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02 첫째 날의 '빛'은 무슨 빛인가? 또 넷째 날의 '광명체'와 어떤 관계인가?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창 1:16~18)
지구의 하루는 태양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해가 뜨면 아침이고 해가 지면 저녁이다. 그런데 창세기 1장은 해가 창조되기도 전에 '날'이 있었고, 그 '날'에 저녁과 아침이 있었다고 말한다. 더욱 이상한 것은 해가 있기 전에 '빛'이 먼저 창조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빛을 '낮이라 부르신다. 태양 빛이 비추이는 시간이 낮인데 태양 없는 낮이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내용을 읽는 창세기의 독자들은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의문을 갖게 된다. 이 빛은 무슨 빛이며 큰 광명체 곧 태양과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이런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제시되고 있다.
첫째로 첫날의 빛을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령한 빛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 빛은 하나님의 임재의 빛으로 그분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빛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 존재의 본질 중의 하나가 빛이시기에 그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빛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빛이 있으면 햇빛이 없어도 된다.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에서는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계 22:5)고 한다. 그러나 만일 첫째 날에 창조된 빛이 참으로 하나님의 빛이라면 하나님의 명령은 '빛이 있으라'가 아니라 '빛이 나타나라'이거나 '빛이 비추라'이었어야 한다. 그 빛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3절) 라는 구절은 이 빛이 이전에는 없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 순간 존재하게 된 물리적인 빛임을 분명히 한다.
둘째로 하나님이 태양계를 빛보다 먼저 창조하셨기에 첫 날의 빛은 사실상 태양 빛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천지의 창조를 선언하는 1절을 창조의 시작으로 보고, 그 창조된 '하늘'에 해달별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는 해석들의 지지를 받는다. 태양이 빛보다 먼저 창조되었기에 첫 날부터 낮과 밤이 구분된 것도 자연스럽게 설명이 된다. 태양이 있었음에도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것은 원시 지구 상태에서 형성된 두꺼운 안개와 가스층으로 인해 그 빛이 차단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 안개 차단벽이 빛이 있으라는 명령과 함께 걷혔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인해 이 해석은 흔히 '안개 이론(vapor theory)'이라고도 불린다.
이 해석이 성립하려면 넷째 날에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셨다'(16절)는 동사가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 그 방식은 두 가지로 제시된다. 하나는 '의미'를 달리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제'를 달리 해석하는 것이다. 전자의 방식이 그 동사를 풀어놓다'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안개에 의해 차단된 빛을 하나님이 넷째 날에 풀어놓으셨다'로 보는 것이다. 후자의 방식은 그 동사의 시제를 '이미 만드셨다는 과거로 해석하는 것이다. 넷째 날 이전에 이미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문법적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해석을 지지하는 근거로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4절)는 명령을 이미 존재한 광명체들에게 부여된 역할과 기능으로 본다.
이런 해석이 견고해지려면 창세기 1장 내의 문맥의 증거가 뚜렷해져야 한다. '만드시니'라는 히브리어 동사 아사는 창세기 1장에서 짐승들의 창조(25절)와 인간의 창조(26절)에도 사용되었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문자 그대로 만드시니이다. 이 단어는 바라와 함께 짝을 이루어 모두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개역개정은 아사는 '만드시니’(made)로, 바라는 '창조하시니'(created)로 일관되게 번역한다. 그것을 넷째 날에만 '풀어놓다'로 해석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시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넷째 날 두 큰 광명체를 '만드셨다(16절)는 히브리어 동사는 다섯째 날 짐승을 만드셨다'(25절)는 동사와 문법 형태가 똑같다. 만일, 16절의 동사를 '이미 만드셨다'로 해석하면 25절도 똑 같이 해석해야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섯째 날 이전에 짐승들을 이미 창조하셨다고 해석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문법적으로 가능한 해석이 문맥적으로 늘 통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문제들만 잘 극복이 되면 이 해석은 창세기 1장 3절부터 창조 주간이 시작된다는 해석과 어울리는 설명이 된다.
셋째로는 하나님이 더 큰 뜻이 있어 '의도적으로 빛을 먼저 만들고 태양을 나중에 만들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 이해는 “어떻게 태양없이 아침과 저녁이 있는 하루가 구성될 수 있는가?" 또 "태양 없는 창조 주간의 첫 3일이 어떻게 나중의 3일과 같은 태양일이 될 수 있는가?" 등등의 모든 과학적 질문은 그렇게 의도적으로 창조를 진행한 창조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창조를 믿는 것은 누군가 그 사건을 목격하고 증언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창세기의 기록을 영감의 기별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창조주의 창조 방식을 현존하는 자연 질서의 범주로 제한하여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창조주는 자유롭게 자신의 창조 의도를 실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은 태양 없이도 하루를 구성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넷째 날 태양 빛의 광합성 작용이 시작되기 전에 셋째 날에 식물을 먼저 창조하셨다. 또 하나님은 여호수아서의 기록과 같이 때로는 태양을 머무르게 하시고도 하루를 구성하실 수 있으시다(수 10:13).
