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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잡이 16호
성경으로 성령을 이해한다
제1부 성령의 역할
A. 성령은 누구신가?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한가지 점을 밝혀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마치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기운이나 힘, 내지는 능력 같은 비 인격적인 물질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령을 하나의 인격체이신 분으로 소개하셨다.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그가", 또는 "저가"라고 호칭하시며 당신 자신과 동등한 인격을 갖추고 있는 개체로 말씀하셨다. 고린도 후서 3:17에서 사도 바울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여 주의 영, 곧 성령을 한 인격체로 말씀하신 사실도 보게 된다. 또한 베드로도 "네가 성령을 속이고.."(행 5:3)라고 말씀하여 성령님을 인격체로 언급한 사실을 알게 된다. 히브리서 9:14은 "영원하신 성령"이라고 호칭하고 있는가 하면, 시편 139:7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령께서는 신성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또한 예수께서 침례 받으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늘 위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계셨고, 예수께서는 요단 강 물에 서 계셨으며, 성령께서는 비들기 모양으로 주님 위에 임하셨던 사실로 성령께서도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삼위 일체 가운데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미루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새로운 믿는자들을 얻게 될 때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분부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성령님을 어떻게 취급하여야 할지에 있어서 큰 도움을 주게 된다. 성령님도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인격적인 개체를 가지신 하나님이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를 알려고 애쓰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성령님께 쓰인바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하여 많이 명상하여야 된다. 성령께서는 순종하는 자들 속에 임재하신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사도행전 5:22
이길 수 있게 해주는 분
이 글의 가장 중요한 사상은 거듭남, 칭의, 성화는 모두 성령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로마서 7장과 8장의 몇 구절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성령의 역사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법이 자신을 구속하기 때문에 경험되는 처절한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14-20. 율법에 구속되어 있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부가하였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로마서 7:22-23
세 가지 법
이 성경절에서 바울은 두 가지 법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첫 번째 법은 하나님의 법, 즉 십계명(7절)을 가리키는데, 바울은 이 법이 공정하고 선하지만 자신이 그 법의 요구를 행할 수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두 번째 법은 "죄의 법"으로서 육신에 거하는 죄의 힘을 가리킨다. "죄의 법"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며, 또한 후천적으로도 습득되어지는 죄로 쏠리는 인간의 성향을 말한다. 이 성향은 인간이 의를 행하지 못하도록 만들며 인간의 도덕성을 약하게 만들어 도덕적 능력의 한계를 설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7장 24절에서,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보면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한탄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로마서 8장에 승리의 말씀을 적고 있다. 로마서 8장은 우리에게 곤고한 인간의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해결점을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세 번째 법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 법은 바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문제와 신앙적 고뇌를 완전히 해결시켜 준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2. 세 번째 법은 바로 우리가 성령께 완전히 굴복한다면 그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성령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승리를 얻도록 할 수 있으며, 이로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승리함으로써, 마음에 진정한 평화를 얻게 하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성령은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을 높이기 위하여 아버지께 간청할 수 있는 모든 선물 중에 가장 고상한 선물이었다. 성령은 본성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영적으로 소생시켜주는 분으로 주시는 바 되었으며 이 분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악의 세력은 여러 세기 동안 강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단의 속박에 복종 당하게 되었다. 죄는 신성의 제 삼위이신 성령의 강력한 작용을 통하여만 물리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은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가운데 오셨다. 세상의 구주께서 이루신 일을 효력 있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마음을 순결하게 만드신다. 성령을 통하여 신자는 거룩한 품성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유전적이며 배양된 악의 성향들을 이기며 당신 자신의 품성을 당신의 교회에 새기는 거룩한 능력으로서 성령을 주셨다.
약속된 선물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기 바로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기로 약속하셨다. 3년 동안 예수께서는 말씀과 비유들로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3년 동안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능력의 근원으로서, 상담자로서, 인도자로서, 친구로서 함께 계셨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야만 할 때가 이르렀고, 그들을 늑대들 속에서 방황하는 양으로서, 뱀들의 공격을 받는 비둘기로서 홀로 남겨두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어느 때 보다도 더 큰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을 아시고, 그들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여러 시험들을 내다보시며 그들을 위한 가장 큰 선물을 준비하셔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려 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요한복음 14:16,17
성령을 의미하는 "보혜사"의 헬라어 원어는 "Parakletos" 이다. 이 단어는 다른 성경 번역본들에는 "돕는 자" (N.A.S.B.), "상담자" (R.S.V.), "대변자" (N.E.B), "당신 옆에서 변호해주는 다른 이" (Philips)로 번역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다른 번역을 비교해 볼 때 "보혜사"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신학자 William Barclay는 "Parakletos"-보혜사가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Parakletos의 문자적 의미는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 단어의 실제적 의미는 '왜 부르심을 받았는가'하는 이유와 연결되어 결정되어진다. 헬라 사람들은 이 단어를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하였다. 'Parakletos'는 법정에서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을 가리킬 때도 쓰인 단어로서 이 사람은 고소 당한 사람의 대변자나 증인으로서 고소당한 사람을 변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이 단어는 어떤 단체나 군대에 초빙을 받아 그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는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러므로 'Parakletos'는 주로 문제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Parakletos'의 현대적 의미는 'to cope' 즉, 견딜 수 있게 한다는 뜻으로,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문제점들과 불안함을 없애주심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이다. 성령은 패배한 영혼에게 승리를 가능케 한다."
