동해온 훌륭한 업적들이 오늘날 우리 현대미술을 풍부하게 만드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 이슛로 떠오르는 미술품 감정에 있어서는 작품의 가치판단에 필요한 가장 객관적인 지표를 제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불거진 일련의 위작시비에서 볼 수 있듯 현행 우리나라 미술품 감정은 그 기능을 다하기에는 아직 미비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 미술품 감정의 실축된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그만큼 철저한 교육 및 자료정리의 세분화 된 감정의 부속기구가 갖추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 김씨의 희망
하나의 희망이라기보다는 지금까지 교직에 몸을 담고 있는 나로서는 학교를 떠날 때까지 항상 노력하는 자세로 다양한 교육과정들을 학생들에게 펼쳐 보여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나아가고 싶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 그림을 추구하고자 하는 감수성이 예민한 이들에게 환경시설은 큰 꿈을 키울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기 때문에 환경개선을 통해 보다 창조적 활동과 새로운 미학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다양한 매체로서 동기유발을 가져다주고자 한다. 또한 이번 기획전시 작품을 준비하는데 있어 많은 자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월동안 관리 소홀로 인해 풍족한 욕구를 드리지 못한 점에 있어서 앞으로는 학생들의 습작이든 작품이든 지금부터라도 자료를 보존시켜 후학들에게 그래도 할 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슬라이드라도 차근차근 준비했으면 한다. 그리고 그동안 못 다한 창작활동에 있어서는 공감각적인 회화방법을 실현코자 캔버스와 벽의 불가분한 관계를 통해 회화의 자율성을 타파하여 아름다운 형태들과 벽면의 어울림으로 구성되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또 다른 작품 세계에 매진하고 싶고, 또한 소박한 바램이 있다면 인간 최고의 선은 행복이다. 나의 사랑하는 두 자녀들이 이제는 새로운 둥지를 찾아 그들만의 제2의 인생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 김씨의 황혼에 대한 계획과 주변 동료
누군가 노후에는 자연으로 돌아가 생활하고픈 생각을 지니고 있다 했는가? 나 또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루도 자연의 소중함을 잊어본 적이 없듯이 산은 고요하기가 아득한 옛날과 같고, 해가 길어서 어린 시절의 심정으로 돌아간다는 것, 정말 번거로운 생활을 벗어나 그동안 꿈꾸어 왔던 시골정원에 아담한 정자와 더불어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못다 한 창작 활동을 펼쳐 보이고 싶기도 하고, 흙과 더불어 정다운 친구들과 낙엽을 밟으면서 호젓한 산길을 묵묵히 걷는 것만으로도 심신의 구원과 환희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자연에는 거짓이 없듯이 진실 속에 둘려 싸여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아무런 욕심 없이 자연의 변화에 따라 순응하는 한 인간으로서 삶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흔히들 거창하게 귀농의 꿈을 품고자하는 그런 유형의 틀을 벗어나서 단지 나만이 존재할 수 있는 소박하고 여유 있는 공간 그런 마음으로 지난해 시골 풍경이 물씬 풍기는 밀양에 조그마한 연구실을 마련했건만 아직 여러 가지 미흡한 부분들이 많아 차근차근 정리해 나아가면 언젠가는 내가 바라던 꿈의 안식처가 될 뿐 아니라 그동안 교직생활의 미담, 남기고 싶은 글들을 정리해 보기도 하고 주변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자리 공간을 통해 지난 세월의 이야기와 더불어 별들을 안주삼아 곡차 한잔 어때요?
나는 자연이 있는 곳에서 청정과 진실과 조화의 철학을 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