그렇다면 그렇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4~5절을 다시 읽어보자.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 본문은 빛과 어두움, 낮과 밤을 나누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임을 분명히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친히'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밤낮을 칭하시며 하루를 구성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14절은 하나님이 넷째 날에 이르러서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라”고 한다. 여기 '나뉘게 하라'는 동사는 사역형이다. 문법적으로 일을 시킨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광명체에게 낮과 밤을 구분하는 기능을 넘겨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의도는 낮과 밤을 구분하는 빛의 주관자가 광명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태양이 빛을 발하며 낮과 밤을 주관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섬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창조의 순서를 통해 분명히 하셨다는 것이다. 20세기 유명한 신학자 카를 바르트(Karl Barth)는 태양보다 빛이 먼저 창조되었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모든 종류의 태양 숭배에 대한 공개적인 거부"(Church Dogmatics, 3:120)라고 하였다. 그렇다. 진정 하나님이 태양보다 빛을 먼저 창조하시고, 태양 없이 낮과 밤을 구분하고 하루를 구성하셨다면 태양이 빛을 발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섬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 해석에도 넘어야 할 문제가 있다. 만일 태양이 진정 창조주간의 넷째 날까지 창조되지 않았다면 2절에서 말하는 땅은 태양 없이 존재한 것이 된다. 더군다나 소극적 간격 이론의 설명처럼 원시 지구가 창조된 이래로 수십억 년이 지난 다음에 창조 주간이 시작되었다면 지구는 그 기간 내내 태양 없이 존재하였다고 생각하여야 한다. 현대 과학에 의하면 지구와 태양의 나이는 서로 비슷한 46억 년 정도이다. 이런 증거는 태양보다 지구가 먼저 존재하였다는 해석과 충돌된다. 물론, '젊은 지구론'에서는 3일의 시차가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6절)의 끝에 언급된 “또 별들을 만드시고"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이다. 이 구절에서 ‘만드시고’는 히브리어 원문에 없다. 그냥 '또 별들을 하고 끝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구절은 에트 하마오르 하가돌(큰 광명으로)…웨에트 하마오르 학카탄(그리고 작은 광명으로)…웨 에트 하코카빔(그리고 별들로)의 구조이다. 그리고 이 단어들을 수식하는 단어가 주관하고'이다. 그러니 '또 별들을'은 '또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로 번역되는 것이 맞다. 이는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는 시편 136 8~9절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은 창세기 1장에는 넷째날에 별들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없다는 사실이다. 별들은 창조주일 이전에 이미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함께 언급된 해와 달도 마찬가지이다.
빛의 근원에 대한 위의 세 가지 설명은 상호배타적이기보다 상호보완적이다. 각각의 논거들을 찾아서 더욱 견고하게 이해를 다져가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창세기 1장 3절에서 '있으라는 명령을 따라 있게 된 빛은 그때까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땅을 밝힌 실제적인 빛이다. 그러나 이때 창조된 빛이 전체 우주에서 처음 존재하게 된 빛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세계에는 이미 빛이 있었기 때문이다. 욥기 38장 7절에 의하면 창조가 이루어질 때 기뻐 노래하던 새벽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었다. 특별히 재림교인들은 사탄과 천사들이 지구 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루시퍼의 반역은 “그리스도께서 지구와 그 거민들을 창조하는 일에 있어서도 신적 능력을 발휘하신 것"(부조, 35)을 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 창조 이전에 존재한 이들이 그때까지 흑암의 세계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빛은 이미 있었다.
1장 4절은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평가한다. 흔히 '좋았더라'는 평가가 4절을 포함하여 창세기 1장에 일곱 번 나온다고 한다(10, 12, 18, 21, 25, 31절). 그러나 4절은 다른 구절과 다르다. 나머지 구절은 모두 와야르 엘로힘 키-토브이다. 그러나 4절만 와야르 엘로힘 에트 하오르 키토브이다. 직역하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이다. 이 구절만 목적어가 지정되어 있다. 그것이 오르, 즉 '그 빛'이다. 다른 구절은 하나님 자신의 창조 행위에 대한 만족을 표한 것이라면 4절은 창조 대상 그 자체에 대한 만족을 나타낸 것이다. 빛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 만족을 표할 대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