동반자 되시는 성령
바울은 "Parakletos"-보혜사라는 단어와 함께 또 다른 말을 사용함으로 성령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의 교제"라는 말이다. (빌립보서 2:1, 고린도후서 13:14)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모든 슬픔과 고통 중에서, 그리고 앞길이 캄캄하고 장래가 암담하게 보일 때에 또한 우리가 무기력하고 외로움을 느낄 때에 믿음의 기도 응답으로써 보혜사가 우리에게로 오신다. 환경은 우리를 모든 지상의 친구로부터 분리시킬는지 모르지만, 어떤 환경도 어떤 먼 거리도 우리들을 하늘의 보혜사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언제나 그분은 우리를 지지하고 붙드시고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오른편에 계신다.
제자들에게 성령 은사의 중요성을 설명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한복음 16:8-10)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거듭나게 하는 힘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죄로부터 떠나기를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면 성령께서 그의 양심에 역사하사 그들이 어떠한 결과를 갖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신다(요한복음 16:11 참고). 또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는 깨끗하게 됨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되며, 의롭게 됨을 얻게 되는 것이다(고린도전서 6:11 참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음과 인생의 전쟁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여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갈라디아서 5:16-25 참고). 또한 성령의 역사는 우리 안에 의를 증가시키며, 이로서 우리가 참된 평안과 즐거움을 얻게 하고, 진리로 인도하며, 연약한 자를 도와 능력을 주시며,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죄를 끊을 수 있도록 하신다(로마서 14:17, 8:26, 요한복음 14:13, 에베소서 3:16, 고린도후서 3:17, 누가복음 24:49 참고).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의 임재를 더욱 더 감사하게 된다. 우리는 죄와 자아와 더불어 싸우기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다음 글을 계속해서 읽기 전에 먼저 성령과 도움의 역사를 달라고 기도하도록 하자.
마음의 본질
아기가 탄생할 때 그 아기의 생각은 자아 중심적이다. 아기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되면 비록 그 방법이 단순하지만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요구를 나타낸다. 아기는 자기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기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너무나도 확실하게 그 뜻을 나타낸다. 만약 그의 생각이나 요구가 거절당하면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낸다. 이러한 현상은 타락한 인간이 유전적으로 나타내는 자연적인 반응이다.
이러한 자아 중심적 반응은 10대 아이들에게도 우울증이나 화를 잘 내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서 생각은 점점 더 복잡하게 되고 자기 자신의 길을 발견하려고 애쓴다. 어른으로 성장함에 따라서 사회가 요구하는 환경에 자신을 맞추기 위하여 자신의 생각을 문화적 환경에 맞추게 된다. 그러나 자아는 계속적인 충족을 요구한다. 자아는 충족되어져야 하며, 보호되어지고, 표현되어져야 한다.
아기들의 반응은 자각이 없는 표현들이다. 단지 생각 없이 나타내는 무의식적 반응이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자아 중심적 아이들의 행동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죄는 고의적으로 알면서 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요단강이 사해로 흐르는 것처럼 죄로 이끌게 된다.
산상 설교 때 예수께서는 이러한 문제를 간단 명료하게 설명하셨다. 산상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은 의로운 생활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점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심으로 인간의 뿌리가 악함을 표현하셨다. (마태복음 7:11 참고)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도 같은 사상을 언급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한복음 3: 6-7)고 하셨다. 다른 말로 말해서, 우리는 초자연적인 어떤 힘에 의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바울은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에베소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과 특별히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표현함으로 로마서 7장에 그가 언급한 죄에 힘없이 넘어지는 인간의 상태를 다시 제시하고 있다. 다윗은 시편 51장 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니"라고 하였고, 욥은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기 14:4)고 하였다.
우리는 욕망, 감정, 동기, 흥미, 경향, 자세.. 등 인간의 개성과 성품을 형성하는 것들을 마음 안에 갖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하여 우리는 왜 아기들도 죗된 증상을 나타내는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마음의 중심에 자기 중심적 자아를 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거절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7)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창세기 3:15)
죄에 대항하여 싸우려고 하는 모든 마음은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원수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원수 관계는 선천적으로 되지 않는다. 인류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으므로 그의 본성은 악해졌다. 그리하여 인류는 사단과 조화되고 그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움직이는 종이 되었다. 죄인과 죄의 창시자인 사단과는 본질상으로 원수 관계가 될 수가 없다. 둘 다 반역으로 악해졌다. 만일 하나님께서 특별히 간섭하지 않으셨을 것 같으면 사단과 인류는 동맹하여 하늘을 대항하였을 것이다. 인류는 사단과 원수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에 연합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경로는 바로 양심이다. 양심은 우리 안에 이미 세워져있는 기관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하여 우리들이 말 안 듣고 고집 센 죄의 길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양심은 왜곡되어지고 무감각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방인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통하여 양심에 호소하심으로써 인간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자아중심적인 우리들의 마음에 예수께서 들어오실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아 중심적인 삶을 고집한다면, 진정한 행복을 가질 수 없으며, 죄로부터 온전한 승리을 쟁취할 수 없고, 하늘과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아신다. 악을 향한 모든 성향과 함께 자아는 반드시 완전히 굴복되어져야 한다.
불행하게도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 많은 경우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며, 무엇을 위하여 말씀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다윗 왕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좋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에 보내어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하였다. 이 죄는 다윗의 양심을 무디게 만들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께서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셔서 한 마리의 작은 양의 이야기를 하게 하심으로써, 다윗의 마음을 찌르셨다(사무엘하 12:1-13 참고). 다윗은 그 이야기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자신의 죄를 깨달은 다윗은 그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의 시, 시편 51편을 쓰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일이 성공하면, 우리의 양심은 일깨워지고 우리가 그 동안 지어온 구체적인 죄들에 대하여 깊은 자각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죄들은 우리를 쉽게 무너뜨리고 힘없게 만드는 육체의 정욕일 수도 있고, 사람들간에 일어나는 부정직한 거래일수도 있으며, 나쁜 성격일수도 있다. 양심은 우리가 즐겨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헛되이 시간을 보내게 만드는 책들, 또는 음악들을 지적하기도 한다.
나는 승리하리라
양심의 외침을 귀담아 듣는 일과 하나님께 속하고자 하는 소망을 통하여 우리는 죗된 습관들을 없애고자 하는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할 수 있다. "나는 이 죄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내가 보기 좋아하는 이러이러한 프로그램들을 나는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절대로 악한 성미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 저러한 나쁜 죄의 습관들을 먼저 고치기 시작함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시도하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시작부터 틀린 길을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개혁은 습관의 개혁보다도 먼저 마음의 개혁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개혁되지 않은 상태에서 습관을 개혁하고자 하면 이러한 개혁은 오래가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기 때문이다.
구멍난 곳을 떼우는 식의 종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전체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어느 조그만 부분이라도 악에 대한 성향이 개발되도록 내버려 두거나 반역의 정신이 싹트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매일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나타내는 일이 허다하다.
억지로 순종하려고 애쓰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자 할 때에 계명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지 않고 단지 순종해야만 하늘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순종하려고 애쓴다면, 결코 우리는 순종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없으며, 실제로 그러한 행위는 순종이 아니라 억지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겉으로만 행하는 외식적 복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순종하기를 원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원함이 순결한 사랑의 결과로서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 마음 속에 살아있는 자아로 인하여 진실된 순종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노력은 이기심에 의지한 특정한 습관의 개혁에 불과하다. 자아가 자아를 개혁하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불가능한 시도이다.
죄의 힘은 인간의 힘으로 정복되어질 수 없다. 죄를 정복하는 것은 악한 영들을 정복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어떤 한계를 설정하여 스스로를 억제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의미한 노력이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승리자로 만드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역사는 단순히 우리 자신이 어떠한 죄에 빠져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일 이상의 위대한 사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아(self)를 포기하기 원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아를 정복할 수 있을까? 자아를 정복하는 법은 바로 거듭남에 있다.
오직 자아가 죽을 때에만,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없어지며,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 차고, 사랑의 향기가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며,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사실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아에 집착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기를 거절하면 우리는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과 다름없다. 죄가 발견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소멸의 불이 따르기 때문이다.
자아는 정복되어지기 어렵다. 인간의 여러 형태로 부패된 마음은 쉽게 성령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승리가 있기 전까지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승리는 확실히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내려지는 능력으로 이 세상의 모든 악과 부패된 감정들은 극복되어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의 자아는 높아지려는 감정으로 크게 부풀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비뚤어진 자아를 갖고 있다. 그들은 바위에 떨어져 부서뜨려짐을 당한 경험이 없다. 자아가 깨어지는 경험이 없으면, 그들은 계속해서 자아에 의존하여 살 것이며, 영원한 의로 돌아서는 경험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늘 진주 문을 들어설 자들은 모두 정복자로서 들어갈 것인데, 그들이 정복한 가장 큰 원수는 바로 자아가 될 것이다.